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이야기도 재미있을까요? 아주 개인적이고 사소하고 괜히 길기만 한 이야기인데. 그래도 기왕 썼으니 풀어놓는 것도 괜찮을 거 같아요. 정 재미없으면 ‘뒤로 가기’ 확 누르면 되잖아요. 그래도 웬만큼 꾹 참아주시면, 안 될까요?
증조할아버지는 꽃거지였어요. 여기저기 떠돌다 만주 독립군들이 있는 곳에 살게 되었지요. 독립군들 있는 곳인데 물자가 풍부했을 거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인심이 사납지 않은 곳이었나봐요.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증조할아버지가 딱했던지 교육도 받아서 붓글씨도 곧잘 쓰고는 했어요.
증조할아버지는 이 악물고 열심히 살아서 만주에서 굉장히 솜씨 좋은 목수가 되었어요. 목공소도 차렸지요. 듣기로는 그 곳에서 독립군 건물들을 짓기도 했대요. 김구 선생님이 종종 만주의 증조할아버지 집에 오셔서 국수를 드시고 가셨다고 하는데, 당장 돈은 없고 그냥 학교를 지어달라고 하기엔 미안하니 글씨를 여러 점 써 주셨대요. 엄마 어렸을 적에는 김구 선생님 글씨가 꽤 여러 점 있었다고 하는데, 전부 도둑질당하는 바람에 저는 한 번도 못 봤어요.
갈 곳 없는 떠돌이 고아가 힘들게 일해서 간신히 자리를 잡았는데, 해방이 되었어요. 증조할아버지는 북한으로 내려갔지요. 그래도 증조할아버지는 솜씨 좋은 목수셨으니 다시 한번 힘껏 일해서 또다시 목공소를 차렸어요. 알뜰살뜰 한 푼 두 푼 모아서 살만 하다 싶으니 왠걸, 이번에는 육이오가 터지고 말았어요. 증조할아버지는 또 빈손이 되었죠. 전쟁 통에 남한으로 내려 온 할아버지는 다시 손에 망치를 쥐었어요. 그리고 다시, 또 다시 목공소를 차리게 되었어요. 악착같이 일어난 할아버지가 지은 집이, 이번에 이야기하려던 증조할아버지의 낡은 집이에요.
증조할아버지가 여러 번 고쳐짓고, 고쳐짓고 해서 지은 그 집은 그 당시에는 퍽 좋은 집이었어요. 언덕 위에 올라선 삼층짜리 집이었는데요, 마당이 딸려 있고 층마다 안에 화장실이 있었죠. 나중에 그 집에서 살게 된 외할머니는 마당에 여러 가지 꽃을 키웠어요. 붓꽃, 봉선화, 맨드라미, 그리고 수많은 꽃과 풀들을 거기서 키웠죠. 화단을 따라 위쪽으로 올라오면, 안방이랑 바로 이어진 문이 있어요. 문 앞에 고추장이랑 된장, 간장이 든 장독이 줄줄이 늘어서 있고, 땅에 묻힌 김치독도 두 개 있었어요.
엄마가 어렸을 때, 할머니가 밤에 김치 심부름을 시키는 게 그렇게 싫었대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큰이모가 더 싫었을 거라고요. 엄마는 손전등을 손에 들고, 큰이모는 그릇을 들고 밖으로 나왔어요. 손을 오들오들 떨면서요. 김치독 뚜껑을 열고 손전등으로 안을 비추면, 큰이모는 시래기를 석석 걷어내고는 살얼음이 언 김치를 꺼내고는 했어요. 네 이모, 손 많이 시렸겠지. 근데 난 그때 무서워서 얼른 들어가고만 싶었거든. 엄마가 그랬어요. 엄마랑 큰이모가 큰 그릇에 김치를 듬뿍 담아오는 사이, 외할머니는 국수를 끓였어요. 그리고는 김치 국물을 붓고, 국수를 담은 다음, 잘게 썬 김치를 넣어요. 참, 중요한 걸 빠뜨렸네요. 방금 꺼낸 김치 무를 탁탁 썰어 넣는 거예요. 그리고 참기름 한 방울. 김치를 가져오긴 정말 싫었지만, 국수는 정말 맛있었대요. 그래서 그런지, 저도 참기름 넣은 국수는 많이 좋아해요.
