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의 최후에 대한 실록의 기록은, 정도전이 이웃 민부의 집으로 피신하였다가 이방원 앞에 끌려 나오고, "옛날에 그대가 나를 살려주었는데 이번에도 나를 살려달라." 고 애걸하다가 참살당한 것으로 나옵니다. 개국 공신으로 위풍당당한 시절을 생각하면 상당히 비참한 최후 입니다.
『삼봉집』에 남겨진 정도전의 자조(自嘲)라는 시는, 소위 말하는 정도전의 절명시(絶命詩)로 알려져 있습니다. 죽기 전에 남겼다는 이야기죠.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操存省察兩加功 조존과 성찰에 한결같이 공력을 다 기울여
不負聖賢黃卷中 서책 속 교훈을 저버리지 않고 떳떳이 살아왔네
三十年來勤苦業 삼십 년 긴 세월 쉬지 않고 이룬 공업
松亭一醉竟成空 송현방 정자 한 잔 술에 모두 허사가 되었구나.
이 담담한 글이 죽기 전에 남긴 소회라고 한다면, 이방원에게 목숨을 구걸했다는 실록의 이야기와는 좀 어울리지 않는 느낌입니다. 때문에 정도전을 다룬 많은 글에서는 실록하고는 전혀 다른 이 내용을 들어 정도전의 최후는 실록과는 많이 달랐을거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건 꽤나 널리 알려진 이야기라 대중적인 통설에 가깝기도 하구요.
정도전의 최후가 이방원의 입장이 많이 들어갈 수 있는 실록하고는 상당히 달랐을 가능성이 높긴 합니다. 그런데 이와 별개로, 이 '자조' 라는 시가 정말로 '절명시' 즉, 죽음을 앞에 두고 지은 시인지는 조금 다른 말들이 있습니다.
『……혹자는 위의 시를 두고, 정도전이 8월 26일(정도전이 죽은 때)에 지은 절명시라고 한다. 하지만 『삼봉집』의 편제로 보면 이 시는 1383년 가을 동북면 도지휘사 이성계의 함주 군막에 가기 전에 지은 것이다. 아마도 마지막 구의 송정을 남은의 송현정이라고 오인해서 이 시를 절명시로 간주하게 된 듯하다.』
한국 고전 번역원, 한국고전선집 『삼봉집』pp.287
역자 : 심경호 고려대 한문학 교수
감수 : 정선용 한국고전번역원 수석연구위원
한국고전번역원은 국가기관이니 여기서의 주석은 어느정도의 권위가 있을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내놓은 삼봉집의 주석은 통념과는 전혀 다르게, 이 '자조' 라는 시가 1383년에 지어졌다고 합니다. 정도전이 1398년에 죽었으니, 당연히 이 자조는 절명시라는게 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근거는 바로 '편제' 죠. 삼봉집에서의 편제상 "자조" 는 최후에 쓴 글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한번 시중의 삼봉집 판본을 보고 이를 확인해보면……
제가 가지고 있는 삼봉집과는 판본이 달라서 직접 보진 못했지만, 한국학술학정보에서 내놓은 '증보 삼봉집' 을 보면, 이 자조라는 시가 가장 뒤에 위치해 있습니다. 따라서 정도전이 최후로 남긴 글처럼 느껴지고, 자연히 유언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아마 시중의 다른 삼봉집들도 이러한 연도별 방식의 편제 자체는 비슷할 겁니다.
그런데……실제로는 삼봉집은 저런 편제가 아닙니다. 오언절구와 칠언절구의 시와 문을 따로따로 넣고 기서, 병서 등을 수록해놓았습니다. 이를테면 칠언절구를 순서대로 쭉 내려놓고, 이와 별개로 오언고시의 시를 쭉 늘어놓는 식이죠. 때문에 '이 분류의 문장에서 이 글은 저 글보다 좀 뒤에 썻구나' 정도는 명확하게 확인 할 수 있어도 , 이런 시와 문, 다른 사람에 대한 찬 등을 모두 한꺼번에 모아서 순서를 보려고 하면 좀 불분명 합니다. 소설로 묘사를 하자면 1인칭 주인공 시점이 아니라 왕좌의 게임 같은 방식이죠.
