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가 몽골에 복속된 원 간섭기엔 수많은 고려 여인이 공녀라는 명목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고려사에 언급된 공녀의 공식적인 숫자는 176명에 달한다. 하지만 실제로 끌려간 숫자는 기록의 4~5배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4)
마냥 생각하기엔, 다른 나라의 요구에 어쩔 수 없이 넘겨주는 여자들이라면 신분이 천한 하층민을 골라 보낼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인간에게 ‘등급’ 이 있던 그 시대에서, 주는 쪽 입장에서는 ‘좋지 않은 것’ 을 주려고 하겠지만 요구하는 쪽 입장에선 무조건 ‘상등품’ 을 원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였던 것이다. 기실 원나라에 끌려가는 공녀 중 많은 사람들은 오히려 지체 있는 집안에서 고생을 모르고 자랐던 어린 소녀들이었다.
이를테면 충렬왕(忠烈王) 시기 공신인 홍규(洪奎)의 일화가 있다. 홍규는 무신 정권의 마지막 실력자인 임유무(林惟茂)를 타도하는데 공을 세운 국가의 최고 원로 공신이었다. 하지만 심지어 그런 홍규마저 자신의 딸이 공녀로 끌려가는 것을 막을 순 없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을 어떻게 지켜야 할까? 고민하던 홍규는 딸의 머리를 밀고 비구니로 만들었다. 하지만 일의 진상은 곧 발각되고 말았고, 속임수를 쓰려던 홍규는 끌려와 모진 고문을 당했다. 국가의 공신이라느니, 원로라느니 하는 것은 몽골제국의 채찍 앞에서는 모두 무력하기 짝이 없는 이름에 불과했던 것이다.
수난을 당한 것은 그 뿐만이 아니다. 홍규가 그토록 지키려고 했던 그 어린 딸 역시 끌려왔고, 쇠 채찍을 맞으며 만신창이가 되었다. 딸은 온 몸이 넝마가 되는 처참한 꼴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소리쳤다.
“내가 혼자서 한 일이에요. 아버지는 관계가 없어요.”
그러나 부녀에게 내리쳐지는 매서운 채찍질은 도무지 멈추지를 않았다. 보다 못한 나라의 재상들이 와서 “홍규는 국가의 최고 원로 공신인데 이럴 수는 없다.” 며 만류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삼별초 토벌과 일본 원정에 2차례 참여했던, 당시엔 병이 들어 집에 누워 있던 당대의 전설적인 무신 김방경(金方慶)도 늙은 몸을 이끌고 나와 “홍규에 대한 처벌을 중단해야 한다.” 고 주장했다. 하지만 냉혹한 몽골의 철퇴 앞에 이런 몸부림은 모두 속수무책이었을 뿐이다.
결국 홍규는 모든 가산을 적몰(籍沒) 당하고 바닷가 섬으로 유폐되었으며, 피투성이가 된 홍규의 딸은 원나라 사신 아쿠타이(阿古大)에게 끌려간다. (5) 그녀의 뒷 운명에 대해 남아 있는 기록은 없지만, 그 주인이 된 아쿠타이는 훗날 원나라 정치계의 내부 다툼에서 밀려 살해당했다는 기록이 있다. 아마도 그녀는 이때 말려들어 같이 죽음을 맡이했을 것이다. 혹은 심한 고문을 당한 몸으로 천릿길을 가다가 길에서 객사했을 수도 있다.
몽골에 대한 원한이 골수에 사무쳤을 홍규의 후손들은, 훗날 공민왕이 반원 정치를 펼칠 때 가장 강력한 지지세력이 되었다. 나라의 원로마저도 이러했을 정도니 다른 사람들은 속수무책이었다. 고려 말의 대유학자 이색(李穡)의 아버지인 이곡(李穀)의 말에 따르면,
“(공녀) 선발에 들고나면 부모와 친척들이 함께 모여서 밤낮으로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습니다. 도성의 문에서 보낼 때에는 옷자락을 붙잡고 쓰러지기도 하고 길을 막고 울부짖으며 슬프고 원통해서 괴로워합니다. 우물에 몸을 던져 죽는 자도 있고 스스로 목을 매는 자도 있으며 근심과 걱정으로 기절하는 자도 있고 피눈물을 쏟아 눈이 멀어버리는 자도 있는데, 이러한 것들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 (6)
라고 할 정도니, 그 참상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런데 혹은 일부러 집안의 여자를 바치는 공녀로 경우도 있었다. 가문의 성공을 위해 공녀를 바쳐 그 연줄로 원나라에 끈을 만들어 두려는 것이다. 하지만 강제적이건 자발적이건, 그 동기가 어찌 되었건 당사자인 공녀들에겐 가혹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수많은 궁녀들 사이에서 ‘황은’ 을 입어 신분상승을 하게 될 확률은 1등 짜리 복권에 당첨될 확률에 비유할 수 있다. 대다수는 나이가 들어 쓸모없게 될 때까지 궁궐에서 일만 하며 모든 세월을 버릴 뿐이었다. 그럴 경우 어쩌다가 궁궐에서 내보내는 경우도 있지만, 그럴 경우에도 환관에게 시집을 가 자식조차 보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7) 고국에서야 고관대작들의 꽃다운 딸 들이지, 사천 리 밖에 대도에서는 외국의 천한 계집이라고 무시나 안 당하면 좋을 무수리 신세였다.
