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19/04/04 03:03:50
Name 신불해
Subject 제주 4.3사건에서 수 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했던 유재흥 (수정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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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 해방정국 ~ 한국전쟁 무렵까지의 인물들 중에 유명하다고 하면 유명한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유재흥이라는 장군 입니다.



무슨 김구, 이승만, 여운형, 박헌영 처럼 교과서에도 이름이 실릴 법한 인사였다거나, 혹은 김두한 마냥 관련 창작물로 알려져 있다거나 하지 않기 때문에 혼란스런 당시 시대상을 고려하면 별로 사람들에게 이름이 친숙할 이유가 없는 인물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재흥이라는 인물이 유명한 건 인터넷 상에서 퍼진 전체적인 행적, 좀 극단적으로 말해서 '일관적인 병신' 이라는 이미지 때문이었습니다. 인터넷 상에서 웹사이트나 블로그 등에서는 그런 식의 시각으로 쓰여진 글들이 수없이 많은데, 그냥 게중에 하나만 옮기면 대략 이런 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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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아들로 일본 땅에서 태어난 친일파에, 민간인 상대로 학살을 하고, 한국전쟁에서는 자기가 먼저 도망을 쳐서 대패 당하는 졸전을 거듭하고, 미군 장교에게 굴욕을 당하고, 그러면서 이후 잘먹고 잘살다가 나중에 현충원에 묻혔다 --- 그냥 이렇게만 봐도 말 그대로 블랙 코미디 스러운 이력이라고 할법합니다. 때문에 여러 웹사이트 등에서 주기적으로 올라와서 욕 먹는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다만, 인터넷 상에서 볼 수 있는 유재흥에 대한 여러 악평들은, '친일파다 → 친일파니까 나쁜 놈이다 → 나쁜 놈이니까 민간인도 학살 했을것이다 → 친일경력 있는 나쁜 놈이니 전장에서도 멍청한 녀석이었다 → 친일파에 민간인 학살하고 전장에서도 멍청한 짓이다 했던 오물 같은 인간이다' 일종의 이어붙이기 요소가 상당한 편입니다.







유재흥이 일본군 대위 활동으로 친일 경력이 있는것은 맞습니다. 이건 분명한 일입니다. 




다만, 유재흥 본인의 최대 오점으로 욕 먹는 '현리 전투' 관련된 부분은, 과거에 디시 밀갤이나 밀군카, 당시만 해도 관련 커뮤니티에서 영향력이 상당했던 '이글루스' 등에서 각종 괴담 및 일화로 묶여지면서 널리 퍼졌는데, 이 부분은 이후로 상당히 많은 역사/밀리터리 동호인들 사이에서 재평가가 일어난 바 있습니다.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유재흥 도망설' 은 '상당히 악의적인 날조' 고, '상황 자체가 애초에 굉장히 힘들었으며' 무엇보다 "너 병사 어딨냐" 며 큰소리친 미군도 '에드워드 알몬드' 장군이 본래 준비된 국군 부대까지 철수 시키며 오판 하다가 당하는등 '미군도 잘한게 없고 오히려 패전에 책임이 막중하다' 등등의 부분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일전의 악명 및 유언비어와는 상반되는 팩트 체크가 꽤 되서 "유재흥이 병/신이라길래 한번 신나게 까보려고 연재글을 썼는데 조사하면 할수록 그냥 재수 더럽게 없게 걸린, 당시의 평범한 한국군 장교의 능력 정도로 보여서 쓰다가 내가 더 재미가 없더라." 라는 이야기도 본 적이 있습니다.





밀리터리 관련된 논쟁은 제껴두고, 다른 부분에 대해서도 할말이 없지 않습니다. 바로 어제가 4월 3일이었죠. 이 글을 쓴 이유도 4.3 사건 관련해서 유재흥이 갑자기 생각났기 때문인데






4.3사건은 남로당원들이 봉기를 하고, 이를 진압하면서, 이 과정에서 수 많은 사람들이 죽었던 사건입니다. 무장대가 날뛰고 군경 토벌대가 이를 토벌하는데, 무장대 토벌한다는 군경이 엄한 주민들만 학살하고 겁을 주며 달아나게 해서 전부 다 황폐하게 해서 초토화 시키고 막상 제주도의 혼란은 한참동안 전혀 잦아들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소위 말하는 '초토화작전' 으로 애꿏은 사람들만 죽이고 했다는 것이 문제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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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상에서 별로 어렵지도 않게 찾을 수 있는 '제주도 학살마 유재흥' 이라는 글들에 대한 편린들.






