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21/11/23 16:18:50
Name Red Key
Subject 꽤 행복한 일요일 오후였다.
코스트코에 왔다. 필요한 물건이 있을 때는 물론이고 일요일 오전에 딱히 할 일이 없을 때는 주로 가는 편이다. 우리 집 최고 존엄께서 카트에 물건을 담고 빼고를 즐기실 때마다 옆에 서서 가슴 중간에 내 양손을 악수하듯 맞잡고 비굴한 자세로 훌륭하십니다, 뜻대로 하시지요, 원수라도 감탄 할 것입니다 라며 응원하는 척 비꼬는 것도 가슴 조마조마한 묘미이고, 시즌 마다 바뀌는 시즌을 대표하는 물건을 전시한 것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유는 입구 전시해둔 거진 구천만원인 금괴를 큰놈과 함께 구경하며 언젠가는 아빠에게 이걸 사줘야 된다 라고 반복해서 세뇌하기 위함도 있다. 금 가격은 싯가이니 금액이 아닌 무게로 1kg 금괴를 사줘야 함을 알려주고, 옆에 다이아는 번쩍거림에 현혹되어 구매하는 순간 가치가 하락함을 명심하고 반드시 금만이 안전자산이라는 것을 강조해서 세뇌 했다. 그걸 다 들은 큰놈은 옆에서 서서 나를 올려다 보며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스크를 끼고 있어 멍하게 입을 벌린 표정을 볼 수 없기에 눈꼽 만큼은 진정성이 더 있어 보였다. 고맙다, 아들 이제 옆으로 가보자. 하며 아이패드, 갤럭시 탭이 있는 곳으로 가 큰놈과 같이 토킹 톰 고추를 만지거나 미니언 러쉬를 하다보니 와이프에게 전화가 와 매번 미친척하고 들고 가는 아이패드 12.9인치 교환 카드를 들고 큰놈과 함께 옷 가판대로 갔다.

와이프를 찾아 쓱 교환 카드를 내미니 작은놈 목에 이런 옷 저런 옷을 대 보고 있던 와이프는 그걸 받아 자연스레 옷 가판대 저 멀리 두었고 나는 그걸 다시 가지고 와 카트에 다시 넣었다.  카트에는 양 어깨에 레이스가 달린 유아용 티가 몇 개 들어 있었고 나는 그걸 들고 와이프에게 의문을 든다는 식으로 내미니 집에서 막 입힐 것이라 레이스가 달려 있어도 싸기만 하면 상관 없다고 했다. 카트에서 앉아 아빠와 눈이 마주치자 해실 해실 해 맑게 웃고 있는 작은 놈은 앞으로 자기가 남들 몰래 은밀히 공주 옷을 입게 될 것이란 것을 알고 있을까? 측은한 마음 동시에 레이스가 달려 나오는 싸고 큰 사이즈의 티가 있었다면 나도 집에서 남들 몰래 공주 옷을 입을 수 있을까 하는 오싹오싹한 의문이 들었다. 레이스가 달린 아동용 분홍티를 손에 들고 큰놈에게 가져다 대볼까 말까 고민하는 와이프를 보고 눈치 빠른 큰놈은 황급히 카트에 올라타 벌렁 누워 아이패드 교환 카드로 얼굴을 가렸고 그 모습을 보고 픽 웃은 뒤 와이프는 카트를 밀고 이동했다.

