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리시스 심프슨 그랜트, 그는 이름에 맞춰 Unconditional Surrender(무조건 항복)이라는 멋진 별명을 얻습니다. 승리할 때 무조건 항복만을 받아들인 것에서 따 왔다 합니다. 전쟁영웅으로 이름 높아서 이후 대통령까지 됩니다만... 좋은 군인이 좋은 정치인은 아니었죠. 전쟁을 싫어하는 편이었고 병사들의 큰 희생에 울기까지 했다고 합니다만... 그는 자기식으로 밀어붙입니다. 그게 이 전쟁을 빠르게 끝낼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요.
+) 계속 이 사진만 올리고 있는데 대통령 된 다음 사진입니다.
1864년 초부터 그랜트는 남진을 명령합니다. 하지만 역시나, 리에게 패했죠. 하지만 그랜트는 이제까지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5월부터 있었던 윌더니스, 혹은 오버랜드 전역의 모습입니다. 남군은 남진해 오는 북군에 맞서 싸웠고, 피해는 계속 북군이 컸습니다. 하지만 그랜트는 병력을 물리지 않습니다. 그가 믿는 것은 북부의 압도적인 인력과 물자, 피해를 입어봐야 바로 보충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북군이 패하고만 있던 건 아니었으니, 그는 서부전선에 있었을 때 부하였던 셰리던에게 기병대를 맡겼고, 셰리던은 여러차례 승리를 거둡니다. 셔먼보다는 유명하지 않지만 남부의 기반을 파괴하는 초토화 작전은 그 역시도 진행했죠.
이 5월 한달 동안 북군의 피해는 무려 5만여, 하지만 남부도 3만이 넘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북군은 계속 병력을 충원하면서 달려들었고, 남군은 그런 북군을 막다가 제풀에 나가 떨어집니다. 이렇게 되면서 공격적이던 리는 방어전을 택할 수밖에 없었죠.
그렇게 남군은 리치몬드에 틀어박히게 되었고, 그랜트는 리치몬드의 남쪽에 있는, 마지막 요충지인 피터즈버그를 공격합니다. 6월부터 65년 4월까지 이어지는 기나긴 포위전의 시작이었죠.
비슷한 시기, 셔먼은 남군의 서부전선 사령관이던 존스턴을 밀어붙이고 있었습니다. 병력만으로 십만대 오만으로 두배였고 여기서도 피해는 북군이 클 때도 있었지만, 역시 차근차근 밀어붙이고 있었죠. 이렇게 되자 남부 수뇌부에서는 존스턴을 자르고 존 후드로 바꿉니다. 링컨이 그랬듯 남부에서 바란 것 역시 공격적으로 나가서 남부까지 쳐들어온 셔먼을 내쫓는 것이었죠. 그래야 될 이유도 있었습니다. 셔먼이 노리고 있는 곳은 조지아주의 중심지, 남부에서도 대도시인 애틀랜타였거든요. 존 후드는 병력을 긁어모아 이 전투에서는 공격해오는 북군보다 많았지만, 셔먼이 이깁니다.
이렇게 되자 9월 1일에 후드는 애틀랜타를 버리고 버리고 후퇴합니다. 그가 애틀랜타에 있는 보급품을 불태우고 가면서 도시 전체에 큰 불이 퍼졌고, 셔먼도 진군하면서 기반시설들을 파괴합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이 지옥같은 광경을 다루고 있죠. 누구나 다 아는 명작입니다. 남부 미화가 많이 심하다는 문제가 있지만요.
이 애틀랜타 전투의 승리는 컸습니다. 리가 동쪽에서 버티더라도 후방이 무너지면 끝이었으니까요. 후드는 직접 맞서진 못 하겠고, 셔먼군이 쉬는 사이에 후방을 노립니다. 하지만 셔먼은 후방에 조지 토머스 등을 남겨두고 있었고, 후드는 이들을 몇 번이고 공격했지만 참패합니다. 프랭클린-내쉬빌 전투입니다. 이걸로 후드는 잘리고 존스턴이 다시 임명됐지만, 이미 병력은 북군과 싸울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해져 있었습니다.
