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3년 7월.
사령관 가로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원나라 군이 물러난 호주는 기묘할 정도로 조용하고 적막했다. 승리 이후의 들뜬 분위기나 떠들썩한 소리 역시 들려오지 않았다.
그럴 만도 했다. 살기 위해, 필요에 의해서 적극 협력하며 손을 잡았던 성 내의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었지만, 그들은 본래 서로를 납치하고 칼을 들며 죽이려 했던 사이였다. 이제 와 승리에 환호하기엔 여러모로 머쓱한 입장들이었다.
그렇다곤 해도, 눈앞의 적이 물러나자 다시 싸움이 재개되었다 하는 일도 없었다. 물론 싸우는 동안 서로 사이가 좋아졌다던가 그런 것은 아니다. 이미 그들은 진작에 끝난 사이였다. 다만 대립이 격화되며 머리끝까지 치솟았던 흥분이 가시자 피차간에 어느 정도는 냉정한 판단을 내릴 수 있게 된 것이었다.
호주 포위전은 전 해의 겨울부터 시작해 해가 바뀌어 여름에 이르기까지 장장 7개월을 끌었다. 천신만고 끝에 포위가 풀리긴 했지만, 성내는 마치 폭탄을 맞은 듯 엉망진창이었고 비축해 있던 양식도 대부분 바닥이 난 상태였다. 지금도 지금이지만, 오히려 걱정이 되는 건 좀 더 이후였다. 전투를 하느라 초봄의 농사는 이미 엉망진창이었던 상태다. 이대로라면 다음 해 보릿고개 때 파멸이 닥치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싸움을 다시 재개할 정도로 모든 사람들이 어리석진 않았다. 더구나 긴 전투로 지쳐있던 것은 모두가 다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잠시 동안은 별다른 일 없이 조용한 형세가 지속되고 있었지만, 이런 상황이 그렇게 오래가지 않으리라는 것은 분명 명약관화했다.
태풍이 지나간 후의 호주 한복판에 있던 한 명의 남자, 주원장은 돌아가는 상황을 물끄러미 관망해 보았다.
장기간의 전투가 벌어졌던 호주성의 참상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여기저기가 부서지고 무너졌으며, 양식은 바닥났고, 사방에선 부상자들의 신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우두머리인 곽자흥, 손덕애, 팽대, 조균용 등의 관계 역시 그런 상황을 고려해 지금 당장 싸우고 있지 않을 뿐이지 좌불안석인 것은 매한가지다. 병사는 다치고 물자는 바닥나고 정치는 혼잡하니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만약 주원장이 이 상황에서 흘러가는 대로 한숨만 쉬며 제자리에 머물렸다면, 그의 운명은 평범한 홍건군 부대의 일개 부장으로서 끝이 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주원장은 적극적으로 상황을 바꿔 보려고 했고, 바로 여기서부터가 이 거대한 천하에서 주원장이라는 사람의 운명, 그리고 그 그릇이 뒤바뀌는 큰 전환점이 되었다.
자, 지금의 꼬일 대로 꼬인 상황에서 어떻게든 타개책을 찾아내고 싶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일단 가장 첫 번째로 필요한 것은 지휘계통의 정상화다. 두 번째는 새로 병사를 충원하는 일이며, 세 번째는 물자를 끌어모으는 일이었다.
두 번째와 세 번째를 원활하게 이루기 위해서라도 첫 번째 과제를 해결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 손덕애, 조균용, 팽대 등을 친다면 또 다시 내전이 발발한 뿐이었다. 지금의 호주성 내에서는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여기서 주원장은 실로 과감한 선택을 내린다. 그래, 차라리 호주를 떠나자.
호주를 떠나면 손덕애니, 조균용이니 하는 파벌 다툼도 의미가 없어지게 된다. 어차피 엉망진창인 상태의 호주니 여기에 발이 묶일 필요도 없었다. 차라리 다른 곳으로 가서 세력을 구해보는 게 지금으로선 나을 수 있었다.
