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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드컵 기간동안 일시적으로 사용되는 게시판입니다.
Date |
2006/07/05 17:55:39 |
Name |
몽상미셸 |
Subject |
[기타] 박지성의 그 ‘아시아적’ 동점골 |
좀 뒷북스럽지만........
월드컵 관련한 글 중 천편일률적이 아닌 것 같아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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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성의 그 ‘아시아적’ 동점골
▣ 민 훙(Minh Hung) 일간 <사이공 해방> 체육부 차장
지난 6월18일 밤과 19일 새벽에 있었던 두 아시아 대표의 경기는 모두 무승부로 끝났다. 그럼에도 다음날 나는 ‘아시아의 승리’라는 제목의 기사를 송고했다. 독자들이 여기에 의문을 품었다면 그 또한 잘못된 것은 아니다. 나 역시 컴퓨터 앞에 앉아 그 기사의 첫 문장을 두드리면서도 망설임이 없지 않았고, 여러 가지 생각들로 머릿속이 복잡하게 엉켜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 순간,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오를란도 두아르테(Orlando Duarte)의 <월드컵 축구 백과사전>(Encyclopedia of World Cup Soccer)이 눈에 띄었다. 나는 그 첫 장인 ‘역대 월드컵 대회의 역사’를 차례로 들추며 이 대회 초창기부터 아시아 참가국의 흔적을 찾았다.
정신력, 단결력, 스승에 대한 존경심
1930년 제1회 월드컵 축구대회가 개최됐을 때, 아시아는 아득히 먼 어딘가에 앉아 있는 관객에 지나지 않았다. 아시아 대부분의 나라들이 제국주의 침략의 발굽 아래, 또는 봉건통치 세력의 수탈 아래 신음하고 있던 당시 아시아는 단지 구경꾼이었을 뿐 어느 한 나라도 국제축구연맹(FIFA)의 회원국이 되지 못했다. 대다수의 아시아인들이 배불리 먹지도 못하던 시절, 축구에 대해 말해 무엇하랴.
16개국이 참가한 1934년 이탈리아 월드컵, 15개국이 참가한 1938년 프랑스 월드컵에도 아시아 대표는 없었다. 그 뒤 세계대전의 발발로 인해 월드컵은 12년 동안 중단됐다가 전쟁의 종식과 함께 1950년 브라질에서 다시 개최됐다. 이 대회에 아시아에서는 버마·인도·인도네시아가 참가 신청을 했다가 마지막 순간에 조용히 철회했다. 1954년에는 아시아에서 중국·한국·일본이 참가 신청을 했으나 역시 마지막 순간 중국이 철회함으로써 아시아 지역 예선전은 한국과 일본의 맞대결로 치러졌다. 예선전은 두 차례 모두 도쿄에서 열렸는데, 1차전은 한국이 5-1로 승리를 거두었고, 2차전은 2-2 무승부를 기록했다. 결국 한국은 아시아 대표로 월드컵 본선 진출 티켓을 거머쥐었으나 알다시피 그 결과는 참담했다. 헝가리에는 0-9, 터키에는 0-7로 대패했다.
솔직히 당시 아시아 축구는 ‘본선 진출을 위한 발판’, 또는 어느 팀이든 원하는 만큼 꺼내 가질 수 있는 ‘주머니 속의 공’ 취급을 받았던 것이 사실이다. 아시아가 세계 정상을 정복하기 위한 장도에는 수많은 고난이 있었다. 가장 빛났던 순간은 1966년 영국에서 열렸던 월드컵이다. 북한은 이탈리아를 1-0으로 누르고 8강에 진출해 포르투갈과 격돌했다. 전반전 한때 포르투갈에 3-0으로 앞서는 기적을 연출한 북한은 결국 아쉽게도 5-3의 역전패를 당하고 말았지만, 월드컵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동방의 작은 나라 북한이라는 수수께끼 팀의 선전은 아시아 축구에 대해 새로운 평가를 내리게 했다. 그러나 북한은 한순간의 ‘돌풍’을 일으킨 뒤 월드컵 무대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아시아는 그 뒤로도 오랜 시간을 기다리며 스스로를 단련해야 했다. 이제 한국이 아시아 축구의 선봉에 서 있으며, 일본이 그 뒤를 이어 아시아 축구에 대한 인식을 바꾸려고 노력해왔다. 그리고 그들은 해냈다.