링컨에게는 최고의 소식이었습니다. 이 승리는 링컨의 재선에 큰 역할을 했죠.
11월 중순, 셔먼은 다시 진군합니다. 조지아주를 관통해 남동쪽으로 향했죠. 남군은 적은 수라도 막으려 했지만 셔먼의 목표가 어딘지 몰랐습니다. 셔먼은 그저 거침없이 진군할 뿐이었죠. 이것이 유명한 셔먼의 바다로의 진군(Sherman's March to the Sea), 혹은 행진이었습니다.
아래에서 다루겠지만 남북전쟁에서 양측이 대군을 빠르게 동원할 수 있었던 이유는 철도 때문이었습니다. 때문에 지난 전투들에서도 철도 등을 파괴하는 공작은 기본이었죠. 그리고 적 영토로 들어갈 경우 철도를 제대로 이용할 수 없었으니 진군은 느리기 마련이었구요. 동부전선처럼 양측의 거리가 짧다면 모르겠지만, 서부는 드넓었습니다. 보급이 많을수록 속도는 늦춰졌고, 남군은 셔먼에게 패했지만 후방 보급로를 계속 노리고 있었습니다.
셔먼의 결론은 간단했습니다. 현지조달이었죠. 병사들에게는 20일치의 식량만 챙기게 합니다. 그가 진군한 곳이 우호적이었거나 풍족했다면 현지조달은 그냥 물자를 구입하는 것이 됐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죠. 거기다 셔먼의 목표는 남군이 아니었습니다. 남부의 전쟁수행능력과 의지 자체였죠.
얻을 수 있는 건 다 약탈했고, 시설은 모두 파괴해 버립니다. 군사시설 뭐 이런 게 아니었습니다. 농장부터 온갖 살기 위한 건물들까지 모두 불태워 버립니다. 철로까지 다 뜯어버렸고, 남군이 쓰지 못하게 녹여서 나무에 둘러버립니다. 이걸 셔먼의 넥타이라 불렀다 합니다. 그의 군대가 하지 않은 건 조직적인 학살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약탈 과정에서 인명피해가 안 날수가 없었고, 모든 걸 파괴해버린 상황에서 사람들이 제대로 살 수 있을 리가 없었죠.
셔먼은 전쟁을 지옥이라 생각했고, 그건 군인뿐 아니라 민간인에게도 마찬가지라 생각했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전쟁광은 아니었고 오히려 전쟁을 싫어하는 편이었죠. 그가 이런 일을 벌인 건 오로지 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함이었습니다. 네, 이래서 그를 총력적의 개념을 이해한 최초의 군인으로 꼽는 것이죠.
조지아주의 대서양에 접한 항구도시 서배너까지 500km를 진군한 후 바다로의 행진은 끝납니다. (이래서 이 행진을 서배너 전역이라고 부릅니다) 셔먼의 다음 목표는 북쪽이었습니다. 여기서도 다를 게 없었죠. 그가 지나간 노스/사우스 캐롤라이나는 조지아처럼 모든 게 파괴됩니다. 이건 리치몬드에서 방어를 계속하고 있던 남군에게도 큰 충격이었습니다. 버티기도 힘든 상황에서 후방이 초토화된 거니까요. 더이상 병력과 물자를 지원받을 수 없는 것은 물론, 고향이 위험해졌다는 소식에 탈영이 계속 이어집니다.
이런 점으로 인해 주목받은 건 동부전선이었지만, 애틀랜타 전투를 비롯한 셔먼의 승리가 남북전쟁의 결정적인 승리였다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반면 애틀랜타까진 그렇다 치더라도 이미 전세가 기운 상황에서 그런 파괴를 저지를 필요가 없었다는 반론도 있구요. 어찌됐든 남부의 피해를 복원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고, 셔먼은 남부인에게 악마와 다를 바 없는 평가를 받게 됩니다.
