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18/04/06 22:49:55
Name 마스터충달
Subject [7] '조금'의 사용법
  나는 간결한 글을 좋아한다. 물론 유려한 문장을 볼 때마다 감탄하곤 하지만, 진짜 유려한 문장을 볼 수 있는 경험은 흔치 않다. 대부분의 유려한 척하는 글은 군더더기가 덕지덕지 붙어, 읽는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 뿐이다. 뇌과학자 존 메디나는 저서 <브레인 룰스>에서 인간의 뇌는 글 읽는 것에 적합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책 읽기가 싫어서 핑계 대는 게 아니라, 나는 진심으로 이 말에 동의한다. 내가 쓴 글을 봐도 단순히 글자로 적은 것보다 짤방과 함께 할 때, 특히 짤방에 글자가 포함될 때 머리에 쏙쏙 들어오는 걸 느낀다. 반대로 글만 읽는 것은 상당한 에너지를 소모하는 활동이다. 그런데 읽기 힘들게 만드는 이유는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군더더기와 복문으로 문장이 길어져 제대로 이해했는지 확인하기 위해 읽은 길을 되돌아가야 할 때면 피로감이 각막을 짓누른다. 봐유? 힘들쥬? 전 힘들어유... 이건 뭐 독자를 괴롭히고 싶은 악취미인가? 좀 봐주면 안 될까? 죽을 때까지 책만 봐도 모든 책을 보기란 불가능할 텐데 말이다.

  그런 군더더기를 대표하는 것으로 '정말, 너무, 아주, 조금' 같은 정도 부사가 있다. 꼭 필요한 경우라면 써야겠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구어적 습관이 묻어나온 군더더기에 머문다. 나는 이러한 표현을 피하고자 꾸준히 훈련했다. 이제는 글을 쓰다가 정도 부사가 나오면 자동으로 백스페이스에 손이 올라갈 정도다. 나는 이것이 좋은 습관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떤 글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그 글은 2ch에서 태어나, 대한해협을 건너와 각종 커뮤니티에서 화제가 됐다. 오랜만에 봤지만, 여전히 처음처럼 가슴에 짠하게 다가왔다. 제목은 <야구장에 데려다준 어머니>다.

LUWaVLR.jpg

  나는 이 글이 몹시 슬펐다. 어머니를 생각하는 아들의 애틋한 마음도 슬펐고, 아들에게 잘해주지 못한 게 상처로 남은 어머니의 마음도 슬펐다. 짧고 간결한 문체 때문인지, 이 글에는 유독 먹먹함이 가득하다. 어머니의 마지막 말에 차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아들의 심정은 절로 하늘을 올려다보게 만드는 먹먹함이 서려 있다. 그런데 의외의 단어에 또 하나의 먹먹함이 함축돼있었다.

  "나는 태어나 첫 프로야구 관전에 흥분했고, 어머니는 평소보다 조금 호화로운 도시락을 만들어주셨다."

  사실 이 글에 쓰인 문장들은 좋지 않다. 당장 이 문장도 '태어나 첫 프로야구 관전에'처럼 주술 관계가 꼬인 비문이 존재한다. 그리고 '조금'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내가 깊이 생각할 기회가 없었다면 '조금'이라는 표현에 코웃음만 흘렸을 것이다. 호화로운 거면 호화로운 거지 조금 호화로운 건 무어란 말인가. 이 또한 흔한 군더더기로 취급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도 어렴풋이나마 가난을 안다. 가난이 두려울 정도로 어려운 적은 없었다. 그러나 때로는 슬펐고, 때로는 분노하기도 했으며, 대부분은 창피했다. 어린아이에게 가난은 창피한 경우가 많다. 아니, 나이를 먹어도 가난은 여전히 창피한 일이다. 작년에 입었던 외투를 재작년에도 입었고, 사실 졸업식 때도 입었다면 올겨울에 동창들 보기가 부끄러워진다.

  <야구장에 데려다준 어머니>에 등장하는 아들은 가난에도 굴하지 않는 꿋꿋한 성격이다. 그리고 어머니를 몹시 아낀다. 그럼에도 그는 어머니의 도시락에 '조금 호화로운'이라는 애매한 수식어를 붙였다. 자기 기준에는 호화로운 도시락이지만, 이걸 호화롭다고 하면 세상이 비웃을 걸 알기에 '조금'이라는 말을 더한 느낌이다. 마치 내가 감히 가난을 들먹이기에는 너무나 풍족한 삶을 살았기에 '어렴풋이나마'라고 언급한 것처럼 말이다.

