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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20/09/14 20:37:27
Name 겟타쯔
Subject 어느 극작가의 비명
※사소함 주의...

2010년 여름, 나는 복학생이었고 계절학기를 수강 중이었다.

복학을 하면서 나는 군복무 당시 계획했던 국어국문학 복수전공을 신청했고, 국문과의 전공수업을 듣게 되었다.

교양수업을 수강하기 위해 오가던 인문대 강의실에, 나름 전공자로서 앉아있으니 마치 새내기가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몇 번 수업을 듣고 나니 숫기없는 성격 때문에, 새내기 시절처럼 쉽사리 친구를 사귈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초급 전공과목이었기 때문에 수강생들은 대부분 나보다 어린 학생들이었고, 눈치없는 복학생으로 비칠까 염려스러워 그냥 조용히 수업만 듣기로 했다.

그녀가 내 눈에 띈건 종강까지 대략 세번의 강의가 남았을 때였다.

외로움에 지쳐 동물적 본능이 작동한 것이 아니었음을 맹세한다. 외모에, 이성의 향기에 끌린 거라면 수업 초부터 눈에 띄었을 테니까.

그녀가 눈에 띈 날을 기억한다. 수업시작 전, 강의실에 마지막으로 들어온 학생이 뒷문을 닫지 않고 들어왔다. 다소 신경 쓰이는 상황. 그런데 그녀가 주저없이 일어나더니, 뒷문을 닫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 사소한 행동이 뇌리에 박혔고, 그 이미지는 수업이 끝난 뒤에 끊임없이 채색되고 세부적인 묘사가 더해졌다.

하지만 연애 경험이 없었던 나는 그 다음 수업시간에도 그녀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휴대전화 번호라도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자제했다.

하지만 이런 고민을 친구에게 털어놓기는 했다. 중앙도서관에서 밤새 함께 시험공부를 하다가, 잠시 머리를 식히기 위해 새벽에 자판기에서 데자와를 꺼내 마시며 친구에게 이런 상황을 이야기 했다.

- 그래도 한 번 번호라도 물어보지 왜.
- 나보다 나이도 어릴거 같고, 뭐 내가 먹히겠냐.
- 번호만 물어어보는건데 뭐. 누가 고백하랬나.

그 다음 수업시간에도 그녀에게 말을 걸지 못했다. 시험을 앞두고, 시험에 악영향을 끼칠 만한 감정적 기복을 겪기 싫기도 했다.

그렇게 정규 커리큘럼이 끝났고, 시험 전에 마지막으로 강평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한 번 더 그 수업에 출석하게 되었다.

강평 중, 시험기간에 함께 공부했던 친구가 나에게 문자메세지를 보내왔다.

- 근데, 걔한테 말은 걸어본거야? 저번에 종강 아니었나.
- 종강은 했는데, 강평이 또 있네. 그리고 말은 안걸었다.

그러자 친구는 나에게 아래와 같이 답장을 보냈다.

- "우물쭈물 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 조지 버나드 쇼.

뭐라는거야, 나는 답장을 않고 다시 교수의 강평에 귀를 기울였다.
교수님은 다음과 같은 말로 강평을 마쳤다.

- 여러분, 어쨌거나 한학기 동안 수고 많으셨고, 시험에 좋은 결과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음, 여기 있는 친구들 대부분 아직 새내기고 해서 드리는 말인데,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 하나 있어요. 영국의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가 자기 묘비에 새긴 말입니다. 우물쭈물 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 앞으로의 대학생활에서 여러분은 우물쭈물 거리다가 황금같은 기회를 놓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나는 우연을 잘 믿지 않는다. 운명론자인 것은 아니지만, 우연이라는 것은 이전에 누적된 사건들이 임계점에 다다라 발생하는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관련이 없어보여서 우연이라고 여겨지지만, 면밀히 분석하면 희미한 인과관계를 찾을수 있다고 믿었다.

친구의 문자와, 강평의 우연을 나는 좋은 핑계로 삼은 셈이었다. 그래서 설레는 마음으로 시험을 망쳤고, 시험을 마치고 나가는 그녀에게 미리 준비한 편지를 건넸다. 편지를 건네면서 딱히 준비한 멘트도 없었고, 편지 내용도 별 내용 없었다. 그저, 위에서 설명한 그 날, 그 이유 때문에 당신이 눈에 띄었고 차 한잔 마시고 싶으니 오늘 오후 5시에 인문대 XX관 라운지에서 기다리고 있겠다. 혹시 몰라 내 전화번호를 남기지만, 기다리다 시간이 지나면 그냥 나는 갈 터이니, 부디 부담은 갖지 마시라 적었다.

