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탈(脫脫)은 어린 시절부터 늘 특이한 아이라는 말을 듣던 소년이었다. 공신의 아들이던 그는 같은 나이 대의 또래들보다 유독 조숙하고 생각의 깊이가 달랐다. 글을 배울 나이가 되자, 탈탈의 아버지였던 마자르타이(馬札兒臺)는 자신의 아들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 포강(浦江) 사람 오직방(吳直方)에게 맡기며 이렇게 말했다.
“글을 배우는 것도 좋지만, 탈탈을 그냥 하루 종일 글만 보게 하는 것보다는 옛 성현들의 훌륭한 말씀과 뜻을 스스로 글로 써보게 하면서 평생토록 이를 지키게 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것이 아들에게는 더 좋은 수행법이 될 것 같습니다.”
오직방은 그 말처럼 소년을 가르쳤다. 증명이 되겠지만, 탈탈은 자신이 배운 가르침을 결코 잊지 않았다.
또한 탈탈은 문(文) 뿐만 아니라 무(武)에도 재능을 보였다. 아직 어렸을 때 이미 1섬 짜리 강궁을 당길 수 있을 정도로 힘이 장사였고, 15살에는 황태자의 경호를 담당하게 되었다. 그 나이에 문종 황제를 만나 “이 아이는 정말 범상치 않구나. 틀림없이 훗날 큰 인물이 될 것 같다.” 라는 평을 듣기도 했다.
17살이 되자 그는 근위군 도지휘사령관이 되었고, 20살엔 추밀원 동지사가 되었다. 같은 해 탕기세이의 일파가 반란을 일으키자 군사를 이끌고 가 남은 잔당을 모조리 소탕하는 공훈을 세웠으며, 24살에 이르러 마침내 벼슬은 어사대부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처럼 빠른 출세가도가 오직 탈탈 본인의 능력 때문만은 아니었는데, 탈탈의 아버지 마자르타이는 권신 바얀의 동생이었다. 즉 바얀과 탈탈은 삼촌과 조카사이 였다. 제국 최고의 실력자가 자신의 큰아버지였던 셈이다.
다만, 큰아버지 바얀과 친아버지 마자르타이는 원한을 가졌다고까진 할 건 없어도 뜻은 별로 맞지 않았던 것 같다. 바얀은 마자르타이가 조정에서 강력한 권한을 잡아 자신을 보좌해주기를 바랐다. 엘 테무르의 동생 사르둔이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어차피 가장 믿을 수 있는 건 가족이니, 친한 가족을 권력의 중심지에 꽂아 바얀 가문의 권세를 한없이 강화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미친 듯이 권력을 추구한 바얀에 비해 마자르타이는 소탈하고 절제된 삶을 원했다. 마자르타이에게 왕위를 내려야 한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형인 바얀이 이미 진왕(秦王)에 봉해졌는데 형제가 모두 왕이 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스스로 거부했다. 평소에도 조정에 머물기보다는 변경을 떠돌면서 자신의 재산을 털어 굶주린 백성을 구휼하거나, 지나친 부역을 조사하고 이를 시정하는데 주된 관심을 가졌던 인물이었다.
그런 아버지의 풍모를 이어받은 탈탈 역시 삼촌을 그리 좋게 보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나 탈탈이 조정에서 자리를 잡았을 무렵에는 바얀의 전횡이 절정에 이르렀을 무렵이었다.
권세가 하늘을 찔렀던 바얀은 자기 마음대로 관작을 남발하는가 하면, 사형수를 아무런 절차 없이 빼내기도 하고 여러 정예병을 사병으로 부렸으며, 국가 창고의 재물 역시 자기 집 곳간이나 되는 마냥 마음대로 꺼내 쓰곤 했다. 그가 칭기즈 칸의 후예인 황금씨족이 아니었기에 감히 즉위하려는 생각을 못했을 뿐이지, 사실상 황제나 다름없는 행세였다.