+) M4 전차에 셔먼이라는 별명을 붙인 건 영국이었습니다. 미군과는 크게 관련이 없는 거죠.
그동안 피터즈버그는 함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랜트가 탱킹하는 동안 셔먼이 딜을 넣은 느낌이지만 (링컨도 비슷한 평가를 했습니다. 물론 남부 후방을 휩쓰는 건 계획된 거였지만요) 그랜트가 그럴려고 그런 건 아니었습니다. 온갖 방법을 다 써서 피터즈버그와 리치몬드를 함락시키려고 했지만 실패한 거였죠. 방어선은 잘 구축돼 있었고, 리는 방어전도 훌륭히 치렀습니다. 온갖 시도가 있었지만 실패했죠. 가령 분화구(crator) 전투의 경우 땅굴을 파고 폭약을 터뜨려 방어선을 깨뜨리고 진격하려 했던 거였는데 그 구멍이 너무 커서 오히려 집중공격을 받고 큰 피해를 입은 전투였죠. 온갖 방법을 다 써보고, 그럴 때마다 남군의 두배에 가까운 피해가 났습니다.
그렇다고 남군이 반격을 할 수 있었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죠. 피터즈버그와 리치몬드에 대한 포위망은 갈수록 강해졌으니까요. 이렇게 되면서 동부전선은 참호전으로 양상이 바뀌게 됩니다. 네, 1차 대전의 그것의 초기 버전이라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남군은 물자를 지원받지도 못했고 탈영병만 늘어납니다. 셔먼의 병력은 물론 사방에서 북군의 증원만 계속되고 있었죠. 3월 말, 북군은 최종공세를 시작했고 4월 초에 남부의 수도 리치몬드와 피터즈버그가 연이어 함락됩니다.
누가 보면 그랜트가 항복한 거 같죠
후퇴하던 리는 버지니아주 애퍼매톡스에서 약간의 교전 후 항복을 결심합니다. 4월 9일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제퍼슨 데이비스 등 남부의 수뇌부도 항복을 결심했고, 이후 각 지역들도 차례차례 북부에, 아니 미합중국에 항복해서 되돌아옵니다. 그랜트는 포로를 폭행하려는 병사들을 말리며 "그들이 다시 우리의 동포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항복을 받아도 병사들은 집에 돌려부내주었죠. 그 자신의 성격도 있겠지만, 이제 패한 측을 감싸안을 때였으니까요.
이렇게 미국의 유일한 내전, 미국 내에서는 시빌 워의 대명사인 남북전쟁이 끝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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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군사적인 점부터 짚어보죠.
애초에 남북의 국력은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북부의 인구는 개전 시점에 이천만명을 넘었고, 전쟁이 일어난 후에도 계속 늘어만 가고 있었죠. 반면 남부는 구백만명 정도, 그나마 그 중 삼백만 정도는 흑인 노예였습니다. 공업은 북부에 집중돼 있어서 남부의 전쟁물자는 북부에 비해 극히 적었고, 생산시설도 마찬가지였죠. 남군은 신발도 제대로 못 신고 싸워야 할 정도였습니다. 외국에서 수입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북부가 해상봉쇄를 했고 노예해방으로 영국과 프랑스가 북부 편을 들었습니다. 흑인 노예를 동원할 생각이 조금씩 나오고 있었지만 많은 반대를 받았고(국방의 의무는 곧 권리입니다) 전쟁이 끝날 쯤에 가서야 소수를 해방시켜 동원했고 다수를 해방시켜 동원할 게획을 세우는 정도였죠. 반면 북부는 노예해방으로 흑인들을 동원하는 것은 물론 이민자들도 징병해서 수십만을 동원할 수 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아일랜드계가 징병을 거부하는 사건도 있었지만요.
