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 추리소설] <왜 그는 임요환부터...?> -51편
#1
2005년 10월 8일 밤.
"너는 지금 누군가를 숨겨주고 있어."
현관 밖에서 마주 선 진호가 화내는 소리를 강민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동수형을 생각하면 네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너나 요환이형이나 지금 사건의 전말을 다 알고 있으면서 어떻게든 증거를 없앨 생각만 하고 있다고. 가스관 안에 숨긴 흉기를 가져온 것도 쪽지를 빼돌린 것도 네 계획이었지? 날 두들겨팬 놈도 너냐?"
강민이 갑자기 안경을 벗었다. 보통 놀란 게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눈으로 어떻게 알았냐고 묻고 있었다. 진호가 차 사고로 죽을 뻔한 이후 강민과 요환 두 사람은 모든 추적을 중단하고 조용히 지내고 있었던 것이다. 한동안 모든 것이 수면 아래로 잠긴 것처럼 보였건만.
"시현씨가 거길 한번 찾아보라고 그러더라. 뒷면에 칼집 난 걸 봤어."
"무서운 여자로군. 누가 흉기를 가져왔고 쪽지를 빼돌렸고 널 두들겨팼는지 시현씨랑 열심히 생각해보도록 해. 어차피 내 입에선 답이 안 나올 테니까."
"네가 더 무서워. 증거 다 없앤 게 범인 숨겨주고 있는 게 아니면 뭔데? 넌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어. 이제 요환이형한테 물어볼거야."
"헛수고 하지 마. 형도 똑같이 대답할 거야."
강민은 다시 안경을 쓰면서 검지손가락만 들어 안경을 치켜올렸다.
"난 단 한 순간도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았어. 네가 이 말을 못 믿겠다면 마음대로 해. 하지만 난 이 이상은 할 말이 없어."
#2
갑자기 아주 키가 큰 사람이 방문을 열고 나왔으므로 나와 요환이형 모두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또 다른 목격자일까? 라고 생각하는 순간 내가 올려다본 그 눈은, 나 강민이 너무나도 많이 봤던 눈이었다.
"연성아, 너, 어, 어떻게 살아 있니?"
"요환이형, 형에게 끝내 사체도 보여 주지 않았던 말레이시아 의사들의 말을 믿었어?"
그, 그러고 보니 어떤 선수도 관뚜껑을 열어 본 사람은 없었다.
용욱이는 사고가 터졌는데도 선수들을 귀국시키지 않고 계속 일정을 소화하게 하는 집행부 쪽에 시종일관 불만을 터뜨렸었지만, 사실 집행부 쪽에서도 사건수습과 장례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아니었다. 감독과 코치, 매니저 정도? KTF에서 정 감독이 '협회'와 관련없다는 것은 정석이의 실험으로 밝혀진 바 있으니 주훈 감독 역시 '협회'편일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을지도 모른다.
"머리를 쓴 거야. 그들이 나부터 죽일 건 뻔했거든. 팀에 스파이가 있다는 걸 출국 전날에 비로소 알았으니까."
요환형이 갑자기 몇 걸음 물러났다. 나에게서, 그리고 연성이에게서.
"한국에 남아 있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니 말레이시아에 피해 있었어. 주변이 온통 범인들뿐이거든.
누가 알았겠어, 임요환 강민 그리고 홍진호까지 세 사람 모두 범인이라고는......"
나는 갑자기 이 상황이 우스워졌다. 그리고 요환형을 쳐다보면서 물었다. 형, 우리가 범인이래. 그런데 형의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연성아, 정말로 그동안 숨어 있었다면, 갑자기 귀국한 의도가 뭐야?"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진실을 밝힐 방법이 없으니까. 이제 범인들끼리 서로 말을 맞추기 시작하면 방법은 없어. 그전까지는 범인 셋이 서로 어떤 역할을 했는지도 전혀 모르던 판국이었으니까...... 박성준은 강민 당신이 보내버렸지. 박성준 옆에 앉아있었던 셋 중에 한 사람."