* 이런 식으로 카테고리가 나뉘어져 있는 식
다만 시중에서 대중들이 보기 위한 삼봉집은, 이런 식으로 나뉘어져 있으면 "대체 이걸 언제 어느 시기에 삼봉이 쓴거지?" 라고 혼동도 되고, 가독성도 떨어지다보니 자연스레 정도전과 행보를 같이 하는 느낌으로 읽기 위하여 이렇게 카테고리가 나뉘어져 있는 글을 한데 섞고, 글이 쓰여진 시기별로 정리하여 전체 글을 연도순으로 편집한게 보통입니다.
꼭 삼봉집만 그런게 아니라 다른 문인들의 문집도 많이들 그렇고, 그런 글을 현대에 내면서 저렇게 가독성 있게 편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쨌거나 저런 식으로 삼봉의 시와 문등을 다 섞어서 연도별로 늘어놓다가, 마지막에 나오는 글을 '자조' 로 해놓는 겁니다.
* 실제 『삼봉집』 칠언절구 부분의 편제 순서
어찌되었건, 실제로 그렇게 '자조' 가 정도전이 최후에 지은 글이라면 삼봉집의 칠언절구 부분에서 맨 마지막에 있어야 합니다. 꼭 마지막이 아니더라도, 적어도 후반부에는 있어야 맞습니다.
실제로 이 칠언절구 부분의 처음 글인 亂後還松京의 내용은 1360년대인 '홍건적의 고려 침공' 에서의 난리, 즉 정도전이 20대인 시절이 배경이지만 거의 맨 마지막 즈음인 御駕遊長湍作는 조선 개국 2년인 1393년, 즉 정도전이 50대인 시절이 배경입니다. 이 글들을 시간 순으로 배치해놓은 걸 확인할수 있는 부분이죠.
그런데…… 저 주욱 늘어져 있는 '자조' 의 위치를 확인하셨을까요?
보시다시피, '자조' 는 후반부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중반부 즈음에 편제 되어 있습니다. 실제 편제에서 '자조'의 바로 앞에 있는 文中子라는 글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천하는 어지러워 전쟁만을 일삼는데 / 紛紛天下事兵爭
지금도 현 임금 위해 태평을 획책하네 / 尙爲時君策太平
머리가 하얗도록 하분에서 도를 강하니 / 講道汾陰從白首
한때의 제자들은 모두 다 이름난 고관이로다 / 一時諸子盡名卿
이 시는 수나라의 왕통이라는 사람의 일화에 따서 정도전이 부른 시인데, '천하를 어지러워 전쟁만을 일삼는다' 는 것 같은건 조선 왕조가 개국된 이후에 할 말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고려 말기 왜구등의 침공이 빈번한 시기에나 할 말에 가깝습니다. '자조'의 바로 앞에 있는 글이 이렇다면, 뒤에 있는 글인 過古東州은 어떤 글인지 보겠습니다.
장군 깃발 멀리 따라 동주(철원)를 지나가니 / 遠隨戎旆過東州
화각소리 높아라 가을도 저무련다 / 晝角聲高欲暮秋
영화롭던 지난날 물을 곳 없고 / 徃事奢華無處問
찬 연기 시든 풀만 구릉을 덮었구나 / 冷煙衰草鎻荒丘
여기서 말하는 '장군' 은 말할것도 없이 이성계 입니다. 이성계가 장군 소리 듣고 북방에 있던 시기면, 바로 이성계와 정도전이 운명적인 대면을 한 1383년 무렵입니다.
실제로 이 뒤의 鐵嶺, 過鐵關門, 題咸興館 같은 글들의 내용 모두가 정도전이 이성계를 따라 북방에서 어슬렁 거리던 일을 이야기하는 내용들이고, 결정적으로 過古東州에는 글에는 이런 주석(조선시대 당시에 삼봉집을 정리하면서 달린 주석)까지 달려 있습니다.
