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4년, 공민왕은 뜻밖의 죽음을 맞습니다. 고려의 마지막 불꽃이라는 평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어이없는 죽음이었죠. 내부의 반란과 홍건적, 왜구의 침략, 아내의 죽음, 신돈의 실패까지...온갖 일을 다 겪은 공민왕은 몸과 마음이 다 무너져 있었습니다. 그래도 너무 어이없었죠.
공민왕은 자제위라는 미소년 집단을 뽑아 음탕한 행위를 일삼았다 합니다. 그의 후궁들을 성폭행하게 시키다 한 명이 임신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 아이를 자기 자식으로 삼기 위해 자제위를 다 죽이고 그 사실을 알린 내관도 죽이려 했다가 거꾸로 죽음을 당한 것이죠. 이 때문에 이인임 등 권문세족이 왜곡한 거든지 조선을 세운 신진사대부들이 왜곡한 거든지 왜곡된 게 아니냐는 말이 나오는 거죠.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죽음, 빨리 다음 왕을 세워야 했습니다. 머리 아픈 일이었죠. 공민왕의 어머니(이자 희대의 막장 왕 충혜왕의 어머니)인 명덕태후(공원왕후)는 왕족들 중에서 뽑자고 주장했고, 큰어른인만큼 왕족들의 회의가 열립니다. 하지만 이에 반대하면서 가장 목소리를 크게 낸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이인임입니다.
"선왕께서 대군 왕우를 후사로 삼았으니 그 뜻을 저버리고 어디에서 후사를 구한단 말인가?" (이 말 자체는 이인임파인 왕족들이 한 말입니다)
공민왕이 죽은 이유가 자제위의 씨를 자기의 씨로 바꿀려다가 그랬다는 건데 참 뜬금없는 말이죠. 하지만 이인임의 뜻대로 강녕부원대군 왕우가 왕이 되니 그가 바로 시호도 없는 우왕입니다. 아니 우왕이라는 것 자체가 이름을 따서 편의상 부르는 이름일 뿐이죠.
시작부터 말이 참 많았던 왕입니다. 그의 어미는 반야, 신돈의 여종입니다. 공민왕의 아내 노국대장공주가 죽은 후 여러 후궁을 들였지만 아이가 없자 신돈이 자기의 자식을 공민왕의 양자로 들이게 했다는 겁니다. 우왕의 '열전'에는 이 얘기와 함께 그보다 더한 카더라도 넣었습니다. 반야와 아이를 동료 승려에게 맡겼는데 돌도 안 돼서 죽어버렸고, 다른 아이를 그 아이인 것처럼 신돈에게 속여서 보냈다는 것이죠. 신돈의 자식도 아니고 아예 근본조차 모르는 아이라는 거죠.
이후 신돈을 숙청하면서 그 아이를 자신이 반야를 가까이 해서 낳은 아이라 했고, 죽인 후(1371년)에 궁으로 불러 명덕태후의 궁에 살게 합니다. 그 때 이름이 모니노, 나이 일곱살이었습니다. 이인임을 불러서 '원자(元子)가 있으니 걱정 없다'면서 소개도 해 줍니다. 이 때 명덕태후에게 그 아이를 가르치자 했지만 천천히 하자는 반대도 받았죠.
이 년 후에는 이름을 추천받아 우라 지었고, 이전에 죽은 궁인 한씨의 아이라고 주장하면서 한씨의 집의 격을 높이고 본격적으로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대군이 된 것도 이 때였죠. 공민왕이 죽은 건 그 다음 해, 우가 열살이 됐을 때였습니다.
정말 그가 신돈의 아이였을까요? 신돈의 여종의 자식이고 일곱살이 됐을 때에야 겨우 부른 걸 보면 그럴 가능성도 적진 않습니다. 하지만 공민왕이 아무리 급해도 그렇게 할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구요. (이 때 42살이었습니다) 특히 이미 있는 신돈의 애를 양자로 삼았다는 부분은 그렇죠. 이 때문에 보통은 신돈이 이미 임신시켜놓은 여종을 바친 거다는 식으로 (왕은 자기 애인 걸로 알았다고) 묘사되죠. 어느 쪽이든 (신돈의 여종이라는 데서 나온) 카더라고, 신돈이 까인만큼 이것도 왜곡된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는 거죠. 반대로 기록에서 공민왕의 자식이라 할 부분은 공민왕 자신의 말밖에 없습니다. 속인 거든, 그조차도 속은 거든 말이죠.
하지만 이 정도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공민왕이 그를 후사로 점찍어뒀다는 점 말이죠. 자신의 최측근 이인임에게 소개해주고 태후에게도 맡겼으며, 교육을 시키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면 말이죠. 하지만 노예의 자식이었다는 게 걸리기도 한 모양입니다. 굳이 신돈의 자식이 아니더라도 이건 충분히 문제되는 부분입니다. (지금 연재하고 있는 경종 영조 얘기만 봐도 알 수 있죠) 원자는 말만 나왔고 실제로 책봉했다는 말도 없고, 왕이 되기 전까지 왕우는 대군이었으니까요. 시간이 더 지나서 후궁에게서 다른 아이를 가졌으면 왕우를 내칠 가능성도 있었을 겁니다. 정확한 건 공민왕 자신만이 알겠죠.