물론 호주성 내의 기존 군벌인 손덕애 등은 물론이거니와, 그의 장인인 곽자흥 역시 쉽게 군사를 때어줄 리가 없었다. 병사를 내려달라고 한다면 오히려 그것 때문에 발이 묶일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때의 주원장은 정말로 두려움을 모르고 과감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병사를 요구하기는커녕, 오히려 기존에 자신 휘하에 있던 병사 700명의 지휘권을 모조리 곽자흥에게 넘겨 주었다. 군사를 요구하지도 않고, 오히려 가지고 있던 병사마저 내어주면서 그는 완벽한 자유를 얻었다. 아무것도 원하는 것 없이 그저 빈손으로 떠나겠다는데 붙잡을 수 있는 명분이 없었다.
주원장은 정말로 혈혈단신 호주를 떠났다. 이때의 그는 세력이 아니라 완전한 개인이었다. 그런 주원장을 따라 나선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 역시 어떠한 세력으로서 주원장을 따르는 것이 아닌, 오직 사적인 인간관계 하나로 따러 나선 일개 개인들이었다.
이들의 이름은 서달、탕화、오량(吳良)、오정(吳禎)、화운(花雲)、진덕(陳德)、고시(顧時)、비취(費聚)、경재성(耿再成)、경병문(耿炳文)、당승종(唐勝宗)、육중형(陸仲亨)、화운룡(華雲龍)、정우춘(鄭遇春)、곽흥(郭興)、곽영(郭英)、호해(胡海)、장용(張龍)、진환(陳桓)、사성(謝成)、이신재(李新材)、장혁(張赫)、주전(周銓) 그리고 주덕흥으로서 모두 24명이었다. 주원장을 포함하여 25명이 전부였던 일행은 정처 없이 길을 떠났다. 그런 그들을 호주성에 남은 사람들은 불안한 눈길로 지켜보며 배웅했다.
머물던 집이건, 같이 살던 가족이건 모두 내버려 둔 채 세상에 나온 25명의 호걸들은 무작정 남쪽으로 걸었다. 갈 곳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성을 떠나기 전, 주원장이 미리 생각해 두었던 이후의 계획이 있었다.
그 계획이란 호주 남쪽의 정원(定遠)으로 향하자는 것이었다. 이 정원의 장가보(張家堡)라는 곳에는 꽤 많은 숫자의 홍군이 무리를 지어 여패채(驢牌寨)라는 산채를 만들어 놓고 있었는데, 이야기를 듣자 하니 그 여패채의 무리는 본래 곽자흥의 조직 중 일부였다고 했다.
당장 병력이 필요한데다, 곽자흥과 완전히 척을 질 생각도 없었던 주원장으로선 여패채의 병사를 합류시키면 “흩어진 아군의 병력을 거둬들인다.” 라는 좋은 명분으로 쉽게 군사를 확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마침 얼마 전 이들이 호주의 본대에 다시 항복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해 왔다. 수천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하는 일도 없이 빈둥빈둥하고 있으려니, 자연히 양식이 금방 떨어져 굶주리게 된 것이다. 다만 호주성 내에서는 제 코가 석자에 먹을 것이 없기는 매한가지라 여기서 또 입을 더하기가 두려워 함부로 결정을 못하고 있었던 중이었다. 바로 그럴 때 주원장이 이를 해결하겠다며 나선 것이다.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此機不可失也)
주원장은 그렇게 말했다. 곽자흥 휘하의 일개 부장에 불과한 그가 주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자신의 병사를 끌어모을 기회는 분명 지금 밖에 없었다. 여기서 시간을 끈다면 여패채의 홍군들은 다른 세력에 의탁하거나 아예 해산해버릴지도 몰랐다. 그는 말을 구해 타고 측근인 비취 등을 비롯한 몇 명의 사람만 거느린 채 서둘러 여패채로 향했다.
비록 25명에 불과하다고 해도, 행색이 범상치 않은 일행이 움직이고 있으니 눈에 띈 것은 자명 한 일이었다. 주원장이 여패채 근처에 다가가자, 그쪽에서도 두 명의 장수가 부리나케 달려오는 것이 눈에 띄였다. 그들은 멀리서 주원장을 향해 부르짖었다.
“정지, 정지하라! 그대들은 어디서 온 누구이며, 무엇을 하러 온 것인가?"
그렇게 외치는 두 명의 모습은 경계심에 가득 차 삼엄하기 그지없어, 아무리 봐도 환영해줄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여기에다 두 장수의 뒤에 있는 여패채에서는 언제 수천 명의 병사들이 뛰쳐나올지 알 수 없었다. 덜컥 겁을 집어먹은 비취는 불안한 목소리로 주원장을 설득했다.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일단 물러나서 사람을 더 끌어모은 후에 오는 편이 나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주원장은 두 번 말하지도 않고 고개를 저었다.