『계해년(1383) 가을, 공이 동북면 도지휘사(東北面都指揮使)로 지금 우리 태조[今我太祖]를 따라서 함주(咸州) 군막에 달려가다.』
앞서 말했듯 삼봉집은 정확한 연대순은 약간 애매한 글이지만, 후세 사람들이 일부 글에 시기를 짐작해서 적어놓은 경우가 있습니다. 조선시대 당시에 삼봉집을 정리한 사람들이 '정도전이 이 글을 작성한 건 이성계를 만났을 당시다' 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렇다면, 그 글의 바로 앞에 있던 '자조' 라는 글도 당연히 정도전이 이성계를 만난 바로 그 당시거나, 혹은 그 직전 정도가 되겠죠. 정도전이 죽던 1398년이 아니라 1382년 ~ 1383년 사이의 글이 될 겁니다.
그렇다면 이 '자조'라는 글의 의미가 많이 달라지죠. 다시 보겠습니다.
操存省察兩加功 조존과 성찰에 한결같이 공력을 다 기울여
不負聖賢黃卷中 서책 속 교훈을 저버리지 않고 떳떳이 살아왔네
三十年來勤苦業 삼십 년 긴 세월 쉬지 않고 이룬 공업
松亭一醉竟成空 송현방 정자 한 잔 술에 모두 허사가 되었구나.
여기서 '30년 세월의 공업'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의 의미가 궁금해지는데,
죽을 당시에 이 시를 외웠다면, 죽을 당시의 정도전으로부터 30년 전은 정도전이 20대 중반일 무렵으로, 당시 정도전은 공민왕의 비서직에 해당하는 자리에 임명되며 순조롭게 관직 생활 하다가 신돈의 전횡에 실망하고 낙향, 부모님의 3년 상을 모시면서 『맹자』를 읽었던 때입니다. 이렇게 보면 굉장히 자연스럽긴 합니다. 순조로운 생활을 포기하고 낙향하며 반항아의 길을 걷고 일생의 지침서인 맹자에 열중했을 무렵을 되새기는 것이니, 드라마틱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1383년 무렵의 정도전이 '자조' 를 지으며 자기의 30년을 되새긴다 해도, 아주 말이 안 되는 건 아닙니다. 1383년 무렵에서의 30년 전이라면 정도전이 10대일 때이고, 학문을 막 제대로 시작했을 무렵입니다. 공부를 시작하고 나서의 여태까지의 일생동안의 공업이 부질없이 느껴진다, 라고 하면 얼추 말이 맞긴 합니다.
실제로 당시 삼봉집의 내용을 보면, 이 무렵 세상에 대한 실망감이 극에 달한 정도전이 자신의 일생과 자신이 배운 학문이 길에 대해 씁쓸해하는 내용의 글이 있기도 합니다. 自詠이라는 글의 내용입니다.
요순 같은 임금 만들려고 공부했건만 / 窮經直欲致吾君
머리 희도록 엉터리라 한탄할 줄 내 어찌 알았을까 / 童習寧知歎白紛
미친 나의 이 말은 태평성대엔 아무 소용이 없었고 / 盛代狂言竟無用
남쪽으로 쫓겨나 친구들과도 헤어졌다 / 南荒一斥離羣群
임금을 요순으로 만들 수 없어 / 致君無術澤民難
왕통이 그랬듯 책이나 파고 지내려 했건만 / 擬向汾陰講典墳
십년 풍진에 전쟁도 너무 많아 / 十載風塵多戰伐
유생들은 영락해져서 구름처럼 흩어져버렸다 / 靑衿零落散如雲
유술이란 알고 보면 자기 일에 졸할 뿐이라 / 自知儒術拙身謀
병법에 뜻을 두어 손ㆍ오를 배웠었네 / 兵畧方師孫與吳
세월은 흘러가고 공은 끝내 못 세우니 / 歲月如流功未立
책상 위 『음부경』만 먼지 자욱하였다 / 素塵牀上廢陰符
저 자조라는 시가 나온 무렵이나 이 시가 나온 무렵이 정도전이 이성계를 만나고 "이 군대면, 무슨 일이든 못하겠느냐." 고 말했을 그런 시기라고 하면, 학문에서 중히 여기는 '충' 에 반하는 길을 선택하고 그간의 가치관을 버린 정도전이 '자조' 했다고 해도 꽤 그림이 안되진 않을 겁니다. '지난 삼십년의 학문이 부질없다' 고 선언하곤 이성계를 선택하는게 되는 것이니까요. 근거로 들기에는 너무 로맨틱한 내용일까요?