어린 시절 큰집인 바얀의 집에서 유년기를 보내며 자랐던 탈탈이었지만 올곧은 심성의 그에게 바얀의 이런 폭주는 도무지 참을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또 영리한 그는 절대권력이 결코 영원하지 않다는 것 역시 잘 이해하고 있었다. 바얀의 전횡은 분명 선을 넘었다. 지금이야 권세가 유지되고 있지만, 만일 무언가 일이 잘못된다면 바얀 본인은 물론이거니와 일족이 족멸을 면치 못할 것이 분명했다. 지금 눈앞에 있는 막대한 재물과 권력은 오히려 탈탈에게 있어 언제라도 사라질 수 있는 공허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쉽사리 털어놓을 수도 없는 일이다. 고민 끝에 탈탈은 아버지에게 생각을 이야기했다.
“큰 아버님의 교만과 방종은 도를 넘었습니다. 만일 천자께서 한번 진노하시면 우리 집안은 모조리 멸망할 게 틀림없습니다. 그전에 무언가 도모해야 합니다.”
“그건 그렇겠지.”
마자르타이는 아들의 생각에는 동의하면서도 막상 결단을 내리지는 못했다. 답답해진 탈탈은 스승인 오직방에게도 조심스레 속내를 털어놓았다. 이야기를 들은 오직방은 이렇게 대답했다.
“네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보았을 것이다.”
“물론입니다.”
“전에 이르기를 대의멸친(大義滅親)이라고 했다. 큰 의를 행하기 위해서라면 육친도 멸한다. 대장부는 마땅히 국가에 충성하는 일을 먼저 생각해야 하네. 나머지는 무엇을 돌아볼 것인가?”
그 말을 들은 탈탈은 자신의 생각을 굳히게 된다.
이런 사정은 꿈에도 모르던 바얀은 그저 이제나저제나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려는 속셈으로 여념이 없었다. 이 무렵 황실 근위병의 정예 병사들은 전부 바얀의 수중에 있었다. 그는 황제를 호위하는 병력마저도 차출해서 자신의 사병으로 부렸고, 한번 바얀이 거리에 행차라도 할라치면 엄청난 숫자의 호위 병력이 거리를 가득 채워 그 위세는 천지를 진동시켰다. 반면 병력을 전부 빼앗긴 순제의 행차는 갈수록 초라해졌고, 거리의 백성들은 바얀은 알아도 순제는 모를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바얀의 손에 의해 산송장이나 다름없게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황실 근위대는 명목상으로라도 유지가 필요했다. 바얀은 여기서도 욕심을 부렸다. 바로 조카인 탈탈을 황실 근위근무직에 배속시킨 것이다. 속셈인즉 황제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게 해서 혹시라도 모를 순제의 돌출행동을 차단하려는 술수였다.
하지만 정작 탈탈은 오히려 황실에 충성하려는 마음뿐이었으니, 바얀의 지나친 과욕은 되려 패착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또한 남은 황실 근위병들은 상관인 탈탈의 인품에 매료되어 너 나 할 것 없이 충성을 바치려 했다. 비록 숫자는 적으나마 이제 탈탈에겐 자신이 부릴 수 있는 병력이 생겼다. 힘이 생긴 것이다.
또 황실 근위병을 통솔하며, 그는 누구의 의심도 받지 않고 자연스레 순제와 접촉할 수 있었다. 황제를 옆에서 보필하게 된 탈탈은 넌지시 자신의 의도를 순제에게 전했다.
“만약 필요하다고 하면, 설사 제 자신의 집안을 부수더라도 전 황실에 충성을 다하려 합니다.”
“뭐라고?”
순제는 탈탈의 의도를 알 수 없어 그 말을 신용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이미 순제 측근은 모조리 바얀의 일파에게 장악되었고, 지금 나타난 탈탈은 바얀의 측근도 아니라 아예 그의 친족이었다. 황실 근위대를 바얀이 자신의 친족에게 맡긴 건 자신을 감시하기 위함이란 너무나도 뻔한 이치였다. 그런 감시자가 친한 적을 해오니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탈탈이 계속해서 넌지시 신호를 보내자, 순제도 그 속내를 알아보아야 할 필요성은 느끼게 되었다.
순제에게는 자신의 세력이라고 할 만한 게 존재하지 않았다. 설사 그런 게 있었다고 해도 바얀이 진즉에 해체시켜버렸을 것이다. 단, 개인적으로 순제를 따르는 심복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아로(阿魯)와 세걸반(世傑班) 두 사람만은 순제가 믿을 수 있다고 여기는 몇 안되는 사람들이었다. 순제는 그들을 보내 탈탈을 넌지시 떠보게 했다.
