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22/04/24 17:05:41
Name 초모완
Subject 믿을 수 없는 이야기


사랑이 가능했던 어느 학창 시절, 중간 고사가 끝나고 물리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들어올때부터 표정이 심상찮았다. 선생님은 다른 과목들의 학년 평균을 하나씩 읊으시더니 맨 마지막에 물리 과목의 학년 평균을 말씀 하셨다.


선생님 입에서 믿을 수 없는 말을 들었다. 학년 평균 39점이었다. 다른 과목들간의 평균 점수 차이가 프로와 아마추어간의 간극 만큼 벌어져 있었다. 선생님은 백점 만점에 반절에도 미치지 못하는 점수에 적잖이 실망하신 듯 했다. 물리 선생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번졌다.


중간고사가 끝나고 일주일동안은 물리 수업 진도를 나가지 않고 사랑으로 우리를 다스려 주었다. 옆반 물리시간이면 그 사랑의 소리가 복도를 타고 우리반에까지 들려왔고, 프랑스 어느 공주처럼 두려움에 머리가 하얗게 셀것만 같았다.


기말고사 전, 물리 수업 시간에 더더 믿을 수 없는 말을 들었다. 선생님은 어떻게든 학년 평균 오십점을 넘기고 싶어했지만 학생들을 온전히 믿지는 못했다. 그래서 물리 선생님은 우리에게 시험 문제를 미리 알려 주었다. 인과관계가 다소 어색하지만 여튼 그러했다. 그분은 전교생들에게 주관식 1,2번 문제를 알려주었다. 각각 오점으로 두 문제를 합치면 십점이었다.


더더더 믿을 수 없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 분은 우리 학생들의 실력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시곤, 문제만 알려줘서는 평균 십점을 올릴 수 없다고 판단하셨다. 그래서 문제를 알려 줌과 동시에 정답도 공개하였다. 선생님은 칠판에 주관식 일번과 이번 정답을 큼지막하게 적으셨다. 그리고 꽤나 만족하신 표정을 지어 보이셨다. 그동안 열심히 가르쳤고 너희들도 열심히 따라와 주었기 때문에 지난 번 39점보다는 높은, 그러니까 오십점 이상, 아니 육십점 이상을 기대하는 모습이었다.


기말고사가 치뤄지고 물리 시간이 다가왔다. 문을 열고 들어오시는 선생님의 표정이 한결 가벼워 보였다. 미소를 짓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선생님은 이전처럼 다른 과목들 학년 평균을 나열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물리 평균 점수가 나왔다.


더더더더 믿을 수 없는 말을 들었다. 지난 중간고사 평균 39점에서 정확하게 십점이 더 떨어졌다. 물리 학년 평균 점수 29점 이었다. 교실은 삽시간에 얼어 붙었다. 선생님의 사랑은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울먹이는 친구도 보였다. 선생님은 조용히 말을 이어나갔다.


더더더더더 믿을 수 없는 말을 듣게 되었다. 주관식 1,2번을 틀린 학생이 있다는 것이었다. 한명도, 두명도 아닌 무려 여덟명의 학생이 틀렸다고 말했다. 다들 이게 말이 되냐고, 선생님 채점이 잘못된 것 같다고… 서로를 돌아보며 웅성거릴만도 했지만 그날의 그 교실 분위기는 내 친구 개똥이의 소개팅 분위기 처럼 적막만이 흘렀다.



더더더더더더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선생님이 조용히 책을 펼치곤 수업을 시작한 것이었다.  오늘은 훼이크고 다음 시간에 사랑해 주시려나보다. 해서 다들 다음 물리시간에 잔뜩 긴장 하였지만 선생님은 그 어떤 사랑의 행동을 취하시진 않으셨다. 학생들이 졸던, 딴짓을 하던, 이해를 하든지 말든지… 테이프를 틀어 놓은 듯 오십분간 본인 말씀만 하시곤 교실을 나가셨다.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그때의 선생님 표정이 떠오른다. 이십구점을 말하셨을 때는 엷게 웃으셨고 주관식 문제를 틀린 사람이 있다고 말했을때는 소리내서 환하게 웃으셨다. 선생님은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더 이상 우리를 사랑해 주시지 않는 선생님은 어떤 마음 가짐이었을까? 그때의 그 선생님 기분을 헤아리면서 오늘도 랭겜을 돌린다.