그런 걸 생각하면 남부는 정말 잘 싸운 편입니다. 좋은 장교진이 큰 역할을 했지만 방어전이라 지형에 익숙했다는 점도 있었습니다. 동부전선은 북부의 계속된 공격을 잘 막아내고 북부로 진격하는 것을 두 번 반복합니다. (세번째 남진은 결국 못 막았지만요) 남군이 북진했을 때 북부에도 큰 피해를 주긴 했지만 어쨌든 두 차례 다 막혔죠. 역시 북부의 방어전이었으니까요.
원래 방어는 공격보다 유리하지만, 이 때는 그게 훨씬 커질 때였습니다. 무기의 발달로 말이죠. 총알은 기존의 동그란 납탄에서 앞이 뾰족한 미니에탄으로 바뀌었고, 머스킷이 강선을 판 라이플로 바뀌어갔습니다. 유효사거리, 명중률 등 살상력이 늘어갔죠. 거기에 연발총도 등장했고, 대포도 발전해 갔구요. 전쟁의 역사를 바꾼 개틀링 기관총도 이 시기 발명돼 도입되기 시작했습니다.
+) 전편에 안 다뤘는데 잠수함도 등장합니다. 이 때는 잠수함 앞에 긴 장대를 달고 그 끝에 폭탄을 달아서 흘수선 아래에서 공격하는 용도로 썼죠. 활대기뢰라고 불렀습니다. 큰 효과는 없었지만요.
이러니 공격할 때의 피해가 커질수밖에 없었죠. 지휘관들, 그것도 큰 전쟁을 겪지 않은 미군의 지휘관들은 이런 변화에 적응하지 못했고, 이게 큰 피해를 낸 다른 이유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정치인들은 이 상황을 더 이해하지 못 했고 공격을 닥달했구요. 그럴 때마다 큰 피해가 이어졌죠. 물론 방어측의 피해도 언제나 컸습니다. 사상자(사망+부상) 오천 정도는 우스웠고 이기더라도 만에 가까운 피해가 나기 일쑤였습니다. 남군에겐 이게 컸죠. 애초에 사오만 정도의 병력밖에 투입 못 하는 상황에서 이겨도 전력의 1/5 수준의 피해를 입었으니까요.
전사자만 해도 북군은 11만명, 남군은 9만명이었습니다. 여기에 부상이 악화되는 등으로 사망한 수를 합치면 양측 합쳐 무려 62만이 죽었습니다. 남북 합쳐 인구가 삼천만이었을 때 말이죠. 당시 젊은 남성의 2%가 죽었다고 하고, 미국이 지금까지 경험한 모든 전쟁에서 이보다 더 큰 피해를 입은 건 없었습니다.
더 무서운 건 이러고도 병력이 계속 충원됐다는 점입니다. 북부는 무려 이백십만여명을 동원했고, 남부는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백만여명을 동원했습니다. 근대의 상징, 철도의 힘이었죠. 철도가 있었기에 그렇게 많은 병력과 물자를 빠르게 동원할 수 있었습니다. 북부의 힘이 여기서 나왔죠. 애초에 남부보다 훨씬 많은 철도가 깔려있었고, 전쟁 중에 6400km를 더 깝니다.
중세까지 서양의 전쟁은 주로 기사 등 소수 군인들의 것이었습니다. 이러니 사상자도 적고 서로 예의를 지키는 낭만적인 문화도 나왔죠. (물론 유럽도 나폴레옹 전쟁이라는 예외를 이미 겪긴 했습니다) 하지만 남북전쟁은 그런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산업화는 더 많은 무기를 만들어 더 많은 병력을 무장시킬 수 있었고, 철도는 그 병력과 물자를 빠르게 수송할 수 있었습니다. 발전한 무기는 그런 군인들을 더 빠르고 많이 죽일 수 있었죠. 셔먼이 말했던 것처럼, 전쟁은 지옥이었습니다. 그것도 국가의 모든 것을 동원해야 하는, 총력전이라는 지옥 말이죠. 유럽은 이 결과를 알고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애써 무시했죠. 하지만 반세기 후, 그들끼리 더 끔찍한 지옥을 만들어냅니다.