목적 없이 이리 저리 구경하다 큰놈하고 창고에 들어간 뒤 누가 먼저 나가서 문 닫는가 하는 눈치게임을 했고 내가 안 져주고 이긴 뒤 큰놈을 놀리니 큰놈은 삐쳤고 그 모습을 한심하게 보던 와이프는 작은놈을 안으라고 하며 큰놈을 카트 의자에 앉히고 달래기 시작했다. 얼핏 듣기에 큰놈이 시무룩하게 아빠 금괴 안 사준다는 말을 하기에 작은놈을 와이프에게 맡기고 큰놈을 안아 든 뒤 다시 창고로 들어가 큰놈이 지 혼자 후다닥 나간 뒤 문이 닫으니 안에서 내가 무서워하며 우는 척을 하고 나와서 분해하는 척을 보고 큰놈의 기분이 좋아진 듯 했다. 그걸 보니 내 금괴는 걱정 없을 듯하여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이번 코스트코 방문 목적인 오란다 한 박스와 몇몇 먹거리를 더 산 뒤 와이프의 눈짓 한번에 매번 그렇듯 순순히 아이패드 교환 카드를 다시 가져다 놓고 계산 후 불고기 베이크를 산 뒤 코스트코를 나섰다. 집으로 가는 길에 지역 유명 김밥집을 지나기에 김밥을 먹을는지 와이프에게 물어보았다. 그러니 먹을 것을 많이 샀으니 안 먹겠다가 했다. 그래서 김밥 집에 도착 후 그럼 내 것 만 사오겠다 달라고 해도 안주겠다 하니 자기 것도 사오라며 웃었다. 내 것만 사왔으면 십중팔구 뺏겼을 건데 다행이다 안도하고 두 도시락을 샀다.

집에 도착해서 김밥과 불고기 베이크를 먹었다. 그런데 와이프가 김밥 꼬다리를 큰놈에게 자꾸 주었다. 애 좋은 거 주지 왜 그걸 줘 하며 와이프에게 말하니 나를 보고 개구지게 미소를 지었다. 김밥 4줄에 8개 있는 소중한 김밥 꼬다리. 나는 김밥 꼬다리를 좋아한다. 왜냐하면 재료의 길이가 상대적으로 길기 때문에 맛이 진한 것이 첫 번째고 몇 개 두고 보면 재료 길이가 모두 다르기에 맛이 미묘하게 달라 맛이 다채롭기 때문이 두 번째이다. 그래서 나 김밥 꼬다리 좋아한다며 그 이유를 와이프에게 연애 할 때 몇 번 설명 했더니 그 이야기가 그럴 듯 하게 들렸던 모양이다. 근데 연애 할 때나 큰놈이 김밥 못 먹을 때는 김밥 꼬다리를 안건들이더니 큰놈이 김밥 꼬다리를 한 입에 넣을 정도의 입 크기가 되자 큰놈에게 주기 시작했다. 서글프지만 내 좋은 것을 자식놈에게 주는 것은 타의로 양보하는 거지만 자의로 양보하는 듯 양보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아직 불고기 베이크가 있으니까. 그런데 불고기 베이크는 꼬다리를 나에게 준다. 불고기 베이크는 김밥과 다르게 꼬다리가 맛이 없다. 왜냐 하면 불고기와 치즈가 적게 들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와이프에게 한 적이 없는데 그 정도는 와이프도 아는 모양이다. 장난스런 마음이 섞인 섭섭함이 있다가도 큰놈과 와이프가 맛있게 먹으면 기분이 좋다.

작은놈을 재우러 들어간 와이프가 같이 잠이 든 모양이다. 큰놈이 살금 살금 걸어가 큰방 문을 빼꼼히 열어보고 그 보다 10배 더 조심 히 문을 닫은 뒤 지 엄마가 자는 것을 확인 후에 나에게 와 오늘은 일요일이고 아침에 도요새 잉글리쉬도 했으며 분수 문제도 한바닥 풀었으니 스마트폰을 하겠다며 조용히 내 귀에다 속삭였다. 나는 그 모습이 귀여워 큰놈의 의도에 반하게 뭐? 핸드폰 한다고 큰소리로 말하니 재빠른 동작으로 몇 번이나 다급하게 검지를 입에다 가져다 대며 큰방 쪽을 슬쩍 보았다. 엄마가 나오지 않는 것을 확인 한 뒤 등 주먹 바깥치기로 나를 위협하기 시작했고 나는 무서워하는 척하며 30분만 하라고 허락 하니 큰놈이 태권도 하원 차량에서 내린 뒤 사범님에게 인사하듯 90도 인사를 하며 감사합니다를 조용히 외치고 지 방으로 후다닥 가버렸다.

