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북(河北)은 좁은 의미로는 오늘날의 허베이 성을 가르키지만, 넒은 의미로는 황하 이북 지역을 가리킵니다. 후한 말엽에 우리가 일컫는 하북이란 유주(幽州), 기주(冀州), 병주(幷州) 등을 말함인데 여기에 현재 산둥성에 걸쳐있는 청주(青州)까지 합쳐서 '하북 4주' 라는 표현이 종종 쓰입니다. 즉 실제적으로는 삼국지 팬덤에서 하북 4주라고 하면 하북, 산서, 산동에 걸쳐있는 영역입니다.
이 4주의 인구는 후한서 군국지 기준으로 1,240만 가량. 유주나 병주 지역은 변경 지역으로 실질적인 인구 숫자가 많지는 않았지만, 흉노 등의 이민족을 상대하는 군사적 역할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병주 등은 북방의 유주와 낙양 지역의 사예를 잇는 요지이기도 했습니다. 때문에 유주 등은 인구 숫자는 적어도 이민족을 상대하기 위한 군사 기지로서 기주, 청주 등의 지원금을 받아 유지하곤 했는데, 중앙 정치가 혼란스럽게 되자 자연히 이는 강력한 군벌이 활개칠 수 있게 하는 좋은 여건이 되고 맙니다. 한 제국이 변경의 적을 막기 위해 준비한 병력이었으니, 필경 천하에서 가장 정예하고 강력한 군사세력이라고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공손찬
이야기를 시작하려면 바로 공손찬이라는 인물부터 살펴봐야 합니다. 공손찬은 본래 2천석을 받던 고관 집안의 자제였지만, 서자였기에 가문의 작위를 이어받지 못해 말단 관리로 경력을 시작한 인물입니다. 순도 100% 무골 같은 행보를 보인 훗날과는 다르게 이때 제법 상당한 능력을 보였고, 풍채 좋고 얼굴 잘생기고 목소리도 또렷한 위너라, 그 능력을 눈여겨 본 태수 유기(劉基)의 사위가 되면서 팔자가 피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런저런 과정을 거쳐 요동속국의 장사(長史)가 되었는데, 이때부터는 가히 '변경의 세기말 패왕' 으로 군림 했다 할만 합니다. 하루는 휘하 기병 수십기를 거느리고 변경을 순찰하다가 우연찮게 선비족 기병대 수백명과 맞붙게 되었는데, 혼자서 창을 들고 수십명을 찔러 죽이고 돌파해서 살아남으니, 선비족 등은 그런 공손찬에게 엄청난 두려움을 가졌습니다.
이 무렵, 변경에서는 장순-장거의 난이라는 사건이 일어나게 되는데, 장거라는 작자가 스스로 천자를 칭하고, 장순은 안정왕(安定王)을 칭하고는 수도에 사람을 보내 "알아서 황제 자리에서 물러나라" 는 충공그깽한 말을 전하고는, 오환의 여타 부족장을 끌어들여 무리 10만을 일컫는 세력이 되었던 대사건이었습니다. 여기에 더해, 오환족의 여러 수령인 구력거, 초왕 소복연 등을 끌어들여 그들의 5만 부대가 청주, 기주 등을 습격하게 획책하여 사건은 끊임없이 확대되게 됩니다.
그렇잖아도 황건적의 반란 등으로 어지롭던 차에 이런 일까지 벌어지니, 10만을 훌쩍넘는 반란군과 이민족 부대가 횡행하고 있으니 하북은 가히 세기말 헬게이트 그 자체로 변모했습니다. 이때 공손찬은 자신의 정예 기병대, 백마의종(白馬義從)을 거느리고 엄청난 전공을 거두어 이민족들에게 공포의 존재가 되었습니다. 당시 북방에서 공손찬이 위망(威望)이 어찌나 대단했던지, 이민족들은 공손찬의 이름만 듣고도 벌벌 떨며, 공손찬이 있다는 곳에는 감히 침범하지도 못하고, 공손찬 그림을 그려놓고 그림에 화살을 쏘며 정신승리를 하면서 자위하는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민족을 대하는 공손찬의 태도는 자못 특이했는데, 이민족을 비천하게 여기는 태도가 과거에 만연했다고 해도 전략상 충분히 이민족과 협력하거나 회유하는등 유화책을 쓰는 경우는 당시에도 충분히 흔했습니다. 그런데 공손찬은 이민족을 멸시하는 정도를 떠나 부모의 원수라도 되는 것처럼 대하며, 이민족과 이야기 할 일이 있으면 항상 화를 내며 앜앜 하며 소리를 쳤고, 말을 해도 항상 겁주게 말을 했습니다. 저 멀리에서 먼지폭풍만 불어도 "놈들이 왔다" 며 하루 종일 말을 달려가 기어코 떄려 잡을 정도였습니다. 후한서에서는 이런 공손찬의 태도에 대해,
'공손찬은 오환족을 절멸시키기로 뜻을 세웠다'
라고까지 언급하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씨를 말려버리겠다는 소리 아닙니까 이거.
그런 이유 때문인지, 분명 전장에서 공손찬의 공포의 화신으로 이름을 떨치고 전공이 막대함에도 불구하고, 실제 상황은 되려 악화되고만 있었습니다. 유주, 기주, 청주에 심지어 서주까지 이민족과 반군의 공격을 받아 쑥대밭이 되는 상황이 되자, 조정에서는 공손찬의 대응책이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여기고, 대신 다른 사람을 이용하기로 마음 먹습니다.