+) 뭐 위의 낭만적인 문화에 서로 선후배사이고 나라가 다시 통일되기도 해서 양측 장교들의 사이는 훈훈했습니다. 그랜트나 리가 서로를 존중하고 리가 북부에서도 존경을 얻었던 것, 셔먼의 맞수였던 존스턴이 셔먼의 장례식에 몸이 안 좋은데도 불구하고 참석했다가 병이 심해져 죽은 것 등을 보면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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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큰 피해를 입었지만 미국이 얻은 건 컸습니다. 연방의 분열을 막아냈으니까요. 지금까지의 미국이 각 주의 연합체 수준이었다면, 이후엔 강력한 연방정부 하의 하나의 미국이 됩니다. 미국이 어떤 나라인지가 이 전쟁을 통해 만들어졌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 강력한 포텐을 터뜨리게 되었죠.
만약 이 때 남부가 그대로 분리되었다면, 북부는 강력한 나라이긴 했겠지만 지금처럼 초강대국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특히 이미 분열을 겪은 상황에서 또 어디서 분리주의가 나와서 나라가 더 쪼개졌을지 모를 상황이니까요. 더 이전의 얘기지만, 미국의 13개 주처럼 시몬 볼리바르의 활약으로 식민지였다 독립한 남아메리카 6개 주는 다 쪼개져서 지금 남미의 나라들이 됩니다. 국력 차이야 있겟지만 미국도 이렇게 됐을지 알 수 없는 거죠.
이것이 에이브러햄 링컨이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인 이유구요. 수많은 낙선을 겪고, 낮은 득표율로 겨우 대통령이 되고, 힘든 전쟁을 겪으면서 재선까지 하고... 수많은 공격을 받고 좌절을 겪었던 그였지만 그 이후의 미국은 그를 최고의 영웅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종전 전, 그는 노예제를 폐지하는 수정헌법 13조를 통과시키는 데 성공합니다. 이렇게 미국의 노예제는 사라졌죠. 그리고 승리를 이뤄내고 통일 미국의 대통령으로 다시 집권했죠. 하지만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4월 15일 암살당합니다.
그 후 부통령 앤드루 존슨이 대통령이 됩니다. 그는 남부에 유화책을 펴서 (이것 자체는 링컨도 하려 한 거지만) 공화당 내 급진파와 대립했고, 탄핵당하기도 했습니다. 부결됐지만요. 이들은 선거를 통해 다수당이 되면서 대통령이 펼치려 한 남부의 온건한 재건을 거부하고 강경책으로 나섭니다. 남부지역을 군이 통치하는, 군정을 편 것이죠. 시간이 지나면서 해제됩니다만.
당으로 본다면 그 동안 양당을 이루던 휘그당은 아예 무너졌고, 민주당 역시 제대로 찍혀서 공화당의 독주가 이어집니다. 중간중간 대통령이 있긴 했지만, 프랭클린 루즈벨트까지 가서야 겨우 독주가 끝나게 되죠. 이러면서 보수-진보가 서로 바뀐 것이 참 재미있습니다.
위인전과 다른 사실을 알고 충격을 먹는 경우가 많죠. 해외의 정치인으로 따지면 링컨도 그 중에 들어갈 겁니다. 내용은 간단하죠. 링컨이 중시한 것은 연방의 분열을 막는 것일 뿐, 노예제 폐지는 그 도구일 뿐이었다는 것이죠. 선거 과정 중에, 남부가 독립하려 할 때 그런 모습이 잘 나타납니다. 심지어 같은 주에서 유세를 할 때도 노예제 폐지 여론이 강한 곳과 반대인 곳에서 한 얘기가 다를 정도죠. 여기에 앤티텀 전투 후의 노예해방선언은 어디까지나 남부의 노예만을 대상으로 했습니다. 40만 정도로 추정되는 북부 내 노예주의 노예는 제외했죠.