와이프와 작은 놈은 자고, 큰놈은 말이 30분이지 말리지 않는다면 한두 시간은 핸드폰을 할 것이니 영화 한편은 볼 시간은 되겠다 싶었다. 그래서 티비를 보니 햇살 비친 티비 검은 화면에 작은놈의 손자국이 무수히 찍혀 있었다. 작은놈이 찍었다는 원인을 아니까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그 무수히 찍힌 손자국은 마치 원한에 찬 영혼이 남긴 심령 현상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우리집 고스트 스팟을 정화하기 위해 유아 장난감용 알코올 소독 티슈로 티비 화면을 닦기 시작했다. 닦다보니 이건 작은놈 키높이가 아닌데 도대체 어떻게 여기까지 손자국을 찍은거지? 진짜 귀신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심령 현상 정화를 마치고 넷플릭스에서 아무 영화나 한 틀고 앉아서 보기 시작했다.

영화를 좀 보다 보니 입이 심심해서 오란다를 하나 먹을까 하다 영화 볼 땐 팝콘이지 하며 주로 와이프가 종종 먹는 대용량 믹스 팝콘을 꺼내 들었다. 기본, 치즈, 카라멜, 딸기 이렇게 들어 있는 팝콘인데 기본, 치즈 팝콘은 맛이 없다. 에이 이건 맛없네 하며 팝콘을 먹다가 카라멜, 딸기 팝콘만 골라 먹기 시작했다. 영화 보며 골라 먹다 보니 분명히 카라멜 팝콘을 잡고 먹었는데 치즈 팝콘을 먹었고, 딸기 팝콘이다 싶었는데 기본 팝콘을 먹었다. 몇번 그러다보니 괜시리 성질이 나서 보던 영화를 멈추고 그릇 두 개를 가져와서 팝콘을 분리하기 시작했다. 그릇에 카라멜과 딸기 팝콘을 반 정도 채웠을 때인데 갑자기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져서 뒤를 보니 큰놈이 한손에 핸드폰을 들고 나를 보고 있었다. 왜 엄마 팝콘에서 카라멜만 빼먹냐고 물어보는 큰놈에게 머뭇 머뭇 대답을 하지 못하니 지 엄마에게 일러준다며 큰방으로 가기 시작했다. 다급히 큰놈에게 포켓몬 카드 5장들이 1팩을 사준다 하니 발걸음을 멈추었고 몸은 그대로 둔 채 고개만 뒤로 돌려 포켓몬 카드는 3팩을 사주며, 자기도 카라멜 팝콘을 같이 먹겠다고 하였다. 그렇게 둘이 짬짜미를 한 뒤 카라멜 팝콘만 두 그릇을 골라 먹었다.

큰놈과 카라멜 팝콘을 먹은 뒤 안 먹은 팝콘을 다시 믹스 팝콘 봉지에 넣고 지퍼를 잠그니 큰놈이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빠 엄마는 맛 없는 팝콘만 먹겠다 그치? 그래서 나는 큰놈에게 엄마 치즈 팝콘 좋아해라며 반대로 말해 주었다. 가까울 시일 내에 오빠 이 팝콘 이상하다 믹스인데 그냥 팝콘 밖에 없네 라는 말을 할 와이프를 상상하니 웃음이 나왔다. 그 모습을 본 큰놈도 뭐가 좋은지 같이 웃었고 거실창을 통해 들어오는 따뜻한 햇살아래 큰놈과 나는 마주보며 낄낄 거렸다.

꽤 행복한 일요일 오후였다.