역사 커뮤니티 같은 곳에서는 그전부터 알음알음 이야기가 나오다가 대략 13~14년 정도를 기점으로 유재흥이라는 인물에 대한 재평가(?)가 일어났고, - 무슨 사실 알고보니 엄청난 사람이었다는 게 아니라, 천하의 때려죽일 악마도 정박아 수준의 졸장도 아닌 그냥 평범하고 일반적인 개인이었다는 식 - 이런저런 영향 탓인지 최근의 게시물일수록 다소 황당한 수준의 글들은 꽤 많이 사라진 편이긴 합니다. 제 기억으로 13년 정도 무렵에만 해도 포탈에 "유재흥 제주도" "유재흥 4.3사건' 으로 검색만 해도 저런식의 글이 바로 첫페이지에 한 5개는 보이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런데 유재흥이 다른 건 몰라도 제주 4.3 사건의 학살마로 욕 먹는건 굉장히 황당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유재흥은 그야말로 수 많은 사람들이 광기와 어리석은 짓을 되풀이하고 끝없이 뒷맛이 씁쓸한 사건 전재 과정 중, 거의 드물게 상식적인 면모, 양심적인 면모를 보여주며 관계자들 모두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던 극히 드문 몇명 중에 한 명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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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요찬




유재흥이 파견되기 전까지 제주도에 대한 군사 작전의 개요란 그야말로 무지막지 했는데, 당시 계엄사령관인 송요찬은 "해안선 5km 이외 지역에 통행금지령을 내리고 그곳에 있는 사람은 폭도로 간주해 총살하겠다" 라는 포고문을 내리고, 문자 그대로 '초토화 작전' 을 펼쳤습니다. 이 당시 송요찬이 이끌던 부대는 9연대였는데, 당시 미군 보고서에 따르면,



“9연대는 중 산간지대에 위치한 마을의 모든 주민들이 명백히 게릴라부대에 도움과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는 가정 아래 마을 주민에 대한 ‘대량학살계획(program of mass slaughter)’을 채택했다”




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조직적인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우리가 아는 4.3사건 관련 유혈극 중 많은 부분이 이 9연대의 활동기간 중에 이루어졌습니다. 이 9연대의 활동은 1948년 하반기 내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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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병선




12월 말 진압부대는 9연대에서 함병선 연대장의 2연대로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학살 기조는 바뀌지 않았고, 오히려 이전부터 이어지던 기조가 이 무렵 절정을 찍었다고 봐도 좋을 정도였습니다. 49년 1월 무렵에 있었던 이른바 '북촌리 학살사건' 에서는, 2연대가 무장대의 공격을 받아 2명이 죽자 북촌리에 찾아간 2연대가 전체 1,000명 가량의 주민들 중 무려 300명에서 400명을 학살하는 4.3사건 당시 단일 규모로는 최대의 학살이 펼쳐지기도 합니다.











사살‧포로자 숫자에 비해 노획한 무기가 너무 적다는 점은 함병선 연대장이 주도한 3월 한 달 동안의 이른바 ‘섬멸전’의 성격을 말해 준다. 사살‧포로자 중에는 목숨을 구하기 위해 산으로 피난해 언제 잡혀 죽을지 모르는, 죽음의 공포를 견디며 숨어 지내던 비무장 민간인들도 다수 포함돼 있었던 것이다.

이와 관련, 한 미군 보고서는 한국정부의 발표를 인용해 3월 1일부터 4월 30일까지의 토벌대의 전과를 ‘반도(rebel) 사살 1,075명, 반도 체포 3,509명, 반도 투항 2,065명’이라고 보고하면서 “이 보고서에서 언급된 대부분의 ‘반도(rebel)’는 토벌대가 섬 안쪽 산악지역의 모든 주민들을 자동적으로 반도(rebel)라고 분류할 때 비로소 성립될 수 있다”는 논평을 했다.6) 중산간지역에 있는 사람들을 일단 ‘반도’라고 전제해 놓고 사살‧체포한 후 이를 ‘전과’로 보고한 것이다.

이같은 작전은 큰 인명피해를 초래했다. 한 미군 보고서는 1949년 3월말까지의 제주 상황에 대해 “지난 한 해 동안 1만 4,000명~1만 5,000명의 주민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들 중 최소한 80%가 토벌대에 의해 살해됐다. 섬에 있는 주택 중 약 1/3이 파괴됐고, 주민 30만 명 중 약 1/4이 자신들의 마을이 파괴당한 채 해안으로 소개당했다”고 기록했다.7)



─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中





주민학살의 대부분은 1948년 12월까지의 9연대의 점령기간 동안에 자행됐다. 그러한 계획은 외형상 주효한 듯이 보여 1948년의 최근 2개월 동안 제주도에서의 반도 활동은 상대적으로 거의 없었다. 그러나 사실상 9연대의 무차별 진압작전은 새로운 형태의 반란으로 전환케 했다. 12월에 9연대가 2연대에 의해 대치됐을때 새로운 흐름의 게릴라 테러가 닻을 올렸다.

함병선대령이 지휘하는 2연대는 처음에 해변의 부락에 숙소를 정했다. 함대령은 섬사람들에 대한 계도 선전계획과 함께 반도들의 하산을 호소했다. .... 2연대는 다소 공격적이 됐다. 그러나 그들의 행위는 주로 반란군을 도와준 혐의를 받고 있는 해안부락민들에 대한 보복에 한정됐으며 종종 부락민들을 재판의 혜택도 없이 즉석에서 대규모로 처형하기도 했다.