이 글에서 나는 2002년 월드컵 대회에서 아시아인의 긍지와 감탄을 불러일으켰던 한국의 화려한 전적에 대해서는 다시 언급하지 않겠다. 내가 여기서 얘기하고 싶은 것은, 지금 독일에서 펼쳐지고 있는 월드컵에서 한국이 치른 두 경기를 통해
바라본 현재의 한국 축구다. 한국은 용맹스럽게 토고의 손에서 승리를 빼앗더니, 이번에는 과거 월드컵 챔피언과의 맞대결에서 선제골을 허용한 뒤에도 점수를 나눠갖자며 머리를 들이댔다. 그리하여 후반전 막바지에 드디어 동점골을 넣었다. 한국 축구는 오래전부터 아시아 많은 나라들의 교과서였다. 아시아 축구의 힘은 단순히 놀랄 만큼 개선된 선수들의 체질에 기대거나 경제 발전 정도에 비례해 생긴 것이 아니라 정신력, 동료의식, 규율, 단결력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시아인의 특질인 스승에 대한 존경심에 의해 발현되는 것이다.
박지성의 동점골에 껑충껑충 뛰다
나는 1998년 아시안게임, 2002년 월드컵 예선전 등에 참가한 한국 선수단이 베트남의 잔디구장에서 훈련하는 모습을 거의 빠짐없이 지켜봤는데, 그것은 그들이 클럽이든 단체든 국가대표단이든 자신들의 깃발과 유니폼에 대해 어떤 의식을 갖고 있는지, 어떤 대오를 형성하는지, 자신의 스승인 감독과 코치에게 어떤 마음가짐인지, 자신의 동료들과 어떻게 굳게 맺어져 있는지, 그리고 어떤 규율 속에서 행동하는지를 직접 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
그런 힘은 어느 선수단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인터넷 신문을 통해 1998년 월드컵 챔피언인 프랑스 대표팀의 레몽 도메네크 감독조차 이런 한국의 힘을 조심해야 한다고 경고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그의 팀은 한국의 위력을 경기에서 실컷 경험했다. 나는 20년 이상 체육부 기자로 일하면서 수없이 많은 경기를 지켜봤지만, 이번에 프랑스와 맞선 한국 대표팀과 같이 자신보다 훨씬 강하다고 평가받는 상대에게 선제골을 뺏기고 열세에 처해 있는 상황에서도 전혀 흔들림 없이 전술 대오와 규율을 지키고, 감독의 지시를 따르며, 또 마지막 순간까지 목표를 이루고자 몸을 던지는 팀을 본 적이 거의 없다. 무승부를 이끌어낸 마지막 10분은 위에 열거한 한국팀의 장점들이 한데 모여 나타난 필연적인 결과였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박지성이 집념의 동점골을 터뜨리던 순간을 말하고자 한다. 마치 베트남 대표팀이 무승부라도 일궈낸 듯이 우리 신문사의 동료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서로 부둥켜안고 기뻐서 껑충껑충 뛰던 그 순간을 ‘괄호’ 안에 보태는 것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우리가 기뻐한 것은 단지 한국의 승리뿐만이 아니었다. 아시아의 대표가 이뤄낸 기적을 기뻐하는 것이었다. 아직 2002년의 ‘4강 신화’에 견줄 만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독일에서 이루어진 승리이기에 더욱더 의미 있고 값지다. 우리는 한국 선수들이 아시아의 팬들을 열광시키고, 아시아인들의 자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에 기뻐한다. 심지어 우리는 영국의 프리미어리그 경기를 볼 때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유니폼을 입고 구장에 선 박지성의 두 발을 주목한다. 그가 동료에게 공을 패스해 골로 연결시키거나 직접 상대방의 골문을 뚫을 때마다 우리는 어김없이 환호한다.
베트남은 언제나 한국을 응원할 것
한국 대표팀이 월드컵의 주인이 되는 것은 여전히 멀어 보이지만, 월드컵 대회 때마다 본선에 진출해 세계의 축구 강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실력과 재능을 겨루게 된 것은 한국 축구의 승리일 뿐 아니라 우리 아시아인의 승리이다. 베트남의 체육부 기자들과 우리 베트남의 축구팬들은 한국 축구에 대한 흠모와 존경과 자부심으로 언제나 한국 대표팀을 응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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