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22/09/14 19:04:58
Name 초모완
Subject 다 함께 영차영차

얼마 전 비가 억수같이 내려 하천이 범람하고 난 이후의 어느 날 이었다.
평소 산책을 자주 했었지만 요 며칠 그러지 못해서 산책로가 얼마나 훼손되었는지, 산보도 할 겸 해서 집 밖을 나섰다.

하천 산책로는 생각보다 피해가 심각했다. 모래와 자갈이 길 위에 흩뿌려지듯 널려 있는 것은 물론이었고, 미처 물로 돌아가지 못한 물고기들이 죽어있는 모습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아. 정말 피해가 심각하구나. 라고 혼잣말하는 내 앞에 더 중대한 피해가 놓여져 있었다. 커다란 나무가 산책로에 쓰러져 있었던 것이었다.

‘이렇게 큰 나무도 비 때문에 쓰러졌구나.’

라는 생각도 잠시, 곧이어 다른 생각들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나야 그냥 나무 위로 뛰어 지나가면 되지만 어르신들은 넘기 힘들겠는데?
유모차 끌고는 절대 못 넘겠다. 밤에 자전거 타시는 분들도 잘못하면 사고 나겠는데?‘

끊임없는 생각에 잠시 멈춰 서서 나무를 한번 들어 볼까 하다가 이내 그만 두었다. 헬스장에서 역기 한번 들어본 적 없는 내가 무슨... 이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자리를 피하려는데 어떤 남자가 나무를 바라보며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남자와 눈이 마주쳤는데 그 눈빛이 마치

‘나무가 이렇게 길을 막고 있으면 사람들이 다칠 것 같으니 우리 둘이 힘을 합쳐 나무를 옮겨 봅시다.’

라고 말하는 듯 했다. 나는 눈빛으로 우리 둘이서는 무리다 라는 신호를 보냈지만 그 남자는 내 신호를 오해하였는지 허리를 굽혀 나무 몸통을 잡고 힘을 쓰기 시작했다. 그분을 놔두고 지나가기엔 마음이 쓰여 나도 나무를 잡고 끌어 보았다. 하지만 그 큰 나무는 꿈쩍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는 그 남자를 바라보며

‘역시 우리 둘이서는 무리네요.’

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그분은 또다시 내 의도를 곡해하셨는지

“좋습니다. 어디 한번 해보죠.”

라고 말하였다. 아니 라는 내 말이 나오기 전에 그분은 다시 한 번 젖 먹던 힘까지 쓰시며 으라차차 기합을 넣었다. 안되는데 왜 자꾸 힘 쓰시지 라는 생각도 잠시, 나도 그분을 따라 어쩔 수 없이 다시 한 번 힘을 주었는데 아까와는 다르게 나무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영문을 모르는 내가 고개를 들어보니 지나가던 시민 한분이 같이 힘을 실어주고 계셨다. 감사합니다 라는 내 말이 끝나기 전에 옆에서 지켜보시던 다른 시민분들께서 한 분, 두 분 나무에 붙어 힘을 보태주시기 시작했다. 도통 움직일 생각 안하던 고목이 영차영차 기합 반동에 맞춰 길 위에서 치워졌다.

우와. 이걸 해내내. 라는 뿌듯한 마음도 잠시, 다 같이 기합과 힘을 합쳤던 시민 분들은 임무를 완수하자 서로 얼굴보기 쑥스러운 듯 데면데면한 분위기만을 남기고 서둘러 각자 갈 길을 갔다.