* 유 대령의  도착

반도들에 대한 작전은 통합부대장인 유재흥 대령이 제주도에 파견된 3월 2일 이후에야 실제로 성공하기 시작한다...



─ 미군 비밀문서 『4·3 종합보고서』中









당시 상황을 묘사한 미군의 보고서에서도 그렇고, 이런저런 자료를 수집해서 발표된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에서도 함병선이 주도하던 1949년 3월 까지의 정세에 대해서 "섬멸전을 펼침" "민간인을 일단 죽이고 반도라고 보고함" "재판도 없이 대규모로 즉결 처형함" "1만 5천명 정도는 죽었고 섬 내 주택의 80%는 소멸 되었고 30만 명의 전체 제주도민 중 무려 4분의 1이 본래 마을을 잃어버림" 등등의 글로 가득차 있습니다. 실제 무장단을 억제하는 효과는 전혀 없이, 그냥 사람만 죽이는 과정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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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3월 유재흥은 제주도 지구 전투사령관으로서 제주도에 도착합니다. 본래 3월 2일 이 자리에 임명 되었지만 실제로 제주도에 온 것은 3월 마지막 주였고, 여태까지는 함병선의 지휘 아래 초토화 작전이 계속 이어지던 중이었습니다. 당시 미군 보고서에서는, "유재흥이 제주도에 온 다음에서야 (아무 의미없는 학살 말고) 좀 제대로 된 작전이 시행되었다." 고 평가했습니다.




일단 제주도에 온 유재흥은 경비행기를 타고 제주도를 한바퀴 쭉 둘러봤습니다. 한라산 주변을 정찰한 결과 중산간 지대는 모두 불타버린게 보였는데, 그런데 한라산 곳곳에 수많은 피난민들이 있는 것이 눈에 띄였습니다.




또 당시 제주도의 인적 배치 상황을 보면, 해안가 지방은 경찰들과 군인들이 쫙 꽐려서 머물고 있었고, 산쪽에는 이런 군경의 공격이 무서운 주민들이 도망가서 피난민으로서 있었으며, 그런 사이사이에 진짜 무장단이 섞여 있었습니다. 이런 상태로는 제대로 된 무장단 토벌이 될 리도 없고, 아무 상관 없는 주민들을 몰아넣으면서 무장단 속에 섞이게 만들어버리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말 그대로 제주도를 '해안가' 와 '산 속' 으로 분단 해버리고 있었던 셈입니다. 아직 산으로 올라가지 않고 있는, 해안가 부근에 남아 있는 일반 주민들이 눈에 불을 키고 돌아다니는 군경에게 위협 당하는 일도 비일비재 했을테고 말입니다. 




떄문에 유재흥은 이런 문제를 파악하고, '일단 토벌군은 해안가에서 놀고 있지 말고 산으로 들어가라.' 며 진짜 무장단이 있을법한 산속 깊은 곳으로 올려 보냈습니다. 





"제주도에 가보니까 산중에 피난민 2만 명 정도가 있었어. 그리고 바닷가에는 경찰 군인이, 산쪽에는 공비하고 피난민이 있는 등 서로 갈라져 있으면서 밤이 되면 욕하고 싸우는 상황이었어. 그래서 나는 ‘군인은 무조건 산으로 올라가라, 공비토벌 해야 한다’며 3개 대대와 1개의 유격대대 등 4개 대대를 한라산 중복지역으로 이동시켰어. 처음에는 각기 전투지역이 있으니까 각 대대가 다니면서 소탕을 했고, 마지막에는 내가 4개 대대를 기동시키면서 작전을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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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제주도민들






일단 군대를 산 위로 올려보내면서, 동시에 탄압이 무서워서 산 위에 올라가 있는 주민들을 내려오게 만드는 일도 중요했습니다. 나중에 작전이 종료 된 후 서울로 돌아왔을때 유재흥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하여간 해안선에서 위로는 다 태워버려 없어진 상태였고, 산중에는 피난민 2만명 가량과 무장공비 230명 가량이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폭도 중에 진짜 공산당이라는 것은 극히 적고 무지로 휩쓸리어 들어간 자가 많았다. 우리는 이들을 귀순시켜 피를 흘리지 않도록 노력하였다.”





이렇게 선무공작(宣撫工作)이 실시 되었습니다. 이 당시 부대의 임무는 어디까지나 '군 임무' 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주민들이 내려왔을때 발생되는 민간의 행정적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령부 내에 민사처가 설치 되었고, 주민들을 위로하기 위한 군악대도 내지에서 따로 파견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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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中
일전까지의 무분별한 살육 작전을 중지시키고, 일단 구금한뒤에 조사해보는 작전을 쓰며 삐라 뿌리기를 시행한 유재흥






당시 미군보고서에 따르면, '일단 죽여놓고 보기' 라는 기존 에서 벗어나 체포한뒤 심문을 한 유재흥의 이런 행보는 대단히 성공적이었다고 합니다.






