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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6/10/20 22:37:30
Name 쇼고
Subject [스포츠] "최하위지명" 드래프트 가장 마지막에 이름이 불려진 사나이의 인생

올 시즌도 드래프트 회의가 다가오고 있다. 드래프트에는 항상 이런저런 드라마틱한 요소들이 따라붙는법.

여기서는 드래프트 회의의 가장 마지막에 이름이 낭독된 선수, 즉 프로야구 선수가 될 수 있는 인간과 그렇지 못한 인간의 경계선에 서 있는 "드래프트 최하위 지명"을 받은 선수에 초점을 맞춰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최하위로 지명된 인물은 도대체 어떤 야구인생을 보내고 있을까. 이번에는 사상 최강의 드래프트 최하위 ・ 후쿠우라 카즈야(치바롯데)의 야구인생을 더듬어본다.

이하는 야구 전문지 "野球太郎No.006 ?2013 드래프트 직전 대특집호"에 개재된 무라세 히데노부씨의 기사를 발췌했다.


9월 9일, QVC 마린필드.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대 치바 롯데 마린즈의 경기는 "사이타마 VS 치바 라이벌시리즈" 특별전으로 현의 위신을 건 싸움의 최종전. 2대2 동점 상황에서 맞이한 7회말 치바 롯데의 공격은 1사 2루. 역전의 호기를 잡은 치바롯데에 대타 ・ 후쿠우라 카즈야의 이름이 울려퍼지자 응원석에선 이날 가장 큰 함성으로 뜨겁게 환호했다.

후쿠우라는 세이부 라이온즈・ 오카모토 료스케의 바깥쪽 높게 솟아오른 패스트볼을 망설임없이 휘둘렀고 타구는 라인드라이브로 좌익수 앞에 떨어지는 결승 적시타. 올 시즌부터 시작된 치바 vs 사이타마의 라이벌 시리즈는 "치바의 긍지"로 구가되는 후쿠우라의 현역 통산 1870번째 안타로 막을 내리게 됐다.

"9월 9일이라서 친건가?"

시합종료 후 이렇게 말하며 웃고 있었던 등번호 "9". 일찍이 '마쿠하리의 켄 그리피 주니어'라 불리며 현재까지도 마쿠하리의 안타제조기 등 수없이 많은 별명을 지닌 마린즈의 혼이라고도 할 수 있는 후쿠우라는 사실 등번호 "70"을 달았던 투수이자, 드래프트 최하위 지명선수였다.


"저는 제가 프로에 들어올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3학년때 여름 고시엔 치바 예선에서도 3라운드에서 노다히가시에게 지기도 했고.... 지금 생각하면 제가 지명된 것도 그 전해에 치바로 야구단이 이전해왔던게 크지 않을까 싶어요" 수훈타를 날린 다음날의 QVC 마린필드. 선두 라쿠텐과의 결전을 앞두고 후쿠우라는 20년 전의 드래프트 회의를 이렇게 회상했다.

1993년 프로야구계에 타자와 켄이치(주니치) ,카케후 마사유키(한신)등 좌타 강타자들을 배출해온 명문 ・나라시노 고교의 4번이자 에이스를 맡아온 후쿠우라에게는 지난해 카와사키에서 치바로 이전해온 롯데 구단의 스카우터가 몇번인가 인사차 방문해 왔다.

"하지만 지명을 확약해줄 만큼의 선수는 아니었고 저도 '혹시 잘하면 프로에 갈 수 있을지도...'정도의 느낌이었으니까요. 고시엔 진출에 실패한 뒤에도 야구가 없는 생활을 즐기고 있었고요 (웃음)"

11월 20일. 신타카나와 프린스 호텔에서 개최된 제 29회 드래프트 회의는 대학생과 사회인에 한해 역지명권을 인정받는 룰이 적용된 첫 해였던만큼 지금까지와는 다른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이미 이날까지 주목받는 후보였던 칸토가쿠인의 카와하라 류이치는 요코하마, 아오야마가쿠인의 고쿠보 히로키는 후쿠오카 다이에, 미츠비시중공업 요코하마의 이시이 타카시는 세이부, NTT 시코쿠의 야마베 후토시는 야쿠르트를 각각 역지명. 드래프트 제도의 근간을 흔드는 이 역지명 제도의 도입에 따라 드래프트 제도 도입 후 처음 1라운드 중첩이 없는 해가 되었다.