松亭一醉竟成空 송현방 정자 한 잔 술에 모두 허사가 되었구나.
자조라는 시에서 또 문제가 되는 건 바로 이 구절입니다. '송현방' 이라는 정도전이 습격을 당한 곳을 아주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것이 바로 이 구절입니다. 이 '송현' 은 바로 정도전의 동지였던 남은의 첩이 있던 장소입니다.
정도전 남은 심효생과 판중추(判中樞) 이근(李懃) 전 참찬(參贊) 이무(李茂) 흥성군(興城君) 장지화(張至和) 성산군(星山君) 이직(李稷) 등이 임금의 병을 성문(省問)한다고 핑계하고는, 밤낮으로 송현(松峴)에 있는 남은의 첩의 집에 모여서 서로 비밀히 모의하여……
……송현(松峴)을 지나다가 숙번이 말을 달려 고하였다. "이것이 소동(小洞)이니 곧 남은 첩의 집입니다." ……
……대궐 안에 있던 사람이 송현(松峴)에 불꽃이 하늘에 가득한 것을 바라보고 달려가서 임금에게 고하니, 궁중(宮中)의 호위하는 군사들이 북을 치고 피리를 불면서 고함을 쳤다.
─ 조선왕조실록 中
그런데 원문을 보시면 알겠지만, 원문은 '송현방' 이라는 장소를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냥 송정(松亭)에서 술에 취했다는 겁니다. 송정은 보통 정자를 가리키는 말죠. '벽송정, 한송정' 같은 식으로 말입니다. 그렇다면, 송정일취(松亭一醉)라는 글은 '송현방에서 술을 마셨다' 는 것보다는 그냥 '정자에서 술을 마셨다' 적는 편이 알맞을 겁니다.
만약 이게 '송현방에서 술을 마신다' 는 의미가 되려면, 송정이라는 단어에 일반적인 정자의 의미를 떠난 다른게 있다는걸 증명해야 합니다. '송현이 송정이라고 부른 적이 있었다.' 식으로요. 만약 그래서 '송현에서의 한잔 술에 허사가 되었구나' 라는 문장이 된다면, '케이크를 먹었다' 는 단어에 대해 '팬 케이크를 먹었다' 고 해석하는 것과 비슷한데...
그런데 네이버 같은 대형포탈 사이트에서 松亭一醉竟成空라는 구절을 한번 검색해보면, 일반 블로그는 물론이고 신문기사들에서까지 거의 대부분 이걸 '송현방 정자 한 잔 술에 끝내 허사가 되었구나' 라고 해석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굉장히 묘한 부분이죠. 이미 송정(松亭)엔 정자라는 의미가 들어갑니다. 송정을 정자라는 의미가 아니라 '송현이 있던 장소를 송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는 식으로 해석의 차이가 있다면 모를까, '송현방 정자' 라고 하면 송정이 정자라는 뜻이라는 걸 인정한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럼 송정일취(松亭一醉)라는 단어는 그냥 '정자에서 술 마셔서 취했다' 고 하면 그만인데, 원문에 있지도 않은 '송현방' 이라는 단어가 난데없이 등장할 이유가 없습니다. '케이크를 먹었다' 는 단어만을 보고 '아르헨티나에서 케이크를 먹었다' 라고 받아적는것과 다를게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이 애매하기 짝이 없는 해설이, '자조' 라는 시를 포탈 등에서 찾아보면 거의 일반적인 수준으로 퍼져 있습니다. '송현방' 이라는 구체적인 장소까지 언급되니 당연히 이 해석을 보면 정도전이 죽기 전에 남긴 절명시라고 확신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제가 지식이 없어서 더 못찾아보는것도 있겠지만, 고전번역원 데이터베이스 등에서 용례를 찾아봐도, 송정을 '남은의 첩의 집이 있던 송현' 을 의미한 용례는 찾아볼 수 조차 없었고, 반대로 그냥 다른 정자를 의미할때 사용된 경우는 굉장히 많이 보았습니다. 적어도 그런 점만 보면 송정을 그냥 '송현 정자, 송현방' 으로만 국한해서 보기 힘들지 않나 싶습니다.
