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
2006/03/20 03:12:36 |
Name |
Sickal |
Subject |
갈데까지 가 보자. |
도저히 아침에 일어날 자신이 없었다. 최근들어서 잠이 많아진 탓인지, 난 절대 6시에 기상할 수 없을 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방법은 딱 한가지 밖에 없었다. 날 밤을 새는 것.그 때는 아직 와우 하기 전이라, 밤새 인터넷을 하고 스타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물론 커피를 마셔주는 건 기본. 그러나, 그날 벌어질 일을 미리 알았더라면, 나는 결코 밤을 새지 않았을 것이다.
예선 공지는 거의 언제나 비슷하다. 쓴거 또 쓰고 쓴거 또 쓰고. 재활용 측면에서는 100점 만점이리라. 어쨌든 출력을 소홀히 할 수는 없다. 예선장에선 작가가 할 일이 별로 없을 줄 알았다. 적어도 내가 처음 일 할 때는 말이다. 그러나 예선장에서 할 일은 물론이거니와 예선장에 가기전에 준비해야할 일도 참 많았다.
일단 맵 추첨을 할 종이가 있어야 했다. 예선 맵 순서는 당일 결정하는게 보통이었으니까. 그리고 2라운드를 위한 맵 추첨이 있어야 했고, 각 팀의 대진표를 적을 종이가 있어야 했다. 각 팀의 승패를 기록할 종이도 필요했으며, 이것들을 벽에 붙일 테이프, 언제 쓰일지 모르는 칼, 그리고 필기도구는 필수품 중의 필수품이다. 그 외에 선수들의 경기 리플레이를 저장할 USB에 각종 마우스 드라이버, 선수들 마우스가 세팅되지 않을 경우를 대비한 개인용 예비 마우스까지.
누가 보면 여행이라도 가는 줄 알겠다.
몇 번 가본 적이 있지만, 그래도 거의 1년여만에 오는 시흥이 낯이 익을리가 없다. 지하철에서 꾸벅 졸 뻔 하다 황급히 내리고 마을버스를 탔다. 아니나 다를까, 낯선 지역에 가면 꼭 한 정거장 앞에서 내리고 만다. 어쩔 수 있나, 한 정거장 지나쳐서 내리는 것 보다는 낫겠지 라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위로 하는 수밖에.
십 여분을 걸어가니 드디어 예선장 피시방위치가 어렴풋이 보이며 옛날에 찾아왔던 기억이 났다. 그때 예선전 기억도 떠올랐다.
윤열이는 감기가 걸려서 고생했었지. 그런 몸으로 3킬씩이나 했었고...여기서 연성이가 역 올킬을 했었지...그 때가 석열이가 처음 출전했던가...
이런저런 경기 생각을 하다보니 어느새 피시방에 도착했다. 하지만 아직 들어갈 때는 아니다. 예선 시작은 9시. 8시 반이니 아직 시간이 있다. 우선 나는 편의점을 들렀다. 간단하게 아침을 때워야 한다. 절대 식사시간이란게 있을리가 없으니 말이다. 김밥과 우유를 사고, 혹시나 몰라 거금을 들여 아몬드를 샀다. 없는 것 보다야 낫겠지.
피시 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팬택 팀을 만났다. 기효가 인사를 해온다. 감독님과 코치님들이 보이고 인사를 건넨다. 선수들 얼굴을 보니 졸음이 한 가득이다. 당연하지...일어날리가 없는 시간에 일어들 났으니 컨디션이 좋을리 있을까. 아직 여유가 있어서인지 팬택 팀도 식사를 하러 간다며 총총 사라져갔다. 창단한지 얼마 안되서인지 벤이 깨끗하다. 쓸데 없는 생각을 한다며 잠시 웃고는 계단을 올라간다.
8시 50분이 되자 예선장은 북새통이다. 응원을 온 사람, 덜 깬 잠을 기어코 자는 사람, 오랜만에 만난 반가운 친구와 잡담을 하는 사람...그 와중에 감독님들과 진행 스탭들은 모여서 회의를 하고 마침내 대진표를 완성, 경기를 진행시키기 시작했다.
9시 20분, 경기 스타트.
사실 이 날 초미의 관심사는 플러스 팀이었다. 지금이야 르까프 (OZ인가?)로 바뀌었지만, 당시에는 플러스 였고, 온게임넷 프로리그 탈락으로 인해 팀 전체가 나갈 곳이 없던 상황. 여기서 떨어지면 당분간 모든 리그에서 작별을 고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플러스 덜컥 진출.
박성준, 박지호 두 선수가 완전 필을 받아 이뤄낸 진출이었다. 조정웅 감독님, 별 말을 하지 않지만, 아니 말을 못 꺼내신다고 보는게 맞겠다. 아무튼 자꾸만 벌어지시는 입을 감추지 못하시는걸 보니 꽤나 기분이 좋으신가보다.
반대로...한빛은...