그러나 드물게, 기적을 이루는 공녀들도 있었다.
기 씨 소녀는 행주 기 씨 집안의 딸로, 아버지는 기자오(奇子敖)라는 사람이었다. 기자오 본인은 조정에서 큰 벼슬을 하지 못 했지만, 그렇다고 본시 하잘 것 없는 집안까진 아니었다. 물론 원로 공신마저도 공녀를 숨겼다가 고문을 당하던 시대였으니 그런 것은 의미가 없었다. 고국에서라면 부족할 것 없었을 그녀는 시대를 잘 못 만난 죄로 수천 리 타향으로 어린 나이에 떠나야만 했다.
그런데 여기서 그녀는 고용보(高龍普)라는 인물을 만나게 된다. 고용보는 원사에서는 투멘데르(禿滿迭兒)라고 기록된 인물로, 본래 고려에서 석탄을 캐던 하층민에 불과한 인물이었다. (8) 고려의 탄광부 고용보가 어떤 운명을 통해 원나라 휘정원사(徽政院使) 투멘데르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여간, 이 고용보는 소녀를 궁녀로 삼으면서 차를 바치는 일을 주관 케 했다. 토곤 테무르에게 차를 바치던 기 씨 소녀는 이윽고 총애를 받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숱한 고생을 겪었던 토곤 테무르는, 이 이역만리의 소녀를 특별히 아꼈다. 그 역시 어린 시절엔 고려의 대청도에서 살았던 몸이었다. 혹은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꼈을 수도 있다. 밖에서는 물론이거니와 집에 들어와서도 원수의 딸이 부인으로 있으니 그로써는 달리 편할 날이 없었을 토곤 테무르다. 기 씨 같은 여인이 있으면 관심이 갈 수 밖에 없었다.
“영리하고 교활해, 특별한 총애를 입었다.” (9)
원사에서는 기 씨 소녀의 성품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똑같은 지혜를 의미하는 말도 할(黠)이라는 표현은 ‘약았다’ 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 보통의 황후들에게 의례적으로 ‘덕이 있고 현명하다’ 고 하는 표현과는 분명히 다르다.
아무래도 여간내기가 아닌 그녀는 토곤 테무르의 마음속 응어리를 잘 파악하고 총애를 받았던 듯하다. 어린 나이에 가족과 생이별하여 타향에 홀로 끌려온 10대 소녀로서는 대단히 능동적인 삶의 태도였다. 물론, 그녀로서도 필사적이었을 것이다. 기 씨 소녀는 틈이 나면 여효경(女孝經) 및 역사와 유교 경전을 탐독했다고 한다. (10) 이 외국의 땅에 그녀는 혼자였다. 고국으로 말하자면 그녀를 저버린지 오래였다. 살아남기 위해선 영리해야만 했다.
물론 토곤 테무르의 정실인 타나실리로서는 황제가 자신을 거들떠도 안 보고 기 씨 소녀만 만나러 다니는 것이 기분 좋았을 리 없었을 것이다. 화가 치밀어 오를 때마다 타나실리는 기 씨 소녀를 찾아가 채찍질을 하면서 모욕했다. 고려 출신 공녀 따위와 엘 테무르의 친 딸이 비교가 될 리 없었다. 매서운 채찍질을 당하면서도 그녀로서는 참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공녀 정도가 아니라 설사 황제라고 엘 테무르에겐 대항하지 못 했을 것이다. “못할 것이 없었다(肆意無忌)” (11) 라는 것이 당시 그 권력에 대한 평이었다. 엘 테무르가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행했던 여러 일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는데, 대체로 이런 식이었다.