"지휘권을 잡은 즉시 유 대령은 전임자 함병선의 가혹한 작전(이 작전은 신분이나 무기의 소지여부를 가리지 않고 폭도 지역에서 발견된 모든 사람을 사살하는것을 포함한다)을 바꾸어 즉각적으로 사면계획을 시작하였다. 가능한 한 포로들을 붙잡아서 유 대령 자신이 직접 심문하였다. 포로들은 양심의 가책을 나타냈으며 만일 그들이 게릴라 전투요원으로 가담한 자가 아니면 음식과 담배 등을 주어서 석방하였다. 현재까지 이러한 방법의 결과는 만족스럽다. 왜냐하면 석방된 포로들은 유대령의 부대를 무기 은닉처로 안내할 것이며 그들의 동료들에게 항복하면 모두 사살당하지 않고 공정하게 대우를 받을 것이라는 말을 퍼뜨릴 것이기 때문이다. 유 대령은 자신의 사면계획 하에서 석방된 포로들마다 최소한 6명씩을 데리고 왔다고 추산하고 있다."







유재흥은 잡혀온 포로들을 자신이 직접 나서서 심문 하면서 조사했고, 고문하거나 무섭게 협박하기보다는 은근히 타이르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그리하여 진짜 주도적으로 나서서 전투를 한 요원, 한마디로 '진짜 무장공비' 가 아닌 한, 어쩌다보니 그들에게 지원 해주는 식량이나 머물 곳을 지원해주게 된 간접 지원자들(그리고 거의 대다수들)은 아무 처벌도 받지 않고, 오히려 음식이나 담배를 받고 석방되었습니다.



불안하고 두려운 상황에서 생각보다 좋은 환대를 받고 풀려난 이들은 당연히 춥고 배고픔에 떨고 있는 동료들에게도 이런 이야기를 했고, 대다수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항복하기 위해 내려오는 탓에, 아무 의미도 없이 사람 수백 수천명을 죽이고도 남아있던 무장단은 거의 괴멸에 가까워지게 됩니다.




미군 비밀문서를 보면 이에 대한 묘사가 좀 더 나옵니다.






그는 자신의 부대를 해변에서 밀어올려 게릴라들과 대치중인 산으로 보냈다. 그는 사면계획을 채택해 중산간 주민에 대한 무분별한 사살을 중지토록 요구했다.

현재의 정책은 작전중 잡혔든 자발적으로 항복했든 간에 산에서 내려온 모든 사람을 구금하는 것이다. 여자·어린이·노인은 대부분 피난민으로 분류되고 있는 반면, 전투가능 연령의 남자들은 피난민 지위가 부여되기 전에 철저히 검색되고 교육되어진다.

유대령 도착이후 300명의 반도들과 그 동조자가 사살당했고 1,500명이 수감됐으며, 소총 22정과 권총 1정이 회수됐다. 무장반도들은 은신처를 이곳저곳으로 옮기느라 고통받고 있다. 3월 9일에는 軍 1개 소대의 매복을 피해가기도 했는데 이제는 정면공격이나 마을 기습 역시도 불가능한 상황이다.

─ 미군『4·3 종합보고서』




부대를 해변에 머물게 하는 대신 산으로 보내고, 산 속 깊은 곳에 해변가의 중간 부분인 중산간 지대에 집중적으로 모여있는 피난민들에 대해서 발포를 중지하는 대신 이들을 일단 구금하고, 여자나 어린이와 노인은 대체로 피난민으로 분류해서 쉽게 풀어주지만 전투 가능한 연령대의 남자들만 좀 더 집중적으로 조사하는 방식.







또한 당시 제주도민들에 대해 가장 행패가 큰 무리들이자, 제주도민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이 바로 '서북청년단' 이었습니다. 유재흥은 이들이 활개치는 것을 막으면서 제주도민들의 두려움을 덜게 해주었습니다.




“제주도 사람들이 싫어하는 서북청년들의 횡포를 막으면서 ‘과거 일은 불문에 부칠테니 안심하고 내려오라’고 선무했고 또 실제로 몇 군데 그렇게 한 결과 소문이 나서 매일 몇 천명씩 내려오니까 2만 명이 금방 내려오게 되었다.”




이런 결과 끝에, 유재흥이 파견된지 얼마 되지도 않는 3월 한달에만 1,500명이 귀순했고, 다시 3월 25일에서 4월 12일 무렵에는 3,600명이, 6월 초까지는 6,000명 이상이 귀순해 왔습니다. 당시 보고서에 따르면 6월 초 시점에서 6000명 중 1,800명 가량은 아직 구금 되어 조사중이만, 나머지 4,000명은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이렇게 두달 사이에 제주도를 빠르게 안정화 시킨 유재흥은 5.10 재선거가 무사히 치뤄지는 것을 확인한 후 며칠 뒤에 제주도를 떠났습니다. 이와 거의 비슷한 시점에서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도 공식 폐지되었고, 악명 높은 서북 청년단도 사령부와 함께 본토로 돌아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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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에 대한 이야기를 할떄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 바로 정치적 시각에 따른 왜곡, 날조 문제 입니다. 혹자는 또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유재흥 이 놈에 대해서 너무 금칠이 심한거 아니냐" "미화가 좀 심하네" 등등등...