관계자들이 모두 뜨악 했을 정도로 한빛의 성적은 처참했다. 거의 아무도 예상을 못했다고 해야할까...너무 큰 충격 때문일까? 한빛은 일언도 없이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쩝.
경기가 길어지며 여기저기서 잠든 선수들이 나왔다. 재경기를 기다리고 있는 헥사트론 팀...실시간으로 올라가는 사진 중계를 보니 거의 도살장 수준으로 나왔다. 기분이 좀 그렇다. 뭐 사실이긴 하지만. 가뜩이나 전 날 밤을 새서 피곤해 죽을 맛인데, 경기는 점점 더 장기전으로 나오고 있었다.
"자 나가자 경기 안하는 사람은 밖으로 나가~"
그래, 경기하는거 뒤에서 안보고 싶겠니. 하지만 유리에 달라붙는건 몰라도 안으로 들어오지는 말자...
매 예선장에서 골치를 썩히는 문제는 두 가지다. 경기하는 선수들에게 방해가 될 수 있기에 선수들의 출입은 철저히 통제한다. 그러나 10분만 다른데를 보고 있으면 어느새 선수들 뒤는 구경꾼들로 북새통이다. 줄을 쳐놔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대놓고 들어와 보는 사람도 있다. 강도경 선수가 그랬다. 물론 쫓아내면 나가긴 하지만 곧 다시 들어온다. 결국 숨박꼭질과 같다.
또 한가지 문제는 리플레이를 저장하지 않는 경우. 패자는 기분 나빠서 저장 안하고 승자는 지쳐서 저장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를 막기 위해 경기 하기전 리플레이 저장해 달라고 5분간에 걸쳐 설명을 해도 예선장에서 소실되는 리플레이가 반드시 생긴다. 어쩔 수 없다. 자동 리플레이 저장이라도 되면 모를까...일일이 저장시킬 수도 없다. 엔터 한 번이면 바로 끝나니까.
좌우간, 이 날의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어느던 시계는 7시, 8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아침 9시 경에 시작했으니 벌써 10시간 째다. 난 전날 밤을 샜기에 피로도는 가중되고 있었다. 가뜩이나 좀 전에 저녁 식사용으로 지급된 햄버거를 먹어서인지 더 졸리다.
심현씨도, 성준모 기자도 지칠대로 지친 상태인 것 같다. 그래도 나를 포함한 세명은 꾸준히 경기 끝나는 선수들마다 체크를 놓치지 않고 정보를 대조해가며 기록을 쌓아간다.
"여기서 3:2 승부가 나면 재경기에요."
"에이 설마."
설마는 나를 잡았다. 재경기는 더더욱 장기전으로 흘러갔다. 다리가 퉁퉁 붓는게 느껴진다. 결국 서서 돌아다니는 시간은 줄어들고, 의자에 앉아서 경기를 지켜보게 된다. 어차피 갈 팀은 이미 갔고, 아까부터 잠을 자던 헥사트론팀을 비롯해 재경기 팀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흠칫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나도 모르게 깜박 존 것이다. 목이 깔깔한 것이 공기가 엄청 탁하다는 걸 느끼게 해줬다. 경기 양상을 보니 그새 한 경기가 끝나있었다.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어서 세수를 했다. 다른 분들은 아직 조는 분이 없는데...그래도 가장 젊은 내가 졸다니 좀 부끄럽기도 했다.
"잠 좀 깨셨어요?"
"갈데까지 가보죠 뭐."
이제 마지막 경기. 시계는 1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결국 승자는 정해졌고, 헥사트론 팀은 보따리를 싸야 했다. 김동진 선수의 벌개진 얼굴이 못내 안타까운 마음을 들게 했다. 장장 15시간에 걸친 내 인생 최장시간의 팀리그 예선전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초토화가 된 피시방의 후끈한 열기도 서서히 잦아들고, 움직이지 않는 몸을 억지로 움직여 정리를 끝마친 후 리플레이를 수거했다. 리플레이 수거를 빼먹으면 오늘 한 일이 말짱 도루묵이다. 결국 몇개의 리플레이는 구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많은 리플레이를 보존했다. 이건 언젠가 리플레이 스페셜에서 쓰일 날이 있겠지.
아침부터 밤까지 나와서 고생해주신 사장님 내외분에게 인사를 드리고 문을 나섰다. 날이 바뀌어 프로리그가 있는 KOR팀도 이제 막 길을 떠나려는 참인 것 같다. 수고하셨다고 인사를 하고 택시를 잡은 뒤 서울! 을 외치고 피디님과 나, 그리고 조연출 형은 구겨지듯 택시 안에서 잠이 들었다.
...사실 너무 피곤해서 잠도 안왔다. 근데 이 얘기를 왜 썼더라.
------------------------------------------------------------------------
ps - 픽션이 다소 가미되어 있습니다.
* 메딕아빠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6-03-21 09:06)
|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