“많은 사람은 필요 없다! 도리어 저들의 경계심만 살 뿐이다.” (多人無益,滋之疑耳)
그렇게 말한 주원장은 말에서 내리더니, 뚜벅뚜벅 제 발로 그쪽을 향해 걸어갔다. 이쪽이 숫자도 적고, 적대적인 모습도 전혀 없어 보이자 여패채에서도 우두머리가 직접 나와 주원장을 맞이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신원을 확인하고 간단한 인사를 나눴다. 이 자리에서 주원장은 좋은 말로 우두머리를 설득했다.
"내 듣기로 곽자흥 원수께서 예전부터 공과 친분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제 공의 부대가 굶주리고 적들이 이곳을 습격하려 한다는 소식이 있어, 원수께서는 이 사람을 보내 도와드리라 하셨소. 만일 같이 하겠다면 즉시 함께 갑시다. 그게 아니라면 이곳을 떠나는 게 좋소." (郭元帥與足下有舊,聞足下軍乏食,他敵欲來攻,特遣吾相報。能相從,即與俱往,否則移兵避之)
가로의 원병을 격퇴한 곽자흥의 이름값 때문이었는지, 혹은 일단 좋은 말로 대답할 요량이었는지 여패채의 우두머리는 흔쾌히 “그러마.” 하고 대답했다. 귀순 의사를 확인받자 서로 간의 우호에 대한 표시로 주원장은 자신의 주머니를 끌러 그에게 넘겨주었고, 저쪽에서도 소고기포를 몇 개 꺼내 건네주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함께 하시겠습니까?”
“짐을 꾸릴 시간이 필요하니, 며칠 말미를 주시오.”
저쪽에서 시간을 달라고 하기에, 주원장은 일단 비취를 산채에 두고 그곳을 떠났다. 그런데 3일 뒤, 여패채의 홍군과 함께 오리라 생각했던 비취가 홀로 부리나케 달려오더니 이렇게 소리치는 것이었다.
"다 틀렸습니다! 저들이 우리에게 귀순하는 게 아니라 다른 곳으로 떠나려 하고 있습니다." (事不諧矣,彼且欲他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비취를 남겨두고 온 3일간 주원장이 아무 생각 없이 손가락만 빨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3일 사이에 주원장과 동지들은 근처에서 자신을 따르겠다는 청년들을 최대한 구해 300명이나 되는 수하를 만들어놓은 상태였다. 비취의 말을 들은 주원장은 그 300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여패채를 향해 달려갔다. 힘으로라도 산채를 장악하려 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여패채에 있던 병사는 최소 수천. 정면 대결을 펼치면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은 자명 한 일이었다. 이기기 위해서는 속임수가 필요했다.
주원장은 사람을 한 명 보내 “의논할 것이 있으니 와 주시기 바란다.” 는 제안을 했다. 여패채의 우두머리는 아마도 주원장 휘하 300명의 병사에 대한 정보는 듣지 못했던 것 같다. 별다른 고민도 없이 터벅터벅 걸어온 우두머리는 간단하게 붙잡혔고, 주원장은 남아있던 여패채의 홍군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며 모두 귀순하라고 협박했다.
홍군들은 대부분이 본래는 그저 농사나 짓던 촌부들이었다. 자기들 스스로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는 데다, 양식도 떨어져 굶주리던 차에 이끌어줄 두목조차 붙잡히게 되자 저항할 의지도,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이윽고 그들은 산채에 불을 지르고 모두 투항해 왔다. 그 숫자가 전부 3,000명. 드디어 주원장에게 자신의 ‘부대’ 라고 불릴 수 있는 군단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부모를 묻을 땅조차 없어 이웃집에 굽실거려야 했던 주원장으로서는 이 정도만 해도 큰 성공이었다. 하지만 감격에 겨워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이만한 병사를 먹이고 무장시키기 위해서라도 끊임없이 싸움에 나설 필요가 있었다. 마침 근처에 진파두(秦把頭)라는 자가 수백여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있다는 소식이 있었다. 주원장은 연습 삼아 진파두를 공격했고, 싱거운 승리와 항복을 받은 후 그의 병력을 휘하에 충원했다. 모두 800여 명이었다.