* 손금불산입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4-05-08 10:00)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 게시글로 선정되셨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살려야한다
22/09/14 19:11
수정 아이콘
주식 글일거라 생각했네요 크크
이쥴레이
22/09/14 19:28
수정 아이콘
주식 글일거라 생각했네요 크크(2)
DownTeamisDown
22/09/14 21:29
수정 아이콘
저는 코인글일것 같았어요.
22/09/14 21:39
수정 아이콘
저도 주식 글인 줄 알고 크크크(3)
22/09/14 19:13
수정 아이콘
수고하셨네요 모두 이런 마음이면 정말 살기 나아질텐데 생각해봅니다
서린언니
22/09/14 19:13
수정 아이콘
영차영차 다함께 추천
우리집백구
22/09/14 19:32
수정 아이콘
호재인가요?
계피말고시나몬
22/09/14 20:11
수정 아이콘
목재입니다.
人在江湖身不由己
22/09/14 20:16
수정 아이콘
나무가 가로로 쓰러졌다면 횡재인걸로...
22/09/14 20:48
수정 아이콘
마리아 호아키나
22/09/14 21:10
수정 아이콘
먼산바라기
22/09/14 21:24
수정 아이콘
22/09/14 21:39
수정 아이콘
아수날
22/09/14 21:52
수정 아이콘
22/09/14 21:59
수정 아이콘
지니팅커벨여행
22/09/14 22:25
수정 아이콘
카밀라 발리예바
22/09/14 22:40
수정 아이콘
다람쥐
22/09/14 21:22
수정 아이콘
어우 좋네요 ㅠㅠ
고생하셨습니다!
22/09/14 21:40
수정 아이콘
훈훈하네요. 추천드립니다.
지니팅커벨여행
22/09/14 22:26
수정 아이콘
오해하기 쉬운 눈빛을 가지셨군요 크크크
알카즈네
22/09/14 23:03
수정 아이콘
영차고 나발이고 우리 다...
페스티
22/09/15 09:14
수정 아이콘
훈훈해진 것 같습니다만...
Foxwhite
22/09/14 23:22
수정 아이콘
아이 이런건 솔직히 지나가다 보면 못참죠
22/09/14 23:29
수정 아이콘
멋있으세요
Winterspring
22/09/15 00:38
수정 아이콘
아 이런 글 너무 좋습니다...삶이 힘든데 왠지모를 위로가 되네요
멋진신세계
22/09/15 06:42
수정 아이콘
약간 기운이 나는 기분이 듭니다. 좋은 글 감사드려요!
기적의양
22/09/15 09:42
수정 아이콘
국립공원이라면 자연은 자연 그래로 둬야 한다며 길 위에 쓰러진 나무를 그대로 놔두는데......=3=3=3

수고하셨습니다!
22/09/15 10:20
수정 아이콘
내용도 훈훈한데 글솜씨도 맛깔나시네요
호러아니
22/09/15 10:36
수정 아이콘
읽는 이의 마음까지 따듯하게 해주는 글 감사드립니다.
22/09/15 10:51
수정 아이콘
생각보다 살다보면 이런 일 많아요
생각보다 세상에는 귀한 마음들이 많습니다
호머심슨
22/09/16 05:04
수정 아이콘
눈빛이 그윽한 그 남자는
우리의 이웃 스파이더맨같은 존재였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3626 IVE의 After Like를 오케스트라로 만들어봤습니다. [7] 포졸작곡가12922 22/11/27 12922
3625 CGV가 주었던 충격 [33] 라울리스타13904 22/11/26 13904
3624 르세라핌의 antifragile을 오케스트라로 만들어보았습니다~ [16] 포졸작곡가13922 22/11/25 13922
3623 토끼춤과 셔플 [19] 맨발14045 22/11/24 14045
3622 [LOL] 데프트 기고문 나는 꿈을 계속 꾸고 싶다.txt [43] insane14081 22/11/21 14081
3621 나는 망했다. [20] 모찌피치모찌피치14150 22/11/19 14150
3620 마사지 기계의 시초는 바이브레이터?! / 안마기의 역사 [12] Fig.113892 22/11/18 13892
3619 세계 인구 80억 육박 소식을 듣고 [63] 인간흑인대머리남캐15386 22/11/14 15386
3618 [테크 히스토리] K(imchi)-냉장고와 아파트의 상관관계 / 냉장고의 역사 [9] Fig.113215 22/11/08 13215
3617 [LOL]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 [25] 어빈13301 22/11/06 13301
3616 [LOL] 좌절감이 사나이를 키우는 것이다 [39] 마스터충달13218 22/11/06 13218
3615 [바둑] 왜 바둑은 남자기사가 여자기사보다 더 강한가? [156] 물맛이좋아요14691 22/11/05 14691
3614 사진다수) 1년간 만든 프라모델들 [27] 한국화약주식회사14323 22/11/05 14323
3613 야 너도 뛸 수 있어 [9] whoknows13545 22/11/05 13545
3612 [바둑] 최정 9단의 이번 삼성화재배 4강 진출이 여류기사 최고 업적인 이유 [104] 물맛이좋아요13938 22/11/04 13938
3611 이태원 참사를 조망하며: 우리 사회에서 공론장은 가능한가 [53] meson13166 22/11/02 13166
3610 글 쓰는 걸로 먹고살고 있지만, 글 좀 잘 쓰고 싶다 [33] Fig.113061 22/11/02 13061
3609 따거와 실수 [38] 이러다가는다죽어14129 22/11/02 14129
3608 안전에는 비용이 들고, 우리는 납부해야 합니다 [104] 상록일기14458 22/10/30 14458
3607 술 이야기 - 럼 [30] 얼우고싶다13050 22/10/27 13050
3606 [테크히스토리] 에스컬레이터, 엘리베이터, 무빙워크 셋 중 가장 먼저 나온 것은? [16] Fig.112744 22/10/19 12744
3605 어서오세요 , 마계인천에 . (인천여행 - 인트로) [116] 아스라이13104 22/10/21 13104
3604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조금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59] 김은동13949 22/10/21 13949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