애초에 노예해방은 적을 상대하기 위한 도구로 많이 쓰였습니다. 프랑스가 영국에 맞서기 위해 그랬고, 반대로 영국이 프랑스에 맞서기 위해 그랬습니다. 미국이 독립할 때도 이런 얘기가 있었구요. 링컨 역시 그 중 하나일 뿐이라는 거죠. 거기에 북부는 애초에 공업이 발달해서 노예보다 임노동자가 더 필요했던 상황, 흑인의 인권 자체보다는 이걸 위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법으로 규정되었다 해도 흑인의 인권은 제대로 보장받지 못 했고, 한 세기가 더 필요했습니다. 그러고도 한두세대가 지난 지금에도 인종차별은 대놓고 말하지 못할 뿐 남아있구요.
+) 북부가 남부 노예의 비참함을 말할 때 남부에서는 너무 심하게 왜곡한다고 맞서면서 북부 흑인 노동자의 생활이 더 비참하다고 맞서기도 했습니다. 최소한 노예는 재산이니만큼 보살펴준다고 말이죠. 전후에 노예가 해방됐을 때도 인권운동가들은 이걸 비판했구요.
뭐 이런 상황이니 극단적으로 링컨은 아예 관심이 없었고 그냥 도구일 뿐이었다는 평까지 나오죠.
남부 육군기. 국기가 따로 있지만 이게 더 많이 쓰이죠.
이러면서 노예제는 그냥 핑계일 뿐, 경제적인 이유나 정치적인 이유를 더 따지기도 하죠. 남부에 더 우호적이 될수록 그렇구요. 남부에 우호적인 이론은 주로 노예제를 핑계로 남부의 자유를 억압하려 한 북부와 자유와 고향을 지키기 위해 싸운 남부의 구도를 만듭니다. 노예무역이 예전에 금지된 상황에서 남은 노예의 재산으로서의 가치는 어마어마했고, 노예해방은 이런 남부의 [부]를 없애는 거였으니까요. 거기에 플랜테이션엔 많은 노예가 필요하니 남부의 경제기반 자체를 무너뜨리려는 것이었구요.
남부에서 대농장과 많은 노예를 소유한 것은 소수였고, 노예가 없는 이들도 열심히 싸웠거든요. 그리고 남부인이라고 무조건 노예를 무시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토머스 잭슨(스톤월) 같은 경우가 그랬습니다. 흑인 노예라고 딱히 차별하진 않았죠. 반대로 그 링컨을 포함해서 북부에서도 불법화 하기 전엔 노예가 있었습니다. 선vs악 대결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 때문인지 위의 깃발은 남부의 백인들에겐 저항의 상징으로도 많이 쓰였습니다. 인권 쪽은 아니고, 권위에 대한 저항으로 포장해서 말이죠. 최소한 나치의 하켄크로이츠처럼 터부시되진 않습니다. 지금은 얘기가 조금 달라졌죠. 작년 사우스캐롤라이나주의 찰스턴 교회에서 인종차별주의자가 흑인들에게 총기를 난사한 사건 때문에 말이죠. 범인이 저 깃발을 드는 사진과 성조기를 불태우는 사진이 발견되었거든요. 이 때문에 미국에서 금기시되어가고 있습니다. 남북전쟁 참전자의 후손 등은 이를 반대하고 있지만요.
+) 이런 관점으로 본다면 남부가 독립한 건 북부에게 낚인거든 그냥 제발저린 거든 너무 성급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_-a
확실히 그런 성자 링컨의 모습은 지나친 포장이긴 할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노예제에 아예 관심이 없었다거나 하는 건 지나친 평가라고 봐요.
링컨은 이상만을 밀어붙이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철저한 정치인이었죠. 여기서 이 말 하고 저기서 저 말 하고, 타협부터 온갖 공작을 일삼는 정치인이요. 반대파를 달래고 부동층을 더 끌어들이려는 정치인이요. 그러면서도 그는 노예제 폐지의 아이콘으로 떠올랐고, 결국 성공시켰습니다.