하루는 탈탈과 아로, 세걸반 세 사람이 우연하게 자리를 같이하는 일이 일었다. 기회라고 여긴 두 사람은 충의를 주제로 탈탈과 긴 이야기를 나누었고, 이 사람이 거짓부렁을 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삼촌인 바얀을 치려는 생각이 있다고 확신하게 된다.
바얀이 대승상에 오르며 위세가 하늘을 찌르던 1339년 가을, 탈탈을 비롯한 세 사람은 바얀이 성문을 나서는 틈을 타 그를 죽일 계획을 세웠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성공하기 힘들듯 해서 일단 계획은 중단했다. 훗날을 계획하고 여기서는 일단 물러날 생각이었으나, 상황은 묘하게 돌아가게 되었다.
이 무렵 누군가가 황제의 어명을 위조하여 관원을 살해한 사건이 있었다. 살인도 살인이지만 어명을 위조했다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중죄였다. 조사 결과, 염방사(廉訪使 : 안찰사) 단도경이라는 자가 관련 있음이 밝혀지게 되었다.
이에 바얀은 쾌재를 부르고는 당시의 어사대부 베르케부카(別兒怯不花)에게 넌지시 운을 띠었다.
“지금의 사건은 어명을 위조해 사람을 죽인 일이니 무시할 수 없는 중죄요. 그런데 이 일에 관련된 사람이 한인 단도경이니, 이는 다 한인들이 쓸모없어서 그런 게 틀림없소. 황제께 말씀드려 한인들이 염방사를 맡지 못하게 해야겠소.”
그러나 베르케부카가 생각하기에 한인 한 사람이 죄에 연관되었다고 해서 중국에 있는 수천만명의 한인들 모두에게 그 죄를 적용시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 상주문을 올리면 훗날의 사가(史家)들에게 두고두고 비난받을 것이 뻔했다. 때문에 그는 상주문을 쓰기만 하고 올리지는 않은 채 병을 핑계로 아예 두문불출해버렸다.
일이 빠르게 진행되지 않자 바얀은 화를 내면서 서두르라고 독촉했고, 지시를 전달받은 감찰어사는 출근하지 않는 베르케부카 대신 어사대 일을 근위대 일과 겸직하던 탈탈에게 찾아갔다.
물론 탈탈 역시 이런 지시를 따를 생각은 없었다. 탈탈은 핑계를 대며 시간을 끌었다.
“베르케부카는 나의 상관이고, 인장 또한 그가 가지고 있소. 그런데 어떻게 내 마음대로 경거망동 일을 처리한단 말이오?”
그렇게 말하며 버티기에 나선 탈탈이었지만, 결국 베르케부카는 압박에 견디지 못하고 상주문을 올리기 위해 출근했다. 베르케부카가 조정에 나온 것을 본 탈탈은 고민하다 스승 오직방을 찾아가 상의했다. 잠시 생각하던 오직방은 이렇게 대답했다.
“한인도 염방사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역대 황제들이 정한 법도이니, 마음대로 바꿔서는 안 될 일이다.”
“하지만 막을 방법이 있겠습니까?”
“상주문이 올라가기 전에 미리 주상에게 말해두는 것이 좋겠다.”
그 말을 듣고 탈탈은 부리나케 순제를 찾아가 일의 전말을 설명했다. 어사대에서 상주문이 올라온 것은 그 직후였다. 탈탈의 설득을 들은 순제는 상주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정에 바얀의 사람들이 깔려 있으니, 순제가 탈탈을 만난 후 상주문을 거부했다는 사실을 바얀이 모를 리 없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그는 즉시 황제를 만나러 왔다. 바얀은 분기탱천하여 소리쳤다.
“탈탈은 저의 조카이니 아들이나 마찬가지인 녀석이지만, 놈의 마음속에는 한인을 비호하는 마음이 가득합니다. 불순하기 짝이 없으니 반드시 처벌해야 합니다.”
