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22/03/06 02:38:55
Name 단비아빠
Subject 나에겐 세 살 터울 여동생이 있었다. (수정됨)
나에겐 세 살 터울 여동생이 있었다.
여동생이란 나에게 항상 어려운 존재였다. 어렸을 때 부모님 손에 이끌려 어딜 가든 같이 다녔고 오빠로서 도와주거나 이끌어 줘야 할 경우도 가끔 있었지만 제대로 된 대화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나이도 성별도 성격도 다른 둘이 얘깃거리도 없었고 같이 놀만한 놀이도 없었다. 가끔 둘이 같은 흥밋거리를 가졌을 때 같이 논 적도 있었지만 (스카이콩콩 같이 타던 기억이 난다. 동생은 너무 어리고 제대로 못타서 금방 포기했지만) 사실 친구 만도 못한 사이가 아니었나 싶다. 서로 싸우거나 울리거나 엄마한테 이르거나 심부름을 시키거나 하던 기억뿐... 뭔가 제대로 된 대화나 놀이를 한 기억이 없다. 같이 있던 시간은 그렇게나 많은데...
동생은 공부를 못하는 편이었다. 그럭저럭 공부를 하던 나와는 좀 차이가 있었다. 부모님은 나에게 공부를 가르쳐보라고 했고 나는 아마 초5? 초6? 시절 즈음 세 살 어린 동생에게 산수를 가르치면서 너무나 간단한걸 바로 이해못하고 즉시 계산 못하는 동생에게서 너무나 큰 답답함을 느꼈다. 부모님 지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같이 앉아서 어떻게든 가르쳐야만 하는 상황에 큰 스트레스를 느꼈고 결국 평생 처음으로 동생을 때리고 말았다.
그 전에 누구를 때려본 적은 없었다. 그 이후로도 없었다. 나는 지금도 그때의 나를 이해할 수가 없다. 산수 계산을 못한다는 이유로 어떻게 사람을 때릴 수 있는지.. 그것도 적당히 때린게 아니다. 처음에는 따귀를 때렸다. 동생이 울기 시작하자 당황하는 와중에 더더욱 화가 났고 동생에게 발길질을 했다. 3살이나 어린 여동생이 진심으로 때린 내 발길질에 아파서 누워있는데 거기에 대고 또 발길질을 했다. 나는 그 순간 이렇게 동생을 때리면 동생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도 때렸다.
그렇게 동생을 심하게 때렸는데도 부모님은 그걸 몰랐다. 그냥 평소처럼 싸우다가 울렸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나는 그냥 적당히 혼났다. 그리고 그건 동생을 향한 내 평생의 트라우마가 되었다. 나는 그 이후로 동생을 제대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동생을 쳐다볼 때마다 그때의 기억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나마 그 이전까지는 적당히 평범한 관계의 오빠와 여동생 이었다면 그 이후부터는 더더욱 대화가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나는 동생에게 관심을 끊었다. 나는 동생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몰랐다. 동생의 학교 성적은 점점 더 나빠져만 갔고 아마 나중에 알기로는 반에서 꼴찌 수준이었던 것 같다. 내가 중학생이고 고등학생이던 시절. 그리고 여동생이 국민학생이고 중학생이던 시절까지는 서로 학교 생활에 충실했고 서로 몰라도 아무런 문제도 없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여동생의 학업성적은 심각했다. 여동생은 고등학교 진학에 실패했다. 나는 고등학교를 못갈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정확히 말하면 못가는 것은 아니다. 인문계 고등학교에 못가는 것이다. 농고라던가 상고같은 고등학교에는 진학이 가능했다. 하지만 이건 따로 추가 신청을 했어야 하는데 부모님 역시 이런 사실을 몰랐으므로 진학 시기를 놓쳐버린 것이다. 꼼짝 없이 1년을 뒤쳐져 놀아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당시 사회 분위기에서 정상교육과정을 못따라가고 1년 꼻는다는 것은 정말 심각한 문제였다. 이 모든 것은 일차적으로는 부모님의 잘못이었겠지만 동생의 학업성적이 그렇게 처참한 줄 몰랐던 나 역시 막중한 책임감과 죄책감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내가 동생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와선 뭐 어쩔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난 이제 고등학생이었고 학교는 겁나게 멀었다. 나는 새벽 6시 반에 나가야했고 밤 10시가 넘어서 집에 왔다.