  어린 아들은 가난의 아픔을 알았으리라. 하지만 어머니를 사랑하기에 애써 꾹꾹 누르며 '즐거웠어요'라고 말했다. 그 작고 어린 가슴에 눌러 담기에 가난은 너무 크고 무거웠으리라. 그래서 뿜어내지 못하고 억눌린 심정이 먹먹하게 다가온다. 이 글은 참 여러모로 먹먹한 글이다. 물론 아들은 이제 가난에 시달리지 않는 훌륭한 어른이 되었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이라는 단어를 붙일 정도로, 가난은 그의 마음속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긴 것 같다.

  이런 생각을 하고 나니 '조금'의 사용에 너그러워졌다. 잘만 쓰면 군더더기가 아니라 화자의 내면을 함축하는 훌륭한 도구가 될 수도 있었다. 근래 글쓰기에 있어 그동안 쌓아 온 신념을 무너뜨려야 할 때가 많았다. 처음에는 신념을 버린다는 데에 거부감도 들었다. 그러나 버리고 나니 그 또한 고집에 불과했다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이 글을 쓰며 또 하나의 고집을 버렸다. 이제는 나도 '조금'을 조금씩 써보기 시작해도 좋을 듯하다.

* 라벤더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8-07-27 17:44)
* 관리사유 :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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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백수
18/04/06 23:08
수정 아이콘
조금이나마 건조했던 눈가를 촉촉하게 만들어준
...조금 좋은 글이네요
추천 조금 박습니다.
조....금 (저..그럼) 이만 -33333
18/04/06 23:22
수정 아이콘
모니터링 속도가 어마무시하시네요.. 닉값 덜덜해..
전자수도승
18/04/06 23:53
수정 아이콘
모든 말은 필요하기에 태어났다고 생각하기에
'아주 약간'에 '조금 더' 아량을 베풀어주시길
18/04/07 02:01
수정 아이콘
같은 단어를 보고 저는 ‘돈이 없기 때문에 어머니께서 많이 호화롭게는 못 하고 조금 좋은 수준으로만 해주셨다’ 의 뉘앙스로 읽었습니다. 즉 남들 보기에 조금이 아니라 자기가 보기에도 조금 좋은 정도. 같은 글 같은 단어를 보고 다르게 느꼈다니 재미있네요.
맥주귀신
18/04/07 02:23
수정 아이콘
우와 멋진글입니다
Quantum21
18/04/07 04:05
수정 아이콘
눈물을 조금 흘리셨다. 에서 잠시 멈추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마다 인상이 머무는 곳은 조금씩 다르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아점화한틱
18/04/07 07:55
수정 아이콘
저도 글쓸때 쓸모없이 부사를 많이 나열하는 편이라... 간결한 문체 좋죠. 비극적인 내용을 간결한 문체로 쓰면 감정이 절제되어 보여서 더 비극적으로 느껴지기도 하지요.
마스터충달
18/04/07 08:36
수정 아이콘
이게 군더더기인가 아닌가는 부사를 빼고 읽었을 때 의미가 달라지는지 보면 됩니다.

'평소보다 조금 호화로운 도시락'
'평소보다 호화로운 도시락'

'평소보다'라는 말에서 이미 호화로움의 수준을 유추할 수 있기에 단순히 의미만 따지면 군더더기이긴 합니다.