그러나 늘 꼭두각시나 다름 없던 순제는 이때만큼은 강하게 나섰다. 여기서 꺾여 탈탈을 처벌한다면 바얀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방법은 영원히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는 모두 짐의 뜻이다. 탈탈의 죄가 아니다.”(此皆朕意,非脫脫罪也)
황제가 ‘나의 뜻이다’ 라고 천명하는데, 이를 억지로 거스르려 하면 군주의 뜻을 대놓고 무시하는 것이 된다. 아무리 대단한 권세가라고 해도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결국 바얀은 어쩔 수 없이 일단 물러나는 쪽을 택했다.
꼭두각시 황제 순제가 이례적으로 적극적인 대항을 한 것은 탈탈의 조언을 들은 탓도 있었지만, 순제 본인의 바얀에 대한 혐오가 도무지 참을 수 없는 수준까지 치닫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바얀이 몽골 왕공들을 자기 마음대로 죽인 사건이 결정적이었다. 그는 친왕들을 죽이면서도 순제의 결정을 의례적으로나마 기다리지도 않았다. 이 일로 말미암아 바얀에 대한 순제의 증오심과 분노는 두려움의 수준을 뛰어넘었던 것이다.
순제는 유일하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탈탈을 만나 눈물까지 흘리면서 자신의 처량한 신세를 하소연했다. 그리고 바얀을 내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충성심이 깊었던 탈탈은 순제의 통곡을 보면서 자신 역시 눈물을 흘렸다.
황제로부터 ‘바얀 척결’ 이라는 밀명을 받은 탈탈은 홀로 고민하다가, 다시 스승인 오직방을 찾아갔다. 밀담 이야기를 전해 들은 오직방은 조심스레 되물었다.
“이 일은 실로 종묘사직의 안위와 연관되는 중요한 일이로구나.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야 할 일이다. 혹시 밀담을 들은 사람이 그 외에 더 있나?”
“저 외에 아로, 톡토무르 두 사람이 있습니다. 모두 믿을만한 자들입니다.”
“그대의 큰아버지 바얀은 주상도 두려워할 정도의 권세를 가지고 있으니, 혹시 이 자들이 부귀에 홀려 한 마디라도 실토하는 날에는 주상도 위험하고 그대 역시 처참하게 주륙 당할 것이다.”
스승에게 경고를 받은 탈탈은 집으로 돌아와 크게 잔치를 준비하고, 이들을 초대해 먹고 마시며 즐기게 하면서도 집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게 했다. 졸지에 감금을 당한 두 사람이었지만 이들은 계속 탈탈에게 협조하면서 바얀을 사로잡을 계획을 같이 논의했다.
탈탈은 휘하 근위 병력을 동원해 궁전의 방비를 철통같이 하면서 각종 모퉁이와 그늘진 곳 마다 병력을 매복시켰다. 그 모습을 본 바얀은 깜짝 놀라 탈탈을 불러 대체 무슨 생각이냐며 책망했다. 하지만 탈탈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가볍게 대답했다.
“천자께서 계신 곳 아닙니까? 그러니 방비를 튼튼히 하는 것일 뿐입니다.”
황실 근위대가 황실 방비를 철통같이 하는데 책임을 물을 수는 없는 일이다. 만약 여기에 불만을 드러낸다면 스스로 황제를 시해할 마음이 있는 반역자라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 된다. 바얀은 심히 불만스러워하면서도 탈탈을 보내주었지만, 이 조카가 언제라도 복병을 이용해서 자신을 습격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지게 되었다.
이미 바얀은 엄청난 숫자의 호위병을 거느리고 있었지만, 경계심이 늘어난 그는 자신의 경호 수준을 한층 더 높였다. 이 정도로 엄청난 호위 병력이 있으면, 감히 탈탈이 그 얼마 되지도 않는 근위대 병력으로 자신을 치지는 못하리라. 틀림없이 바얀은 그런 마음을 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이런 조치가 스스로의 목을 조르는 꼴이 되고 말았다.
1340년 2월, 바얀은 자신의 호위 병력을 이끌고 사냥에 나섰다. 일말의 불안감은 있었던 건지, 그는 순제에게 같이 사냥에 나서지 않겠느냐고 권했다. 순제가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이를 거절하자 바얀은 그러면 황태자 엘 테구스라도 사냥에 같이 데려가겠다며 억지를 부렸다.