그런데 이 글에 다룬 내용의 출전에서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게 '제주 4.3사건 진상보고서' 인데, 이 보고서는 2003년 '4.3특별법' 을 통해 구성된 위원회를 통해 발간 되었고, 노무현 정부 시절에 만들어지고 서문 쓴 사람은 당시 국무총리 고건이고 작성기획단장을 맡았던 인물은 지금 서울시 시장인 박원순 입니다. 노무현 고건 박원순이 하는 말이 다 옳다는 건 아니어도, 최소한 여기서 설명한 유재흥의 면모가 정치권의 양대 구분에서 자기쪽편 얼굴 금칠해주기 같은 식으로 나온 묘사는 아니라는 점은 확실합니다.



오히려 '박원순이가 쓴 4.3사건 보고서는 다 거짓부렁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 유재흥에 대한 묘사도 금칠해주는 구라라고 하게 되는) 라는 주장은 검색해보면 주로 조갑제 닷컴 이런데서 글이 보이는데.... 아무튼 그 이상의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만, 행적의 출전에 대한 정치적 시각과 성향에 따른 왜곡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될 것이라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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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9월 필자 등은 서 장군과 면담하기 위해 한강변에 자리 잡은 아파트로 찾아갔다. 사전에 초토화작전의 지휘계통, 미군 고문관과의 관계, 군법회의의 실체, 9연대 프락치 사건의 진상, 계엄령에 대한 인지여부 등 수십 개항의 질문지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송요찬 연대장 밑에서 부연대장을 맡은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초토화 등 중요한 질문에는 "당시 상황에 대한 기억이 없다"는 답변으로 일관했다. 너무나 실망스러운 면담이었다....


군 지휘관 중에 유재흥 장군(중장 예편·국방장관 역임)도 진솔하게 증언조사에 응했다. 그는 송요찬-함병선 연대장이 초토화란 강경 진압작전을 벌였음에도 제주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1949년 3월 당시 대령의 신분으로 제주도지구전투사령관으로 부임했다. 그는 두달여의 짧은 재임 기간에 해안지대에 주둔했던 진압부대를 산악지대로 이동시켜 본격적인 무장대 소탕전을 벌이는 한편 대대적인 선무작전도 추진했다. 

그는 "경비행기로 한라산 주변을 정찰한 결과 중산간 지대는 모두 불탔고, 그런데 한라산 곳곳에 수많은 피난민들이 보여서 '하산하면 과거의 죄를 묻지 않겠다'는 선무 삐라를 뿌렸다"고 증언했다. 군 지휘관 출신의 입에선 듣기 힘든 '피난민'이란 표현이 나온 것이다. 그것은 실제 상황이었고, 이후 한라산 기슭을 헤매던 수많은 입산 피난민들이 하산의 길을 택하게 된다.

군 장교들을 대상으로 증언조사를 하면서 느낀 것은 정상적인 진압작전을 했거나 학살극에 참여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비교적 진솔하게 증언한 반면 유혈의 한복판에 있었던 사람들은 '모르쇠'로 일관한다는 점이다. ...








제주 4.3사건 관련해서 조사나 신경도 많이 쓸 수 밖에 없는 입장인 제민일보(제주지방 일간지) 같은 언론에서도,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듣기 위해 만난 당시 관련이 있던 많은 군 관계자들이 모르쇠로 일관하는 모습에 비해서, 유재흥은 인터뷰 등에도 적극 협조하며 진솔하게 당시 사건 이야기를 해주고 협력해줬다는 것에 대해 고마움을 표시하기도 했습니다. 




이런저런 모습을 봐도, 유재흥은 간혹 몇몇 유언비어가 말하는 것처럼 4.3사건에서 무슨 수천명에서 수만명을 학살한 살인마긴 커녕,



오히려 폭력이 극에 달한 시점에서 아주 상식적인 시각으로 문제에 접근해서 짦은 2개월 정도의 시간 속에서 문제를 빠르게 해결하고, 최소 수천명에서 최대 2만명의 목숨을 구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지 아쉬운 것이 있다면, 당초에 유재흥 장군은 귀순한 사람들에 대해 죄를 묻지 않겠다고 했는데, 5월 초에 떠났을 무렵 아직 감옥에 있어서 석방되지 못했던 1,600명 정도의 사람들은, 진상보고서에 따르면 무죄 방면 되지 못하고 전국 각지의 보고서로 흩어지거나, 심할 경우 처결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유재흥이 떠난 이후에는 함병선이 좀 더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제민일보 인터뷰 등을 통해 보면 "내가 제주도를 떠난 뒤의 상황은 잘 알지 못한다." 고 유재흥은 이야기 하더군요. 그 문제만 뺴면, 48~49년 겨울 동안 산속에서 굶주리며 아사 직전이었던 수 많은 사람들을 살린 공적이 있다 할법 합니다.