나는 이 포지션에서 어떤 식으로 주먹을 올려지르면 최연성 그 녀석의 턱에 명중할 수 있을지를 궁리하고 있었다.
"당신은 계속 선기자에게 협박당했어. 선기자는 당신이 성준이보다 먼저 화장실에서 돌아와서 약을 넣는 걸 흘낏 봤거든. 한강변에서 요환형과 둘이서 진호형 모르게 서로의 행각을 실토한 후에 두 사람은 함께 선기자를 죽이기로 마음먹었지. 당신이 양복 안주머니에 숨겨갔던 건 보이스 레코더가 아니라 총이었어. 당신은 총을 들이댔고, 레코딩은 요환형이 했지. 협박으로 나오는 거짓 증언."
"너는 완전히 잘못 알고 있어. 우리 두 사람이 경험한 현실을 네가 네 말로 바꿀 수는 없어."
"민아, 누가 연성이처럼 말하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정말로 할 말이 없어져. 우리가 중모형 집에서 뭘 했는지는 정말로 우리밖에 모르니까."
"요환이형!"
"깜찍한 살충제를 궁리해낸 사람은 요환이형이었지. 인규와 종민이가 방마다 뿌리겠다면서 살충제를 찾으러 왔을 때 그건 형 방에 있었어. 내가 바보였다면 그날 꼼짝없이 당했겠지. 내가 온몸이 마비되는 척 쓰러질 때 형은 얼마나 안도했을까?"
"난 정말로 벌레 잡으려고 가지고 있었던 거야."
"형이 경찰에서 한 진술은 하나도 맞는 게 없어. 범인은 키 170정도의 면식범, 홍진호였지. 동수형 집에서 두 사람이 마주쳤을 때 둘다 기절할 만큼 놀랐을 거야. 원래 '협회'는 자기들의 하수인들끼리 서로의 존재를 알지 못하도록 철저히 컨트롤하고 있는데다가 누구에게 어떤 미션을 줬는지 철저히 숨기거든."
"요환이형, 형은 진호 아니라고 했잖아?"
"결국 범행 후의 짧은 시간에 진호형이 대충 설명하고 요환이형한테 뒷수습을 부탁했지. 가짜 발자국 만들고 흉기 숨기고 쪽지 태우는 일이 그 시간에 전부 이뤄질 수 있었던 건 형이 협조하지 않았다면 성립이 안 돼."
"그 말은 맞아 최연성. 하지만 진호는 아니야."
나는 요환형의 돌처럼 굳은 입술이 다시 무겁게 열리는 것을 비참하게 쳐다봐야 했다. '그 말은 맞아 최연성'이라고...... 형이 저런 말을 다시 하는 것은 굉장히 괴로운 일일 것임에 틀림없다. 일전에 나는 형에게 그 기억을 다시 재생해 달라고 단 한번만 부탁했었다. 그 때 한강대교는 보고만 있어도 눈이 시려운 푸른빛을 냈다.
"진호형이 아니라고 믿고 싶은 것일 뿐이야. 사실은 진호형 본인도 그렇게 믿고 있으니까. 범행 직후 진호형은 살인의 기억을 잊어버리려는 강한 자의식 때문에 혼란을 일으키고 결국 최면 치료를 받아 현장에 갔었던 자기 기억을 지워버렸어. 그건 '협회'의 손아귀에서 스스로 벗어나겠다는 행동이니 지금까지 계속 형이 그들에게 쫓기고 있는 건 당연한 일이야.
그 기억을 살려 보려고 요환이형은 있지도 않았던 차 사고 얘기를 지어내서 실마리를 던져봤지만 통하지 않았지. 결국 포기했을 테지? 민이형과 KTF팀원들이 지금 철저하게 진호형을 사건의 진실에서 소외시키고 있는 이유는 혹시 진호형이 진짜 다 기억해내 버릴까봐 그러는 걸거야.