게다가 아버지는 여동생을 세상에... 원단제직공장에 취업시켜버렸다! 반드시 고등학교에 보내야만 한다는 잘못된 고집 때문이었다.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낮에는 공장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야간고등학교를 다니는 그런 곳이었다고 한다.
내 여동생이 졸지에 갑자기 16세의 나이로 여직공이 되어버린 것이다.
게다가 나는 동생이 거기에 갇혀서 몇 달동안 지내는 동안 한번도 면회 가본 적 조차 없어서 사실 어떤 곳인지 구체적으로 잘 모른다. 다 나중에 주워들은 얘기다. 당시의 나는 여동생의 상황에 대해서 부모님한테 물어보는 것 자체를 할 수도 없었다. 나는 죄책감을 느끼면서 여동생의 사정에 대해 나하곤 상관없다는 식으로 계속 외면만 하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철없던 중3 꼬마가 그런 감옥같은 공장에 갑자기 가서 적응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물론 철없는 생각이다. 어쩔 수 없이 그곳에 적응해야만 하는 사람들이 거기엔 가득이었을테니까. 하지만 동생은 전혀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나 역시 사실 그 당시에는 동생의 사정에서 눈을 돌려도 되는 적당한 변명거리가 있었다. 대학입시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대학입시를 만만하게 본 나는 너무 아슬아슬하게 높은 곳을 지원했고 아슬아슬했던 만큼 결국 떨어져버린 것이다. 아슬아슬하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나는 너무 몰랐다.
담임 선생님 배려로 후기 시험으로 근처 대학에 장학생으로 갔다. 사실 후기 시험때 나는 너무너무 시험을 망쳐버렸고 내 점수는 아마 전기에 비해 최소 60점 이상 떨어져버렸다. 원래대로라면 장학생 조건조차 못맞출 상황이었는데 평소의 내 성적에 대한 담임 선생님의 보증이 있었기에 장학생 입학이 간신히 가능했다.
이미 내 멘탈은 박살나있었다. 나는 재수를 선택할 용기도 없었다. 일단 담임선생님의 배려로 입학한 학교를 포기한다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부모님은 재수를 하고 싶으면 하라고 했지만 겨우 두달간 방황하고서 후기 시험을 망쳐버린 나는 혼자서 1년간 공부를 해서 다시 성적을 끌어올릴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학생활에 만족할 수도 없었다. 심지어는 학과선택까지 실패해버려서 학교 수업에는 도저히 관심조차 가질 수 없었다.
동생과 나는 서로 엇나갔다. 동생은 몇 달만에 공장에서 집에 돌아왔고 집에서 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때까지는 얌전한 아이였지만 이때부터 제대로 탈선하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게 어울릴 친구들이 비슷한 처지의 친구밖에 없었을테니 당연하다. 나는 이 시기의 동생이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 전혀 모른다. 사실 얼굴을 본 기억도 거의 없다. 분명히 같이 집에서 살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동생은 그 다음 년도에 농고에 진학했다. 나는 재수를 선택하지 못하고 그냥 2학년이 되었다. 학교 성적은 엉망이었고 장학생 조건 유지도 힘겨웠다.
여동생은 학교에서 일진 비슷한 위치였던 것 같다. 뭐 애들을 괴롭히고 다녔다는게 아니라 어울리지 못하고 아웃사이더였다는 의미다. 같이 1년 꼻고서 농고에 같이 들어갔던 친구들과 함께 서울로 일주일씩 가출도 하면서 소위 탈선청소년의 길을 차근차근 걸었다. 나는 내 여동생이 저렇게 되었다는걸 믿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책임의 일부는 나에게 있었다.
나는 결국 2학년을 마치고서야 장학생 조건 유지에 실패하고 군대에 갔다. 군대에 가서 정신적으로 모든걸 리셋하겠다는 생각이었다. 군대는 정말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힘겨운 곳이었다. 몸이 상당히 빈약하고 사회적 경험도 너무나 부족했던 나에겐 더더욱 그러했다. 대학 2학년을 끝내고 군대에 오면 이미 나이가 많은 편이다. 하지만 나는 나이값을 못했다.