유우
유우는 황실 가문의 일원으로, 청렴하고 덕이 많기로 당대에 이름이 높았습니다. 그 명성은 공손찬과는 다른 의미로 이민족들에게도 퍼져 있었는데, 유우는 강경론자인 공손찬과는 달리 이민족 유화론자였고, 유주자사 시절 선비, 오환, 부여, 예맥 등에까지 좋은 이미지가 퍼져 알아서 조공하고 변경에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게 했던 사람입니다.
그 이후 유주 자사를 사정상 그만둔 상황이었는데, 조정에서는 "유우가 유주자사 시절 보여준 성과가 있으니, 그 사람을 써서 이민족을 덕으로 다스리면 이렇게 힘들이지 않고도 평정이 가능할것." 이라는 의도에서 유우를 유주목으로 임명하게 됩니다. 과연 이 계책은 성과가 있어서, 아예 대화 자체가 불가능한 공손찬에게 질려 있던 구력거 등 이민족은 유우가 유주목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사람을 보내 귀순해왔고, 반란을 일으킨 장순 역시 세력이 갑자기 쪼그라들자 선비족에게 정신없이 도망쳤다가 목이 잘려 유우에게 보내졌습니다. 공손찬이 그 난리를 치고도 평정 못한 반란을 앉아서 덕으로 제압한 셈입니다.
이렇게 되니 공손찬은 자기 상황이 웃기게 되어버리기도 했고, 본래 강경론자인 그의 정책과도 맞지 않아 어떻게든 화의를 깨기 위해 중간에서 이민족의 역관을 암살하는 등 계속해서 분탕질을 쳤지만, 상황을 파악한 이민족 측에서는 공손찬에게 들키지 않게 샛길 사이로 사람을 보내면서 결국 화의가 이뤄지게 됩니다. 이때문에 공손찬은 유우를 마음 속에서부터 깊이 증오했습니다.
한편, 대략적인 난리가 끝나자 유우는 변경에 대한 감축 정책을 펼칩니다. 앞서 언급한 내용이지만, 후한서 유우전에 따르면 이민족과 접하고 있는 유주 지역은 군사적 비용이 많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인구 부족으로 경제력이 떨어졌기 때문에, 기주와 청주 등지에서 연간 2억전 가량의 돈을 끌어와 유주의 자금으로 쓰고 있는 형편이었습니다. 필경 그 자금의 대부분은 군사자금으로 쓰여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유우는 온건책을 펼쳐 협상으로 이민족 문제를 해결해 대군의 주둔 필요성을 줄였기 때문에, 유주의 부대 중 공손찬 휘하 1만 부대를 남기고 모두 해산시켰고, 남는 돈을 난리통에 끊어진 길을 보수하는데 쓰고 소금과 철을 개발하고 유통하며 농업을 안정화 시키고 이민족과는 교역을 했습니다. 곡식 가격을 안정시키고 청주, 서주 등에서 황건적의 난을 피해 올라온 사람들의 터전을 마련해 유주의 안정화에 막대한 기여를 했습니다.
이에 비해 공손찬은 공적 자금을 이용해 자신의 부대를 키우고, 대신 무리하게 규모를 키우느라 궁핍해진 병사들이 마음대로 약탈을 하게 내버려 두면서 사적인 세력 확대를 꾀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유우는 유우대로 공손찬이 미울 수 밖에 없고, 공손찬은 공손찬대로 돈을 마음대로 융통할 수 있는 전쟁을 유화책으로 해결한 유우가 좋을리가 없었습니다.
이 무렵 조정의 권위는 동탁의 횡포로 땅에 떨어졌고, 그 유명한 반동탁 연합군이 결성된 상태였습니다. 연합군, 특히 원소는 동탁 뿐만이 아니라 동탁이 옹립한 '헌제' 에 대해서도 정통성을 공격했고, 한복과 연계하여 대안으로 명망이 높은 유우를 황제로 추대하려는 움직임까지 보였으나 당연하게도 공손찬은 극렬하게 반발하며, 원소에게 군사적인 위협을 가하기까지 합니다.
여기에 더해, 유우 본인 조차도 황제가 되는 것은 '역적질' 로 여기면서 반대했습니다. 연합군이 대안으로 내세운 유우 본인이 장안 조정의 정통성을 옹호하고 있으니 본래도 지리멸렬했던 연합은 싱겁게 끝이 나는 흐름이 되었는데, 물론 그렇다해도 유우가 동탁을 좋아할 이유도 없었기 때문에 유우는 장안의 헌제와 연락하여 헌제를 탈출시키려는 계획을 꾸밉니다. 그런데 여기서 뜬금없는 인물, '원술' 이 등장합니다.
당시 연합군 측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휘하의 손견을 보내 직접적으로 동탁과 싸웠던 원술은, 장안에서 무관을 거쳐 돌아가던 유우의 아들 '유화' 를 중간에서 붙잡고 모든 사정을 알게 됩니다. 원술은 이를 이용할 생각으로, 유화를 잡아두고는 유우에게 "병사를 보내주면, 같이 서쪽으로 가서 천자를 영접 합시다." 라고 콜을 보냈습니다.
충신으로서 천자를 맞이하는 문제도 있고, 아들이 인질로 잡혀있기도 하니 유우는 병사를 준비했는데, 공손찬은 유우가 천자를 맞이하기라도 하면 자기에게 문제가 생긴다고 여겼는지 "저건 틀림없이 원술이 사기치는 것이다. 결코 병사를 보내면 안된다." 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기어코 유우가 병사를 보내자, 공손찬은 일이 만약 이루어지면, 당시 손견을 앞세운 낙양 수복 등으로 천하에 명성이 자자하던 원술이 자신을 적대할까 염려스러워 아예 일을 기정사실로 만들기 위해 사촌동생인 공손월에게 1천여 기병을 맡겨 일종의 동맹을 맺었습니다. 이 공손월과 1천 기병은 공손찬이 원술에게 맡겨놓은 일종의 담보라고 생각하면 될 듯?
