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19/05/23 16:11:59
Name 블랙초코
Subject 아무것도 안해도... 되나?
안녕하세요.
오랫동안 어딘가엔 남기고 싶었던 이야기를 여기 써 봅니다.
꼭 글로 정리해 보고 싶었어요. 저한테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거든요.



저는 원래 계획마스터입니다.
계획 하나는 기가 막히게 짜죠. 실천은 별개지만 일단 무조건 계획이 있어야 움직입니다
학교 다닐때부터 버릇이 되어서 나중에 고등학교 수험생활 할때는 그 전날 계획을 다 세우기 전까지는 잠도 못잤고,
대학교때도 똑같았습니다.
그게 꼭 공부가 아니더라도, 미래에 뭘 해야겠다. 어떤 사람이 되어야겠다 부터
하다 못해 결혼 후에는 내일 빨래를 하고 장을 보고 청소를 하고 이런거까지 죄다 계획을 세워서 했습니다.
계획을 클리어하고 찌익 지우는 그 기분이 너무 좋았거든요

대학 졸업 후 진학 준비를 하면서도 매일매일이 그랬습니다.
입시도 준비하고, 자격증도 준비하고, 더불어 매일매일 집안일하기 장보기 밥먹기 등등.
계획을 안 세우면 큰일 나는 줄 알았어요. 바보 되는 거 같고, 하루를 통째로 날려먹는 거 같고,
그러다 보면 일주일. 한달. 1년을 그냥 멍청망창 날려먹는 건 아닐까 불안해하며 몇 년을 살아왔으니까요.
입시가 끝나면, 합격/불합격 여부에 따라 또 뭘 할지, 뭘 준비할지.
일을 하게 된다면 어떤 걸 할지, 언제부터 할지, 그걸 언제부터 시작할지 등등.
지금 생각해도 좀 바보 같네요. 실천력이 플래닝의 반만 따라갔어도.. 키키

그러다가 일생일대의 이벤트가 찾아옵니다.
아기가 생겼어요.
뭐... 결혼한 사람이고 아기도 계획에 있었으니(이것도 계획,소름;) 우선은 기뻤습니다.
기다리던 아기였으니 기쁘고 좋았습니다.
근데 이 아기는 정말 달력을 들고 생겨난건지 칼같이 6주 되는 날 입덧으로 꼼짝없이 드러눕게 됩니다.
어지럽고 소화 안되고 다 귀찮고 밖에 나가면 1시간 이상을 못 다니고....
아무것도 할 수가 없더라고요.
다행히 토는 안했지만, 먹는 걸 못 먹어서 그냥 살도 쭉쭉쭉 빠지고, 아무도 못 만나고 그렇게 집에 있었습니다.

계획을 못 세우겠더라구요.
내일의 내가 멀쩡한지, 내일 나는 어지럽지 않을지, 뭘 먹을 수 있을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어서요.
그렇게 2달을 보내고, 입덧은 끝났어도 떨어진 체력은 돌아오질 않아서
뭔가 활동적으로 시간을 쓰진 못했습니다.
정말 갑자기, 아무것도 안했습니다. 아니 못했습니다.
저 '아무것도'란, 제가 지금껏 계획해오던 내 미래를 가꾸는 일입니다. 공부라던지, 공부라던지, 공부 같은 것들이요.
선배들은, 동기들은, 후배들은 다들 각자 바쁘던데. 미래를 꾸미느라 현재를 너무나도 바쁘게 살던데.
저는 집에서 티비로 세상을 보고, 컴퓨터로 세상을 읽고, 휴대폰 보고 누워있고.


근데 재밌는건, 제가 하나 생각하게 된 건.
나 하나 오늘 논다고해서 이 세상이 끝난다든지, 당장 내일의 내가 폭삭 망해서 영원히 아웃된다든지 하는 일은 없다는 겁니다.
아무것도 안해도. 내가 내 미래를 가꾸지 않아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내 인생은 여전히 내가 잘 챙기고 있고, 날 아껴주는 사람도 날 여전히 아껴주고, 아직 할 수 있는 일이 많다고 느끼니까
그제서야 맘이 좀 편해지고, 즐겁게 쉬고 잘 놀았습니다.
학교에서부터 경쟁에 치여서, 친구들이 경쟁자가 되고 견제 대상이 되던 그 좁은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내가 아직은 경험하지 못한 그 길을 친구들이 먼저 멋지게, 보란듯이 잘 해내길 바라는 마음으로 열심히 응원할 수 있었고.
지금까지 나 그래도 완벽하진 않았지만 애썼구나 스스로 토닥일 수도 있었고.
계획에만 맞춰서 그동안 소홀했던 것도 한번씩 볼 수 있었고.
오히려 좋은 시간이었다고 생각해요.
지금도 나 혹시 뒤쳐져있나, 싶을 때는 그 때 생각했던 것들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나는 이제 제대로 쉴 줄도 아는 사람이다. 달리기가 필요할 땐 얼마든지 달릴 수 있다. 이렇게요.
간혹, 이거 혹시 그냥 자기합리화인가 싶다가도. 좋게 좋게 생각하자 싶어서 이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언젠가 또 계획을 세울 수 있는 날이 오면, 저에게도 다시 제 미래를 가꿀 수 있는 시간이 많-이 허락된다면
지금 숨 한 번 고르고 쉬었던 게 그립겠죠. 아, 더 놀껄... 크크
아 그리고.... 사실은 아무것도 안하는걸 제가 너무나도 좋아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아직은 좀 더 이 기분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라고 있어요 :)