엘 테구스는 죽은 문종과 지금 태황태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태황태후는 자신의 아들이 아닌 순제를 황제로 올리는데 동의했지만, 그렇게 양보한 만큼 태자 자리는 자신이 낳은 아들이 되게 한 것이다. 무종의 뒤를 이은 인종이 자신의 아들 대신 무종의 자식을 태자로 삼겠다고 약속한 것과 비슷했다. 물론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지만.
바얀은 자신이 도성을 비워도 수많은 병력을 거느리고 있고, 황태자도 데리고 있으니 문제가 없으리라 여겼던 것 같다. 하지만 오히려 거기에 맹점이 있었다. 바얀이 휘하 병력을 모두 이끌고 떠났기 때문에, 평소라면 바얀의 세력으로 가득 찼을 도성이 되려 한산해졌던 것이다.
이 틈을 타 탈탈은 순제를 만나 ‘바얀 척결’ 의 밀지를 확실하게 받아냈다. 그리고 근위대를 비롯해 통솔 할 수 있는 모든 부대를 장악한 뒤, 평소 자신을 따르던 신뢰할 수 있는 관원들을 모두 성문 앞으로 집합시켰다.
이와 동시에 중서성과 추밀원의 대신을 불러 모아 순제에게 충성 맹세를 하도록 했다. 지금 순제가 바얀 척결의 밀지를 내렸으니, 순제에게 충성 맹세를 한다는 것은 바얀을 역적으로 보는 것에 동의한다는 말이 된다. 조정에 남아 있는 건 탈탈의 병사들 밖에 없었으니 대신들은 죽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순식간에 수도를 장악한 탈탈은 마지막 단계로 사람을 보내 바얀의 군중에 있는 황태자를 데려오게 했다. 너무 많은 병력을 보내면 의심만 받을 뿐이다. 탈탈이 보낸 30명의 병사들은 아주 조용히 사냥에 나섰던 황태자를 수도로 모셔왔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탈탈은 바얀의 죄를 나열하는 상소를 쓰게 하는 한편, 바얀에게 사람을 보내 그를 대승상 직위에서 하남행성 좌승상으로 좌천시킨다는 어명을 전하게 했다.
이때 바얀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수는 문답 무용으로 수도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바얀이 따로 거느리고 있는 사병만으로 수도 함락이 가능할지는 미지수였지만, 최소한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그 방법 밖에 없었다.
하지만 당황한 바얀은 최악의 수를 두고 말았다. 다음날 날이 밝자 바얀은 성 안으로 사자를 보내 대체 무슨 일인지 알아보도록 했다. 탈탈은 성문을 열어주지 않고 성곽 위에서 사자에게 소리쳤다.
“조서가 내렸기 때문에 승상을 축출했던 것이다. 죄는 오직 승상 한 사람에게만 물으며 관련이 없는 다른 사람들은 모두 소속 관서로 돌아가 업무에 집중하도록 하라.”
사자가 돌아와서 이 소식을 전하자, 반란군에 연관되고 싶지 않았던 바얀의 병사들은 슬금슬금 눈치를 보더니 모조리 달아나고 말았다. 만일 바얀이 순제를 데려오거나, 최소한 황태자라도 지키고 있었다면 이렇게까진 일이 진행되지 않았을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이 없는 바얀은 명분 없는 반역자에 불과했다. 하물며 돌아오면 죄를 묻지도 않겠다고 하지 않는가.
바얀이 그토록 추구했던 권력과 권세는 하루아침에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그토록 위엄에 넘쳤던 행차를 이끌었던 호위 병력은 썰물 빠지듯 모두 사라져 바얀은 달랑 혼자만 남게 되었다. 어이가 없어진 바얀은 결국 패배를 인정하고 항복했다. 대신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순제를 뵙게 해달라 간청했지만, 이마저도 허락되지 않고 서둘러 떠나라는 말만 듣게 되었다.
일세를 풍미했던 권신은 결국 홀몸이 되어 떠났다. 말이 부임지로 떠난다는 것이지, 자신이 이제 어떻게 될 것인지는 바얀 본인도 충분히 잘 알고 있었다.