기존에 거느리고 있던 300명. 여패채에서 거둬들인 3,000명. 그리고 이번에 얻은 800명 등 병력은 이제 4,000여 명을 넘고 있었다. 이 정도면 한 번쯤 더욱 강력한 상대에게 싸움을 걸어봐도 좋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마침 적당한 적이 근처에 있었다.
정원 동쪽에는 횡간산(橫澗山)이 있었다. 그리고 이 횡간산에는 목대형(繆大亨)이라는 사람이 이끄는 2만 부대가 있었는데, 이들은 지금까지 주원장이 싸워 왔던 여타 민병들과는 성격이 좀 달랐다. 그들은 바로 의병이었다. (1)
원나라를 세운 것은 몽골인들이다. 때문에 원나라에 대한 인식은 중국인을 탄압한 몽골인과 여기에 맞서 농민 봉기를 일으키며 반항하는 기존 중국인의 대립 구도라는 전제가 깔려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복잡다단한 한 시대의 동향이란 그렇게 간단하게 정립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원나라는 몽골인들의 나라였으나, 중화제국이기도 했다. 전근대 왕조에서 실질적인 여론을 주도하는 지주 계층은 반 이민적, 반 외세적 성향을 가지기도 했으나 동시에 자신을 원나라의 유신이라고 여기는 생각도 있었다. 강남에서 태어난 한족 출신 지식이면서 대도의 봄날을 노래한 고계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이후에도 계속 언급되겠지만 수많은 ‘한인 지식인’ 들이 원나라에 대한 ‘충성’ 을 지키기 위해 분골쇄신하며 몸을 던지다 죽었다.
따라서 그런 원나라의 유신들이 조정을 도와 도적 무리를 퇴치하는 ‘의병’ 을 일으킨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더군다나 농민들로 구성된 홍건적들은 돈이 많은 지주를 습격하여 살해한 후 재물을 약탈하는 일이 잦았다. 정신적인 영역에서도, 그리고 현실적인 영역에서도, 이들에게 있어 홍건적이란 무슨 민족적 동지 따위라기보단 그저 증오스러운 적일뿐이었다.
때문에 원나라 말에는 무수한 ‘홍군’ 의 존재만큼이나, 수많은 민군(民軍)이 있었다. 그리고 이 민군이야말로 무능한 관군을 대신해 홍군과 격렬하게 대립하는 제국 최후의 전투력이었다. 당장 제국의 마지막 희망이라고 할 수 있는 차간 테무르의 의용병 부대 역시 민군이었다. 한때 유복통의 용봉 정권을 거세게 몰아붙였던 타식파토로도 과거 양양에서 모집한 2만의 민군이 큰 전력이 되었다.
절서, 절동 지역에서 파죽지세의 기세를 보였던 서수휘, 팽형옥의 서계홍건군 천완 정권에 일격을 먹인 세력도 다름 아닌 이 민군이었다. 1352년, 휘주 등을 공략하던 팽형옥의 세력이 일시적으로 약화되었을 때 동단소(董摶霄)가 이끄는 민군이 갑작스레 기습을 가했고, 그 공격의 여파로 천완 정권의 정신적 지주였던 팽형옥은 전사하고 말았다. (2) 같은 해 탈탈이 서주 지마이의 홍건군을 격퇴할 때도, 부패한 관군 대신 따로 민병을 조직해 큰 성과를 거둔 일도 있었다.
따라서 이런 민병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무능하고 부패한데다 적을 만나면 달아나기 바쁜 관병에 비해, 지킬게 많은 지주들이 거금을 아끼지 않고 조직한 민병은 전투 의지나 군자금의 준비나 모두 나무랄 데 없었기 때문이다. 이들과 싸우는 것은 배고픈 이들끼리 적당히 뭉쳤을 뿐인 도적 무리를 병합하는 일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일이었다.