화단 너머에는 개집이 있었어요. 엄마가 키우던 개 이야기는 제가 잘 모르지만, 제가 어렸을 때 외할머니는 거기서 개 한 마리를 키웠어요. 제 기억엔 사자만큼 큰 갠데, 지금 보면 그만하진 않겠죠. 그냥 똥개였지만, 진짜 많이 예뻤어요. 제겐 소원이 있었는데, 그 개 허리 위에 타 보는 게 소원이었어요. 사자처럼 멋지게 달려갈 거 같았거든요. 그런데 물릴 거 같기도 하고 용기도 없어서 그랬던 적은 없어요. 그 개는 목줄이 풀어진 틈에 달아나고 말았어요. 아마, 개장수에게 잡혀가지 않았을까. 외할머니는 온 동네를 개를 찾으러 돌아다니다, 결국 한동안 우울해 했지요.
일층에는 안방하고, 식모언니가 살던 방, 그리고 부엌이 있었어요. 나중엔 옷방으로 쓰던 그 방은 옛날엔 식모언니가 살던 방이었대요. 외할머니는 시집을 온 뒤로 허리 한 번 못 펴고 엄청나게 일을 많이 하셨대요. 목공소에서 일하는 사람들 밥 해먹이랴, 다섯이나 되는 아이들 밥 해먹이랴, 수십 명의 밥을 매 끼 하셨으니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사람을 더 쓰면 좋을 것 같지만 증조할아버지는 동네에서 알아주는 짠돌이 할아버지였어요. 아마, 어렵게 사셨으니 더더욱 그랬을 테지요.
외할머니와 식모언니는 정말 고생을 많이 했어요. 그리고 딸들도요. 외할머니가 시장에 가서 장을 봐 오면 줄지어 앉아서 하루 종일 뭘 다듬고 정리하고 그랬대요. 엄마는 무랑 오이를 그렇게 좋아했는데, 하루는 외할머니가 자리를 비운 사이 사다 놓은 무랑 오이를 다 먹어버렸대요. 김치 좀 담그려고 돌아보니 그 많던 무랑 오이는 하나도 없고. 외할머니는 엄마를 곧바로 야단쳤대요. 왜냐고요? 그 집에 무랑 오이 귀신은 엄마밖에 없었으니까요.
부엌하고 안방 사이에 이층으로 올라가는 나무 계단이 있었어요. 외할머니가 쓸고 닦고, 엄마랑 이모들이 왁스를 묻혀서 또 닦고, 손녀가 물이 흥건한 수건으로 안하니만 못하게 닦은 그 계단은 반질반질 빛이 났어요. 왜, 오래된 나무 바닥이 자꾸 닦다보면 빛나는 것처럼요. 증조할아버지가 만든 그 계단은 너무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았어요. 딱 올라가기 좋은 높이였죠. 그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이층이었어요.
옛날에는요, 이층에 방이 세 개였대요. 하나는 큰이모랑 엄마 방. 하나는 둘째 이모랑 막내 이모 방. 하나는 삼촌 방, 하나는 화장실이었어요. 잘 시간이 되면 아랫층에서 “요담뿌 가지러 내려와!” 하는 소리가 들렸대요. 요담뿌는 양철통을 말하는 거예요. 입구를 열어서 펄펄 끓는 물을 채우고 마개를 닫아요. 그리고 손 데지 않게 뜨개질로 만든 주머니에다 쏙 집어넣어요. 이걸 잠자리에다 넣으면 요가 아주 뜨끈뜨끈해지지요.