* 노틸러스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9-11-05 10:51)
* 관리사유 :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에는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한 사람은 안왔으면 좋겠습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 안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참돔회
19/05/23 16:18
수정 아이콘
글을 보며 저도 웃게 됩니다. 힘내시고! 화팅입니다!!!
아이와 산모 모두모두 건강하시고 행복하길!
19/05/23 16:19
수정 아이콘
마인드가 멋지시네요!
아기도 엄마 닮아서 긍정적일 것 같습니다.
19/05/23 16:24
수정 아이콘
아무것도 안하는 거 좋아요.

그런데 초코님은 아무것도 안하는게 아니라 세상 소중한 사람을 기다리고 계신거에요. 그 아이를 만나고 나면 더욱 아무것도 못하실 수 있겠지만, 무엇을 하는 것보다도 기쁜 순간들을 경험하실 거에요. 순산을 기원합니다.
진주삼촌
19/05/23 16:30
수정 아이콘
좋은 엄마가 되실것이 명확하니 좋은 아이로 성장할것 같습니다.
물론 육아는 전쟁이겠지만...
사악군
19/05/23 16:34
수정 아이콘
멋진 시간이 되시길!
本田 仁美
19/05/23 16:36
수정 아이콘
지금까지 열심히 사셔서 좋은 시기가 온거죠.
행복한 시간 오래 즐기셨음 좋겠네요.
도들도들
19/05/23 16:45
수정 아이콘
시간도 버리고 나면 오히려 얻게 되는 것들 중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19/05/23 17:00
수정 아이콘
계획에 계획세우기를 넣으시면 되지 않을까요?
헛소리 죄송합니다.
그래도 좋은 소식인거죠? 축하드립니다! 그마저도 계획이라니 계획대로 되고있어
19/05/23 17:01
수정 아이콘
한번 놀면 계속 놀게된다
이거 개소립니다 걱정마세요 흐흐
19/05/23 17:08
수정 아이콘
와 저는 평생 무계획 인생이라서,
계획을 세워서 클리어하는 삶의 방식을 언제나 꿈꾸기만 하고 매번 실패해왔는데, 오히려 정반대의 길을 걷고 계시네요.
제가 볼 때는 굉장히 좋은 습관인데 나중에 삶이 정상화 되시면 꼭 다시 실천하시길 바랍니다.

아 물론 애가 태어날 것인 이상 향후 최소 10년간은 계획을 세우실 필요 없을 것 같긴 합니다. 애는 계획대로 절대 움직이지 않거든요.
동네꼬마
19/05/23 17:09
수정 아이콘
꼭 어떠한 대단한걸 하지 않아도 충분히 행복하고 의미있는거라고 생각합니다.
이웃집개발자
19/05/23 17:09
수정 아이콘
굳..너무 굳입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안군-
19/05/23 17:47
수정 아이콘
사람은 닥치면 다 하게 돼있더라고요. 계획을 세워도 계획대로 안되는 일도 많고, 불가항력적인 일이 벌어지기도 하죠.

삼국지에서 제갈량은 "모사재인 성사재천(謀事在人 成事在天) "이라 했고,
성경책엔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라고 했죠.
그냥 지금을 즐기세요. 카르페디엠!
19/05/23 17:56
수정 아이콘
그렇네요.
아이가 생긴이후로는 계획의 빈도와 세부사항들이 많이 줄었어요 자동으로 크크
어디서 본건데 신이 아이를 보내주는 이유는
'니맘대로 안되는게 있다'
는걸 보여주기 위함이라구요
19/05/23 17:57
수정 아이콘
지난 계획세우기로, 오늘의 나를 만들었기 때문에, 계획(?)이 없는 나날이 더 좋아보입니다.
오늘의 블랙초코님을 축하합니다.
진산월(陳山月)
19/05/23 18:39
수정 아이콘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싶다. 이미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지만 더욱 더 격렬하게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싶다...] 라는 명격언이 있습니다.

