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18/06/04 02:18:17
Name 마스터충달
Subject 글을 쓴다는 것
  50,000

  글깨나 쓴다는 소리를 듣다 보면 오만해지기기 쉽다. 사람들의 칭찬에 우쭐거리기 때문만은 아니다. 물론 뜨거운 호응을 받으면 어깨에 힘이 팍 들어갈 때도 있다. 그러나 뽕은 맞을 때 뿐이다. 시간이 지나면 그 또한 지나간다. 뽕 맛에 취해서 오만해지는 사람은 오래가지 않아 무너진다. 그런데 뽕쟁이가 아니더라도 오만해질 수 있다. 잠깐의 우쭐함을 넘어 꾸준히 성장하는 와중에도 오만해질 수 있다. 왜냐하면 성장하기 때문이다.

  글을 쓰다 보면 조리 있게 쓰기 위해 생각이 많아진다. 앞뒤 문맥을 살피고 말이 되는지 따진다. 적확한 단어를 사용하여 내용을 깔끔하게 함축한다. 이런 고민을 매일매일 반복한다. 반복은 훈련이 되고 습관이 된다. 그렇게 성장한다. 평소에 책 한 권 안 읽고, 글 한 자 안 쓰는 사람과 차이가 벌어진다. 어쩔 수 없다. 인간의 사고 능력은 꾸준히 쓰지 않으면 낡는다. 우리나라 성인의 40%가 일 년에 책 한 권 읽지 않는다.* 통계는 없지만, 글쓰기가 더 심하면 심했지, 덜 할 거라 생각지는 않는다.
*http://www.index.go.kr/potal/main/EachDtlPageDetail.do?idx_cd=2694

  이 차이가 오만함을 부른다. 조리 있게 말하는 것이 뭔가 대단한 능력이나 된다고 생각한다. 횡설수설하는 상대에게 말 좀 조리있게 해보라며 타박한다. 요점 정리가 안 되는 글에 짜증을 낸다. '저 사람은 제대로 말도 못하고, 생각이 없나?' 이런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표현하지 못한다고 생각조차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말을 못 한다고 생각마저 없는 것은 아니다. 요즘 그를 볼 때면 그런 생각이 자주 든다. 그는 언어와 별로 친하지 않다. 책을 많이 읽지도 않고, 나를 만나기 전에는 영화도 좋아하지 않았다. 글을 쓰지도 않고, 달변가도 아니다. 종종 두서 없는 소리를 하기도 한다. 논리적인 서술에 있어 나와 실력 차이가 존재하는 게 사실이다.  

  그런데 종종 나를 깜짝 놀래킬 때가 있다. 전혀 뜬금없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핵심을 찌르는 경우가 많다. 특히 작품을 감상할 때 자주 느낀다. 그는 감상을 엉뚱하게 표현할 때가 있다. 그래서 무슨 뜻인지 다시 물어보고, 또 물어보고, 하다 보면 처음 표현한 말이 묘하게 핵심을 관통한다는 걸 깨닫게 된다. 내가 작품을 해부해가며 노트에 빼곡하게 의미를 적어나가고 있을 때, 그는 그냥 느껴버리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설득력 있게 서술하지 못할 뿐, 나보다 더 많은 걸 느끼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내가 오만함을 그대로 드러내는 무례한 사람이었다면, 그의 재능을 못 알아차렸을지도 모른다. 천만다행으로 나는 그의 생뚱맞은 소리를 들었을 때 무례하게 굴지 않았다. '그게 뭔 소리여?', '진짜 생각이 없냐?' 이런 소리는 절대 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게 무슨 뜻이야?', '자세히 알려줘.', '이렇게 말해볼까?'라고 했다. 내가 예의 바른 사람이라는 자각은 없지만, 이런 걸 보면 부모님이 가정 교육을 잘 하신 듯하다.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예술을 감상하는 데 있어 정답이 없다는 걸 절실히 느낀다. 세상에는 사람 수만큼 갖가지 감상이 존재할 것이다. 다만 모두가 조리 있게 표현하지 못할 뿐이다. 적절한 훈련만 한다면 그도 이동진이 되고 앙드레 바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너무 나갔는데? 어쩌면 위대한 수준에 오르는 데 있어 오히려 내가 불리할지도 모른다. 먼저 이해하고 나중에 느끼는 것보다, 먼저 느끼고 나중에 이해하는 게 훨씬 촉촉하기 때문이다.





  글이란 결국 소통이다

  세상에 천재는 있어도 바보는 없는 것 같다. 물론 바보 같은 짓을 하는 사람이 많긴 하지만, 시야가 좁아지면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지는 법이다. 사람이 아니라 상황이 바보를 만든다. 물론 꾸준히 바보짓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도 사람은 바보가 아니다. 굳이 바보를 꼽자면 신념일 것이다. 아무리 똑똑해봤자 멍청한 신념을 따르면 멍청한 짓을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좋은 신념은 걸레처럼 너덜너덜해야 한다)

  만약 주변에 바보가 널려있다고 생각된다면, 그건 정말 바보가 널린 것도 아니고, 자신이 천재인 것도 아니다. 아마 생각의 깊이에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 다만 그걸 끌어내는 소통이 부족할 뿐이다. 누구라도 진지하게 말할 기회를 주면 깊이 있는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이를 말로 끌어내면 대화가 되고, 글로 풀어내면 글쓰기가 된다.  