* 노틸러스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9-10-08 11:01)
* 관리사유 :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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及時雨
19/04/04 03:24
수정 아이콘
이때 제주도에서 일본으로 도망쳐서 재일교포 된 사람들 정말 많더라고요.
조병옥 최대의 실책이자 제주도의 슬픈 역사입니다.
유재흥씨는 새삼 다시 보게 되네요.
10년째도피중
19/04/04 04:06
수정 아이콘
유재흥 욕도 이글루스에서 보고 유재흥 재평가도 이글루스에서 처음 봤더랬지요. 덕택에 양쪽 다에 휘둘려 봤습니다. 흐흐흐.

모든 프레임이 그렇습니다만 특히 '친일파'라는 프레임은 너무한 면이 있습니다. 말씀하신대로 그냥 '친일파'라고 해버리면 "그 사람 친일파니까 그런 짓도 했겠지"라고 너무 의심없이 단정짓는 모습이 많아요. 저 사람들 구제해주자가 아니라 사안은 사안대로 접근해야 한다는 건데 그게 너무 안된단 말이죠.
여기 가장 큰 책임은 언론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교육도 만만치 않죠. 차라리 사명의식을 가진 사람들은 어찌보면 괜찮아요. 그런데 책임있는 자리에 있으면서 평상시 관심도 없다가 꼭 무슨 날만 되면 한마디씩 하는 양반들이 제일 문젭니다. 그렇게 사람들을 바보로 만들어요.

별개로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덕택에 정리가 잘되었습니다.
모리건 앤슬랜드
19/04/04 04:23
수정 아이콘
태어나보니 아버지가 조선출신 일본군 고위 장교였으니 비슷한 시기 조선에서 나고 자랐던 청년들의 고뇌 이런 부분이랑은 당연히 거리가 있었을테고 본인도 선택할수 있는 길이 많지 않았겠지요. 비슷한 예로 일본군 대좌까지 했던 김석원 장군의 아들도 태평양 전선에서 전사해 야스쿠니 신사에까지 합사되었다죠. 당연히 부자가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되었구요. 직 간접적으로 주변인이 피해를 본 입장에서야 다를수 있겠습니다만 후대인의 입장으로 멀찍이 바라보는 입장에선 무조건 나쁜놈들 친일파들이라고 매도해버리는것도 쉽지 않은부분이네요.
klemens2
19/04/04 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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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읽어보니 상식적이고 당연한 조치를 행한 것 같은데 금수만도 못 한 것들 때문에 빛이 나는 군요. 근현대사는 관련 책이나 글 읽을때마다 너무 슬픕니다.
강미나
19/04/04 0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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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오래되서 기억도 잘 안나는데 노무현 정권 당시에 유재흥이 뭔가 기존 장성들과 정치적 발언을 했고(전작권이었으려나....) 그걸 기점으로 유재흥 비난 글이 인터넷에 좍 퍼졌던 게 분명 의도가 있는 글이었죠. 나이 많은 사람들 입맛 맞춰주는 유튜브 방송이나 다를 바 없는 글이었어요.
wish buRn
19/04/04 0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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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세대가 일제치하에 있었고
곧바로 큰전쟁까지 겪었습니다.

남한이 살아남을 때 일제부역자 공이 없을수 없죠...
새강이
19/04/04 0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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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감사합니다 지금은 많이 희석되었지만 4.3사건은 제주도민분들이 외지인을 믿지 못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죠 정말 슬픈 사건이고 지금이라도 재조명되어 다행입니다
치열하게
19/04/04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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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흥 장군 깍아내리기(?)는 본문 자료에도 있듯이 '전작권 환수' 논리를 만들기 위해서 의도된 거라고 생각합니다.
당장에 나라 구한 수준이었던 '영천전투'같은 건 빼고 패전이었던 '현리전투'를 들먹이며 '이 놈 때문에 전작권을 미국이 가져갔다. 그리고 이 놈은 무능하며 나쁜 친일파다' 논리를 만드는 거죠. 잘한 일 중 하나로 평가받는 43사건에서의 행동도 왜곡해가면서요.
강미나
19/04/04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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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망할 위기에서 일제부역자 출신들이 나라를 위해 싸웠으니 한국사가 시작부터 혼돈 그 자체였을 밖에요....
미끄럼틀
19/04/04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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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네요. 4.3에 대해 어느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왜곡이 있는지 몰랐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19/04/04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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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덕술같은 목을 매달아도 시원찮을 악질 친일파가 국가 훈장을 받았으니..
하여튼 이승만 쓰레기의 과오가 너무 큽니다..
홍승식
19/04/04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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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보면 볼수록 선동과 날조는 좌우를 가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괄하이드
19/04/04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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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악마는 함병선이라는 놈이군요.
도들도들
19/04/04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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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바람, 돌이 많아 삼다도.
가뜩이나 태풍에 휩쓸린 뱃사람이 많아 여초였는데, 4.3.때문에 남자들이 하도 죽어서 진짜 여자들만 남았다는 말이 있죠. 물론 지금은 남초로 전환되어 옛말이 됐지만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19/04/04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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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리 갔다 4.3 추모관 보고 먹먹했는데 이 글 보고 또 참 답답한 감상이 드네요. 진영 나눠서 누군 이편 누군 저편 하며 날조하고 금칠하고... 글 너무 잘읽었습니다.
하야로비
19/04/04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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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에도 나온, 4.3 학살 당시 초토화 작전으로 수많은 민간인 희생자를 냈던 송요찬 장군은 1960년 4.19 혁명때는 이승만의 계엄령 선포에도 불구하고 "군은 절대로 시민에게 발포하지 마라!"고 명령하여 대형 학살을 막고 이승만과 시민대표 면담을 주선하여 혁명이 최소한의 희생으로 끝날 수 있게 유도하였죠. 때로는 역사를 평가하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19/04/04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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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때 쓰는말이 공과 과를 구분해야 된다. 인것 같네요.
인간이란게 한쪽면만 가질 수 는 없으니까
반다비07
19/04/04 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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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었습니다.
초짜장
19/04/04 13:24
수정 아이콘
햐 거참... 43때 미친 짓한걸 반성하고 새 사람이 된건지, 대세 맡는 후각이 엄청나서 홀라당 넘어가버린거지...
19/04/04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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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흥이야 영천 전투 같은 이길 수 있는 전투에서는 이기고 못 이길 전투에서는 지고, 한 평범한 장군이죠. 개전 초 문산-의정부 전투에서의 패배도 그야말로 역부족이었고, 현리 전투조차 알몬드의 삽질이 합쳐지며 벌어진 것이라(물론 그렇다 쳐도 대응이 안된 점 자체는 잘못 맞습니다만) 저런 평범한 장군을 넘어서는 장군이 별로 없었던 것이 당시 한국군의 현실이고. 저도 한때는 유재흥 엄청나게 졸장이라고 욕했었는데 알게되면 알게될 수록 과하게 까인 사람이라는 답이 나오더군요.