원나라에서는 이런 민병 조직의 대장에게 적당한 감투를 주고 전력으로 써먹었다. 횡간산의 목대형 역시 그런 부류에 속했다. 이들은 곽자흥 일파에게 장악당한 호주를 수복하기 위해 규합되었지만, 원나라 군이 물러나면서 단독으로 싸워 이길 자신이 없었던 지라 일단 철수해 횡간산을 지키고 있던 참이었다. 조정에 의해 의병원수(義兵元帥)로 봉해진 목대형 외에 조정에서 내려온 장지원(張知院)이라는 원나라 군관이 이 부대를 통솔하고 있었다.
장기적으로 호주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이 의병 부대는 소탕할 필요가 있었다. 다만 2만이나 되는 숫자란 여러모로 부담스럽긴 했다.
화운(花雲)
이때 주원장에게는 화운(花雲)이라는 용장이 있었다. 화운은 얼굴이 기이하게 검어 별명이 흑선봉(黑先鋒) 이었던 장수로, 힘이 세고 용맹함도 보통이 아니었다. 주원장은 그런 화운에게 부대를 나눠주고, 야밤을 틈타 횡간산을 급습하도록 지시했다.
숫자가 많고 나름대로 전력도 잘 갖춰져 있다고 해도 일단은 민병대. 아직 전투를 벌인다는 실감도 없이 태평하게 밤을 보내던 횡간산의 민병들은 컴컴한 어둠 속에서 흑장군의 기습을 받자 혼비백산해 어쩔 줄을 몰랐다. 여기에 화운이 기습 공격을 펼치며 나름대로의 꾀를 부린 것도 절묘하게 작용했다. 병사들에게 시켜 북과 꽹과리를 치며 요란을 떨게 하니 자다가 기습을 당한 민병들로서는 사방이 적으로 가득 찬 줄 알고 놀라 도망치기 바빴던 것이었다.
2만이나 되는 병력들은 제대로 된 전투조차 치르지 못하고 완전히 무너져 패주했다. 개중에서 가장 먼저 도망간 사람이 조정에서 내려온 군관 장지원이었다.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도망친 장지원의 행방이 묘연한 가운데, 혼란에 빠진 부대를 어떻게든 진정시키고 수습해 다시 한번 싸워볼 태세를 만든 사람은 본시 군인도 아니고 민간인이었던 목대형이었다.
목대형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필사적인 노력을 통해 어떻게든 병사를 수습했다. 이렇게 되자 상황은 다시 미묘해졌다. 초전에선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민병대의 숫자는 아직도 많고, 잔뜩 경계하고 있으니 전날처럼 싱겁게 이기긴 어려울 것이다. 무턱대고 다시 싸운다면 이긴다는 보장도 없고 설사 승리할 수 있다고 해도 큰 피해를 입을 것만 같았다.
그런 적의 대장인 목대형이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주원장이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 성격이 관대하고 온후하며 사람을 다스리는 일에 재주가 있는 인재라고 칭찬하는 소리가 적지 않았다. 말을 듣자 하니 이 작자, 적이라곤 하지만 제법 탐나는 사람이 아닌가.
때마침 운이 좋게도 주원장 군의 진영에 있던 숙정(叔貞)이라는 사람이 목대형과 어느 정도 알고 지내는 사이라고 했다. ‘목대형을 잘 달래보라’ 는 지시를 받은 숙정은 상대의 군영에 가 인사를 나누고 사정을 설명하며 투항을 권했다. 목대형은 그 제안을 듣고 고민했다. 민병을 일으킨 가장 큰 원인은 주위의 도적을 제거하여 자신들의 안전을 구하기 위함이었다. 관군은 도망치고 민병도 한번 패배해 상황이 어려워진 참인데, 저쪽에서 안전을 보장해준다면 투항하지 못할 이유도 없으리라.
생각 끝에 목대형은 백기를 들고 투항 의사를 밝혔다. 주원장이 목대형을, 그리고 그가 이끄는 2만 민병대를 두 팔 벌려 반겼음은 물론이다. (3)
25명으로 시작된 모험은 3,000명에서 4,000명, 그리고 이제 2만 명까지 마치 요술 방망이를 휘두르듯 불어나고 있었다. 여기에 현지의 지주였던 목대형이 투항하면서 협력을 받아 군사를 먹이고 보다 더 무장시키는 일 역시 수월해졌다. 최소한의 행색이 갖춰지자 주원장은 곧바로 오합지졸 그 자체인 단순한 ‘숫자’를 확고한 ‘전력’ 으로 만드는 일에 착수했다. 그는 장병을 소집했다.