근데 그 '조금'이 군더더기로만 보이지 않고, 조금이라고 붙일 수밖에 없는 어떤 주눅든 감성이 느껴지더라고요.
포도씨
18/04/07 09:11
수정 아이콘
넘넘 멋진 글이네요! 아주아주 칭찬해~
조금은 너그러운 마음을 가진다면 정말정말 메가슈퍼울트라초캡숑짱 좋은 사람이 되실거에요!
는 농담이고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는 문장의 정말도 눈에 들어오더군요. 지긋지긋한 가난에 시달리는 어머니와 자기 자신을 위해 악착같이 노력했던 글쓴이의 심정을 엿볼 수 있는 꾸밈말인듯합니다. 학생때 배웠던 시적 허용처럼 문법적으로는 옳지 않더라도 고치면 오히려 그 맛이 안 사는 문장이 있는것 같습니다.
마스터충달
18/04/07 09:28
수정 아이콘
너그러워지고 겸허해져야할 것 같습니다. 아직 한참 모자른 것 같습니다...
마스터충달
18/04/07 09:28
수정 아이콘
이분 센스가 조금 좋으시네요.
blacksmith01
18/04/07 13:50
수정 아이콘
형편없는 글솜씨때문에 댓글을 달기가 망설여지는 글이네요;
어느 분야든 발전해가는 도중에 자신만의 철학으로 선을 그을 때가 있고, 그걸 또 깨면서 더 발전할 때가 있죠.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18/04/07 16:14
수정 아이콘
정말 너무 진짜 좋은 글이네요. 덕분에 조금 행복해져버렸습니다. ㅠㅠ
TheLasid
18/04/07 22:50
수정 아이콘
좋은 글입니다. 댓글은 지금 달지만 잘 읽었어요 :)
마스터충달
18/04/07 23:07
수정 아이콘
말씀 고맙습니다. 예전에 라시드님과의 댓글 덕에 정도 부사를 돌아보게 되었고, 이런 글도 쓰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눈팅족이만만하냐
18/04/08 00:01
수정 아이콘
(수정됨) 정성스러운 글 잘 읽었습니다. 이런 댓글 남기는 게 조금 죄송스럽고 조심스러운데, 저도 OrBef님의 해석이 자연스러운 것 같습니다.

만약 원문에서 "평소보다"라는 표현이 없이,

"나는 태어나 첫 프로야구 관전에 흥분했고, 어머니는 '조금' 호화로운 도시락을 만들어주셨다."

라고 했다면, 이글의 내용-충달님의 이해와 사유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을 것 같은데, 그게 아니라 "평소보다"라는 비교급의 표현이 들어간 원문을 놓고 해석할 때는,​ 맥락상 방점을 찍어야 할 부분이 '조금 호화로운'이 아니라 '평소보다 조금'이라고 생각됩니다. 번역을 한 거라 원문을 확인해 봐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겠지만, '평상시의 도시락에 비해서 조금은 좋은 수준으로 만들어주셨다’는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서 "평소보다 조금"이라는 표현이 반드시 들어가야 했고, 그래서 그 부분은 애초에 군더더기가 될 수 없는,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표현이었다고 생각됩니다. "호화로운"이라는 표현은 '맛있어보이는', '많은 재료가 쓰여진', '비싼 재료가 들어간' 등의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서 쓰인 단어이거나 그런 의미로 번역을 하는 과정에서 가져다 쓴 단어로 생각되고요. ​
그리고, '조금'이라는 표현 속에는 어린 시절 작가의 환경에서 도시락이 나아져봤자 크게 나아질 수는 없는 경제적/상황적인 한계를 함축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고요.

​원문을 충달님처럼 이해한다면, '조금'이라는 부사가 군더더기인지 여부가 중요한 게 아니라 '평소'라는 명사에 '~보다'라는 부사격조사가 붙은' 평소보다'라는 표현이 군더더기인가 여부를 따져봐야 되지 않나 싶습니다.
마스터충달
18/04/08 00:09
수정 아이콘
오... 말씀에 공감이 갑니다. 군더더기가 무엇인지 결정하는 것도 사람마다 다를 수 있군요. 저로서는 굉장한 깨달음이네요. 말씀 정말 감사합니다.
치열하게
18/04/08 00:25
수정 아이콘
표현에 좋고 나쁨에 매끄럽움과 꺼칠꺼칠함에 어색함과 자연스러움에 눈이 안 가는 것은 이야기의 힘도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TheLasid
18/04/08 02:56
수정 아이콘
저도 조심스럽게 드리는 말씀이지만, 군더더기 말이라는 건 사실 없을지도 모릅니다.
말을 군더더기로 만들어 쓰는 사람이 있을 뿐이고요.
개인적인 생각인지라 근거는 없습니다.

이하는 그냥 잡소리에요.