먼저 그의 집에서 잔치가 열린다면, 단 하루에 말 13마리를 잡는 경우도 있었다. 말이라는 동물은 요즘 시대에서도 마리 당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동물이다. 물론 잡아먹기 위해 도축하는 말이 비싼 경주마 같은 가격은 아닐 테지만, 엘 테무르쯤 되는 인물이 손님에게 접대하기 위해 내놓는 말이 형편없은 몰골의 말도 아닐 것이다.
그런데 조정의 최고 실력자쯤 되는 인물이라면 크게 잔치를 벌일 만한 일은 무수하게 많을 것이다. 그때마다 저 정도의 사치를 부린다고 생각해보면, 이건 제아무리 중국 황제라고 해도 쉽게 부리기 힘든 사치라고 할만 했다.
색을 밝히는 일에서도 그는 거리낌이 없었다. 원나라 말기엔 황제들이 빠르게 죽고 바뀌었기 때문에, 몇 대 전의 황제인 태정제 예순테무르의 황비들은 아직도 아름다움과 젊음을 유지하고 있었다. 엘 테무르는 이런 황비들을 내키는 대로 마음껏 취했다. 황제의 여자였던 비들을 일개 신하가 겁탈했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믿기 힘들 정도의 불경함이지만 사서에서는 분명히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
심지어 아예 종실(宗室)에서만 사십여 명을 뽑아가 모두 자신의 첩으로 두고, 데리고 놀다가 지겨우면 삼일 만에 내쫓기도 했다. 그날그날 내키는 대로 여자를 데려와 첩으로 삼다 보니 나중에는 엘 테무르 본인마저도 누가 누군지 분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하루는 연회 중에 구석에 있는 부인 한 명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마음이 혹한 엘 테무르는 그녀도 데리고 가려고 “저 여자는 누구인가?” 하고 물었다. 그러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태사의 집안사람입니다(此太師家人也).” (12)
엘 테무르가 태사의 벼슬이었으니, 바로 본인의 집사람이라는 이야기다. 자기 집 여자를 보고도 누구인지 물을 정도였으니, 촌극도 실로 대단한 촌극이 아닐 수 없다.
엘 테무르는 아무래도 색정광이었던듯하다. 비정상적으로 섹스에 탐닉했다. 평소에도 심했지만, 토곤 테무르가 나타나고 나서는 이것이 더 심해졌다. 토곤 테무르가 권력을 얻으면 자신을 죽이려고 할 것은 뻔한 일이다. 물론 지금은 본인의 위세가 훨씬 강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감을 감출 수는 없었다.
토곤 테무르의 황제 즉위를 막고, 혹여나 즉위할 것을 고려해 미리 자신의 딸을 결혼시켜 외척까지 되고서도 뭐가 그렇게 불안했는지는 모를 일이다. 엘 테무르는 불안감을 덜하기 위해서인지, 그야말로 미친 사람처럼 성관계를 맺었다. 소돔과 고모라가 따로 없는 실로 광인의 난교였다.
결국 이런 무절제한 생활이 원인이 되어 그는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사서에서는 엘 테무르의 죽음에 대해 기록하기를,
“몸이 파리해지더니 피오줌을 싸지르며 죽었다. (體羸溺血而薨)” (13)
라며 냉담할 정도로 적나라하게 사인을 적어 두었다. 한때 제국 전역을 좌지우지했던, 원나라 말기 최강의 권신으로서는 너무나도 비참한 죽음이었다.
이 죽음은 무언가 석연치 않다. 물론 엘 테무르가 색을 밝히고 무도하긴 했을 것이다. 하지만 토곤 테무르가 고려에서 반란을 꾸민다는 ‘소문’ 만 듣고도 그를 소환하며 자신의 파벌인 충혜왕을 바로 퇴위시켜버렸던 것이 엘 테무르였다. 그런 그가 정치적 위기에 봉착한 절체절명의 순간에, 단지 처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모든 것을 잊고 죽을 정도로 섹스에만 빠지다 죽다니?
어쩌면 무언가 비화가 있을 수도 있지만, 우리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찌 되었건 엘 테무르가 죽게 되면서 1333년 6월, 마침내 토곤 테무르는 황제에 즉위할 수 있었다. 그가 바로 혜종(惠宗) 이며, 순제(順帝)이자, 중국을 장악한 제국으로서 원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