- 월드컵 기간동안 일시적으로 사용되는 게시판입니다.
Date |
2002/06/25 02:17:02 |
Name |
글장 |
Subject |
[기타] 폐인의 호프집 순례기 |
안녕하세요. 피지알 여러분..
오래간만입니다.
저는 지금 프랑스 빠리에서..
이랬음 좋겠는데
기실 서울 시내 여러 호프집을 전전하는 신세가
됐습니다.--;
월드컵 때문에 한달 동안 실직했습니다.
이른바 월드컵 폐인--;
월드컵 개막 일주일전에 프로그램이
한달간 죽는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아시다시피 작가들은 회당 돈을 받기 때문에
한달이면 4회분 원고료가 떠버렸습니다.
거기에 재방분을 포함하니..
다가오는 카드값 결재... 왠지 섬뜩하더군요.
사실 전 축구를 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국내 프로리그도 한번도 안봤으니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가실겁니다.
월드컵이 다가오고 있을 때
우리 데스크가 내뱉은 말이 있었습니다.
- 남의 잔치가 될 텐데 경기장만 지어줬다-
저도 그 얘기에 동의하는 편이었습니다.--;
밤잠을 설쳐가며 본 그간의 월드컵은
대개 그러했거든요.
그 얘긴 그만하고 ...
아무튼 할 일이 전혀 없는 --;
저는 호프집을 누비고 다녔습니다.
스타를 청산하고 나니 바로 월드컵 폐인
팔자가 이런가봅니다--;
제 주의의 동료들도 거의 같은 신세가 됐습니다.
지금 방송국에서 자기 프로그램 계속 하는 작가 별로 없어요.
다 비슷한 처지죠--;
그럼 우리들이 하는 일은 뭔가...
한국팀 경기가 있는 날이면 뭐..호프집에 일찍부터 죽치고 앉아서 수다떨고 응원하고 술마시고..합니다.
요즘 왠만한 호프집은 예약하지 않으면 안되서
아주 힘들어요.
특히 멀쩡히 직장 잘다니면서 단체로 예약하는
근처 증권회사 넘들이 저희 라이벌입니다.
실컷 마시고
집에 가서는 각 월드컵 게시판 순례를 하고 논점을 정리해서 수다떨 내용을 채록합니다.--;
이 짓을 한달동안 하고 있습니다.
한국 팀 경기가 없는 날은 한국팀 경기 재방송을 몇 번 보고 남의 나라 경기보고 ....
그러고 있습니다.
저녁엔 또 호프집에 갑니다.
호프집에서 맥주만 사먹었는데 술값이 엄청 나왔습니다.
생애 이렇게 많은 맥주를 먹어본 적이 있나..싶네요.
물론 지금도 ...누르면 맥주가 나올 정도의 상탭니다.
그간 제가 호프집에서 꽤 많은 사람과 얘길 해봤어요.
평소라면 엄두도 못낼 일이지만
지금 한국은 분위기 이상하잖아요.
거리에서 아무나 끌어안고 박수치고...
서울의 공기가 이토록 화기애애한 건..처음 경험합니다.
아무튼 호프집 순례를 계속 하는 도중
여러사람의 질타를 받은 여대생 한 분.
그 분은 저처럼 축구를 잘 모르는 분인데
이분이 한국 전 경기를 보다가
" 어머 오프사이드가 뭐야? "
(그래도 난 그건 아는데--;)
순간 자리가 썰렁해졌고...
얘기는 축구의 저변에 대해 떠드는 자리가 됐습니다.
외국의 클럽 축구 문화
그들의 열광적인 팬 문화
한국식 축협 운영방식의 문제
질낮은 언론....
우리 국민성까지 안주로 올려서 별별 얘기를 다했습니다.
결론은 뭐 앞으로도 축구 사랑하고 축구를 잘 모르는 사람도 월드컵 이후까지 축구팬으로 붙잡아둬야한다..로 .
하지만 갖가지 화제중 압권은 요즘 게시판에서도 회자되고 있는 패배주의에 관한 것이었요.
여러 말이 오고갔는데 그중 서울 어느 대학에서 동양사를 강의하셨다는
팔순도 넘은 노인에게서 들은 얘기가 기억에 남네요.
그분은 집안이 괜찮아서 일제치하의 동경으로 유학을 갔다고해요.
당시 일본은 벗꽃이 한창인때는 우에노 공원에 수많은 도쿄시민들이 모여들었다고 합니다.
도시락을 먹고 술도 마시고 아무튼
봄밤을 맘껏 즐기는데
그분은 그게 그렇게 부럽고 행복해보이더랍니다.
당시의 일본인은 지금과는 사뭇 다른 자신감이 있는 일본인라고 합니다.
전승국(戰勝國)이기 때문이랍니다.
일본이 왜 전승국인가 하실 분이 계시겠지만
당시 일본은 청. 러와의 전쟁에서 모두 이겨서
국운이 하늘을 찌르고 국민들은 승리감에
도취된 상태였다고 하네요.
강한 적을 모두 이겼을 때 그 기분이 어떤지 승리가 만들어내는 분위기가 뭔지 저도 이젠 좀 알거 같거든요.
식민지 청년이 그 자신감에 차있는 일본인들의 축제를 봤으니...그 기분이 어땠을까요?
- 승리가 뭔줄 알아? 승리는 미치는 거야..-
그분이 술 취해 거의 미쳐가면서 한 말씀입니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지금 우리도 한창 축제를 즐기고 있고
심리상태도 그와 비슷한 거 같아서 괜히 기분이 좋았습니다.
여의도 거리를 가득메우고 지나가던 버스의 승객들이 박수를 치고 웃고...
도무지 여기가 한국인지 헷갈릴 정도로 멋있더군요.
여름의 밤은 가뜩이나 들뜨는데 ...
정말 이런 건 ..처음입니다.
사실 우리가 언제 관제 축제말고 제대로 된 축제를 즐겨봤나요.
축제를 어떻게 시작하는지도 몰랐고 어떻게 즐기는지도
몰랐던 거 같아요.
지금 월드컵 축제를 보니 전 몰랐던게 확실합니다.
이런 종류의 즐거움이 있다는 사실도 믿기 어려웠습니다.
한국의 승리뒤에도 여러 잡음이 나오는 건..
아마도 승리가 낮설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이겼을 때 어떻게 즐겨야하는지 이제 배우고
있다는 생각도 합니다.
패배를 받아들이는 정서는 결코 주의나 주장이 될 수 없고 습관이라는, 익숙해지면 곧 자취도 없이 사라질...거라구요.
우리가 승리를 기뻐하는 법을 이제 막 배우듯
이탈리아 스페인도 이제 패배가 뭔지 배우고 있지 않습니까.
원래도 시끄러운 놈들이니까 그것도 떠들면서 배우네요....
다행히 아직 축제는 끝나지 않았고
축제는 절정으로 향해가지 않습니까..
심판 판정의 문제니 승부조작이니
유럽 축구의 헤게모니 쟁탈전이라느니 하는 말들은
축제기간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할 기회가 있을 겁니다.
지금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승자고 더 맘껏 즐겨야될 거 같아요.
저도 남은 기간 보다더 충실한 폐인으로...살아갈 생각입니다.
그리고 글 안쓰겠다고 해놓고 글쓴거...
죄송합니다.
너무 기분이 좋아서 어디라도 말을 하고 싶어서..
월드컵 사강갔으니 봐주세요.
피지알 여러분 남은 축제 잘 즐기십시오.
저도 맘껏 즐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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