거기에 주니치는 1위지명 토요타오오타니 고등학교의 히라타 히로시에게 고교생 첫 1억엔의 계약금을 내는 등 상위지명자의 계약금은 치솟았고 각 구단의 재정은 핍박해졌다. 유망한 선수들은 물밑교섭의 쟁탈전이 격화됐다. 그런 도중 치바롯데는 "애인"이라고까지 불렸던 카나가와 대학교의 와타나베 슈이치를 드래프트 직전 후쿠오카 다이에에게 빼앗겨버리고 NTT 도후쿠의 좌완 카토 타카야스로 1위지명을 급하게 변경했다.

이런 신인선수들의 상황과는 전혀 인연이 없었던것이 치바롯데의 드래프트 7위, 전체 최하위가 되는 64번째로 지명된 나라시노 고교의 좌완투수・후쿠우라였다.

"지명됐을 때는 학교에서 연습하고 있었어요. 꼴찌니까 이미 상당히 시간이 지나고 나서 운동장에서 "롯데에 지명됐다"라고 들었습니다. 그야 뭐 당연히 기뻤죠, 지명된다면 어디든지 갈 생각이었지만 역시 롯데는 로컬 구단이었으니까요'

93년 마린즈가 드래프트에서 지명한 신인선수는 1위 카토 타카야스(NTT 도후쿠) 2위는 "치바가 좋으니까 롯데에 가고싶어요"라고 고교생이면서도 롯데를 역지명한 고료의 타치카와 타카시. 3위는 오오츠카 아카시(벳푸하무로다이), 4위 나카야마 마사유키 (쿠마가이), 5위 모로즈미 켄지(히타치), 6위 오노 신고(고템반니시), 그리고 7위 후쿠우라 카즈야. 지금 돌이켜보면 드래프트 역사에서도 드문 하위지명에서 걸출한 선수들이 쏟아져나왔던 해였다.

이 해 입단한 고등학생들에게 주어진 등번호는 타치카와가 "52", 오오즈카가 "65", 오노가 "63"로 전원 높은 숫자의 등번호였지만 7위 후쿠우라에게 주어진 등번호는 "70". 숫자 그대로 등록 가능한 선수 70명중 마지막, 이라는 취급이었다.

"제가 이 해 드래프트의 최하위지명이란 사실은 그렇게 신경쓰이진 않았어요. 그것보다도 프로야구선수가 됐다는 기쁨이 더 컸으니까요. 그래도 등번호 70은 역시 마음이 무거워졌죠, 당시는 지금처럼 세자릿수 등번호인 육성선수도 없었고 선수라면 60번대가 마지막. 그런데 70번이니 시합에서도 "네놈, 코치냐 !"라고 자주 놀림받았어요 (웃음), 그래도 다른 구단에 지명된 동기들을 보면서는 격차를 느꼈죠. 코시엔에 나갔던 이쿠에이의 오오무라(킨테츠 3위)나 우와지마히가시의 히라이(오릭스 1위), 오미야히가시의 히라오(한신 2위), PL의 마쓰이 카즈오(세이부 3위). 그리고 2위로 지명된 타치카와는 걔내들이 고시엔에서 준우승했던 2학년때 예선에서 붙었어요. 그때 제가 있던 우익수 자리를 넘어가는 엄청 큰 홈런을 맞았는데... 몸은 단단하고 타구는 엄청나고, 그냥 괴물이라고 생각했어요"

입단교섭의 자리에서 후쿠우라는 담당이었던 이타치 야스시 스카우터에게 "좌완투수는 많이 없으니까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차례는 분명히 올거야. 3?4년 후 1군에서 던질 수 있도록 밑에서 확실히 토대를 만들어줘"라는 말을 듣고 깊게 가슴에 새겼다. 

"그러니까 견실하게 노력한다면 몇년 후에는 반드시 1군에서 던질 수 있는 날이 올거야. 마린의 마운드에 올라가서 '가장 밑에서 기어올라왔어!' 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노력하지 않으면 안돼. 그렇게 밑고 있었지만.. 현실은 그렇게 달지 않았어요"



1994년, 치바롯데 마린즈에 입단한 후쿠우라는 갑작스런 어깨부상에 시달려 2군에서도 투구연습이 전혀 불가능한 상황에 빠져있었다.

 프로 1년차의 시즌이 개막한 직후의 연습날. 오전 연습이 끝나고 점심 쉬는시간에 후쿠우라는 동기였던 드래프트 6위 오노와 함께 당시 2군 타격코치였던 야마모토 코지(山本功児)에게 호출됐다. 아무도 없는 그라운드로 간 오노와 후쿠우라에게 야마모토는 뜬금없이 "쳐 봐"라고 말하며 강제로 둘을 배팅케이지로 밀어넣고 피칭머신을 상대로 프리배팅을 시켰다. 결과적으로 이게 운명의 갈림길이 됐고 쾌타를 연발하는 후쿠우라의 타격은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타격코치의 심장을 보기좋게 꿰뚫었다.