아마도 원술은 이런저런 선택지를 놓고 주판알을 튀기고 있었겠지만, 공손찬의 이 행동으로 인해 확실하게 마음을 굳이고는 유우가 보낸 병력을 아예 꿀걱 삼켜 먹튀하고는 헌제 구출에 나서지 않았습니다. 뒤늦게 모든 진상을 알게 된 유우가 공손찬을 씹어먹고 싶을 정도로 증오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 무렵, 하북에는 또다른 호걸이 출현했습니다.
원소는 당시 온 천하에 명망이 자자한 인물로써, 천하에 명망이 자자한 '탁류파' 계열 원씨 가문이라는 기반에 더불어 6년 상을 지내는 고행에 환관을 적대하는 움직임으로 청류파의 지지 역시 끌어냈고, 반동탁 연합의 맹주로서 명성을 구름처럼 떨치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그 동탁조차 처음에는 원소를 증오하면서도 회유하기 위해 발해태수 직을 내주었을 정도였으니 말 다 한 수준입니다.
그런 회유에도 불구하고 반동탁연합이 일어나게 되자 동탁은 수도에 머물고 있던 원소의 일가친척을 모조리 처단했는데, 여기에 더한 동정론까지 더해져 원소의 명성은 하늘 끝까지 치솟는 판이었습니다. 그러나 천하가 원소에 호응하는 엄청난 열기에도 불구하고, 당시 원소 자신이 실제적으로 가지고 있는 물리적 자산은 보잘 것 없었습니다. 당시 그는 기주의 일개 군인 발해의 태수였는데, 실제로는 발해 태수라는 직 마저 제대로 쓰지 못하던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멀리도 온 원소
반동탁연합군의 일원이었던 원소는 거병이후 낙양 지척의 하내로 이동해 왕광과 함께 주둔해 있었습니다. 당장이라도 동탁을 칠 기세였으나, 문제는 당시 연합군의 일원이자 기주목이었던 한복(韓馥)이었습니다.
한복은 애초에 동탁이 임명한 사람 입니다. 발해가 속해 있는 기주를 관장하는 자리에 한복을 임명한 것은 원소 같은 무리를 감시하기 위한 동탁의 의도가 있었겠지만, 한복은 흘러가는 대세를 보고 원소에 거병에 협조하긴 했습니다. 그러나 한복은 자신의 지역 바로 안에서 엄청난 명성을 가진 원소가 결국 세력을 모아 자기를 칠까 두려워 했기에, 종사(從事)를 파견해 원소를 감시했습니다. 연합군이 일어난 이후에도 다른 사람들이 하내, 영천, 산조 등에 주둔 한 것에 비해 혼자만 저 멀리 후방의 업에 남아 있었습니다. 심지어 그 와중에 수하를 불러 "원 씨의 편을 들어야 하는가, 동 씨의 편을 들어야 하는가." 하고 의견을 물을 정도였으니, 기회주의적인 성향이 상당히 강했다고 볼만 합니다.
원소가 동탁 토벌을 위해 하내에 주둔하게 되자, 한복은 손 안대고 코푸는 방법을 취하기로 마음 먹습니다. 즉, 후방에서 군량을 보내지 않는 겁니다. 한복은 원소에게 보내는 군량의 양을 조금씩 조금씩 줄여서 원소군이 알아서 흩어지게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원소는 발해로 돌아가지도 않고 있었는데, 한복이 이처럼 노골적으로 견제를 하고 있는 정황을 보면, 아마도 돌아가는 부분에 있어서도 견제 때문에 마음대로 돌아가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지 않나 싶습니다.
이 무렵 원소의 상황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그 위풍당당한 원소의 모습과는 180도 다를 정도로 쪼들리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영웅기 中 "(원소왈)기주는 강성한데, 나의 병사들은 굶주리고 궁핍하니……"
후한서 中 "(저수왈)원소는 의지할데 없는 객장이오, 곤궁한 병사들뿐이라, 우리가 내쉬는 숨이나 바라고 있으니 비유컨데 아기가 품 속에 있는데 젖을 먹이지 않으면 바로 굶어죽는것과 같사옵니다."
의지할데 없는 객장이라는 것이 당시 원소에 대한 평이었습니다. 그 말대로 제대로 된 근거지도 하나없이 떠돌아 다니며 말라죽기만을 기다리던 것이 원소의 비참한 신세였습니다.
국의와 봉기. 문-무에서 후한 말 군웅할거의 양상을 송두리째 바꿔 버린 두 사람.
원소가 이렇게 처참한 신세로 떨어진 무렵, 한복의 객장이었던 국의라는 인물이 한복에게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게 되자 원소와 결탁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한복에 대항한 반란군과 손을 잡았으니, 이 시점에서 원소와 한복의 관계는 파탄난 셈입니다. 바햐으로 원소와 한복의 충돌이 불가피해졌을때, 원소를 오래전부터 따르던 봉기가 원소에게 '천하의 향방을 모조리 바꿔버릴 전략' 을 내놓습니다. 봉기의 계략은 바로 공손찬을 끌어들이자는 것이었습니다.