* 손금불산입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3-10-06 00:07)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 게시글로 선정되셨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21/11/23 16:21
수정 아이콘
행복하네요. 모처럼 따뜻해지는 일상글 감사합니다 :)
저런 소소한 일상이 정말 행복인것같아요.
미고띠
21/11/23 16:27
수정 아이콘
잘보았습니다. 재밌었어요.
임시회원
21/11/23 16:29
수정 아이콘
너무 좋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너랑나랑
21/11/23 16:30
수정 아이콘
좋은글 감사합니다. 저도 지난 일요일이 생각나고 그러네요 ^^
21/11/23 16:35
수정 아이콘
불고기 베이크에 옛날엔 치즈가 없었던거 같은데 치즈가 있다니.. 왜 난 못느꼈지..
Cafe_Seokguram
21/11/23 16:42
수정 아이콘
진짜 행복이 멀리 있지 않네요.
자너프
21/11/23 16:49
수정 아이콘
행복함이 전해져 저도 미소가 지어졌습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리듬파워근성
21/11/23 17:04
수정 아이콘
@)
김밥 꼬다리 하나 놓고 갑니다 크하하핫!
21/11/23 22:07
수정 아이콘
코스트코 불고기 베이크 단종 된다고 합니다. ㅠㅠ
청원글 올리러 갑니다.
Hammuzzi
21/11/23 23:28
수정 아이콘
좋은글 감사합니다.
행복한 일요일의 일상에 즐거워지네요.
믹스팝콘의 카라멜만 골라먹다니 반칙입니다.
21/11/24 12:08
수정 아이콘
아이패드 교환권이 뭔가용 ?
글은 참 기분좋게 읽었습니다 크크
21/11/24 13:49
수정 아이콘
패드나 노트북류는 제품을 배치해두지 않기 때문에 직접 카트에 담을 수가 없습니다. 대신 제품 카드를 두어 구매 의사가 있으면 그걸 계산대로 들고가 계산 후 제품을 수령 할수 있습니다. 저도 경험은 못해봤네요. ㅠㅠ
보로미어
21/11/24 20:39
수정 아이콘
이런게 그냥 행복이 아닌가 싶어요. 잘 읽었습니다.
이시하라사토미
21/11/25 09:59
수정 아이콘
행복한 가정이네요

읽으면서 저도 같이 행복해지네요.
nm막장
21/11/25 10:28
수정 아이콘
글 잘쓰시네요 잘 읽었습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3483 [기타] 잊혀지지 않는 철권 재능러 꼬마에 대한 기억 [27] 암드맨3533 22/04/15 3533
3482 [일상글] 게임을 못해도 괜찮아. 육아가 있으니까. [50] Hammuzzi2556 22/04/14 2556
3481 새벽녘의 어느 편의점 [15] 초모완2519 22/04/13 2519
3480 Hyena는 왜 혜나가 아니고 하이에나일까요? - 영어 y와 반모음 /j/ 이야기 [30] 계층방정2485 22/04/05 2485
3479 [LOL] 이순(耳順) [38] 쎌라비3707 22/04/11 3707
3478 [테크 히스토리] 기괴한 세탁기의 세계.. [56] Fig.13143 22/04/11 3143
3477 음식 사진과 전하는 최근의 안부 [37] 비싼치킨2480 22/04/07 2480
3476 꿈을 꾸었다. [21] 마이바흐2381 22/04/02 2381
3475 왜 미국에서 '류'는 '라이유', '리우', '루'가 될까요? - 음소배열론과 j [26] 계층방정3116 22/04/01 3116
3474 망글로 써 보는 게임회사 경험담(1) [34] 공염불3212 22/03/29 3212
3473 소소한 학부시절 미팅 이야기 [45] 피우피우2688 22/03/30 2688
3472 [테크 히스토리] 결국 애플이 다 이기는 이어폰의 역사 [42] Fig.12471 22/03/29 2471
3471 만두 [10] 녹용젤리1703 22/03/29 1703
3470 당신이 불러주는 나의 이름 [35] 사랑해 Ji1680 22/03/28 1680
3469 코로나시대 배달도시락 창업 알아보셨나요? [64] 소시3454 22/03/22 3454
3468 톰켓을 만들어 봅시다. [25] 한국화약주식회사2394 22/03/19 2394
3467 밀알못이 파악한 ' 전차 무용론 ' 의 무용함 . [62] 아스라이3231 22/03/17 3231
3466 그 봉투 속에 든 만원은 쓰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19] 숨결2322 22/03/17 2322
3465 철권 하는 남규리를 보자 예전 기억이 떠올랐다. [38] 초모완3210 22/03/16 3210
3464 우리네 아버지를 닮은 복서... [12] 우주전쟁2440 22/03/15 2440
3463 콘텐츠의 홍수를 살아가고 있는 요즘 아이들의 생활 [52] 설탕가루인형형3389 22/03/14 3389
3462 서울-부산 7일 도보 이슈 관련 간단 체험 [141] 지나가는사람2074 22/03/14 2074
3461 [테크 히스토리] 청갈적축?! 기계식키보드 정리해드립니다 / 기계식 키보드의 역사 [64] Fig.12914 22/03/14 2914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