당시의 고양된 기분을, 야마모토 코지는 회상한다.

"입단당시 후쿠우라는 몸도 가늘고 약해서 연습도 힘든 상황이었어요. 근데 타격이 좋다는 소문을 몇번인가 들어서 한번 보고싶다는 생각이 들어 시켜봤는데.... 대단했어요. 샤프한 스윙으로 쳐낸 날카로운 타구가 우라와 구장 오른쪽 네트에 팡!팡!하고 맞았죠. 이미 그때부터 천재적인 배팅 센스를 가지고 있었어요"

케이지에서 나온 후쿠우라에게 야마모토는 고했다

"너 지금 당장 타자로 전향해"

하지만 야마모토에 있어 다이아몬드의 원석을 발견한듯한 흥분은 후쿠우라에게 있어서는 돌연한 투수실격선고를 받은 기분이었다.

"깜짝놀랐죠, 입단교섭때 타자전향의 이야기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었고 이제 막 개막해서 쉴틈도 없는 시기에 나온 '타자가 되라'였으니까요(웃음). 이게 드래프트 하위지명의 현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저는 투수를 하고싶단 고집이 있었으니까 감추지 않고 "1년간은 투수로 하고싶습니다"라고 거절했었는데..."

후쿠우라는 그 뒤에도 계속 투수였지만 야마모토 코지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 뒤에도 후쿠우라와 얼굴을 마주할때마다 "뭐야, 너 아직 투수하고있었어 ?", "빨리 타자로 전향해"라고 집요하게 쫓아왔다. 야마모토는 필사적이었다.

"우리 코치들은 시즌이 끝날때면 해고할 선수들에게 X자로 표시하고 감독에게 제출합니다. 그걸 2군감독이 판단하고 다음 시즌 계약이 정해지는데 당시 후쿠우라는 투수를 계속했다면 조만간에 X가 표시될 선수였어요. 그럴거면 빨리 타자로 승부시키고 싶다는 생각은 있었습니다"

7월의 올스타 직전, 후쿠우라는 2군감독이었던 다이고 타케오 감독실로 불려가 정식으로 타자전향을 타진당했다. 

"결국 올스타가 열릴 때에는 타자가 됐죠. 배팅에 자신이 없었던것도 아니었고 좋아하긴 좋아했는데... 그래도 역시 투수로서 던지고 싶었어요. 그럼에도 전향을 결심한 이유는... 음, 뭐였을까요. 어떤 의미로서는 야마모토씨한테 억지로 당하는 느낌이 아니었을까요(웃음)"


투수로서 입단했지만 1년도 버티지 못하고 반은 강제적으로 타자로 전향한 후쿠우라는 타자로서 프로의 세계에서 살아가게 되었다. 

"타자로 전향해도 상당히 힘들거란건 알고 있었어요. 다른 선수를 봐도 다들 신체조건부터가 틀렸고, 시작이 투수였던 만큼 누구보다도 뒤쳐져 있다, 라는 의식은 있었으니까요. 연습도 처음엔 특히 힘들었어요. 저는 왼손잡이니까 1루나 외야밖에 보지 못하는데 정말 형편없었어요. 매일 시합이 끝난 뒤에 유격수였던 오오즈카랑 수비훈련 또 수비훈련, 2군 내야수비코치였던 사토 켄이치씨한테 엄청 혼나가면서 배웠어요"

그 후 1루수로 3번의 골든글러브에 빛나는 수비는 이때 다져진 것. 어려운 원바운드나 송구도 여유있게 처리하는 후쿠우라에 내야수들은 절대적인 신뢰를 보내기까지에 이르렀다. 
 
"원바운드의 연습도 했는데 나중에는 폭투왕이었던 오오즈카의 악송구를 계속 주우러 가다 보니까 저도 모르게 좋아졌어요 (웃음), 젊었을 때 나이가 비슷했던 녀석들은 모두 연습에만 몰두하고 있었어요. 역시 하지 않으면 늘지 않는다. 당연한 것 중에서도 당연한거니까요"

그 중에서도 후쿠우라의 연습량은 누구보다도 무시무시했고 전향을 제안했던 야마모토도 혀를 내밀었다.