정치가 역사를 범하며 결론을 뒤집어버린, 있어서는 안될 안 좋은 사례중의 하나겠죠.
happyend
19/04/04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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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육지사람들에겐 4.3이란 이런거구나 싶네요.
제주사람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도 .......유재흥을 은인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좀 까칠해보이지만.....
정말 당황했습니다.
제주 4.3의 진실에는 사실과 관점이 존재합니다. 오죽하면 정명조차 못한 채 부유하겠습니까....
지금 시점에서 유재흥을 평가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들이 많다보니...까칠했습니다만, 그래도 관심에 대해선 감사할 따름입니다.
19/04/04 19:25
수정 아이콘
저도 지금까지 유재홍이 x신 같은 장군으로 생각하고 있었는 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군요.
19/04/04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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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민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네요
happyend
19/04/04 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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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게 쓸 형편이 못되어서 간략하게만 말씀드리는점 양해바랍니다.

국군과 미군은 제주를 실전훈련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한국전쟁때 전과를 거둘수있었죠.대부분의 장교들이 그 경험으로 출세합니다.
미군도 아시아정책이 초토화 ㅡ베트남에서 써먹게되는계기죠.

그러니까 유재흥이 1948년에 부임했다면 똑같았을겁니다.
그런데 1949년 부임 목표는 단하나.
재선거 성공시키는거였죠.
그작전이 성공한것일뿐.
말그대로 흑묘백묘

ㅡ이게 저의 관점이고 제주사람들의 생각일겁니다
19/04/04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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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감사합니다 예전에 올리셨던 글도 잘 읽었었어요
신불해
19/04/04 2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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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흥 부임 하기 반년 전도 아니고 불과 두달 전만 해도 함병선의 지휘 아래 300~400명을 한꺼번에 죽이고 부임 직전까지만 해도 아무런 진전도 없었다가,


미군 비밀 문서든, 훗날 진상조사위원회의 조사보고에서건, (다른사람도 아닌 4.3사건에 대해 주기적으로 기사로 다루는 제주도민들 당사자들의 지역지인)제민일보의 훗날 당사자 인터뷰 등에서건 "유재흥이 오기 바로 직전까지만 해도 섬멸전이 지속되었지만 유재흥이 오고 난 직후부터 바뀌었다." 고 일관되게 언급하고 있는데


부임 바로 직전까지만 해도 모든게 초토화되고 학살되는 상황에서 정상적으로 일을 되돌린 사람에 대해 "이전에 왔으면 그 사람도 똑같았을것" 이라는건 좀 그런듯 합니다. 똑같을 것이라는건 유재흥도 수천명 학살했을 것이라는 말이나 진배 없는데, 실제로는 수천명 살린 결과를 낸 사람이 (하지도 않는) 수천명 죽인것과 똑같은 취급 받으면서 욕먹는건 좀 부당하지 않나 싶네요.