“무릇 거사를 일으킴에 있어, 한 주에 근거하지 않으면 자립할 수 없습니다. 지금 기주는 강하고 충실하나 한복은 용렬한 자이니, 은밀히 공손찬과 약조하여 병사를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오게 하면 한복은 이 소문을 듣고 반드시 두려워할 것입니다. 아울러 말 잘하는 선비를 보내어 한복에게 어떻게 하면 화가 되고 어떻게 하면 복이 될 것인가 설명을 늘어놓게 하면, 한복은 창졸간에 궁박해져서 반드시 그 지위를 장군께 양도하게 될 것입니다.” - 후한서 원소전
원소는 그 제안에 따라 공손찬에게 사람을 보내는 한편, 본인은 연진을 거쳐 북상하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원소와 약조한 공손찬 역시 기주라는 좋은 지역을 차지할 기회가 왔다고 여겨, '동탁을 치러갈테니 길을 빌려주어라' 라는 명목으로 기주를 향해 진격해오기 시작했습니다. 천하에서 손꼽히는 공손찬 군단이 쳐들어오고 있다는 것만도 무시무시한 일인데, 남쪽에서 북상해오는 원소군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았습니다. 뛰어난 장군이었던 국의를 앞장세운 원소는 업성의 남쪽 근처에까지 이르러 본래 연합군에 참가했지만 대항을 시도한 장양, 어부라를 모두 소탕했고, 이후에 언급으로 보면 장양, 어부라의 병력을 흡수한 것으로 보입니다.
북쪽에서는 천하최강의 백마의종이, 남쪽에서는 그토록 두려워하던 원소가 점점 세를 불리며 진격해오는 것을 본 한복은 패닉 상태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기주를 장악한 한복의 세력은 결코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한복이 반동탁연합군 문제로 인해 하양(河陽) 지역에 배치해놓은 병력만 강노부대 1만명에 달했었는데, 이 부대를 이끌던 조부(趙浮)와 정환(程渙) 등은 소식을 듣자 바람같이 업으로 귀환 했습니다. 공교롭게도 이 귀환하던 1만 병력과 북상하던 원소군은 청수(淸水)를 낀 조가라는 곳에서 만나게 됩니다.
조부와 정환은 귀환하는 것이 먼저였기에 양군간에 교전은 펼쳐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만여 병력에, 전선 수백척이 눈 앞에서 지나가는 모습을 본 원소는 초조하기도 하여 매우 분통을 터뜨렸습니다. 귀환한 조부와 정환은 한복을 설득했습니다.
"원본초의 군대는 식량이 없고 흩어져 있습니다. 비록 장양과 어부라의 병력을 새롭게 귀부시켰다곤 해도 제대로 쓰지 못할 것인즉 우리의 상대가 아닙니다. 직접 병사를 살피시고 막으면 단 열흘이면 저들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원소는 여기서 심리전을 걸었습니다. 그는 바로 한복을 쳐서 돌이킬 수 없는 사생결단을 내는 대신에, 고간과 순심을 보내 한복을 겁주는 동시에 설득에 나섰던 겁니다.
"공손찬이 승세를 타서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여러 군이 여기에 호응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원장군이 군대를 이끌고 오고 있으니, 장군은 실로 위험한 상황입니다. 공손찬은 연, 대 지역의 군사를 거느리고 있으니 그 예봉은 당해낼 수 없습니다. 원씨는 본래 장군의 옛 친구요, 동맹을 맺었으니 장군을 위한 계책으로는 기주를 들어 원씨에게 양보하는 것만한 것이 없습니다. 원씨가 기주를 얻게 되면, 공손찬은 (원소와) 능히 더불어 싸우지 못하고, 필히 장군을 후덕하게 대우해 줄 것입니다. 기주를 친한 벗에게 맡기면 이로써 장군은 현명하게 양보했다는 명성을 가지게 되고, 자신은 태산(泰山)에서 편안하게 있게 됩니다. 원컨대 장군께선 의심치 마소서!"
이에 한복의 부하였던 경무, 민순, 저수 등은 "기주의 군사가 백만이고, 곡식은 10년을 지탱할 수 있다. 원소 따위는 외로운 빈객이며 군사는 궁색해서 바로 굶겨 죽일 수 있다. 절대 항복하면 안된다." 며 한복을 설득했지만, 겁이 많은 한복은 결국 원소에게 항복하기로 결정합니다.
아마도 한복으로서는 무엇보다 두려운 것은 공손찬이었을 것입니다. 도저히 공손찬을 이길 자신이 없는데, 한복은 공손찬이 증오해 마지 않는 유우를 황제로 추대한 적이 있으니, 공손찬의 손아귀에 걸리면 그야말로 뼈도 못추릴 수 있습니다. 원소는 그래도 한때 손을 잡은 관계였으니, 공손찬보다는 좀 더 몸을 맡길만하다고 여겼을지 모릅니다. 결론은 이 역시 파멸로 가는 길이었지만 말입니다. 어찌되었건, 후한서 군국지 인구 593만에 달하는 하북 4주 최대의 지역 기주는 제대로 된 전면 싸움 한번 없이 원소에 손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기주를 가볍게 손아귀에 넣은 원소에겐 진정한 문젯거리가 닥쳐오고 있었습니다. 문제란 말할것도 없이 공손찬이었습니다.