"후쿠우라는 배팅에 관해서는 천재적인 센스의 소유자였죠, 그 천성의 배트 컨트롤과 어떤 볼에도 절대 어깨가 열리지 않고 폼도 무너지지 않는 밸런스. 제가 배팅에 관해서 뭔갈 가르쳤던 기억은 거의 없어요, 오히려 제가 지도자로서 소중한 것을 배울 수 있었죠, 후쿠우라는 매일 가장 빨리 그라운드로 오고 마지막까지 남아있었어요. 그가 대단했던건 그걸 쉬지않고 계속 해나갔던 거에요. 2군시절뿐만 아니라 1군에 올라가서도 후쿠우라는 결코 자만하는 일 없이 연습했어요. '계속 노력하다보면 어떻게든 된다' 그런 것들을 후쿠우라한테 배웠습니다. 1년 아래인 사부로도 후쿠우라의 연습자세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생각해요"

그 후 1군출장을 하지 못한채 3년간을 2군에서 보낸 후쿠우라가 브레이크를 이룬건 프로 4년차가 되는 97년. 전 요코하마 감독이었던 콘도 아키히토를 새 감독으로 초빙한 첫 스프링 캠프를 2군에서 시작한 후쿠우라는 방배정에서 위기감을 느꼈다.

"그때 캠프에서 같이 방을 쓰게된 사람이 선수가 아니라 구단 스탶이었거든요. 그걸 알았을때 '아아... 난 이제 올해로 짤리는구나, 뭐야 이 방배정은. 또 뒷쪽에서 드래프트 1위야?'하고 각오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운은 돌연하게 찾아왔다. 97년 7월 5일, 호조였던 후쿠우라는 2군의 원정에서 아키타로 이동한 직후 긴급히 1군에 소집됐다. 당시 2군감독이었던 야마모토는 이렇게 말한다.

"1군에 부상자가 나와서, 1루수가 없으니까 바로 후쿠우라를 올려라는 이야기가 와서 아키타에서 바로 보냈어요, 후쿠우라가 운이 좋았던건 그때 호조였던 피크 타이밍에 1군으로 호출됐단 점입니다. 그리고 그는 아무리 긴장해도 흔들리지 않는 강한 정신력을 지니고 있었고요, 전 후쿠우라의 데뷔를 TV로 관전했는데 첫 1군무대에서도 전혀 주눅드는게 없었어요"

그날, 1군 승격 즉시 7번 1루수로 스타팅 멤버 출장을 이룬 후쿠우라는 오릭스의 프레저로부터 중견수 앞에 프로 첫 안타를 날리며 호기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93년 드래프트 동기 중에서는 오노에 이어 가장 늦은 1군 데뷔였다. 

"깜짝 놀랐어요, 아키타에서 비행기를 타고 돌아왔더니 바로 그경기 선발 1군 첫출장이었으니까요. 2군에서도 괄목할만한 성적을 남긴 것도 아니고 홈런도 10개정도? 왜일까하고 생각하면서 거기서 안타를 쳤고 이어서 다음 날에도 대타로 나갔을때 좌투수한테 안타를 치면서 조금 자신이 붙었었던거 같아요"

그 다음날 후쿠우라는 1루수 주전으로 정착. 8월 12일 세이부전에서는 좌중간에 프로 입단후 첫 결승홈런을 꽃아넣는 활약 등으로 27일부터는 3번타순에 발탁. 별안간 나타난 등번호 70 3번타자는 시즌이 끝날때까지 그 자리를 사수했고 최종성적 67시합 출장에 타율 2할 8푼 9리, 6홈런, 23타점이라는 좋은 성적을 마크. 다음 해인 98년에는 등번호가 "9"로 바뀌고 개막부터 주전으로 129경기에 출장. 첫 규정타석에도 도달했다.

덧붙여, 이 해 홈 개막전에선 모교인 나라시노 고교의 취주악부가 초청되어 후쿠우라의 타석때는 모교의 응원가인 "렛츠 고 나라시노"를 연주해 한때 치바롯데 마린즈의 단골 응원으로 정착되었다. 그리고 2000년대에 돌입하며 드디어 천재타자의 재능이 개화하게 된다.

2000년 시즌 전반, 후쿠우라는 안타를 양산하며 4할에 가까운 타율을 기록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암을 선고받고 병마와 싸우는 어머니에게 활약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바램이 있었다. 그러나 후쿠우라는 첫 올스타 출장을 기록하지만 어머니는 그 화려한 무대를 보지 못하고 결국 세상을 떠나게 된다.