블랙초코님은 쉬셔도 됩니다. 좋은 글 고맙습니다.
19/05/23 21:02
수정 아이콘
제 아내가 쓴 글인줄 알았습니다.
제 아내도 비슷한 고민을 하고, 결혼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아무것도 안하는 삶으로 들어갔었거든요. 그 과정에서 상담도 받았고요.
그런 시간들 끝에, 아내도 아무것도 안하는 삶을 즐기기 시작하더라고요. 아이가 생기면서 더욱 더 그런 삶을 체험하기도 했고요.
지금의 감정과 시간들을 충분히 누릴만큼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
드러나다
19/05/23 23:52
수정 아이콘
저는 더했어요. 내가 원하는 내가 되기 위해 이루기 어려운 계획들을 늘어놓고나서, 당연히 그에 맞게 행동하지 못하는 제 자신을 게으르다 부족하다 욕하고 탓하고 꾸짖기를 반복했거든요.
그러다가 그냥 아무 것도 하지않고 지금 나 자신으로도 괜찮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문득 하게되었어요. 용감히 지금 나 자신으로 살아보자. 머릿속에 그린 또다른 나로 억지로 변하려하지말자. 그리고는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이야기의 결은 조금 다르지만 글쓴분도 마음을 편하게 먹으시길 바래요.
19/05/24 02:10
수정 아이콘
울 와이프같네요 꼭 흐흐
계획대로 살려하고 기자시절 습관 못 버려서 아기귀저기가방에 수첩이랑 볼펜은 곧 죽어도 넣고 다니는 여자인데..
정말 임신. 출산. 첫째육아. 그리고 또 임신. 육아와 동시에 임신 및 출산까지.
계획대로 되는게 하나도 없더라구요. 너무 힘들고 예상하기 어려워서..
저랑 너무 달라서 많이 다투기도 했지만 정말 고생많았다는 말 꼭 해주고 싶어요.
글쓴이님도 꼭 무사히 건강한 아이를 낳고 기르시길 빌어봅니다.
그리움 그 뒤
19/05/24 10:37
수정 아이콘
60세 이상 나이드신 분들에게 후회되는 것이 무엇이냐 질문했을 때
동양계 사람들은 젊었을 때 공부를 못한게 후회된다. 열심히 일을 하지 않은 것이 후회된다 등이 주 대답이었고,
서양계 사람들은 젊어서 너무 쓸데없이 열심히 살려고 했다,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문제를 너무 고민했다 등이 주 대답이었다고 하더군요.
어느 쪽이 더 낫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이렇게도 살아보고 저렇게도 살아보는 거지요. 그렇다고 방탕하게 사는 것은 아니지만요.
블랙초코님과 다른 피지알러들의 오늘과 내일을 응원합니다. 삶에 정답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3092 신입이 들어오질 않는다 [67] 루루티아12392 19/07/31 12392
3091 [LOL] 협곡을 떠나는 한 시대를 풍미한 정글러, MLXG 이야기 [27] 신불해7265 19/07/19 7265
3090 [연재] 그 외에 추가하고 싶은 이야기들, 에필로그 - 노력하기 위한 노력 (11) [24] 222380 19/07/19 2380
3089 [9] 인간, '영원한 휴가'를 떠날 준비는 되었습니까? [19] Farce3771 19/07/17 3771
3088 햄을 뜯어먹다가 과거를 씹어버렸네. [25] 헥스밤7701 19/06/28 7701
3087 (일상 이야기) "지금이라도 공장 다녀라." [54] Farce12289 19/06/27 12289
3086 (번역) 중미 밀월의 종말과 유럽의 미래 [56] OrBef7620 19/06/27 7620
3085 [일상글] 가정적인 남편 혹은 착각 [54] Hammuzzi7545 19/05/30 7545
3084 아무것도 안해도... 되나? [20] 블랙초코8670 19/05/23 8670
3083 애를 낳고 싶으니, 죽을 자유를 주세요 [26] 꿀꿀꾸잉8190 19/05/21 8190
3082 [일상글] 결혼 그리고 집안일. (대화의 중요성!) [136] Hammuzzi15065 19/05/14 15065
3081 [8] 평범한 가정 [7] 해맑은 전사4268 19/05/09 4268
3080 [LOL] 매드라이프, 내가 아는 최초의 롤 프로게이머 [59] 신불해8222 19/05/07 8222
3079 [LOL] ESPN의 프레이 은퇴칼럼 - PraY's legacy in League of Legends nearly unmatched [43] 내일은해가뜬다13414 19/04/21 13414
3078 [8] 제 첫사랑은 가정교사 누나였습니다. [36] goldfish9818 19/04/29 9818
3077 [기타] 세키로, 액션 게임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다. [59] 불같은 강속구8589 19/04/15 8589
3076 [8]남편'을' 덕질한 기록을 공유합니다. [119] 메모네이드15152 19/04/24 15152
3075 연금술과 현실인식의 역사. [33] Farce6292 19/04/17 6292
3074 한국(KOREA)형 야구 팬 [33] 기다6408 19/04/12 6408
3073 "우리가 이 시대에 있었음을, 우리의 시대를, 결코 지워지게 하지 않기 위해." [40] 신불해11228 19/04/11 11228
3072 거미들, 실험실 수난의 역사 [38] cluefake12317 19/04/12 12317
3071 제주 4.3사건에서 수 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했던 유재흥 [30] 신불해9002 19/04/04 9002
3070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36] 미끄럼틀7414 19/03/27 7414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