당초에 가로막는 한복군을 안평(安平) 지역에서 간단하게 쳐부수며 진군하던 공손찬은 원소가 기주를 점거하자 미리 약조해놓은 것이 있었는지, 혹은 상황을 살펴볼 요량이었는지 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문제의 도화선은 엉뚱한데서 터졌는데, 하북과는 거리가 먼 예주 영천군의 양성에서 펼쳐진 전투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이 전투는 원소계 세력과 원술계 세력의 싸움이었습니다. 원술과 사이가 좋지 않던 원소는 이 지역에 주앙(周昂)이라는 인물을 시켜 양성을 취하게 했습니다. 이에 원술은 손견을 보내 전투를 치루게 했는데, 하필 여기에 지난날 원술에게 온 공손월이 포함되어 있었고, 공손월은 전투 중에 화살을 맞고 사망했습니다. 그러자 공손찬은 크게 화를 내며 "내 동생이 죽은 것은 전부 원소에게 비롯된 것이다." 라며 보복을 결심했습니다.
이에 원소는 매우 두려워 하며, 공손찬의 분노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자신이 본래 가지고 있던 발해 태수의 직을 공손찬의 사촌 동생인 공손범에게 주며 납작 엎드렸습니다. 그러나 별 소용은 없었습니다.
공손찬과 원소가 일촉즉발의 상황에 놓인 이때, 또다른 대사건이 펼쳐집니다. 황건적의 세력이 가장 성했던 청주를 비롯해 서주의 황건적 30만명이 북방으로 올라왔던 것입니다. 당시 하북에는 황건적과는 또다른 '흑산적' 이 대단히 세력이 강력했기 때문에 이들 황건적은 흑산적과 세력을 합치려고 했다고 하는데, 그러나 이곳에는 공손찬이 있었습니다.
공손찬은 발해군 동광(東光) 지역에서 보병과 기병 2만여명을 주둔시키고는, 발해군 경계로 쳐들어오는 황건적 30만과 정면으로 맞상대를 펼쳤습니다. 천하최강의 백마의종 군단에 30만 황건적은 지푸라기만도 못한 수준으로 나가떨어졌고, 처음의 싸움에서 3만명이 손도 써보지 못하고 전사했습니다. 황건적은 수레를 수만대나 버리고 도주했는데, 공손찬은 이들을 추격하여 또다시 수만명을 죽였고, 포로를 7만명이나 획득했습니다.
'수만 대나 되는 수레' 라는 것을 보면 아마도 이들 황건적은 실제로 30만의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기보다 여자나 어린이, 노인까지 섞인 30만의 황건 '부락' 이라고 봐야 할 것 같기도 합니다. 변방에서 이민족과 싸우면서 경험을 쌓은 사납고 잔인하고 날랜 병사들에게 그런 유민들은 30만이건 100만이건 큰 차이는 없었을 겁니다. 어쨌든 30만이라는 숫자는 정말로 엄청난 임팩트라, 이 대사건 이후 공손찬의 이름은 하늘을 지를 지경이었습니다.
영웅기 : "공손찬이 청주의 황건적으로 쳐서 크게 격파하고, 돌아와 황종(黃宗)에 주둔하며, 그 군수와 현령을 바꾸니, 기주의 장리(長吏)들 중 그 풍모를 바라보면 호응하지 않는 것이 없어, 성문을 열고 그를 받아들였다."
바햐으로 최대의 절정기를 맞이해 거리낄 것이 없어진 공손찬은 휘하 측근인 엄강을 기주 자사로, 전해를 청주 자사로, 선경을 연주 자사로 삼고 각 군현의 관리를 배치한 후, 원소의 10가지 죄상을 알리는 포고문을 조정에 보내고 파죽지세로 진격했습니다. 아직 자신의 손에 있지도 않은 지역의 관리를 배치했다는 것은 이 지역을 자기가 곧 얻겠다는 것인데, 기세를 몰아 진군하면서 한꺼번에 이렇게 배치한것은 말 그대로 천하를 삼킬듯한 기세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전력에서 압도적인 열세에, 기세에서도 밀려 수 많은 군현 관리들이 원소를 버리고 성문을 열어 공손찬을 맞아들이고 있던 상황. 가히 절체절명의 위기였지만 앉아서 죽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원소 역시 동원할 수 있는 수만 부대를 이끌고 나섰고, 양 군은 계교(界橋)에서 운명을 대결전을 펼치게 됩니다.
이때 공손찬은 총 4만 병력으로 보병 3만, 기병 1만명을 거느렸고, 기병은 각각 5천명씩 보병의 양익에 주둔했습니다. '깃발과 갑옷이 천지를 빛나게 할 정도였다' 고 할만큼 대단한 정예병이었습니다. 이에 맞서는 원소는 국의에게 800명을 이끌고 선봉에 서게 하고, 강노 부대를 1천명씩 양익에 배치했으며, 원소 본인은 수만 보병을 이끌고 후위에서 진을 쳤습니다. 병력은 수만이라고 언급되긴 하지만, 공손찬에 비해서는 열세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병력, 전투 경혐, 기세, 어떤 면을 보더라도 불리한 싸움이었지만, 이때 원소군의 선봉 국의가 엄청난 대활약을 펼치며 전장의 향방을, 그리고 역사를 바꾸게 됩니다.
'국의는 오래동안 양주(凉州)에 있어서, 강(羌)족의 방식에 대해 잘 익혔기에, 그 병사들은 모두 다 날랜 정예였다.'
공손찬이 동북 변방의 무장으로 이름을 떨쳤다지만, 국의는 국의대로 서북 변방에서 잔뼈가 굵은 무장이었습니다. 이민족과 기병대를 상대로 한 전투 경험이 풍부한 국의였는데, 그런 국의가 특별히 800명을 이끌고 나갔고 이 병사들이 정예병이었다는 언급을 보면, 이들은 국의가 양주시절부터 개별적으로 데리고 있던 병력이었을 가능성이 있어 보입니다.
