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20/02/20 19:15:20
Name 연필깎이
Subject [일상] 두부 조림
저희 할머니께선 참 음식을 잘하십니다.
그리고 그 음식솜씨는 고스란히 우리 이모가 물려받았습니다.
사실 제 이모는 육류를 전혀 못 드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닭백숙 등등 고기 요리를 그렇게 잘합니다.
맨날 이모한테 '솔직히 고기 못 먹는 거 거짓말이지?'라고 장난을 칠 정도입니다.

그에 반해 우리 엄마는 할머니의 손재주를 물려받았습니다.
요리를 잘하지 못하는 우리 엄마 덕에 제 성장기의 밥상은 주로 배달음식이었습니다.
그래도 좋았습니다. 우리 엄마랑 같이 밥을 먹으니까요.

엄마는 그래도 가끔 음식을 해주셨습니다.
그 중 제일 기억에 남는게 바로 '두부조림'입니다.
원체 두부를 좋아하긴 하지만 엄마가 해준 두부조림은 정말 특별한 맛이 났습니다.
그래서 맨날 엄마한테 두부조림을 해달라고 떼를 썼던 기억이 납니다.

나이를 먹고 타지로 대학을 가며 엄마를 보는 날이 점점 적어질 시점에,
집에 가면 항상 '뭐 먹고 싶어?'라는 물음에 '두부조림'이라고 답을 했습니다.
입대하고 휴가를 나와도 제 대답은 항상 같았어요.

그러면 엄마는 왜 자꾸 그걸 얘기하냐고 툴툴대면서도 만들어 주셨습니다.

사실 두부조림은 집 앞 반찬 가게에 흔히 보이는 음식이지 않습니까?
서울로 직장을 잡은 후 어느 날 두부조림이 너무 땡기는 겁니다.
해서 집 앞 반찬 가게에 급히 가서 두부조림을 샀습니다.

확실히 맛있었습니다. 정말 맛있었어요.
그런데 엄마가 해준 그 오묘한 맛이 안 나는 겁니다.
우리 엄마가 해준 두부조림은 짠맛과 단맛이 묘하게 섞인 그런 맛이거든요?
헌데 가게에서 파는 두부조림은 맛이 너무 깔끔해요.

뭔가 모를 실망감에 사로잡힌 저는 엄마한테 전화를 했습니다.
'나 이번 주말에 내려갈 테니까 내가 자주 먹는 걸 해달라'고 말이죠.
엄마의 '아 조림?'이라는 그 대답에 미소가 절로 지어졌습니다.

실은 요즘 직장 스트레스가 상당해서 힘이 듭니다.
원형탈모에 스트레스성 위염에 멀쩡하던 사람이 종합 병동이 되어가고 있더라구요.
흔히 몸과 마음이 아프면 맛있는 걸 먹고 푼다고 하잖아요?
얼마 전부터 엄마가 해준 두부조림이 너무 땡깁니다.

그래서 이번 주말에 두부조림을 먹으러 집으로 내려갈까 합니다.
어쩌면 두부 핑계를 대고 엄마를 보러 가는 걸지도 모르지만요.