  따라서 글쟁이는 친절해야 한다. 다른 이의 생각을 끌어내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렇게 마음 속 생각을 친절하게 끌어내면 상대방을 감동시킬 수 있다. 그런 사람이 많아지면 인기글이 된다. 좋은 글은 그 와중에도 올바른 가치를 벗어나지 않고, 누군가를 차별하며 상처 주지 않는 것이다. 위대한 글은 이것을 국가나 시대 단위로 해내는 일이다. 이걸 인류 단위로 해내면 종교가 되나?





  겸손하고 친절해라

  글깨나 쓴다는 소리를 듣는다면 겸손해야 한다. 말 좀 조리있게 한다고 생각마저 뛰어난 것은 아니다. 잘 훈련되었을 뿐, 똑똑한 게 아니란 말이다. 다행스럽게도 세상에는 내가 오만할 수 없도록 자괴감을 선사하는 훌륭한 글이 널려있다. 그들에 비하면 내가 얼마나 작고 하찮은 존재인지 깨닫게 된다. 그래도 정신 못 차리고 오만해지려 하면 여기저기서 나를 담금질한다. 인터넷 변두리의 작은 커뮤니티에서조차 얼마나 많은 지적과 꾸지람을 들어야 했던가. 실로 고마운 일이다. 긴 시간을 할애한 장문의 쓴소리에는 애정이 담뿍 담겨있다. 물론 약간의 우쭐함과 나 잘난 맛도 있겠지? 그 덕에 나는 반성하고, 고민하고, 발전할 수 있었다. 아직도 한참 모자라 떫은 처지이지만, 그래도 조금씩 익어가고 있음을 느낀다. 따가운 폭염도 햇살은 햇살인 셈이다. (물론 그저 비난하고 싶어서 비난하는 것은 신경 꺼야 한다)

  꾸지람이 나에게서 겸손을 끌어내듯이, 나 또한 글을 통해 독자의 마음을 끌어내야 한다. 내가 떠올린 기막힌 생각은 다른 누군가가 이미 떠올렸을 것이다. 어디서도 볼 수 없다면, 단지 글로 표현하거나 실용화 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걸 끌어내어 텍스트로 바꾸는 게 글쓰기다. 예전에는 글쓰기란 '너에게 나를 보내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생각이 달라졌다. 나를 받아들이는 독자라면 애당초 나와 비슷할 확률이 높다. 사람들은 공감할만한 글에 공감한다. 잘 썼다고 공감하지 않는다.

  글을 쓴다는 것은, 결국 '너에게 너를 보내는 일'이다. 나는 단지 글이라는 이름의 거울을 제공할 뿐이다. 그대가 이야기하고 싶은 생각을, 나의 잘 다듬은 필력으로 대변해주는 일이다. 그래서 친절해야 한다. 친절함이 독자와 소통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그렇게 통하게 되었을 때 상대의 욕망을 알 수 있고, 그 욕망을 풀어내주면 공감을 얻게 된다. 그런 사람이 천 명, 만 명을 넘어가면 좋은 글쟁이가 되는 게 아닐까?

  본격적으로 글쓰기 시작한 지 5년이 지나서야 이걸 깨달았다. 나는 좀 느린 것 같다. 음... 그게 나쁘진 않은 것 같다.





Written by 충달 http://headbomb.tistory.com

* 라벤더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8-08-24 17:29)
* 관리사유 : 좋은 글 감사합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18/06/04 03:26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솔로13년차
18/06/04 05:06
수정 아이콘
(수정됨) 댓글달기 어렵게 만드는 글이네요. 크크.
지금도 참 좋은 글을 써 주시는데, 시간이 흘러 더 단련되고나면 더 좋은 글을 써주시겠죠?
그리고 그 때가 되면 이 글도 충달님에게는 이불을 차고 싶은 글이 될 지도요.
충달님에겐 시간이 흐르면 부끄러운 글이 될 지 몰라도, 제게는 시간이 흐르면 이 글이 고전이 될 것 같습니다.
추게가 작동하지않고 있다는 게 아쉽네요. 그래도 추게로.
18/06/04 08:24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18/06/04 12:09
수정 아이콘
50000함을 다스리기 위해 60000만함을 이용합니다.
마스터충달
18/06/04 12:46
수정 아이콘
60000만 = 6억인가요?
18/06/04 15:55
수정 아이콘
[肉만만함]이니까 오만함을 위해 고기를 먹는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pppppppppp
18/06/04 13:30
수정 아이콘
와..
Lord Be Goja
18/06/04 13:44
수정 아이콘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touhounet&logNo=221211107006
이런 방구석 작가나 비평가로 종치는 사람도 많을겁니다
pgr같은데서 칭찬 받고 문피아같은데서 꾸준히 연재하시는분들은 단언컨데 초 상위권이죠
마스터충달
18/06/04 14:15
수정 아이콘
진짜 슬픈 건 이런 잉여인생이 아니라 진지하게 최선을 다하는 데도 된다는 보장이 없다는 점이겠죠. 최선을 다하는 게 아니라 잘해야 되니까요...
Multivitamin
18/06/04 21:25
수정 아이콘
(수정됨) 좋은 글이네요. 이런말 해도 뽕 안맞으실거 알기에 맘껏 칭찬드립니다.