휘하 부대원들이 모두 집결하자 주원장은 그들 앞에 섰다. 잠시 제장들과 병사들을 둘러보던 그는 나직하게 연설을 시작했다.
“너희들은 본래 큰 부대였다. 하지만 너희들을 상대한 내가 큰 힘과 고생을 들이지 않았는데도 이렇게 우리 쪽으로 굴러 들어왔다. 원인이 어디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 말은 질문이었지만, 웅성거리는 소리 외에는 명확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주원장은 다시 말을 이었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기율(紀律)이 없었다. 둘째는 병사들의 훈련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뭘 해야 할지 알겠는가? 우리는 엄격한 기율을 세울 것이며, 또한 엄격한 훈련을 할 것이다. 그렇게 해야먄 공업을 이룰 수 있으며, 모두에게도 최종적으로 좋은 일이 있게 될 것이다.” (4)
─이로써 군대의 사기가 크게 떨쳐졌다(軍聲大振) (5)
군성대진(軍聲大振). 사서에서는 당시 주원장 군에 대해 이렇게 평가를 남기고 있다. 여태까지의 그가 일개 도적 무리의 대장 정도였다면, 이 시점에 이르러서 그는 진정한 군벌 집단의 우두머리로 격상하게 되었다. ‘주원장 군’ 이 탄생한 것이다.
끌어당기는 힘을 말하는 중력은 물체가 크고 무거울수록 더 강력하게 작용된다고 한다. 지금까지의 작고 작던 주원장의 부대는 마치 눈사람을 굴리듯 자신들이 직접 데굴데굴 굴러가며 주변의 작은 세력과 인재들을 흡수했다. 하지만 얼기설기나마 ‘주원장 군’ 이 탄생하고 군단의 모습이 갖춰지게 되자,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인재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풍국용(馮國用), 풍국승(馮國勝) 형제가 주원장 군에 합류하게 된 것 역시 바로 이 시점이었다.
풍승(馮勝)
풍국용, 풍국승 형제는 두 사람 모두 이 근처인 정원 출신이었다. 둘 중에서 동생인 풍국승은 중간에 이름을 풍종이(馮宗異)로 개명했고, 이후에 한번 더 개명하여 최후에는 풍승(馮勝)이라는 이름을 썼는데 이 마지막 이름이 가장 유명하다. 형제는 모두 용맹하고 지략이 많았고, 독서를 즐겼으며 병법에 통달해 비상한 지혜와 더불어 뛰어난 지휘 실력을 갖춘 호걸들이었다.
두 형제는 홍건적의 난이 발발하며 치안이 극도로 흉흉해지자 산채를 만들고 부대를 조직하여 스스로를 보호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귀에도 목대형의 2만 부대가 주원장에게 맥없이 넘어갔다는 정보가 전해졌다. 그들 형제의 병력만으로는 이 대부대에 대응할 수 없었기에 두 사람은 고심해야만 했다.
하지만 말을 들어보니 주원장 군은 기율이 삼엄해 비교적 안심할 수 있고, 먼저 투항한 목대형 역시 해코지를 당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렇다면, 공격을 당하기 전 차라리 아직 자신들의 가치가 있을 때 투항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아 보였다.
주원장 군이 근처인 묘산(妙山) 부근까지 이르자, 형제는 사람들을 이끌고 제 발로 그를 찾아가 귀부 의사를 전했다. (6) 생각지도 못했던 도움을 얻자 주원장은 크게 기뻐하는 동시에 호기심을 느꼈다. 풍국용, 풍승 두 형제는 유생의 의복을 입고 행동이 단정했는데, 밑바닥의 빈민이자 떠돌아다니는 거지였으며 도적 집단의 일원으로 평생을 살았던 주원장은 제대로 된 유생이란 족속을 상대해보는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두 사람을 환대하며 질문했다.
“그대들의 옷차림을 보아하니, 역시 유생인가? 천하를 평정하고 한다면, 장차 어찌해야 한다고 생각하시오?” (爾被服若是,其儒生耶, 顧定天下,計將安出)
어쩌면 시험이 될 수 있는 질문에 대답한 것은 형인 풍국용이었다. 본래 이 형제는 두 사람 모두 용맹과 지모를 갖추었지만, 개중에서 동생은 무장으로서 재능이 뛰어났고 형은 일을 꾸미고 기획하는데 능했기 때문이다. 풍국용은 목소리를 가지런히 하고 대답했다.