적의 선봉부대 숫자가 별볼일 없는 것을 본 공손찬은 기병 부대를 동원해 단번에 이를 공격케 했습니다. 이에 맞서는 국의는 병사를 전부 방패 아래 숨게 하여 움직이지 않게 하다가, 적이 수십보 앞까지 다가오자 그제야 동시에 다함께 일어나, 먼지를 휘날리며 크게 소리치고 곧장 앞으로 돌진했습니다. 동시에 원소군의 측면 강노부대가 적을 향해 미친듯이 공격을 퍼부었고, 공손찬이 자랑하던 천하최강의 기병대는 고꾸라지듯 쓰러져갔습니다.
이에 공손찬 휘하인 기주자사 엄강과 그 부하 천여명이 전사했습니다. 기록상으로는 명확하진 않지만, 자신의 목숨이 달린 상황에서 800명 부대가 수만 대군과 싸우는것을 손가락만 빨며 지켜본다면 말이 안되는 일이니 아마도 이 시점에서 원소가 이끄는 본대는 흔들리는 공손찬 군에 달려들었을 것입니다. 초전에서 선봉에게 크게 당한 공손찬은 결국 원소군을 이겨내지 못하고 대패를 당했습니다. 국의는 국의대로 본대와는 별개로 계속해서 공손찬군을 뚫어버리고 진격했고, 공손찬군 후위 부대가 겨우 다시 수습해서 반격하려고 했지만 이 역시 몰아내어버렸으며, 급기야 적의 군영까지 쳐들어가 완전히 초토화를 시켜버리는 미칠듯한 활약을 펼쳤습니다.
후방에서 군대를 지휘하던 원소는 전투의 승패가 거의 결정되어가자 다리 근처로 와서 머물렀는데, 아마도 이 무렵 국의의 선봉과 본래 옆에 있던 수만 보병은 적을 추격하던 상황이었는지 후방에 있던 원소 옆에는 수십명의 강노병 밖에 없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래도 전투가 끝났을테니 별 문제는 없으리라 여겼을테지만, 이때 원소는 오히려 후방에 있었기에 큰 봉변에 처하고 맙니다.
초전의 싸움에서 흩어진 공손찬군의 기병 2천명이 다시 수습되어 전장에 복귀해버렸던 겁니다. 이렇게 되니 본대와 거리가 떨어진 원소는 완전히 적에게 포위 되었고, 옆에는 수십명 밖에 없으니 이대로 죽은 목숨이 될 상황이었습니다. 이 상황이 되자 전풍은 원소를 붙잡고 끌고 가며 담 속에 들어가 적이 물러날때까지 숨어있으라고 권했지만, 원소는 되려 이를 뿌리치고 성을 내더니, 투구를 땅에 내던지며 소리쳤습니다.
"대장부가 적에게 당할 지경이 되어 담장 틈으로 들어간다면, 어찌 살아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휘하 강노병을 독려해 미친듯이 강노를 쏘아대며 적의 기병을 몰아내니, 너무나도 완강한 저항에 기병들은 상대가 원소라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결국 물러나게 되었고, 물러나던 와중에 저승사자 국의에게 걸려 또다시 패퇴했습니다. 그야말로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완승이었습니다. 전투에서 패배한 공손찬은 계로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계교 전투로 원소가 한숨을 돌렸다곤 하지만, 여전히 공손찬의 세력은 강대했습니다. 원소는 휘하 장군 최거업을 보내 공손찬을 공격캐 했지만, 공손찬은 3만이나 되는 대군을 다시 한번 동원하여 최거업을 대패했고, 수천여명을 죽여 기세를 회복했습니다. 그러나 원소가 용주(龍湊)에서 다시 한번 공손찬을 격파하여 완전히 유주로 쫒아보내게 됩니다.
이 시점에서 조정의 사자가 화의를 청하자, 공손찬과 원소 두 사람은 일단 휴전에 동의합니다. 193년 3월, 원소는 박락진(薄落津)이라는 곳에서 제장들을 모두 모아 공손찬이라는 대적을 물리친 것을 축하하는 연회를 성대하게 열었습니다. 모두가 얼싸좋다 하고 술을 마시면서 즐기고 있었는데, 갑자기 전령이 나타나 충격적인 소식을 전했습니다.
10만 흑산적이 나타나, 원소의 본거지 업성을 함락시켜버렸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장연
흑산적은 황건적과는 별개로 황하 이북에서 세력을 떨치던 세력으로, 천하가 혼란한 틈을 타 여러 유민을 받아들여 어지간한 수령들 한 사람당 2~3만 명씩을 거느렸고, 그 수령을 합치고 보니 세력이 전부 한 백만쯤에 달했다는 무리입니다. 이미 한나라 영제 시절부터 황하 이북을 초토화시켜 명성을 떨쳤고, 사실상 조정에서는 이를 진압할 수가 없어 장연에게 자치권을 주고 그를 제도권 안으로 끌어들여 제어하는 방식을 취했습니다.
이때 장연은 휘하인 우독(于毒)을 시켜 10만 대부대를 동원해 업성을 장악하고, 태수 율성(栗成)을 잡아 죽였습니다. 업성은 원소군의 본거지였고, 제장들의 처자도 모두 그곳에 있는 만큼 연회장에서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근심하고 두려워 어쩔 줄 몰랐고, 어떤 사람들은 일어나 가슴을 치며 눈물까지 흘렸습니다. 오직 원소를 제외하곤 말입니다. 원소는 얼굴빛 하나 달라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원소는 패닉 상태에 빠진 제장들을 데리고 나아가 우독을 포위하여 단 5일만에 우독을 참살하고 만명을 전사시켰고, 다시 그 주위의 흑산적 대장 여러 명을 쳐서 또다시 수만명을 전사시켰습니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자 흑산적의 수괴 장연이 직접 나섰습니다. 장연은 횽노, 오환 등과도 연결 고리가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병력까지 합쳐 정병 수만, 기병 수천이라는 막강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여기에 맞서는 원소 역시 비장의 무기 하나를 준비했습니다.