그리고 나는 곧장 인문대 XX관으로 가서 캐모마일 차를 주문하고 빈 테이블에 앉아 그녀를 기다렸다. 시험이 끝난게 오후 두시 쯤이었고, 나는 세시간 정도를 기다렸다. 내가 시간을 정해줬으니 하염없이 기다린 건 아니었고, 원래 탁 트인 라운지에서 커피나 차를 마시며 아무 생각도 안 하거나 책을 읽는 걸 좋아했다.

5시가 지나도 그녀는 오지 않았다.

나는 책을 읽고 있었는데, 책이나 마저 읽을 겸 30분 정도를 더 라운지에 있었다.

- 저.....

그녀가 왔다. 시계를 보니 5시 30분이었다. 이 30분의 연착은 그녀의 사소한 고민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나는 어색하게 인사를 했고, 그녀는 더 어색하게 인사를 받았다. 잠깐의 대화 후 나는 다시 약속을 잡았다. 며칠 뒤에, 어디 카페에서 다시 봬요.

그녀는 카페에도 나와주었다. 그때 나는 더이상 침착하지 못했다. 심각하게 떨리는 손으로 찻주전자를 집었고, 찻잔에 따른답시고 절반은 테이블에 쏟은 것 같았다. 그래서였을까, 그녀는 그날 이후 내 부름에 답장하지 않았다.

며칠 뒤 나는 세 평 원룸 골방에 틀어박혀 남아공 월드컵을 쓸쓸하게 즐겼다. 그냥, 우물쭈물 할 걸 그랬나. 그래도 그 날의 풍경은 참 좋았다. 어느 극작가의 비명으로 시작된 우연과, 짧지만 가득했던 설렘, 그리고 비록 결과는 안 좋았지만 누군가 나의 부름에 응답해주었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어떻게든 승화시키고 싶은 기억이 되었다.

---

[우연]

마른 꽃잎이
뜨거운 물에 풀어지는 오후
귀를 기울이자 그대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름의 경계에 피는
가을의 꽃과
기다림의 우연

어제의 일기예보는 빗나갔고
그래서 오늘은
때 묻은 고양이가 제 발을 핥고
사람들은
어느 극작가의 비명碑銘을 노래했다

모든 공전하는 것들의
망설임과 그리움
그 궤도에서
연못의 인공분수에 뜬 무지개의
사소함으로
그대에게 추락하는 일,
어쩌면 나는 부서지지 않고
그대와 함께 왈츠로 자전하는 일

이 모든 사건을 우연又緣이라고,
부르고 싶다

* 노틸러스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1-07-13 23:16)
* 관리사유 :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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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온날흙비린내
20/09/14 20:46
수정 아이콘
이런 짤막한 수필형식의 글들 좋아합니다. PGR 자게에서 가끔씩 이런 글 발견할때마다 즐거워지네요. 잘 읽었습니다.
20/09/14 22:23
수정 아이콘
그래도 그때의 감정에 충실하는게 훨씬 나은거 같습니다. 이런저런 상상과 혹시나 하는 막연한 기대 때문에 그때의 감정을 묻어버리면 그건 결국 평생 치유할 수 없는 미련으로 남더라구요. 한걸음 내딛을까 말까 고민이 되는 상황에서 나아갈 수 있는 용기는 결과가 어쨌든 청춘만이 할 수 있는 멋진 업적이 되는거 같아요.
콩탕망탕
20/09/15 11:54
수정 아이콘
폴오스터의 소설에 나오는 우연을 떠올릴만한 상황이네요.
글 잘 봤습니다.
이명준
20/09/15 12:56
수정 아이콘
옛 노트에서 - 장석남

그 때 내 품에는
얼마나 많은 빛들이 있었던가
바람이 풀밭을 스치면
풀밭의 그 수런댐으로 나는
이 세계 바깥까지
얼마나 길게 투명한 개울을
만들 수 있었던가
물 위에 뜨던 그 많은 빛들,
좇아서
긴 시간을 견디어 여기까지 내려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리고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그때는 내 품에 또한
얼마나 많은 그리움의 모서리들이
옹색하게 살았던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래서 그 옆에서 숨죽일 무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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