전 “양철 요담뿌” 세대는 아니고 “고무주머니 요담뿌” 세대인데요. 예전에 양호실에서 쓰던 주황색 고무주머니에 펄펄 끓는 물을 담고, 뜨개질로 만든 주머니에 쏙 넣어서 쓰는 거예요. 이게요, 전기담요 저리가라거든요. 전기담요는 오래 깔고 자면 온몸이 쑤셔요. 그렇다고 히터는 공기가 갑갑하고요. 난방도 마찬가지죠. 그런데 요담뿌를 꼭 안고 자면요, 처음에는 뜨끈뜨끈해요. 그러다 스르르 식으면서 딱 좋은 온도가 되어가요. 아침에 일어나면 몸이 찌뿌둥하지도 않고 가뿐하죠. 전 전기담요 없이는 살아도 요담뿌 없이는 못 살 것 같아요. 이게, 말로 표현을 잘 못해서 그렇지 기가 막히거든요.
엄마한테는 못 물어봤는데 한 가지 이상한 건 말이에요. 증조할아버지는 집 안에서 절대 일본어를 못 쓰게 하셨거든요. 독립군 지역에서 자라서 그런지, 일본어를 쓰면 불벼락이 떨어졌대요. 왜, 많이 쓰던 “벤또”나 “요지” 같은 걸 입 밖에 내면 어마어마하게 혼이 나고는 했다는데. 요담뿌는 왜 요담뿌일까요. 엄마가 말끝마다 요담뿌 요담뿌하는 걸 보면 그때도 많이 썼던 말인 거 같은데. “그 뜨거운 물 담아두는 양철 통” 하려면 너무 길어서, 깐깐한 할아버지도 한 번 슬쩍 눈을 감아 준 걸까요?
엄마랑 큰이모가 쓰는 방에는 각자 쓰던 책상이 한 개씩 있었대요. 엄마의 책상 위에는 보물이 하나 있었어요. 할아버지가 일본으로 출장을 갔다가 사온 드르륵 열리는 신기한 필통이요. 그 필통은 위아래로 여는 게 아니라, 슬라이드 형식으로 밀었다 닫았다 하는 필통이었어요. 지금이야 그런 필통이 많지만 그 때는 그게 몹시 특별해서 엄마도 애지중지하던 필통이었죠. 엄마 말마따나 “소중히 보관해서 딸까지 물려주려고 했던” 필통이었는데, 엄마를 괴롭히던 못된 어떤 남자애가 똥두간에 던져버렸어요. 예쁜 빨간 책가방이랑 같이 말이에요. 이 남자애, 어찌나 스케일이 컸던지. 그 반 여자애들 가방을 죄다 푸세식 화장실에 집어넣었대요. 요즘처럼 물자가 풍부하던 때가 아니라 당장 교과서를 구할 수 없어서, 학교는 생난리가 났고요. 그나마 부잣집 아들이라 어찌어찌 해결은 했다는데. 엄마가 아끼는 필통은 영영 못 찾게 되었죠.
방 문 앞에는 스위치가 하나씩 달려있었는데요. 요즘 집에 달린 터치식 스위치는 물론 아니었고, 그전에 쓰던 왼쪽 오른쪽으로 톡톡 누르던 스위치도 아니었고, 위 아래로 잡아당겨서 켜고 끄는 구식 스위치였어요. 무지무지 엄하고, 어마어마한 구두쇠였던 증조할아버지를 꼼짝도 못하게 만드는 존재가 딱 한 명 있었는데요. 바로 막내이모였어요. 막내이모는 좋아하는 증조할아버지를 따라서 “전기를 아껴야지!” “화장실 불을 누가 안 껐어?” 하고 종알거렸고, 때로는 수도꼭지를 꽉 잠그고는 “물 좀 아끼란 말이야!” 하고 잔소리를 해댔지요. 그러니 증조할아버지가 안 예뻐할 리가 있나요. 늘 엄한 표정을 하고 있다가도, 막내이모를 보면 얼굴이 풀어지곤 했대요.
