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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
2002/01/05 10:37:26 |
Name |
Apatheia |
Subject |
[꽁트] ...What does it matter? |
뭔가에 중독된다는 것은, 한바탕 크게 열병을 앓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 열병이 격렬할수록 사람은 빨리 지치게 된다.
유령저그. 그것이 프로로서의 내 별명이었다.
같이 게임을 하는 녀석들 중에서는 게임 화면상에 모눈종이라도 대어져 있는 듯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빌드오더를 구사하며, 오히려 그 점에서 희열을 느끼는 이상한 놈들도 많았다. 상대가 테란일 때는 이렇게, 상대가 프로토스일 때는 또 저렇게... 미네랄 얼마에 가스 얼마일 때 레어 업그레이드를 들어가는 것이 최적화 빌드냐 하는 웃기지도 않는 논쟁으로 밤을 새우며 급기야는 '18... 한겜 붙자'라는 웃기지도 않은 메시지를 던져놓고 게임조인창으로 달려가기가 일쑤인, 그런 녀석들 말이다. 물론, 텅 빈 채널에 남겨진 채 피식 쓰디쓴 웃음을 짓는 것이 주로 내 역할이었다.
난 빌드오더라는 말 자체를 아주 싫어한다. 그딴 게 다 뭐란 말인가? 해처리를 먼저 짓든 스포닝 풀을 먼저 짓든... 무얼 어디에다 짓든 상대를 꿇어 엎드리게만 만들면 되는 것이 아닌가. 승부는 짧으면 짧을수록 좋다. 게임은 빨리 끝날수록 짜릿하다. 그것이 내 생각이었다. 그래서 한때 난 극악의 9드론 러쉬로 아주 악명이 높았다. 요즘은 다른 녀석들 또한 단수가 높아져서 그다지 잘 먹히지는 않고 있지만, 지금도 내 9드론은 데뷔한지 얼마 안 되는 어리버리한 초년생 프로들 정도는 간단히 강간해 버릴 정도의 실력은 된다. 유령저그라는 내 별명은, 상대가 초반 빌드를 채 펼쳐보이기도 전에 저글링 러쉬로 판을 쓸어버리는 내 게임을 보고 모 방송국 해설자 양반이 붙여준 별명이다.
자, 이제 짐작이 되지 않는가. 나라는 인간이 대충 어떠한 인간인지 말이다. 내가 어떠한 자세로, 어떤 마음가짐으로 게임에 임하는지, 내게 게임이란 어떤 의미인지. 게임이 좋아 게임을 시작했고 결국은 프로가 되었다. 그리고 얼마전까지는 제법 악랄한 승률을 자랑했었다. 지금은 좀 그때만 못하기는 하지만, 그건 게임을 잡는 내 마음이 예전만 같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전엔 이기는 것이 재미있었다. 그 황홀한 쾌감을 놓치고 싶지 않아 자는 시간이 다 아까울 지경이었다. 중간중간 간혹 질 때도 있긴 했지만 그런 게임들은 오히려 내 전의에 불을 사르는 계기가 되었고, 내게 패배를 안긴 녀석들은 반드시 며칠 이내로 가혹한 댓가를 치렀다.
하지만 그건 이제 다 지난 일이다. 며칠전 이름도 낯선 한 애숭이 테란에게 지고도 별로 분함을 느끼지 못하는 나 자신을 보며, 난 인정하기로 했다. 내가 서서히 승패에 둔감해지고 있음을. 사람의 감각기관 중에서 가장 예민한 것은 후각이고, 동시에 가장 피로해지기 쉬운 것도 후각이라고 한다. 그런 것과 같은 이치일까. 승리에의 중독은 짜릿한 만큼 빨리 익숙해졌다... 이겨도 기쁘지 않고 져도 슬프지 않은 무덤덤한 상태. 난 그렇게, 게임과 승패에 중독된 채 서서히 길들여져 갔다.