여포
장안에서 이각에게 쫒겨난 뒤 정처없이 방랑하던 외로운 늑대 여포는 원술에게 의탁하려 했으나 거부 당했고, 이에 북으로 올라가 원소에 의지하려 했습니다. 마침 흑산적과의 싸움이 급했던 원소는 여포를 동행해 흑산적과 맞서 싸웠고, 이때 여포는 적토마에 타서 적진을 돌파하여 장연군을 격파하니, 사람들은 "사람 중에 여포가 있고 말 중에 적토가 있다." 고 그 용맹함을 칭찬했다고 합니다.
비록 장연군의 숫자는 10만을 일컫을 때보다 적었지만, 이민족 부대까지 포함된 이 병력이야말로 오히려 흑산적 최강의 정예군이었는지 장연의 흑산적 본대와 여포를 앞세운 원소군은 10여일간을 끊임없이 치열하게 맞서 싸웠습니다. 장연군도 많이 전사했지만, 원소군 역시 계속된 싸움에 지칠대로 지쳐 양군은 결국 승부를 내지 못하고 서로 무승부로 물러났습니다. 다만 원소군은 본거지가 함락된 최악의 위기를 넘긴 방면, 장연의 흑산적은 완전히 패망한 것까진 아니어도 사람만 많이 죽고 결국 얻어낸 것이 없어서, 이때를 기점으로 점점 세력이 약화되었습니다.
한편, 공손찬이 유주로 쫒겨오게 되자 안그래도 사이가 좋지 않았던 유주목 유우와 공손찬의 대립은 더욱 격화 되었습니다. 공손찬은 원소와 싸우려는 뜻을 전혀 버리지 않았는데, 몇번 대패한 공손찬이 다시 한번 세력을 일으키려면 그만큼 유주를 쥐어짜야 합니다. 유주의 안정화를 꾀하는 유우가 이를 좋아할리도 없었고, 공손찬이 만약 원소를 상대로 역전이라도 거둬 진짜 하북을 장악하게 되면, 그때는 누구도 공손찬을 막을 수 없기에 유우는 일부러 공손찬에 대한 군량 지원을 줄였고, 이에 공손찬은 그만큼 더 악랄하게 약탈을 자행했습니다.
공손찬의 again 파워 돌격
결국 참다참다 못한 유우는 자신이 통솔가능한 주둔병 10만을 총동원해 공손찬을 쳤습니다. 그런데 유우의 종사 중에 공손기(公孫紀)라는 인물이 평소 공손찬에게 "당신도 공손씨요? 나도 공손씨요." 같은 식으로 성이 같다며 좋은 대우를 받아서, 몰래 도망쳐 공손찬에게 이 소식을 전했습니다.
처음 소식을 들은 공손찬은 깜짝 놀라 어떻게든 달아나려 했습니다. 유우의 기습이 너무나도 창졸간이었기에 대응할수도 없었고, 공손찬의 휘하 병력도 전부 다른 곳에 흩어져있어 수백명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우가 너무나도 선량한 사람이었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유우 휘하의 10만명은 공손찬의 병사들과는 달리 전투 경험이 부족했는데, 사람들은 공손찬을 아예 주둔하고 있던 성채로 태워버리자고 권했으나 그러면 관계없는 사람들이나 그들의 집이 불타 생업이 곤궁해질까 염려한 유우는 이를 거절했습니다.
이를 파악한 공손찬은 오히려 자신이 불을 지르고는, 유우의 부하들이 당황하여 불을 끄려던 때 수백명을 이끌고 돌격하여 10만 군사를 여지없이 깨버렸습니다. 도망친 유우는 친분이 있던 선비족과 오환족을 불러들여 공손찬을 막으려 했지만 그 전에 공손찬은 유유를 추격해 그와 가족을 모조리 사로잡아 버리고 맙니다. 공손찬은 사로잡은 유우를 저잣거리에 꿇어 앉히고는 조롱을 퍼붓었습니다.
"만약 유우가 응당 천자가 될 만 하다면, 하늘께서는 마땅히 바람과 비를 내려 구해주소서!"
당시는 가뭄이었기에 비가 올리는 없었고, 공손찬은 유우를 조롱 끝에 죽여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공손찬의 유우 살해는 전략적으로는 최악의 선택이었습니다.
'유우는 은덕이 두터워 민심을 얻었고 북쪽의 주(州)에서는 유우의 은택을 입어 백성들은 떠돌던 이들이나 본래 살던 이들을 막론하고 몹시 애석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 후한서 유우전'
하북에서 유우의 인망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라, 유우를 죽인 공손찬의 악행에 분개해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유우의 종사였던 선우보는 본래 한족이지만 어린시절부터 오환, 선비족 등과 부대껴 살아 그들의 친분이 깊은 염유를 끌어들어 한족, 이민족이 섞인 수만 군대를 만들어 공손찬에 대항해, 공손찬의 부하 추단을 죽이고 4천명을 전사시켰습니다.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본 원소 역시 유우의 이름을 활용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여겨, 원술에게서 탈출한 유우의 아들 유화를 대장으로 내세웠습니다. 이 유화의 부대에 선우보, 염우의 병력이 합세하고, 과거 유우의 은덕에 도움을 받은 초왕 소복연 등도 선비족 칠천명을 이끌고 합류했으며, 국의의 부대와 연합하니 그 숫자가 물경 10만에 달할 정도였습니다.