영화 링컨에서 그런 모습이 나옵니다. 미국 전역의 노예제를 금지하는 수정헌법을 통과시킬 때 말이죠. 반대하는 의원들을 달래면서 말이죠. 그냥 밀어붙이는 이상주의자의 모습이 아니라 타협부터 매수까지 일삼는 그런 모습으로요.
그가 노예제에 관심이 없었다기엔 그와 공화당은 쭉 노예제 폐지를 밀었습니다. 하나의 미국을 지키는 게 더 우선순위였을 뿐 그들은 노예제 폐지를 쭉 밀고 나갔죠. 그들이 계속 타협책을 내밀어도 남부가 독립하려 한 이유가 뭐겠습니까. 그들이 정권을 잡는 한 노예제는 결국 폐지될 것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죠.
39%의 득표율로 겨우 대통령이 된 상황, 노예제 페지예는 찬성하지만 그리 적극적이진 않은 부동층들, 섣불리 노예제를 폐지했다가 더 큰 힘을 얻게 될 남부... 이런 상황에서 이상만으로 밀어붙이려면 반대파들을 다 죽여야 가능했을 겁니다. 아 반대파 죽이면서까지 강행하는 걸 반대하는 이들도 다 죽여야 가능했겠죠. 애초에 노예를 부리고 인종차별을 하는 백인들이 문제였지만, 그래선 안 되는 거구요.
정치적인 발언들을 제외하고 보면 노예제 폐지가 그의 신념이었던 걸 볼 수 있습니다. "노예제가 잘못이 아니라면 세상엔 잘못된 게 없다"는 그의 말 등에서 말이죠.
남부의 얘기로 간다면, 확실히 노예제만을 지키기보다는 그걸 포함한 남부의 관습, 혹은 아예 자기 고향을 지키려는 이들이 많았을 겁니다. 하지만 거기엔 결국 노예제가 들어갑니다. 2차대전기에 독일이나 일본에서는 이런 이들이 적었을까요? 그렇다고 이들이 옳았다고 할 순 없죠. 여기에 노예를 거느리지 않더라도 자기보다 하층이 없어지는 걸 거부했다는 분석을 무시할 수 없구요.
경제적인 이유도 들어갔겠지만, 경제적인 이유만으로 모든 걸 설명하는 이론은 사장되고 있다고 합니다. 결국 독립까지 주장하게 된 화제의 중심은 노예제였으니까요. 애초에 혁명같은 진보적인 사건도 그 배후엔 정치, 경제적인 이유들이 들어갑니다. 어디든 기득권을 몰아내고 새로 기득권이 될 집단이 있고, 불황이든 호황이든 경제가 빠지지 않으며, 대의엔 큰 관심없는 사회불만층의 참여가 들어갑니다. (작품에서 양아치부터 범죄자들이 혁명에 참가하는 건 클리셰죠) 일을 벌이고 난 후 지배층만 바뀌고 더 퇴보하는 경우도 있구요. 프랑스 대혁명부터가 그랬죠. 그렇다고 이런 사건들의 영향을 무시할 순 없습니다. 지금 한국이 독재랑 뭐가 다를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 민주화운동 다 물리고 독재 때로 돌아갈까요?
노예제가 폐지되고도 인종차별이 계속 이어졌지만, 그래도 산은 하나 넘었습니다. 너는 인간이 아니다에서 인간이지만 동급은 아니다로 바뀐 정도지만, 그래도 이걸 넘지 않았으면 갈 수 없는 것이었죠. 사람들의(백인들의-_-;) 인식이 조금이라도 바뀌었으니 이럴 수 있었고, 법으로 불평등했던 것을 평등한 것으로 바꾸었으니 이후 흑인인권운동으로 이어질 수 있었구요.