게임과 승패에 별반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과, 하루라도 게임을 하지 않고는 살 수 없다는 것은 엄연히 별개의 문제이다. 사람은 왜 하루에 세끼의 밥을 먹어야 할까? 그렇게 교육받고 자랐기 때문이다. 아주 어렸을 적부터 하루에 한끼의 밥만을 먹고 자란 사람은 반드시 하루에 세 번 밥상에 앉아야 할 필요성을 별반 느끼지 못한다. 나 또한 그런 상태였다. 게임은 어느샌가 내 생활의 일부가 되어버렸고, 성적이나 승패와는 상관없이 어둡고 침침한 배틀넷의 화면을 바라보고 있어야만 내 마음에 참된 평화가 찾아드는 것이다. 내 컴퓨터는 언제나 켜져 있고 내 아이디는 언제나 내가 즐겨가는 그 채널에 걸려있다... 그것으로서 나는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는 것이다...
-hello ;)
채널창에서 벌어지는 시답지않은 말장난, 더러더러 눈에 띄는 프로들을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채널에 들어온 것으로 보이는 몇몇 양민들의 아이디들. 언제나처럼 채널은 그런 분위기로 흘러가고 있었다. 워낙에 잠수가 잦았던 탓인지 내게는 한 게임 뛰자는 말도 잘 들어오지 않는다. 텅 빈 눈으로 채널을 바라보는 내 눈에 띄인 것은, 내게로 들어온 귓말 한 줄이었다.
-hello? r u there?
"......"
낯설은 아이콘... 외국 사람인가.
영어도 딸리는데 귀찮게스리.
-i'm here.
-u r GHOST-ZERG?
고스트 저그라... 저렇게 들으니 또 어감이 새롭다.
-yes I am... who r u?
-i'm just a USUAL user... game with me?
"......"
대문자로 적힌 USUAL... 웬지 묘한 뉘앙스를 풍겼다. 우리말의 반어법과도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sure.
일부러 나를 찾아 여기까지 왔을 '성의'를 생각해서...라기보다, 그 알 수 없는 상대에게 호기심이 일었음을 부인하지는 않겠다.
-gggggggggggggg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
언제나처럼 길다란 good luck 메시지를 남기고 나는 드론을 뽑기 시작했다. 위치는 로스트 템플 8시. 그는 외국인들이 흔히 그렇듯이 랜덤이라고 했다. 오늘도 언제나 그랬듯 9드론 러쉬를 들어가 볼까... 그러나 오버로드를 보내 정찰해 본 바로는 거리가 제법 되었다-그의 진영은 2시였으니까- 그래도 간만에 하는 게임인데 9드론 러쉬는 너무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리도 멀겠다, 상대 종족은 테란... 오늘은 오랜만에 장기전으로 가져가 보도록 하지.
-u know me?
앞마당 멀티를 먹으며 메시지 한 줄을 날렸다. 도대체 이 친구는 어디서 내 이야기를 들었을까?
-someone told me about u ;)
-someone? who?
-i think he is ur friend.
-my friend?
-yeah. ;)
한국식 채팅에 나오는 '^^' 아이콘이 눈에 익어서 그런지, 저 아이콘은 아무래도 정이 들지를 않는다.
-his id is jeannie_sky
-jeannie?
jeannie_sky...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녀석은 한달전쯤 갑자기 게임을 접은 녀석이었다. 꽤 싹수가 있는 프로토스였는데... 주변에서 아무리 이유를 물어도 대답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짐을 챙겨 숙소에서 나가버렸더라는 이야기를 채널에 왔던 누군가가 전해주었던 기억이 난다. 아닌게 아니라 그날이후 녀석의 게임은 어디에서도 볼 수가 없었었다.
-he stoped game.
-really?
-yes.
-my god... ;)
게임을 접었다는데 왜 저렇게 웃지?
-who is the winner?
예감이 이상했었다. 드론을 클릭하던 손가락이 가늘게 떨려 엉뚱한 곳으로 마우스 포인트가 비껴가는 것을 보며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me. ;)
그와 동시에, 내 크립 한 켠에 벙커 러쉬가 시작되었다.