“금릉(金陵)입니다.”
“금릉?”
금릉이란 바로 오늘날의 난징을 가리키는 옛 지명이었다. 남경은 훗날 대도가 북경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서경, 동경하듯 대치되며 사용된 표현이며, 이 당시의 공식적인 이름은 집경(集慶)이었고 금릉은 예전부터 사람들이 사용했던 말이었다.
풍국용(馮國用)
이 금릉과 호주는 200km가 넘게 떨어져 있었다. 더군다나 그 사이에 대하 양자강이 있었기에 심리적인 거리는 더욱 멀었다. 때문에 갑작스레 나온 금릉이라는 말은 충분히 의아할 수 있는 이야기였지만, 풍국용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금릉은 용이 휘감고 호랑이가 웅크린 모양새로, 가히 제왕의 도읍이라 할만합니다. 먼저 금릉을 함락시키고 도읍으로 삼으십시오. 그런 다음 사방으로 군사를 보내어 백성을 어려움에서 구제하고, 인의를 제창하고 민심을 거두며, 백성을 노략하지 않고 재물을 약탈하지 않으면 천하를 평정하는 것은 분명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金陵龍蟠虎踞,帝王之都。願先拔金陵,定鼎,然後命將四出,救生靈於水火,倡仁義於遠邇,勿貪子女玉帛,天下不難定也) (7)
장강을 건너고, 남경을 수도로 삼아, 천하를 평정하라.
풍국용이 이런 조언을 했던 시기는, 아직 장사성이 남쪽으로 진군하기 2년 전이었다. 아직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하남, 안휘에서 활개를 치는 홍건군과 이를 진압하려 원나라군이 내려오는 북방에 가 있는 시점에서 남쪽을 바라본 것이니, 그 시야가 보통 넒은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 조언은 주원장의 시야에 있어서도 큰 영향을 끼쳤다.
호주에서 태어나, 행각승으로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다 다시 돌아와 고향의 군벌이 되었던 그였다. 나름대로 세상 경험을 했다고 자부하지만 아무래도 그 시야는 어느 정도까진 지엽적인 곳에 고정 되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강을 건너 수도를 정하고 세상을 평정하라고 한다. 일개 지방 군벌인 주원장에게는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며 천하가 넓어지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태조가 크게 기뻐했다(太祖大悅)
주원장은 풍국용의 말을 듣고 반색하며 그 부대를 받은 것은 물론이고, 풍국용과 풍승 모두를 자신의 부대에 두어 여러 비밀스러운 일을 같이 의논했다. 이후 풍국용은 참모로서, 풍승은 무장으로서 그를 적극 도와주는 공신이 되었다.
머릿속으로 장강을 도하하여 금릉을 장악하는 기분 좋은 상상을 떠올려 보긴 하지만, 일단 그런 일은 먼 미래의 일이다. 현재의 주원장은 호주 근처의 일개 무장세력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런 미래를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라도 지금은 부지런히 세력 확장에 나서야만 했다. 주원장은 다음 목표를 저주(滁州)로 잡았다.
그렇게 결정하고 저주를 향해 군사를 이동시키던 중, 중간에 휴식 명령을 내리고 쉬고 있던 중의 일이다. 잠시 한숨을 돌리고 다시 부대를 움직이려고 준비하고 있던 주원장에게 누군가 찾아왔다는 보고가 왔다. 풍씨 형제처럼 세력을 가지고 귀부하러 온 근처의 군사세력인가? 그건 아니라고 한다. 그러면 본대라고 할 수 있는 호주에서 온 연락일까? 그것도 아니라고 한다.
주원장을 만나러 온 사람은 단 한 명의 유생이었다. 유생이라고? 그렇다면 대체 그 유생은 뭐 하는 사람이란 말인가?
그 유생의 이름은, 이선장(李善長)이라고 했다.
(1) 명사기사본말 中
(2) 오함, 주원장전 138p, 해당 항목 주석.
(3) 명사 권 134 목대형 열전
(4) 명태조실록 권 1
(5) 명사기사본말 中
(6) 명사 권 129 풍승 열전
(7) 명사기사본말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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