저도 한때 블로그에 끼적거리던게 친구들이 좋다 해서 뽕 들어갔는데, 요즘은 3문장 이상의 글 이어지는게 힘드네요. 삶에 찌들어서 책도 안보고. 계속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장수풍뎅이
18/06/05 07:48
수정 아이콘
표현이 서툰 친구들 앞에서 제가 오만했던 것은 이닌가.. 하고 돌아보게 되네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18/06/05 09:04
수정 아이콘
스스로를 돌아보는 건 분명 의미있는 거지요.
lizfahvusa
18/06/06 12:30
수정 아이콘
자게에 글이 많이 올라오지만 읽기 쉽고, 이해하기 쉬운 글은 단연 마스터충달님 글이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독자를 위한 친절한 글 기대하겠습니다.
18/08/24 17:46
수정 아이콘
읽기 쉽고 좋은글 있으시면 추천도 부탁드립니다~!
마스터충달
18/08/24 18:08
수정 아이콘
전 피천득 수필이 이 쪽으로는 원탑 같아요.
18/08/27 14:11
수정 아이콘
이제서야 읽었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마스터충달
18/08/27 23:04
수정 아이콘
저도 잘 읽어주셔서 고마워요~
제랄드
18/08/29 20:43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하루종일 글에 대해 연구하고 고찰하는 사람의 냄새가 자욱하네요. 하고 계신 일 역시 잘 되길 기원합니다.
18/09/02 22:55
수정 아이콘
너에게 너를 보낸다는 부분을 다시 곱씹어 봅니다. 좋은 이야기 감사합니다.
18/10/08 17:48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합니다. 충달님을 놀라게 하는 그 분이 어떤 영화에 어떤 느낌을 남기셨는지 무척 궁금하네요 :)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3086 (번역) 중미 밀월의 종말과 유럽의 미래 [56] OrBef21319 19/06/27 21319
3085 [일상글] 가정적인 남편 혹은 착각 [54] Hammuzzi24830 19/05/30 24830
3084 아무것도 안해도... 되나? [20] 블랙초코22029 19/05/23 22029
3083 애를 낳고 싶으니, 죽을 자유를 주세요 [27] 꿀꿀꾸잉22912 19/05/21 22912
3082 [일상글] 결혼 그리고 집안일. (대화의 중요성!) [136] Hammuzzi30412 19/05/14 30412
3081 [8] 평범한 가정 [7] 해맑은 전사10085 19/05/09 10085
3080 [LOL] 매드라이프, 내가 아는 최초의 롤 프로게이머 [59] 신불해22507 19/05/07 22507
3079 [LOL] ESPN의 프레이 은퇴칼럼 - PraY's legacy in League of Legends nearly unmatched [44] 내일은해가뜬다19195 19/04/21 19195
3078 [8] 제 첫사랑은 가정교사 누나였습니다. [36] goldfish19762 19/04/29 19762
3077 [기타] 세키로, 액션 게임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다. [60] 불같은 강속구18630 19/04/15 18630
3076 [8]남편'을' 덕질한 기록을 공유합니다. [126] 메모네이드27074 19/04/24 27074
3075 연금술과 현실인식의 역사. [33] Farce18306 19/04/17 18306
3074 한국(KOREA)형 야구 팬 [35] 딸기18613 19/04/12 18613
3073 "우리가 이 시대에 있었음을, 우리의 시대를, 결코 지워지게 하지 않기 위해." [41] 신불해25202 19/04/11 25202
3072 거미들, 실험실 수난의 역사 [38] cluefake23487 19/04/12 23487
3071 제주 4.3사건에서 수 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했던 유재흥 [32] 신불해16171 19/04/04 16171
3070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37] 미끄럼틀18455 19/03/27 18455
3069 e스포츠의 전설, 문호준 [47] 신불해19892 19/03/24 19892
3068 보건의료영역에서의 데이터 사이언티스트의 역할과 미래 [61] 여왕의심복14615 19/03/26 14615
3067 어디가서 뒤통수를 치면 안되는 이유... [28] 표절작곡가27162 19/03/26 27162
3066 슬픈 일일까. [12] 헥스밤14199 19/03/25 14199
3065 [기타] 카트라이더 리그 결승을 앞두고 - 여태까지의 스토리라인을 알아보자 [14] 신불해11336 19/03/19 11336
3064 (안 진지, 이미지) 과몰입과 가능성의 역사. [22] Farce12884 19/03/21 12884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