결국 포구(鮑丘)에서 펼쳐진 '사실상' 최후의 결전에서 공손찬은 대패했고, 2만명이 전사했습니다. 끔찍한 참패 이후 공손찬은 일전부터 준비했던 요새 '역경' 에 틀어박히게 됩니다.
역경루에 웅거한 공손찬
공손찬은 역경에서 버티기만 하며 출격도 거의 하지 않으면서, 그 이유를 묻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과거 만리장성 근방에서 반역을 일으킨 호족들을 쫓고, 맹진에서는 황건적을 격파하였는데, 당시 생각키로는 천하를 평정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겼다. 오늘에 와서 돌아보니, 싸움은 이제야 시작된 것으로, 전쟁은 내 결정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군세를 쉬게 하고 농사에 힘써, 이를 통해 흉년에 대비하는 것이야말로 최선의 방책이다. 병법에 이르기를 백 개의 누각은 공격치 않는다고 하였는데, 지금 내 진영에는 누각이 천리에 걸쳐 있고 식량은 삼백석이나 쌓아두었다. 이걸 먹고 앉아있으면 천하의 변화를 기다리기에 충분할 것이다."
사실상의 '천하 통일 포기 선언' 및 '우리들의 싸움은 지금부터다' 를 선언하고 버티기만 했는데, 공손찬의 이 작전은 생각보다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백성들을 완전히 쥐어짜서 만든 역경은 10중 참호가 있고 참호 뒤에 각기 5, 6장 정도(12~14m) 높이의 벽이 있었고 그 위에 망루만 수천개에 이르렀으며, 공손찬 자신이 거주하는 중앙의 망루는 특별하게 건축하여 벽의 높이가 10장(23m)이 넘었고, 그 위에 고층 누각을 세워져 있었으며, 저장된 양식은 300만 섬에 달했던데다 성 안에서는 둔전까지 가능했습니다.
이런 어이없는 요새의 방위력 때문에 원소군도 역경을 쉬이 함락시키지 못했고, 오히려 군량 부족으로 곤궁에 처해지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이렇게 버틴다 한들, 이미 하북 4주를 다 차지해가는 원소군이 전력을 기울여 공격하면 버틸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원소군의 공격이 절정으로 치닿는 199년, 공손찬은 아들 공손속을 시켜 장연에게 구원을 청하게 했습니다. 후한서에는 그 구원 편지의 내용이 적혀 있는데, 실로 생생합니다.
"옛날에 주나라가 멸망하던 혼란때 나자빠진 시체가 땅에 가득했다고 하는데, 내심 그런 일이 말이 되겠느냐고 난 생각했었다. 지금 생각지 못한 적의 예봉에 눌린 상황이구나.
원씨의 공격은 마치 귀신과 같고, 운제 충차는 우리 군의 누각을 공격해대고, 큰북과 뿔피리는 온 땅을 울리고 있으며, 낮 밤 가리지 않고 공격해 들어와 한 마디 말할 틈도 없다. 새가 사람을 쪼아 먹고, 고인물이 산만큼 넘치는구나.
너는 장연에게 머리를 숙이고 긴급함을 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비 자식 간에는 말하지 않더라도 마음이 통할 것이다. 우선 철기 오천을 풀어 북방의 습지에 매복시키고, 불을 놓아 신호하여라. 내가 본진에서 출진하여 기세를 올려, 즉각 결착을 짓도록 하겠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우리 성은 멸망하고, 천하가 아무리 넓다고 해도 너를 받아줄 것은 없을 것이다.
이와 동시에 공손찬 본인은 돌기병을 이끌고 오랜만에 출진해 원소군의 뒤를 쳐서 요격할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참모 관정이 "이미 군사들은 모조리 무너진 셈인데 여전히 버티는 것은 장군이 있기 때문이다. 장군이 버리고 떠난다면 역경은 금방 위태로워 질 것이다." 라고 만류했고, 결국 공손찬도 그 말을 듣고 역경에 눌러 앉게 되어, 최후의 발악조차도 못해보고 역경루에서 썩어서 죽어가는 길을 택하게 됩니다.
장연은 남은 흑산적 무리 10만을 싹싹 긁어 역경 근처에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공손찬군의 작전은 이미 원소군에 전부 노출되었던 상태였고, 이를 역이용한 원소군의 복병에 당해 공손찬과 장연 모두 대패하고 맙니다. 원소군은 땅굴을 파고 들어가 역경성의 요새를 무너뜨렸고, 공손찬은 패망이 눈앞에 왔다는 것을 깨닫고 처자식을 모두 죽인 후 자결했습니다. 공손찬을 만류했던 관정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후회하며,
"내가 듣기로 군자는 남을 위험에 빠뜨리면, 필시 자신도 그 고난을 함께 한다고 들었다. 어찌 나 홀로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라는 말과 함께 무너지는 역경루를 넘어 몰려오는 원소군에게 단기필마로 돌진한 뒤 전사했습니다. 마침내 공손찬의 무리가 평정되었고, 하북은 모조리 원소의 손아귀에 들어왔으며, 원소가 천하최강의 군웅이 되었습니다. 원소는 죽은 공손찬의 수급을 베어 허도에 있는 조조에게 전했습니다. 공손찬의 잘린 목을 본 조조는 홀연(忽然) 하여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알다시피, 천하의 향방은 이때부터 천하이강의 흐름, 원소와 조조의 싸움으로 좁혀지게 됩니다.
* 라벤더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8-06-22 16:26)
* 관리사유 :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