* 노틸러스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0-10-13 14:24)
* 관리사유 :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페스티
20/02/20 19:34
수정 아이콘
(수정됨) 절로 미소가 나오는 훈훈한 이야기네요
두부조림 레시피는 받아두시면 좋을거 같아요(제가 궁금하니까 올려달라는 건 아닙니다 흠흠!)
저도 어머니가 해주시는 닭죽 좋아해서 얼마전에 요리해보려다가 전화로 이러쿵저러쿵 여쭤봤던게 생각났어요 크크
티모대위
20/02/20 19:44
수정 아이콘
따뜻한 이야기네요.. 건강하시길...!
20/02/20 19:52
수정 아이콘
집밥이 그립네요 ㅠㅠ
부대찌개
20/02/20 20:02
수정 아이콘
어서 두부조림 레서피를 내놓으십시오!!
치열하게
20/02/20 20:05
수정 아이콘
두부조림 맛있죠. 따뜻한 흰 밥에 먹으면 꿀맛. 사실 두부가 다 맛있죠. 그나저나 할머님은 능력자셨네요.
그리움 그 뒤
20/02/20 20:06
수정 아이콘
좋아요~~
두부조림 맛있게 드세요
20/02/20 21:27
수정 아이콘
이런 글 좋아요. 어머니께서 오래 오래 건강하시길 빕니다.
오지키
20/02/21 00:21
수정 아이콘
두부조림 덕후로서 매우 공감합니다.
저도 몇개월만에 부모님 댁에가면 리퀘스트 no1요리가 두부조림이라서 정말 많은 양을 만들어주십니다.
따로살면서 저는 몇번이나 시도해봤지만 실패했습니다.
즉, 언젠가는 기억속에서만 머무를 요리라서 더 소중한 것 같네요.
껀후이
20/02/21 10:36
수정 아이콘
두부조림 너무 좋아요...
그래서 레시피는 안 주시나요?!?
덕분에 훈훈하게 아침 시작합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3832 [LOL] 2023 여름, 울프와 함께하는 희노애락 [80] roqur11599 23/12/03 11599
3831 커피를 마시면 똥이 마렵다? [36] 피우피우12067 23/12/02 12067
3825 [역사] 최초가 아니면 최초를 사면 되지 / BIC의 역사 [6] Fig.113356 23/11/28 13356
3824 [LOL] Trying to win the last game of the season [40] becker12430 23/11/24 12430
3823 [LOL] LPL, 적으로 대하지만, 동지애도 느끼다. [15] 마트과자12484 23/11/20 12484
3822 [LOL] 마침내 우승을 목격하다 [15] 풍경12401 23/11/19 12401
3821 [LOL] 흥미진진했던 2023 월즈를 돌아보며 (및 숭배글) [25] 원장12233 23/11/19 12233
3820 아들녀석의 입시가 끝났습니다. [63] 퀘이샤14571 23/11/21 14571
3819 오늘보다 내일이 더 행복해질 우리에게 (feat. 결혼기념일) [7] 간옹손건미축12664 23/11/19 12664
3818 [육아] 같이놀면되지 [55] Restar12967 23/11/17 12967
3817 [기타] 내가 사랑하는 이 곳이 오래오래 흘러가길 바라는 마음 [22] 노틸러스12524 23/11/17 12524
3816 적당히 살다 적당히 가는 인생은 어떠한가 [17] 방구차야12825 23/11/17 12825
3815 엄마 아파? 밴드 붙여 [19] 사랑해 Ji14870 23/11/16 14870
3814 나의 보드게임 제작 일지 ① [16] bongfka14302 23/11/16 14302
3813 남자 아이가 빗속에 울고 있었다 [20] 칭찬합시다.14207 23/11/15 14207
3812 [역사] 덴푸라의 시작은 로마?! / 튀김의 역사 [19] Fig.114018 23/11/15 14018
3811 프로젝트 헤일메리: 하드 SF와 과학적 핍진성의 밸런스 게임 [35] cheme14101 23/11/14 14101
3810 멍멍이를 모시고 살고 있습니다(시츄) [53] 빵pro점쟁이10722 23/11/14 10722
3809 '최후의 질문' 다시 생각하기 [37] cheme11193 23/11/12 11193
3808 우리는 테일러의 시대에 살고 있다 (feat. Eras Tour) [23] 간옹손건미축11042 23/11/08 11042
3807 [LOL] LOL을 이해하기 편하게 만든 용어 [73] 오타니11338 23/11/15 11338
3805 유머게시판 차량 주차비 27만원 아파트의 탄생 비화 #1 (픽션) [33] RKSEL11931 23/10/31 11931
3804 어떤 과일가게 [4] 칭찬합시다.18012 23/10/29 18012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