'협회'는 정말 머리가 좋은 놈들이야. 피해자들이 다 동료 선수들이다 보니 형들의 마음이 약해질 걸 예상했겠지. 실제로 요환형은 선기자를 욕조에 담가 죽이고 나서 그동안 억눌렸던 죄책감이 폭발해 버렸고 민이형과 다퉜지. 형, 그동안의 우울증 치료도 소용이 없었어? 이럴 걸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협회'는 스파이들끼리 서로의 정체를 알지 못하게 늘 따로 행동시킨 거야.
그래서 세 형들끼리 손을 잡고 그들에게 대항한다거나 하는 일은 일어날 수가 없었고, 민이형과 요환이형은 서로를 범인이라고 주장하며 계속 의심하고 날을 세우고 있었던 거잖아.
그동안 정말 답답도 했겠어. 지금 두 형들이 서로의 정체를 실토한 지금 가장 먼저 하고 있는 일들이 고작 증거 인멸이라니 안타까울 뿐이야."
요환이형이 그 말을 듣더니 갑자기 연성이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나를 붙잡았다.
"민아. 나 믿지? 나 임요환 믿지?"
"갑자기 왜 그래?"
그때 연성이가 우리 두 사람을 내려다보며 옆구리에 손을 올린 채로 거만하게 말했다. 마치 우리를 심판하듯.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이중스파이야. 어때, 이래도 서로를 믿을 수 있겠어? 둘 중 하나는 협회를 위해 일하면서 동시에 선수들을 지키기 위한 미션을 수행중이야. 그러니 결국엔 둘 중 한 사람은 상대방을 쏴죽이게 되어 있어.
알겠어? 이중스파이라고!"
그때 나는 내 가슴 속 깊숙한 곳에 있는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건 아니다. 나부터 이렇게 생각하고 나부터 이렇게 인정하면 안 된다...... 그리고 연성이는 내가 가장 듣고싶지 않았던 말을 해버렸다.
"왜 두 형들만 살아 있어? 왜...... 왜! 형들 둘은 죽지도 않고 잘만 살아 있어?
왜 진실을 알리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은 다 다치고 끝까지 숨긴 사람들만 이렇게 살아 돌아다니고 있냐고......"
번개같이 스치는 깨달음이 있었다. 나는 아이스박스 쪽으로 달려갔다. 흉기가 하나 더 들어 있다. 내가 그걸 들고 연성이에게 부딪쳐갈 때 요환이형은 창백한 얼굴로 보고만 있었다. 난 그 창백한 얼굴에 관해 어디서 들은 적이 있다. 그리고 그 얼굴로도, 말은 할 수 있었겠지. 끝내 말만 했겠지. 무력한 젊은이들-
"민아, 안돼!"
"왜 아직도 몰라? 이 녀석은 이미 죽었다고!"
30cm짜리 쇠꼬챙이. 그래, 난 프로가 아니라서 정확히 심장을 찌를 수 없음을 안다. 그러나 이 액션은 충분히 나를 꿈에서 깨어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유령은 햄릿에게도 나타났다고 했다. 나는 지금 무엇이 두려운가?
유령을 찌르는 것은 절대로 비참한 짓이 아니야. 다만 내게 환영을 봐야만 하는 절실한 이유가 햄릿만큼이나 있는 것 같진 않아. 이건 가혹해......
"미니햄?"
"헉, 헉."
"와 이라노? 한 방 쓰는 내가 오히려 잠을 못 자겠다! 쿰 좀 그만 쿼라."
"정석아. 허억, 정석아, 내 무의식이 대체 지금 뭐라고 말하고 있는 걸까?"
"또 요환이형이랑 진호형 의심했나?"
"난 정말로 할 말이 없어. 만약에 연성이가 정말로 살아 돌아온다면 난 변명할 말이 없어......."
#3
2005년 9월 18일.
"이, 이래도 되는 거야? 이거 범죄 아니야?"
"문 다 땄는데 이제 와서 도망간대도 넌 이미 공범이야. 밖에서 망이나 봐라."