부사에 관한 글을 써서 올리려고 했는데, 이래저래 생각의 정리가 안 되어서 못 올리고 있네요.
제가 뭐 잘 알아서 쓰려는 건 아니고, 부사에 관한 적대감은 영어에서 왔을 가능성이 높아서 그렇습니다.
영어권의 유명 작가들 가운데서도 특히 글을 잘 쓰시는 분들이 흔히 부사에 엄청난 적대감을 표하시는데,
이분들이 쓴 글쓰기에 관한 책이 (혹은 여태 텍스트에서 글쓰기에 관해 논할 때 나오는 이분들의 의견이) 여과 없이 한국어로 들어온 감이 없잖아 있어요.
영어와 한국어는 너무도 다른 언어고, 한국어에선 부사를 활용했을 때 자연스러운 경우가 많은데 말입니다.
(충달님께서 그러시다는 게 아닙니다. 부사 자체에 거부감을 표하는 분들이 꽤 있어요.)
부사가 중요하다는 말은 국어학자분들을 비롯한 글을 잘 쓰시는 분들이 워낙 많이 그리고 잘 써 두셨으니
번역가가 둘 사이에 가교를 놓는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가끔씩 듭니다.
마스터충달
18/04/08 09:03
수정 아이콘
(수정됨) 저는 너무 깊게 생각하기 보다는 "빼도 좋은 것"이면 군더더기 일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깊이 생각하면 글이 안 써지기도 해서요;; 행동할 때는 단순화하는 것도 필요하더라고요.

글쓰는 사람들이 부사에 거부감을 느끼는 이유는 허영을 싫어하거나 과유불급이라는 생각에서 그런 것 같아요. 뭔가 잔뜩 달렸다고 느끼는 순간 부끄럽다는 느낌이 퍼뜩 들거든요
TheLasid
18/04/08 09:31
수정 아이콘
아...말씀을 좀 이상하게 드렸나 봅니다. 말씀하신 대로 빼도 전달하려는 의미에 차이가 없다면 군더더기겠지요. 그런데 가령 아... 그... 저... 같은 음성적 잉여표현은 이름부터 잉여표현이라고 찍혀있긴 하지만, 말 자체가 잉여라기 보다는 사람들이 잉여롭게 써서 잉여 소리를 듣는 것 같아요. 이런 표현을 쓰면 멍청하고 유약해 보인다고 쓰지 말라고들 하는데, 자신을 낮추려거나 어수룩한 척 행동하려는 사람에게는 훌륭한 기능을 하는 표현이지요. 말씀하신 늘어지는 문장도 그럴 의도로만 쓴다면 훌륭한 기능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부사가 많으면 허영으로 느껴진다는 말씀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갑니다. 충달님은 한국어로 글을 쓰시니 부사만 안 써도 글이 한결 간결해지시겠죠. 근데 영어권 사람들은 형용사 덕후에요. 그 말을 한 영어권 저자들의 의도는 부사를 빼고 글을 간결하게 써라가 아니라, 부사대신 그 자리에 형용사 같은 걸 넣어라 입니다. 영어 문장에서 형용사 쓰는 거 보면 한국어 부사는 양반이에요. 명사 수식이 엄청 늘어집니다.
마스터충달
18/04/08 09:44
수정 아이콘
부사 대신에 형용사 넣으라는 걸 그대로 가져와 한국어 글쓰기 팁으로 말하는 것도 봤습니다. 크크크. '부사 빼고 형용사 넣으면 달라질 게 없는데?' 싶었는데 나중에 보니 영어 얘기였...

전 영어 형용사 사랑도 싫어요 ㅠ.ㅠ 특히 관계대명사절, 관계부사절... 싫어요. 복문 만들지, 길어지지, 해석힘들지, 뭐 이건 고등학교까지만 영어 공부한 보통 사람들은 다 싫어할 거라 생각해요;;;;;
TheLasid
18/04/08 09:56
수정 아이콘
저도 싫습니다 ㅠ 볼 때마다 빡쳐요.
싸이유니
18/04/10 10:17
수정 아이콘
사진이안보여서요...어떻게볼수 없을까요?
18/07/31 10:24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 드립니다. 늦게나마 댓글 답니다
마스터충달
18/07/31 10:27
수정 아이콘
좋게 봐주셔서 고마워요 ^^~
BloodDarkFire
18/08/02 15:09
수정 아이콘
간결한 글은 좋아합니다. 그러나 간결한 문장에 대해선 잘 모르겠습니다. 평소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을 포함하여, 책을 자주 읽는 사람에게도 부사는 생각보다 친근한 녀석이더군요. 최근에는 굳이 집착할 이유가 무언가 싶습니다.

재밌게 읽었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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