-bunker... --;
예전에, 아까도 말한 9드론 러쉬로 이곳 저곳을 휩쓸고 다니던 시절에, 사석에서 내게 적대감을 보인 녀석들이 몇 있었다. 그땐 노매너의 절정이라고 욕도 많이 먹었었다... 그땐 이해하지 못했는데, 역시 초반러쉬란 건 당해보면 그다지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우르르 벙커를 짓는 SCV 근처로 몰려가는 내 드론들을 보며 나는 가볍게 혀를 찼다.
-just a kidding ;)
결국 짓던 벙커를 깨는데 성공했다. SCV 및 마린도 죽였고... 그랬더니 단지 장난이었을 뿐이다 라고 넉살좋게 메시지를 날려온다. 갑자기 짜증이 났다. 게임이 장난이야?
-kidding? good. --;
어디 두고보라지. 마음을 먹고 성큰을 몇 개 박았다. 이것으로서 마린 러쉬는 일단 안심이다. 벙커러쉬 들어온 놈이 마린러쉬 들어오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 말이다... 한눈 팔지 않고 일단은 스파이어를 올린다. 저글링 러쉬는 타이밍을 놓친 느낌이고... 이젠 뮤탈로 가 보려는 생각이다. 러쉬란 게 어떤 건지를 가르쳐주지. 내 입술 위로 삐딱한 미소가 걸린다.
-mutal?
채팅 창에 떠오른 그의 메시지 한 줄. 나는 순간 움찔 놀라 마우스를 놓쳤다... 스캔이라도 뿌렸나?
-no use... I have a lot of turret. ;)
뭐야, 이 새끼. 나는 나직히 중얼거렸다. 스캔으로 알았으면 알았지, 그걸 왜 대고 얘기를 하는 거지? 그것도 터렛 많다는 얘기까지?
"......"
가능성은 두 가지다. 정말로 스캔을 뿌려서 알았거나, 아니면 짐작이거나. 난 후자쪽에 걸었다. 고도의 심리전이군, 더러운 양키새끼.
-thx. ^^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나는 더욱 열심히 뮤탈을 뽑았다. 그러나 웬지, 자꾸만 기분이 나빠졌다.
-use lurker man... I'm no siege. ;)
-......
시즈가 없으니 럴커를 쓰라고? 이 새끼 지금 장난하자는 거야?
조롱당하고 있다는 기분을 참을 길이 없어, 나는 기어이 한 마디를 치고 말았다.
-MYOB, man.
(Mind Your Own Business -상관하지 말라는 뜻)
-...;)
알 수 없는 웃음... 나는 점점 더 기분이 나빠졌다.
뮤탈이 줄잡아 한 부대쯤 모였다. 이제 러쉬 타이밍이다.
본진 방어를 위한 최소한의 병력을 남겨놓고 나는 포인트를 드래그에 뮤탈들을 부대지정했다. 마지막 공격을 위해 마우스 포인트를 움직이려는데, 다시 채팅 메시지가 뜬다.
-mutal rush? though I warned...
-......
이 새끼 맵핵인가...
양민 딱지를 떼고 나서 좀체로 해 본적 없던 말이 슬그머니 내뱉아졌다. 정말 알고 하는 말인지, 아니면 어림짐작인지...
-gl yo.
어쨌든.
부대지정된 뮤탈리스크에 어택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까닭 모르게 자꾸만 손가락에 가벼운 경련이 일어났다... 터렛... 터렛... 터렛이라....
"...세상에."
그의 기지는 그야말로 터렛 밭이었다. 그러나 보통 말하는 터렛 도배의 형태가 아니라, 실로 교묘한 간격을 두고 터렛들이 서로서로를 방어하고 있었다... 나름대로 침착하게 대응하느라고 대응했지만 이미 터렛의 집중 포격을 받아 뮤탈이 반부대 정도 사라져 버린 후였다... 그나마 남은 뮤탈 중 상당수는 사이언스 베슬의 이레디에이트 공격으로 파괴되었다.
"젠장..."
가디언 변태를 하려고 해도 남은 뮤탈이 적어 그나마도 힘들다... 이렇게 된 이상은 본진에 지어둔 히드라덴을 이용해 럴커를 만드는 수밖에. 그나마도 많이 늦은 타이밍인 건 알았지만 그것 외에는 방법이 없지 않은가.