전 구식 스위치가 정말 신기했어요. 그런 스위치는 증조할아버지네 집 말고는 없었거든요. 공연히 위아래로 틱틱 내리면서 놀다가, 괜히 눈치를 슥 보고는 했어요. 제가 할아버지네 집에서 놀던 때에는, 이모들 방 두개가 방 하나로 합쳐져 있었어요. 벽을 터서 만든 커다란 방 한쪽은 막내이모의 침실이었고요, 하나는 컴퓨터 방이었어요. 컴퓨터 책상 위를 매킨토시, 285, 386, 486, 그리고 다른 컴퓨터들이 차례차례 채워갔지요. 언젠가 생일이었던 날, 이모가 회사에서 만들었다던 어떤 학습용 프로그램을 받았는데, 그게 참 재미있어서 두고두고 가지고 놀고는 했지요. 물론, 이모는 제가 컴퓨터 막 틀어놓고 불 안 꺼도 저한테는 뭐라고 안 했어요. 게임을 하다 실행이 안 되면 이모가 슥 와서 고쳐주곤 했어요. 지금 생각하니 무지 민폐네요, 하하.
이층에서 삼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요, 계단 턱이 좀 높았어요. 어렸을 때 그거 올라가려고 용을 쓰고는 했지요. 삼층으로 올라가면 조그만 다락방이 하나 있었어요. 한여름에도 서늘한 기운이 돌아서, 거기 누워있으면 선풍기도 필요 없었어요. 다락방에는 이모들이랑 삼촌들이 어렸을 때 보던 책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지요.
엄마는 할머니에게 야단을 맞거나 우울할 때면 그 다락방으로 올라가곤 했대요. 다락방에 올라가서 좋아하는 책을 실컷 보는 거예요. 그러다 좋아하는 책을 얼굴 위에 올려둔 채로 잠에 들어버리기도 하고요. 다락방에서는 아랫층에서 외치는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서. 밥도 안 먹고 그렇게 자 버릴 때도 많았대요. 한참 자다보면 차가운 바닥 때문에 등줄기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서 눈을 뜨게 되는 거지요.
저도 엄마처럼 거기에 곧잘 누워 있었어요. 전 손녀 프리미엄으로 외가댁에서는 야단 한 번 맞지 않았지만요. 엄마가 보던 책을 한참 뒤적거리다 보면 제가 좋아하는 ‘어린이 명작동화 전집’이 나와요. 두꺼운 자줏빛 양장 표지를 들추면 옛날 책 냄새가 훅 하고 들어와요.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면 색은 바랬지만 아직 볼만한 삽화들이 그려져 있고요. 그 중에서 가장 좋아하던 이야기는 ‘대도둑 훗첸플로츠’였어요. (옛날 표기법으로는 훗첸플로츠인데, 찾아보니 이제는 ‘대도둑 호첸플로츠’라고 하네요.)
이건 대도둑이라고 하기엔 좀 많이 띨띨한 도둑이야기예요. 옛날 어느 옛날, 카스페를네 할머니가 살고 있었어요. 할머니는 커피 가는 기계 하나를 갖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게 보통 기계가 아니거든요. 커피콩을 넣고 슬슬 돌리면 무려 음악이 나오는 예쁜 커피 기계였죠. 그 날도 할머니는 흥겹게 커피를 가는 참이었어요. 그런데 주방으로 커다란 남자 하나가 들어와요. 그러더니 “그 커피 기계 내놔, 할멈!” 이러는 거죠. 할머니는 타고나길 좀 강심장인 건지 “댁 누구요? 이건 내 기곈데. 이건 못 줘.” 했죠. 그랬더니 강도가 이 세상 물정 모르는 할머니에게 쓴맛을 보여주고 싶었는지 신문을 꺼내서 딱 펼쳐요. “이것 좀 보라우, 할멈!” ‘무시무시한 대도둑 훗첸플로츠!’ 자기소개까지 다 하고 강도는 커피머신을 빼앗아가버려요. 노래가 없으니 흥이 안나고, 할머니는 시무룩해져서 금요일마다 하던 특식을 안 하게 됬어요. 손자에겐 이게 무엇보다 끔찍한 일이었죠. 소시지도, 크림을 듬뿍 얹은 자두 케이크도 못 먹게 되다니! 머신을 찾아야 해! 라고요.