* 손금불산입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3-12-15 09:18)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 게시글로 선정되셨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22/04/24 17:53
수정 아이콘
저도 공고나와서 선생님들이 시험전에 문제 다 알려줬는데
평균 50점 나왔나 그랬어요
다이애나
22/04/24 17:58
수정 아이콘
항상 웃으면서 전체 차단 후 랭겜을 시작하는 제 마음과 같군요
메가카
22/04/24 19:16
수정 아이콘
야만스럽지만 그나마 저분은 학생을 생각해서 사랑?을 배푸시는 선생이었군요
두동동
22/04/24 22:30
수정 아이콘
그렇게 때리고 공포분위기를 조성해도 결국 자기의 말은 학생들에게 아무 힘이 없었다는 거니까... 지금까지 자기가 선생님이랍시고 한 것이 뭘까 싶지 않았을까요. 학년 평균 39점 29점은 학생만 탓하기에도 뭣한 점수고.
아빠는외계인
22/04/24 23:34
수정 아이콘
가끔 지적장애 여부를 확인해야될 일이 있는데 놀랍게도 실제 지적장애나 경계선 지능장애에 해당하는 사람들 중 고등학교 성적은 평균 근처를 기록하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있더라고요. 그래서 이제는 중학교 성적만을 참고하게 되었습니다..
태양의맛썬칩
23/12/15 23:59
수정 아이콘
대치동 일타강사를 데려와도 학생 본인이 공부할 마음이 없으면 끝이죠
회색사과
23/12/18 10:50
수정 아이콘
한성 과학고 초특급 난이도 뭐 이런 거 아녔을까유 크크크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3854 [LOL] 53세 할재(?) 에메랄드 찍기 성공 [41] 티터13941 24/02/07 13941
3853 [팝송] 제가 생각하는 2023 최고의 앨범 Best 15 [12] 김치찌개13357 24/02/04 13357
3852 [역사] 손톱깎이 777 말고 아는 사람? / 손톱깎이의 역사 [29] Fig.113581 24/01/23 13581
3851 구조적 저성장에 빠진 세계, AI는 이 한계를 뚫을 수 있을까 [34] 사람되고싶다13590 24/01/21 13590
3850 조선의 젊은 아베크족들이 많은 걸 모르셨나요? - 1940년 경성 번화가를 걸어보다. [12] KOZE16100 24/01/13 16100
3849 2023년 영화 베스트 25 - 주관 100% [23] azrock14945 24/01/12 14945
3848 과학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 과학철학의 역사 [32] Fig.114955 24/01/09 14955
3847 pgr 삼촌의 시티팝 추천곡 [26] 라쇼14846 24/01/08 14846
3846 [서평] '변화하는 세계질서', 투자의 관점으로 본 패권 [51] 사람되고싶다14610 24/01/05 14610
3845 골수 서구인인줄 알았던 내가 알고보니 MZ유생? [22] 사람되고싶다13370 24/01/09 13370
3844 [기타] 이스포츠 역사상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정상에 오른 선수들 [39] 워크초짜12587 23/12/23 12587
3843 와인도 이렇게 열심히 사는데 / 와인의 역사 [25] Fig.113586 23/12/14 13586
3842 구글 픽셀 5년차 사용기(스압, 데이터 주의) [37] 천둥13767 23/12/02 13767
3841 [서평] '내가 행복한 이유' 그렉 이건 作 [6] cheme13605 23/12/01 13605
3840 두 돌이 된 아이는 너무 귀엽고, 부부의 낙은 모르겠다 (육아일기) [29] 두괴즐16514 23/12/13 16514
3839 한미일 의료현장 비교 [36] 경계인16281 23/12/12 16281
3838 비가 온다 [5] 영호충13454 23/12/11 13454
3837 유정란이 몸에 좋아 [56] 겨울삼각형14047 23/12/11 14047
3836 유료화 직전 웹툰 추천-위아더좀비 [18] lasd24113710 23/12/09 13710
3835 [일상글] 인생 확장팩 36+1개월 플레이 후기 [40] Hammuzzi12641 23/12/08 12641
3834 민들레 [18] 민머리요정11599 23/12/07 11599
3833 [서평] 보이지 않는 중국, 중진국 함정을 가장 잘 설명한 책 [39] 사람되고싶다12178 23/12/06 12178
3832 [LOL] 2023 여름, 울프와 함께하는 희노애락 [80] roqur11584 23/12/03 11584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