군대에 있을 때 동생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처음으로 친구들과 함께 면회를 왔다. 나는 그때 여동생의 얼굴을 제대로 보는게 도대체 몇 년만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눈앞에 있는 화장을 한 생소한 젊은 여자가 진짜 나의 여동생이 맞는건가 의심을 했다. 내가 기억하는 여동생은 십년도 더 전의 모습이었다.
나는 동생과 대화라는걸 했다. 동생은 밝은 모습으로 평범하게 대화를 했다. 너무나도 미칠 듯이 어색한 나와는 다르게 동생은 친구들과 함께 조잘조잘 떠들어대면서 내 기분을 자연스럽게 맞춰주었다. 그리고 내 동생은 9살 때 나에게 맞았던걸 전혀 기억하지 못했고 그걸로 나를 탓하지도 않고 있었다. 동생과 같이 온 친구들은 1년 꼻던 시절부터 계속 동생과 함께 했던 탈선청소년 동지들이었다. 나는 그 아이들을 상당히 원망하고 있었지만 처음 만나본 그 아이들은 그냥 너무 평범했다.
나는 동생에게 잘해줘야겠다고 결심했다. 그후로도 동생 얼굴 보기는 힘들었다. 군대 전역하고서 곧바로 편입으로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동생과 몇가지 추억이 더 생겼다. 좋은 남자친구를 만들어주겠다고 서울대 다니던 아는 놈을 꼬셔서 어떻게든 소개팅 자리도 한번 만들어주었다. 내가 생각해도 부끄러운 추억이다.
내 대학 졸업식에 와서 꽃을 들고 환하게 웃던 모습이 너무나 선명하게 기억난다. 내 졸업모와 망토를 걸치고서 자기도 대학 졸업 해보겠다고 찍었던 독사진이 지금은 영정사진으로 쓰이고 있다. 그렇다 사실은 영정사진으로 너무 자주 보다보니까 선명하게 기억이 나는 것일수도 있다. 바로 몇 달 전에도 봤으니까.
동생은 참 어이없이 죽었다. 죽기 전에 영정 사진이라도 제대로 남기려고 했는지 졸업식날 그 사진을 찍고 나서 4달 후에 죽었다. 한밤중에 술먹고 스쿠터 타고서 집에 돌아오다가 순간적으로 휘청해서 도로변에 주차되어있던 트럭 모서리를 박아버린 모양이다. 별거 아닌 사고지만 동생은 헬멧을 안쓰고 있었다. 동생은 이전에도 여러번 비슷한 사고를 냈다. 스쿠터를 타고 가다가 도랑에 박아버린 적도 있었고 아버지 차를 몰래 끌고 나갔다가 도랑에 빠트린 적도 있었다. 어떻게 보면 예고된 운명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동생이 죽고서 나는 내가 슬픈건지 잘 모르겠는 심정이었다. 나는 기계적으로 의무적으로 울었다. 최근 아주 약간 동생과 가까워졌는데 다시 옛날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나는 동생을 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죽은 자식은 빨리 잊어야 한다며 장례식을 치르자마자 동생 물건을 모조리 정리해버린 아버지를 상당히 원망했다. 나이먹은 지금이야 그게 맞는 행동이었다고 생각하고 나라도 그랬을 것 같지만...
나는 동생을 잊기 않기 위해서 동생과 관련된 숫자로 로또번호를 만들었다. 이 번호로 로또를 사면서 동생을 기억할 생각이었다. 4, 7, 17, 26, 39, 44였다. 혹시 이걸로 크게 당첨이라도 된다면 동생이 저승에서 오빠에게 한턱 쏜게 아닐까? 하는 기대였다. 하지만 이걸로 돈 번 적은 없다.
아버지가 미처 정리하지 못한 약간의 물건들을 따로 숨겨놓고 나는 동생을 자주 기억했다. 동생을 잊어버리면 죄책감이 들었다. 나는 동생이 왜 꿈에서 안나오는지 서운했다. 그리운 사람은 꿈에 나오는거 아니었나? 내가 정말 동생을 그리워하고 있는걸까? 그리워함이 부족해서 꿈에 안나오는게 아닐까? 그러다가 꿈에 동생이 한번 나왔을때는 상당히 기뻤다. 지금까지 살면서 두어번쯤 꿈에 나왔던 것 같다.