링컨은 성인이 아니고, 그 진보가 신격화된만큼 크진 않았다 하더라도 이 남북전쟁은 그 진보를 이뤄낸 전쟁입니다.
중간에 Confederate flag 부분은 논란의 여지가 있어보입니다. 저항의 상징으로 많이 쓰인다고 했는데 이는 글을 읽는 분들을 오도할 여지가 충분히 있어보입니다. 이것은 일부 남부 백인 사회 내에서만 이해되는 의미일 뿐만 아니라(그것도 과거에...) 우리가 생각하는 인권 등의 가치를 위한 저항과도 약간 궤를 달리합니다. Rebel flag라도 불리는 만큼 권위에 대한 저항의 측면이 있으나 그것은 흑인들을 희생을 바탕으로 한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죠. (오히려 저는 그냥 직역해서 반역이라고 쓰고 싶네요.) 그리고 글 내용 중에 최근에서야 인종차별주의자들과 연계되기 시작했다는 것은 전혀 사실과 다릅니다. 1940년대에도 인종차별폐지에 반대하는 백인우월주의자들이나 인종차별주의자들이 지속적으로 이 깃발을 사용해왔고, 이는 KKK와 같은 극단적인 단체와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인종차별의 의미를 담아 사용되어왔죠. 물론 저도 가끔이나마 주변에서 볼만큼 나치깃발만큼 터부시 되진 않습니다. 그건 그나마 일부 정상적인(?) 지지자들이 과거 고장를 지켰던 선조들에 대한 예우, 남부의 전통 등으로 포장을 해와서 그런 것이겠죠. 하지만 이미 부정적인 부분이 너무 커져서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기라고 보여집니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흠. 그렇다면 그부분은 수정을 해야될 정도겠네요. 자고 일어난 후에 보충하겠습니다.
우선 저항 부분은 전 반항 느낌으로 썼는데, 좀 구체적으로 해야겠네요. 남부에 국한된다는 부분도 그렇구요. 최근 부분은 최근의 퇴출 문제, 그러니까 금기시가 최근에 되고 있다는 걸 얘기한거였습니다.
남북전쟁에 대해서는 이 글을 바탕으로 쓰게 됩니다만 제가 느낀 거라면 남부의 독립시도는 나라가 생성되는 과정이라 생길 수 있는 시도이고 북부의 독립시도저지 역시 그렇다는 거죠. 저 때가 아니면 독립할 수 없고 저 때 막지 않으면 통합된 미국 역시 존재 할 수 가 없다는 것? 그것과는 별개로 저 때 이후 우리가 흔히 아는 무법자의 서부시대가 열린다는 걸 생각해보면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죠. 그 미국을 바라보는 유럽의 시각 역시 그렇고요. 이 때에 미국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여러가지 생긴 것 같아요. 오버워치에 나오는 해결사(기병대), 무법자, 민병대, 레드넥.....
이 때 이런걸 하셨군요. ^^ 저 역시 노예의 역사를 다루면서 이 쪽을 파봤는데 눈시님의 시각과 거의 일치한 결론을 낸거 같습니다.
사실 이 '노예제 폐지'라는 부분은 선악의 개념만으로 다가가서는 정말 혼란스러울 수 밖에 없습니다. 저는 제 스스로를 그런 관념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고 그런 것도 이미 인지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오판이고 오만이었습니다. 흐흐.
영국이 시작한 '노예제 폐지 게임(...)'이 어떻게 세계제국 영국을 낳았는가, 철도의 건설이 전통사회를 파괴했듯 노예제 폐지라는 '만능주문'은 어떻게 수많은 전통사회를 파괴하였는가, 삶의 질이라는 측면에서 노예냐 자유민이냐는 하나의 기준점으로 가치가 있는가, 궁극적으로 현대인은 정말로 노예제로부터 벗어났다고 볼 수 있는가....
그리고 그 질문들의 집약체와도 같은 사건이 '남북전쟁'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