죽을 것이다. 틀림없이 자신을 죽일 것이다. 빨리 죽이느냐, 늦게 죽이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자신이 타나실리 황후를 멀리 떠나보내 독살케 한 것처럼, 이제 자신 역시 객지에서 돌연 의문사를 당하고 죽게 되리라.
바얀이 진정(真定)에 이르러 잠시 쉬고 있을 무렵, 시골 노인들은 그 권세가 대단하던 바얀이 왔다는 말을 듣고 술잔을 들고 찾아왔다. 마음이 괴롭고 적적하던 바얀도 촌부들의 방문을 굳이 마다하지 않고 그들과 어울려 술을 마셨다. 한껏 술이 들어가 취한 바얀은 격정을 참지 못해 노인들에게 이렇게 소리쳤다.
“그대들은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는 일을 본 적이 있소?” (爾曾見子殺父事耶)
조카인 탈탈은 자신에게 있어 아들뻘이나 다름없는데, 그는 아버지인 자신을 몰락케 했다. 그리고 이제는 곧 죽게 될 운명이었다. 바얀의 심정 그 자체인 말이었지만, 노인들은 그에게 술을 더 권하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자식이 아버지를 죽이는 것은 보지 못했소이다. 그런데 신하가 임금을 죽이는 것은 본 적 있구려.”(不曾見子殺父,惟見臣殺君。)
엘 테무르가 명종 황제를 독살하고 권력을 잡았을 때, 바얀 역시 2인자로서 권세를 누렸다. 바얀이라고 해서 그 죽음에 과연 책임이 없겠는가, 당신 역시 황제 시해범의 부역자에 불과하지 않는가 하는 말이었다. 바얀은 그 말을 듣고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혔다고 한다.
바얀이 먼 길을 걸어 임지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조정에선 또 다른 조서가 내려왔다. 그를 남은주(南恩州) 양춘현(陽春縣)으로 옮겨 구금한다는 이야기였다. 바얀은 그곳으로 떠나던 도중 용흥로(龍興路)에 이르러 돌연 병사했다. (1) 1340년 3월이었다.
바얀이 죽었다. 이는 한 시대의 끝을 의미했다. 엘 테무르의 득세로부터 12년간 이어진 권신 정치가 마침내 끝을 맞이한 것이다. 그 12년 동안 칭기즈 칸의 후예들은 권신에게 목줄이 묶인 개에 불과했을 뿐이다. 몽골 제국의 대칸이 그토록 비참했던 시기도 달리 찾기 힘들다.
특히 그 12년은 원 순제, 토곤 테무르라는 한 사람에게 있어 자신의 운명이 송두리째 뒤흔들린 시간들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추방자로서 떠돌아다녔고, 14살의 나이에 황제가 되었으며, 20살이 될 때까지 남의 꼭두각시로만 살아왔다. 평생을 타의에 의해 조종 당하는 삶의 연속이었다.
이제 마침내 그가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어쩌면 지금껏 잘못되었던 많은 것들을 고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틀렸던 것을 옳은 것으로 고칠 수 있는 시간은 아직 충분히 남아 있었다. 모든 것은 그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려 있었다.
그런데 권력을 되찾은 1340년 6월, 순제가 생에 처음으로 자신의 독단으로 내린 큰 결정은, 실로 뜻밖의 일이었다.
“…..문종 황제는 명종 황제에게 독약을 먹고 죽이게 하였으며, 사악한 이야기를 지어내 짐을 명종 황제의 아들이 아니라고 꾸미고 먼 시골로 내쳤다. 하늘이 문종 황제에게 천벌을 내려 죽게 했다….”
“부타시리는 짐의 작은어머니로, 짐의 뜻과는 달리 간신과 결탁해 태황태후라는 칭호까지 받았으나, 그 죄악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문종의 아들 엘 테구스는 나이가 어려 처벌하기 곤란하니, 먼 고려에 유배시키도록 하겠다.” (2)
순제가 내린 명령은 문종 황제의 신주를 철거해 ‘폐주’ 로 만들고, 부타리시 태황태후를 구금시키며, 황태자 엘 테구스는 고려로 유배 보낸다는 내용이었다. 가히 철저한 복수였다.