세월이 많이 지나간 지금은 무덤덤하다. 제사를 지낼때마다 꾸준히 동생 영정사진도 올려놓고서 술도 한잔씩 올려주지만 쓸쓸한 마음은 더 이상 없다. 심지어는 가끔 나에게 여동생이 있었나 깜짝깜짝 놀라기도 하고 동생의 이름이 너무나 낯설다. 죄책감의 편린이 느껴지기는 한다.
지금은 딸이 두명 있다. 단비 단혜라는 이름이다. 구지 이름을 밝히는 이유는 어차피 아이디 보면 나와있기 때문이다.
둘이 서로 사이좋게 지내주길 바라는데 너무 사이가 안좋다. 항상 단비를 데려다놓고 동생을 잘돌봐줘야 한다고 얘기하지만 그리 쉽게 되질 않는다. 내 훈계가 도리어 독이 되는 느낌이다. 저 아이들도 커서는 나처럼 동생과의 제대로 된 추억이 전혀 없음에 괴로워하는 날이 오게 되지는 않을까 가끔 걱정한다. 같이 합기도 학원에 보내고 같이 피아노 학원에 보내고 있는데 그렇게라도 함께 하는 시간이 늘어나면 추억도 늘어나겠지. 친형제라는게 의외로 가까이 있어도 그렇게 가까운 관계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 손금불산입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3-11-24 10:05)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 게시글로 선정되셨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염천교의_시선
22/03/06 03:14
수정 아이콘
저도 제 가족을 잃은 기억이 있습니다. 말씀들이 꽤나 공감되네요.
말씀하시는 것을 보니 꽤 오래된 일이신 거 같습니다. 시간이란 게 참...약인 거 같기도 하고 야속한 거 같기도 해요.
시간이 지나면 어느 정도 잊혀지니 말입니다. "잊지 못하고 계속 부여잡고 있으면 망자께서 못 간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이런 걸 보면 그 사람을 위해선 어느 정도 잊어주는 게 더 나은 일인 거 같기도 합니다.
단비아빠
22/03/06 03:27
수정 아이콘
(수정됨) 감사합니다 옛날 얘기가 맞지요.. 2001년에 죽었으니까요...
이제 아버지가 돌아가실 차례가 되어서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다보니까 또 동생 생각이 나서 적었습니다.
개인사 주절거린거긴 한데.. 뭐 저하고 비슷한 상처를 가진 분에게는 조금쯤 공감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담번엔 아버지에 대해 써볼 생각이에요. 간병하면서 힘들었던거...
율리우스 카이사르
22/03/06 09:11
수정 아이콘
담담한 좋은글 잘 봤어요. 저는 부모님이나 형제 자식등 2촌이내 가족을 잃어본적이 조부조모말고는 없는지라… 상상하기가 힘드네요
22/03/06 09:22
수정 아이콘
저에게는 세살터울 친삼촌이 있었죠. (아버지가 8남매 중 장남 그 삼촌은 늦동이 막내...) 형제처럼 지냈는데... 30대 초반에 돌아가셨죠. 참 어린 나이었는데...
도들도들
22/03/06 09:57
수정 아이콘
글 감사합니다. 담담해서 눈물이 많이 나네요.
도들도들
22/03/06 10:04
수정 아이콘
부모 입장에서 형제자매 간 사이좋게 지내도록 하는 게 참 어려운 일 같습니다. 아이들 한 명 한 명 먹이고 씻기고 재우는 일만 해도 벅찬데 둘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다 알 수는 없고 잠시만 신경 못 쓰면 누군가는 서운해지기도 하고요. 참 어렵습니다.
이명준
22/03/06 10:25
수정 아이콘
저는 삼형제 중 장남이고 동생들하고는 4살 6살터울입니다.
지금 동생들하곤 잘 지내는 편인데 유독 둘째가 저를 많이 어려워합니다.
어렸을 때나 청소년기에 제가 동생을 심하게 때렸다거나 나쁘게 대한 적은없었는데 아마도 저하고는 다른 성경탓에
보이지 않는 거리감 같은 것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형노릇도 좀 하고 잘 해주려고 노력을 하고 동생도 또 그런 것에 대해서 참 고마워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이지 않는 거리감도 좀 있는 것 같고, 어려워 하는 것 같습니다.