그렇게 카스페를과 친구가 커피머신을 되찾아서 케이크와 소시지를 먹게 되는, 좀 엉뚱하면서 웃긴 이야기였어요. 뜬금없지만 케이크 묘사가 너무 충실해서 항상 그걸 보면서 군침을 흘렸지요. 한바탕 책을 보다보면 밑에서 절 찾는 소리가 조그맣게 들려요. 내려가서 할머니가 차려주는 밥을 먹고 집에 가거나, 아니면 엄마의 전화를 받곤 했어요. “오늘 늦으니까 거기서 자고 와.” 그 말이 왜 그렇게 싫었는지 몰라요. 나중에는, 자고 싶어도 잘 수 없게 될 텐데.
1997년, 아이엠에프가 터졌어요. 증조할아버지가 세 번째로 지은 그 집과 다른 땅들 모두 넘어가게 되었지요. 마지막 빚을 제때 변재하지 못했다면, 우리 집까지 넘어갈 뻔 했다는 건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야 알았어요. 자식들끼리 십시일반 모은 돈과, 그 집과 땅을 처분한 돈을 모아서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머물 집을 구했어요. 증조할아버지네 집은 우리 집에서 길 하나만 건너면 갈 수 있었지만, 전 한동안 쳐다도 안 봤어요. 할아버지가 그 집에서 이사하게 된 게 빚 때문이라는 사실도 몰랐는데도요. 그냥 보기가 싫었어요. 뭐라고 표현할 수 없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속상했던 것 같아요.
삼 사년 쯤 흐른 뒤에야 담너머로 그 집을 슬쩍 보게 되었어요. 마당이 사라지고 없었어요. 시멘트로 죄다 덮어버렸더군요. 온갖 꽃들이 피어나던 화단도 없었어요. 그냥 맨땅이었어요. 괜히 봤다, 그렇게 생각했죠. 내가 커서 나중에 돈을 많이 벌면, 그 집을 다시 사고 싶다고. 아직 어렸던 때라 그 집은 커녕 내가 누울 땅 하나 사려고 해도,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는 걸 몰랐을 때니까요.
그리고 십년도 더 지난 지금에 와서는, 그 집이 누군가를 따뜻하게 품어주고 있겠지, 그런 생각이 들어요. 옛날부터 그 집이 있던 동네는 고향에서 떠나온 사람들이 머무는 곳이었어요. 증조할아버지 때는 육이오 전쟁 때 집을 잃은 사람들이 사는 곳이었고요. 어린 엄마가 살던 때는 고향을 떠나 돈을 벌러 온 여공들이 머무는 벌집같은 자취방들이 있는 동네였고요. 그 집 마당이 사라지던 때는, 아이엠에프 때문에 몰락한 사람들이 모이던 동네였고요. 지금은 타국에서 돈을 벌러 온 노동자들이 삼삼오오 사는 동네니까요. 어떤 사람들은 그 동네가 가난한 동네라고도 하고, 그런 사람들이 모이니까 범죄가 많이 일어나는 동네라고도 해요. 실제로 무서운 일도 잔뜩 일어났지만, 그래도 전 그 동네를 생각하면 외할머니가 잔뜩 차려놓은 밥상이 떠올라요. 엄마가 오늘도 바쁘다고 입이 댓발은 나온 손녀를 위해 모기장을 쳐 주던 할아버지의 뒷모습도요.
맨 손으로 세 번이나 일어난 증조할아버지만큼 능력이 좋지도 않고, 악착같은 데도 없는 손녀라 그 집을 다시 살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뭐, 그 집에서 다른 사람들이 행복하게 산다면 집을 지은 증조할아버지도 기뻐하지 않을까요. 지금 누가 살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증조할아버지가 지은 그 집에 환하게 불이 들어와 있으면 좋겠어요. 제 마음 속에 남아 있는 증조할아버지의 그리운 그 집이랑 똑같이요.
* 라벤더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6-01-08 12:10)
* 관리사유 :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