……『실록』은 정도전이 죽는 장면을 매우 비겁한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는 이웃 민부 집으로 피신하였다가 이방원 앞에 끌려 나와 "옛날에 그대가 나를 살려주었는데, 이번에도 나를 살려달라." 고 애걸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정도전과 같은 거물이 그렇게 구차한 말을 하였을까 의문이다. 오히려 그가 참수당하기 직전에 읊었다는 <자조>라는 시 한 수가 혁명가다운 기개를 보여준다.
操存省察兩加功 조심하고 조심하여 공력을 다해 살면서
不負聖賢黃卷中 책 속에 담긴 성현의 말씀 저버리지 않았네
三十年來勤苦業 삼십 년 긴 세월 고난 속에 쌓아온 사업
松亭一醉竟成空 송현방 정자 한 잔 술에 그만 허사가 되었네.
─왕조의 설계자 정도전 中 한영우 저
서울대 한영우 교수는 1970년대부터 정도전 연구를 해서 정도전의 재평가를 주도하고 스스로도 이를 업적으로 생각하시는 이 연구의 최고 권위자 분이십니다. 현존하는 정도전 관련 모든 저작물이 이 분 저작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한영우 교수가 낸, 정도전 관련 저서 중에 가장 대표적인 책이라고 할 수 있는 『왕조의 설계자』 정도전(초판 99년)에서 이 '자조' 에 대한 해석을 적어놓으면서 '송현방 정자 한 잔 술에 그만 허사가 되었네' 라는 앞서 말한 굉장히 모호한 표현이 적혀 있습니다. 한영우 교수가 처음으로 저 해석에 송현방이라는 사족을 붙였는지 아니면 다른 해석을 보고 이와 같이 해석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 해석이 일반적인 해석으로 널리 퍼진 데에는 이 영향도 크지 않을까 싶습니다.
결과적으로 정리를 하자면 그렇습니다.
① '자조' 는 『삼봉집』 편제상 정도전의 만년에 쓰인 시라기보다는 이성계를 만나고 역성의 생각을 확고히 굳힌 시기에 쓰여진 시라고 보는 편이 자연스럽다
② '자조' 에서 정도전이 이방원에게 습격 당한 장소인 '송현방' 을 아주 구체적으로 언급했다고 보기도 어렵지 않을까
③ 결정적으로 이 '자조' 가 절명시라고는 정도전 본인도, 나중에 『삼봉집』을 재간하면서 엮거나 한 사람들도 한 적이 없습니다
『삼봉집』엔 다른 설명 없이 그저 시만 있을 뿐입니다. 그것만 보면 정도전이 죽기 직전이라 자조했는지, 그냥 생각해보니 본인 꼴이 웃겨서 자조했는지, 친구와 바둑이라도 하다가 져서 자조했는지(-_-) 알 수가 없습니다. 그것만으로도 다시 생각해볼 필요는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건국대 신병주 교수 EBS 역사특강 : 한양천도와 경복궁 설계 中
송정이 송현 정자인가 아닌가 하는 부분과는 또 별개로, 다른 부분에서 이 '자조' 라는 시의 해석이 다르게 전해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첫구절의 조존성찰(操存省察) 부분인데, 다른 예시로 든 해석에서 보이듯 조존과 성찰에 공을 들이는, 일반적인 성리학의 수양방법으로서의 조존성찰이라고 보는게 일반적인데, 이걸 신병주 교수처럼 두 왕조(고려와 조선)에 공을 세웠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드라마 '용의 눈물' 에서는 저 '양조' 로 번역을 했고, 드라마 정도전에서는 '조존성찰' 의 의미 그대로 풀이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걸 '양조' 로 보는 건 너무 스토리텔링을 쓰는 듯한 해석이 아닌가 싶은데... 앞서 말했듯 자조가 1383년에 나왔다는 설이 된다면 후자의 해석은 일단 접어두어도 될듯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