민이 뚱한 얼굴로 대답하며 용호의 등을 떠밀어 문 밖에 세워놓고 문을 꽝 닫아버렸다.
"용호도 우리 팀플레이에 끼게 하진 말 걸 그랬나? 넷이나 진실을 알다니 너무 위험해."
"용호가 우릴 도와 주는 조건으로 모든 걸 얘기해달라고 했으니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용호의 부산 친구녀석이 올라와서 문을 따 줬으니까 우리가 여기 잠입할 수 있었던 거 아냐. 정석이 너도 몰카 장비 다루는 친구 두지 않았으면 우리한테 말 한마디 빼낼 생각 못 했을 거다."
"허어. 이것만 알아 둬. 부산엔 재주꾼들이 많다 아이가. 그리고 햄들 둘이서만 이런 대담한 짓을 할 배짱들 아닌 거 안다."
"민이는 모르겠지만 내가 대담하지 못한 건 확실해. 날 여기 올 수 있게 했던 것도 민이니까. 자, 이제 거의 다 빼냈다."
요환이 숨을 훅 불면서 장갑을 벗었다. 강민이 옆에서 장갑과 칼 모두를 조심스럽게 받아들었다. 민은 손짓을 해서 정석으로 하여금 준비해온 신문지를 펴게 했다. 흉기를 거기에다 싸가려는 듯 했다.
"이거 어디다 숨길 생각이야?"
민은 꼬챙이를 신문지로 싸면서 요환에게 물었다. 요환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일단 내가 대충 묻어 뒀다가 나중에 해결하지. 시간이 없으니 숙소 마당 같은 데 묻어야겠어."
"미니햄, 이거는 지문 아이가?"
"민이 너. 정석이랑 용호한테 설명도 제대로 안 해 주고 여기까지 데려온 거야? 우리는 저 지문 때문에 흉기를 되찾으러 온 거잖아 정석아."
"우리 사정도 생각좀 해줘 요환이형. 숙소 안에 온통 도청장치 뿐인데 어디서 얘길 충분히 했겠어. 애들한테 설명해준 거라곤 형도 들었다시피 여기까지 오는 차 안에서 한 말 있잖아, 그게 전부라고.
돌아가는 길에 또 그 긴 설명 해야 돼. 분명히 그 와중에 정석이가 내 멱살 한번 제대로 잡을 타이밍이 오겠지만."
정석은 갓 교제를 시작한 연인처럼 어색하게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있는 임요환과 강민 두 사람에게 시선을 두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행님-하고 불렀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뒤돌아보았다. 정석은 그에게 질문했다.
"흉기의 지문이 도대체 누구 껀데 이래 못 숨겨 안달이가?"
그는 질문하는 정석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더니 갑자기 묘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둘 중에 하나가 지문 주인이거든."
※작가 코멘트:
자, 이제 의심과 반전이 난무하는 후덜덜한 완결의 세계로 함께 달려갑시다. 굳이 다음편 예고 안 해도 될 것 같습니다.
지난 예고편에서 많은 분들이 '정말로 최연성 선수가 살아 돌아오느냐'를 궁금해하셨는데, 그때 제가 분명히 '저는 낚시꾼 기질이 있습니다'라면서 일단 51편의 내용을 유출하긴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제가 확실히 답한 건 아닙니다. "시신을 보지 못했다" "인규와 종민이 찾으러 왔을 때 방에 있었다" "진호만이 사건의 진실에서 소외되고 있다'를 비롯해, 이미 나온 진실에 기반한 대사들이 많지만 과연 무엇을 가려 듣고 판단하셔야 하는지는 역시 가르쳐드리지 않습니다. 그간의 선수들 특집 외전에 불만 가지셨던 분들은 이제 좀 소름을 느끼셨는지?
지난 50편은 강민 선수 특집으로 쓴 외전이었으며 현재 Ace게시판에 있으므로 자유게시판 검색에선 안 나옵니다. 밑에 링크해뒀으니 아직 읽지 못하신 분들은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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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omy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6-02-04 03: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