"처음 올스타에 출장했을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그 이후에 타율이 급강하했어요. 결국 2할 9푼 6리로 시즌을 마치면서 아깝게 3할에 닿지 못했죠. 거기서 왜 3할을 칠 수 없었는지 분석하고 계속 생각하도록 했습니다, 1군에 처음 올라왔을때는 2군이랑 비교해 밥은 호텔에서 먹을 수 있고 세탁도 해주는데다 관중이 가득 찬 구장에서 좋은 시합을 할수 있다는 환경적인 면에서 '이렇게 좋은 장소는 없다, 절대로 남고싶어'라는 헝그리 정신으로 웨이트로 가는 몸을 불리고 저한테 부족한 부분을 무모하게 길러 나갔는데 도중부터는 '이렇게 단순하게 하는 것만으로는 안된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메커니즘적으로도 하나하나씩 생각하게 됐어요"

다음 해인 01년, 후쿠우라는 니혼햄 오가사와라 미치히로와 최종전까지 얽혀간 수위타자 경쟁에서 승리하고 타율 3할 4푼 6리의 첫 리딩히터에 빛나고 이해로부터 6년연속 3할타율을 기록. 05년 첫 우승을 경험한 시즌에는 발렌타인 감독의 매일매일 바뀌는 플래툰 시스템 안에서도 유일하게 후쿠우라만이 "3번"에 고정되는 절대적인 신뢰를 얻어 플레이오프 세컨드 스테이지 호크스전에선 결승점을 올렸다. 일본시리즈에선 만루홈런을 날리는 등 찬스에 강한 타격으로 치바 롯데 마린즈의 일본시리즈 우승에 공헌.

하지만 만성적으로 시달리던 요통을 시작으로 사구에 의한 골절 등 혹사해왔던 몸은 후쿠우라로부터 훌륭한 퍼포먼스를 점점 빼앗아가기 시작했다. 99년부터 03년까지 1군감독을 지낸 야마모토 코지는 당시 후쿠우라의 기억을 이렇게 말했다

"후쿠우라의 타격 센스를 가지고 있다면, 벌써 2000안타를 달성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죠, 근데 후쿠우라는 아무리 컨디션이 나빠도 쉬지 않았어요. 시합전 트레이너한테 후쿠우라의 허리에 문제가 있단 보고가 올라와도 본인은 "괜찮습니다, 출장하겠습니다"라고 반드시 말했어요. 컨디션이 만전이었다면. 이라는 변명은 하지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어떻게든 2000안타는 달성해 줬으면 하고 염원하고 있습니다"

93년 드래프트로부터 20년이 지난 가을. 
같이 드래프트에 지명되어 1년차 같이 배팅케이지로 끌려간 오노 쇼고가 은퇴를 표명하며 최하위로 지명된 후쿠우라는 드래프트 동기들 중 유일한 현역으로 남았다.

"한솥밥을 먹어온 동기가 그만두는건 쓸쓸하네요. 특히 우리들은 사이가 좋았으니까. 지금 팜에서 코치직을 맡고 있는 오오즈카도 은퇴할때 '먼저 가서 기다린다' 라든가, 농담으로 말하고 있었지만(웃음). 아무래도 은퇴해서 해설이나 코치직을 맡고 있는 동기들을 보면 복잡한 기분이 되죠"

치바현에서 태어나 명문 나라시노 고교에서 4번과 에이스를 겸하고, 드래프트 최하위이면서도 고향의 구단에서 20년간 마린즈의 주축으로 힘든 시기도 팀을 견인해온 후쿠우라의 불굴의 의지를 마린의 라이트스탠드(응원석)은 "치바의 긍지"라고 칭한다.

"의식이라고 할건 없지만 이정도 듣고 있다보면 역시 달성하고싶네요, 응원해주시는 기대에 보답해드려야 하니까. 그걸 위해선 목숨을 걸고 준비하지 않으면 안돼요. 지금까지보다도 한층 더 "





※후쿠우라는 현재 2000안타까지 68안타를 남겨두고 있습니다.

후쿠우라의 응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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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ngs'speech
16/10/20 23:16
수정 아이콘
멋있게 살았네요. 구로다도 그렇고 일본 야구에 멋있는 선수들이 많네요.
키스도사
16/10/20 23:52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합니다!
엘룬연금술사
16/10/21 00:17
수정 아이콘
멋진 이야기네요. 한국에도 이런 스토리가 많이 있을텐데, 좀 더 알려지고 회자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6/10/21 02:56
수정 아이콘
와.. 대단한 선수네요.. 잘읽었습니다!
이브나
16/10/21 08:11
수정 아이콘
제목만 봤을 때는 김호령 얘기인줄 알았는데...
우리 호령이도 다치지만 않으면 타이거즈 레전드가 될겁니다.
타격만 좀 더 잘 하면 말이죠...
생겼어요
16/10/21 08:37
수정 아이콘
이런글 참 좋아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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