엘 테구스(雅克特古思)
‘구금’ 이나 ‘유배’ 도 사실은 좋게 포장한 말이었을 뿐이다. 부타시리 태황태후는 구금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붕어’ 했다. 자연사인지 타살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타이밍은 실로 기묘했다. 한때 황태자였던 엘 테구스는 신하들이 유배를 보내면 안 된다고 극구 말렸으나 순제는 듣지 않았다. 엘 테구스는 고려에 도착하기도 전에 죽었다. 순제는 겉으론 죽은 그의 장례를 치르며 애도했지만, 젊디젊은 사람이 유배를 명령받은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급사했다는 것은 의미하는 바가 명확했다.
철저한 복수의 정치. 자신이 잃었던 것을 다시 되돌려 받을 수 없다면, 남들 역시 잃어버리게 하겠다는 증오의 표출. 그게 바로 순제의 첫 번째 결정이었다. 물론 아버지를 잃고 혹독한 어린 시절을 겪은 순제에게 이는 당연한 보상으로 여겨졌을 수 있다.
그러나 엘 테무르, 문종을 떠나 태황태후나 어린 엘 테구스에게까지 그 죄를 물을 수 있는지는 의문이며, 설사 자의가 아닌 타의였다고 해도 예법을 무시하고 ‘태황태후’ 로 까지 추켜세우며 모셨던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것은, ‘이제 새로운 시대가 왔다’ 고 기뻐하던 사람들의 마음속에 음울한 어둠을 드리우게 하기엔 충분한 일이었다.
불과 몇 달 전 바얀을 숙청하며, 순제는 “바얀은 짐이 어리다고 무시했고 태황태후와 동생 엘 테구스를 경멸하는 등 횡포를 일삼았다.”(欺朕年幼,輕視太皇太后及朕弟燕帖古思,變亂祖宗成憲,虐害天下) 라는 것을 이유로 삼았다. 그런 조서를 내린 지 몇 달도 되지 않아, 그들이 사실 천하에 둘도 없는 악적이라며 유배를 보내고 몰래 죽여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바얀은 악적의 준동을 막은 공신이라는 말인가?
한 명의 사람이 올곧게 자라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시기가 유년기와 청소년기다. 하지만 순제는 그 시기를 모두 비정상적으로 뒤틀린 환경 속에서 보냈다. 순제 본인도 스스로를 “어려서 온갖 고생을 겪었고, 들어와 대통을 이었다.”(朕早歷多難,入紹大統 ) (3) 고 평했다. 어쩌면 그가 훌륭한 황제가 되기는 처음부터 틀렸을지도 몰랐다. 청나라의 조익(趙翼)은 이 일을 거론하며 다음과 같은 냉담한 평을 남겼다.
“처음에는 존칭함이 예가 아닌데도 이를 행했다. 나중에는 죄가 아닌데도 죄로 삼았다. 쇠조(衰朝)의 황주(荒主). 실로 꾸짖을 가치도 없는 것이다.” (4)
쇠조의 황주. 쇠락해가는 나라의 폐망한 군주일 뿐이다. 그러니 애당초 꾸짖을 가치조차 없다. 비판이라 쳐도 너무나 냉혹한 평이다. 그러나 어쩌면 가장 핵심을 찌르는 말일 수도 있다.
원순제. 혜종 토곤 테무르. 그는 원나라 100여 년 역사상 위대한 세조 쿠빌라이에 이어 가장 오랫동안 즉위했던 황제였으며, 세상에서 가장 거대했던 제국을 멸망시킨 군주였고, 조상들이 점령했던 땅을 잃어버리고 달아난 후손이었다. 그의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평생에 걸쳐 철저한 실패와 완벽한 패배로 점칠 되어 있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패배는 아직 시작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최대의 패배를 안겨주게 되는 상대는, 그보다도 몇 배는 지독한 운명의 별 아래서 태어나게 된 사람이었다.
(1) 원사 열전 138 바얀 열전, 탈탈 열전
(2) 원사 순제본기 40
(3) 위와 같다.
(4) 조익, 이십이사차기(二十二史箚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