형제간이라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것이 있는 것 같아요.
나이가 들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위하는 마음이 있는 것만으로도 괜찮다고 스스로 위로하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부디 평안하시길...
이러다가는다죽어
22/03/06 10:38
수정 아이콘
하....고생하셨습니다 두분 다
문재인대통령
22/03/06 13:14
수정 아이콘
으어... 고생하셨습니다.
22/03/07 00:45
수정 아이콘
스티븐 킹 소설중에 비슷한 소설이 있었는데 기억이 안나네요. 잘 나가는 변호사가 동생의 부고를 듣고 나서야 후회하면서 동생과의 추억을 회상하는....정말 고생하셨다는 말 밖에 할 수 없네요
콩탕망탕
22/03/07 10:34
수정 아이콘
단편집 "나이트 쉬프트"에 있는 "사다리의 마지막 단"을 말씀하시는것 같네요.
저도 글을 읽으면서 비슷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엘리엇
22/03/07 01:27
수정 아이콘
저 또한 비슷한 시기에 동생을 잃었어요. 99년이었고 동생은 막 스물이었는데… 아직도 꿈에서 깨면 그 아이가 진짜 없나 한참 생각합니다. 못되게 굴었던 죄책감, 내가 그 어느 순간 다른 선택을 했으면 결말이 달라졌을 것 같은 헛된 후회, 그 아이가 베풀었던 마음 같은 기억이 아직도 괴롭지만 잊어가는 게 더 많아요.
다시 만나고 싶어요. 어디서든.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공지 추천게시판을 재가동합니다. [6] 노틸러스 23/06/01 7248
3539 (스포) 단 1화 만에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 빠진 이유 [80] 마스터충달670 22/07/06 670
3538 소소한 취미 이야기 - 은하수 촬영 [52] 시무룩143 22/07/06 143
3537 관심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 - 구글 시트 공유합니다 [28] Fig.1167 22/07/06 167
3536 이제 인간은 바둑 AI를 절대로 이길 수 없는가? [86] 물맛이좋아요302 22/07/05 302
3535 실시간 감동실화) 오얏나무 아래서 갓을 고쳐쓰다. [100] 스토리북182 22/07/04 182
3534 상반기에 찍은 사진들 [20] 及時雨1483 22/07/03 1483
3533 (육아) 여러가지 불치병들...ㅜㅜ [103] 포졸작곡가1960 22/06/29 1960
3532 누리호 성공 이후... 항우연 연구직의 푸념 [155] 유정1217 22/06/28 1217
3531 [웹소설] 지난 3년간 읽은 모든 웹소설 리뷰 [77] 잠잘까1082 22/06/28 1082
3530 마지막을 함께한다는 것 - 을지면옥 [48] 밤듸980 22/06/26 980
3529 게임사이트에서 출산률을 높이기 위한 글 [36] 미네랄은행2134 22/06/22 2134
3528 (pic) 기억에 남는 영어가사 TOP 25 선정해봤습니다 [51] 요하네688 22/06/22 688
3527 (멘탈 관련) 짧은 주식 경험에서 우려내서 쓰는 글 [50] 김유라921 22/06/20 921
3526 [PC] 갓겜이라며? 최근 해본 스팀 게임들 플레이 후기 [94] 손금불산입1076 22/06/16 1076
3525 [기타] 한일 1세대 프로게이머의 마인드 [33] 인간흑인대머리남캐1138 22/06/15 1138
3524 글 쓰는 당신을 응원합니다 [31] 구텐베르크966 22/06/14 966
3523 [테크 히스토리] 생각보다 더 대단한 윌리스 캐리어 / 에어컨의 역사 [29] Fig.1804 22/06/13 804
3522 개인적 경험, 그리고 개개인의 세계관 [66] 烏鳳754 22/06/07 754
3521 오늘은 날씨가 참 좋았어요 [12] 及時雨628 22/06/06 628
3520 몇 년 전 오늘 [18] 제3지대579 22/06/05 579
3519 [15] 아이의 어린시절은 부모에게 주어진 선물이다. [24] Restar1999 22/05/31 1999
3518 [15] 작은 항구도시에 살던 나의 어린시절 [7] noname11970 22/05/30 97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