-lurker? too late...
-......
-what about hive-up? ;)
-...shut the fuck up.
내 분노는 극에 달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놈은 내 빌드를 훤하게 읽고 있었다. 내 빌드를 뻔히 들여다보는 걸로도 모자라서 지금 내겐 무슨 유닛이 없으니 뭘로 공격하라는 둥의 참으로 친절한 조언을 아까지 않았다... 프로가 되기 이전부터 되고 난 후까지, 셀 수 없이 많은 게임들을 해 왔지만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게임은 처음이었다.
-...GG.
마지막 해처리가 깨지기 직전, 나는 더할 수 없이 비참한 기분으로 항복을 선언했다. 놈이 게임에서 나가버린 후로도 꽤나 한동안, 나는 자판에 손도 대지 못한 채 멍하니 앉아있었다. 뭐지? 도대체... 뭐라는 놈이지?
화면에 점수 창이 떴다... 잠시 망설이던 나는, 마우스 포인트를 움직여 게임을 저장했다. 실로 오랜만에 해 보는 리플레이 저장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건지, 그것을 알아봐야만 했다. 멀티도 제대로 하지 않은 것 같던데, 도대체 어떻게 내 빌드를 그렇게 다 알고 있는 거지? 맵핵이라는 생각은 솔직히 들지 않았다. 많지도 않은 부대를 운용해 내 공격을 막아내던 그 컨트롤은 놈이 그따위 편법이나 쓰는 하수가 아님을 말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맵핵이 아니라면, 도대체 뭐야?
싱글플레이 메뉴에 들어가 load replay 옵션을 눌렀다. 워낙에 리플레이 저장 및 감상에 인색한 터라 깨끗이 비워진 폴더에 방금 한 게임의 파일이 떴다. 조금은 떨리는 손으로 리플레이를 열고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인지, 내겐 설명이 필요했다. 양쪽의 비전을 모두 켜고, 속도를 1배속으로 낮추었다. 도대체... 저 놈이 무슨 짓을 한 거지?
"......"
순간 나는 아연했다. 2시 방향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커맨드 센터도, SCV도, 그 무엇도 없었다... 다시금 비전창을 열어보았다. 거기엔 분명히 나와 놈의 아이디 두 개가 나란히 올라와 있었다. 그러나 2시방향엔 아무 것도 없었다. 8시 방향의 내 본진이 차근차근 올라가고 있는 동안에도...
"......"
미니맵 쪽에서 이상한 낌새를 채고 내 본진으로 시야를 돌려보았다. 내 드론들이 크립 한 귀퉁이로 몰려가 하릴없이 공격을 해 대고 있었다. 아무 것도 없는 크립을... 한참을 그러더니, 그들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해처리로 돌아가 미네랄을 캐기 시작한다... 벙커러쉬... 이럴 수가...
여기서 나는 정신을 놓아버렸다. 멍해진 내 눈앞으로 펼쳐진 모니터에선 뮤탈리스크 한 부대가 2시 방면으로 날아가다가 마치 지운 듯이 사라져버리고 있었다. 잠시 후엔 럴커 몇 기가 위로 올라가다가 또한 지운 듯이 사라져갔다. 그리고 내 본진의 건물 및 크립이 무언가로 지운 듯이 하나하나 없어지고 있었다. 처음엔 성큰이, 그 다음엔 스포닝 풀이, 그 다음엔 히드라덴이, 그리고... 해처리까지...
-Good game. ;)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리플레이에 채팅 메시지가 들어오다니... 그 분하던 와중에도 기억나는 놈의 마지막 메시지는 GG였다. 그럼... 저것은?
"누...누구야 넌?!"
나는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jeannie_sky... 녀석도... 놈에게 이런 일을 당하고 게임을 접은 것일까?
-...who am I? What does it matter?
i'm just a USUAL user... regame with me? ;)
겜벅스 아티클란 비어있는 거 보기 멋해서 적어본...
짧고 허접한 꽁트.
-Apatheia, the Stable Spr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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