유재흥을 은인으로 생각하거나 유재흥의 은혜에 감읍하라는 주제가 아니고, '최소한 엄한 사람 하지 않을 일 가지고 부당하게 욕은 하지 말자.' 는게 글에서 다루는 내용이기도 하니까요. 확실한건 유재흥이 오기 바로 직전까지도 학살글이 벌어졌고, 유재흥이 떠난 직후에도 1,600명 처벌 및 사살 같은 일이 있었구요.



http://www.jnuri.net/news/articleView.html?idxno=25503
군 지휘관 중에 유재흥 장군(중장 예편‧국방장관 역임)도 진솔하게 증언조사에 응했다. 그는 송요찬-함병선 연대장이 초토화란 강경 진압작전을 벌였음에도 제주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1949년 3월 당시 대령의 신분으로 제주도지구전투사령관으로 부임했다...
군 장교들을 대상으로 증언조사를 하면서 느낀 것은 정상적인 진압작전을 했거나 학살극에 참여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비교적 진솔하게 증언한 반면 유혈의 한복판에 있었던 사람들, 그 집행자들은 ‘모르쇠’로 일관했다는 점이다....



4.3 사건에 대해 누구보다도 더 조사도 보도도 많이 했을 제주도 지역 언론지에서도 유재흥에 대해서는 '진솔하게 관련 이야기를 해주며 협조했다' 거나, '정상적인 작전을 하고 학살극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은 진솔하게 협조해주었고, 반면 유혈극의 한복판에 있었던 집행자들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라는 식으로 유재흥에 대해서는 4.3사건의 비판과 거리를 두는 의견들이 있습니다.
강미나
19/04/05 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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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역시 당사자로서의 이런 입장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실제 6.25를 겪은 분들이나 그분들로부터 직접 영향을 받은 분들이 아무리 많은 세월이 흐르고 많은 변화가 있더라도 북한과 좌익에 대한 적대감에서 벗어날 수 없듯, 제주의 비극은 깊고, 그로 인해 제주도민들이 가지는 국군에 대한 뿌리깊은 적대감은 당연한거죠. 사실만 가지고 설득할 수 없는 부분은 엄연히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사람이니까요.
happyend
19/04/05 07:12
수정 아이콘
음.유재흥이 제주를 살리기위해 애썼고 그래서 차별성이 있다는 주장에 대해
ㅡ저는 그럴 가능성이 없다고 확신할수는 없지만
단 한가지는 만일 1948년에 부임했다면 함병선 송요찬과 같았거나 안그랬다면 일찍해임되었을겁니다.
그게 4.3의 비극이니까요.
다만 유재흥대신 다른 군인이 선무활동에 나섰을때 같은 결과를 낳았을거란 제 의견이 너무 단순하다면 제 한계입니다.
어찌되었든 제가하고자한말의 핵심은
ㅡ지금 진실을 밝혀 비극의 원인과 책임자를 역사앞에 드러내는게 우선이 아닐까
그 다음 살리신분들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하는거죠.
예컨대 그 무시무시한 육지경찰중에도 문형순같은 고귀한분도 계셨고
서북청년단에도 교회다니는사람들 구해준 기독교인도 있고
군인들 가운데도 초토화작전을 전범이라고 맹렬하게 거부한 김익렬연대장이나 총을 바닥에 쏴서 수백명중 한명쯤 생존자가 생기게 한분들도 있죠
하지만 유재흥 사령관의 목적자체가 토벌이 아니라 선무용 임명이었으니
선무를 잘한것이 훌륭하긴하지만 은인이라기엔 그 역시 자신의 선의와 역사의식과 인권의식을 가진건 아니었고.
선무기간 중에도 대량학살과 공포는 존재했으니까요.
다만
말씀하시고자하는 취지 ㅡ4.3의 비극을 초래한 두 연대장에 비해 다르다는점은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유재흥도 제주에서 선무가 아니라 토벌을 지휘할수있었으면 한국전쟁때 그 꼴은 안당했을수도 있겠죠.연습된 지휘자니까요.ㅡ이건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긴하지만
수많은 군인 경찰들이 여전히 4.3의 유혈위에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으며 마약중독자였던 정보장교는 어느지역에 홈페이지에도 등장했다 제주도민의 항의로 사라지게된것도 불과 몇년전부터입니다.

장황했지만 유대인학살보다 비극속에 도움을 준 이들을 더 감동스러워하는게 사실입니다.
전국이 외면한채 고립된섬에서벌어진 비극에 대해 따뜻한손길을 내민분들을 소개해주시려던 취지로 여기겠습니다.감사합니다
신불해
19/04/05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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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민들의 아픈 기억과 회한 그리고 그 런 기억이 잊혀지지 않고 무엇보다 큰 피해를 입은 당사자들이 가장 주목 받아야, 그들의 아픔에 대한 기억을 잊지 않고 있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십분 공감합니다.





다만 유재흥 같은 경우는 아픈 기억의 당사자인 제주도민을 제쳐두고 이 사람을 먼저 치켜세운다ㅡㅡ 이런 부분을 떠나서 워낙 유언비어와 각종 날조의 희생향이었던 부분이 있어서 '최소한 하지도 않은 일 가지고 엄한 사람 욕하는건 막아야 하지 않나. 그 날의 진정한 진상에 다가가는데 도움이 되지도 않고.' 라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런점으로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happyend
19/04/05 12:05
수정 아이콘
네.
좋은글에 제가 흥분한것같아 죄송합니다.
좋은하루되시고.건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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