+) 이 때문에 신돈에 관한 기록 자체가 왜곡이고, 죽은 한씨의 자식이 맞지 않겠냐는 주장도 나옵니다. 생각해볼만한 부분입니다.
뻔히 있는 왕우를 놔두고 회의를 연 것도 이해하기 쉽습니다. 이 어려운 시기에 제대로 된 세자라도 열 살이면 다시 생각해 봐야 될 상황이니까요. 그런데 노예의 자식으로 정통성도 꽤나 약하고, 궁에 들어온 지도 3년밖에 안 됐습니다. 나이도 좀 되고 힘도 있는 종친을 고르는 게 나을 수 있는 상황이었죠. 왕우 자신의 문제를 떠나서 고려왕의 권력은 형편없었습니다. 무신정권 백년에 원 간섭기 백년이었습니다. 공민왕도 원에 의해 조카를 내쫓고 왕이 된 처지였고, 개혁 중에도 반대와 반란에 시달렸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런 새파란 아이를?
하지만 이인임 역시 충분하 명분이 있었습니다. 어쨌든 그는 공민왕의 최측근이었고, 공민왕에게서 직접 왕우를 부탁받았습니다. 그렇게 왕우를 까고 까는 기록만 있는 고려사에서도 분명 (세자 책봉만 안 했을 뿐) 세자 교육을 시작했구요. 생각이 그리 깊지 않았을 지 몰라도 공민왕의 생각은 분명 왕우에게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내세울 가까운 종친이 있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죠. 공민왕부터가 자기 조카 대신 왕이 된 상황이었으니까요.
그렇게 밀어붙이면서 왕우는 거꾸로 해서 우왕이 됩니다. 이인임은 그 어린 왕의 밑에서 최고의 권력을 누리게 되죠.
+) 이 때문에 이인임이 공민왕을 암살했다는 음모론도 나오죠. 진지한 학설로는 다뤄지지 않는 것 같네요. 고려사지킴이로 활동하시는 길공구님께 이걸 문의드린 적이 있었는데 역시 부정하시면서 이인임이 공민왕의 뜻을 이은 확실한 고명대신이다고 말씀하시더군요
+) 이인임은 공민왕이 개혁정치를 하든 망가지든 그의 뜻을 따랐던 정말 최고의 공신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우왕대에 권신이 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죠. 그렇게 타락하는 모습을 보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생각납니다. 공민왕 시해사건의 전모를 밝혔듯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원수를 갚았고 어린아이를 옹립하면서 자기가 권력을 마음껏 누렸죠. 물론 둘의 출신 차이가 극과 극이고 (이인임은 권문세족, 히데요시는 평민이죠) 권력을 얻은 후의 행보도 많은 차이가 있지만요
이렇게 왕이 된 우왕, 하지만 뭐 할 수 있는 게 없었죠. 나이도 너무 어렸으니까요. 이인임은 절대권력을 휘둘렀고, 권문세족의 횡포라는 내우와 홍건적, 왜구 등의 외환은 어린 왕이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5년, 우왕이 자신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의 유모 장씨가 지윤과 손 잡고 이인임을 내쫓으려다 역으로 당한 사건이죠. 최영부터 명덕태후까지 모두 장씨를 죽이려 했죠.
+) 그의 어머니 반야는 그가 왕이 된 후 왜 자기 자식을 다른 사람의 자식으로 바꾸냐면서 태후에게 애원하다가 강에 던져집니다.
"이 여인이 나를 길렀으니 곧 나의 어머니와 같다. 아들이 그 어미의 목숨을 어찌 구하고 싶지 않겠는가? 경들이 이미 나를 임금으로 삼은 터에 내가 어찌 유모 한 사람조차 구해낼 수 없단 말인가? 제발 놓아 보내고 죄를 묻지 말도록 하라."
왕이 이렇게 애원했지만 장씨는 유배당하고 목이 잘립니다. 이 사건도 이래저래 말이 많더군요. 우왕이 이인임의 힘을 줄이기 위해 직접 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으니까요. (역으로 이인임이 최영, 명덕태후까지 끌어들여서 막아낸 거란 얘기가 되죠) 아무튼 왕의 유모면서 정치적으로 뭘 하려 했으니 당할만 하다 싶긴 한데, 왕조차도 그의 죽음을 막지 못 했으니 우왕의 상황을 알 만 합니다.
이듬해에는 명덕태후도 죽습니다. 궁의 큰 어른으로 공민왕과 여러번 대립했고, 우왕이 왕이 되는 걸 반대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왕이 된 후에는 그를 보살피고 힘이 돼 주었다 합니다. 죽으면서 우왕이 그만 놀고 왕답게 하길 바란다는 말을 남겼지만, 그녀가 죽은 후 우왕의 비행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이후의 기록은 정말 노는 걸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것도 막장으로 노는 걸로 말이죠. 허구한 날 사냥만 하고, 여기저기서 잔치를 벌이면서 술 쳐먹고 뻗어서 신하들이 왕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정도였습니다. 민가를 지나다 예쁜 여자가 있으면 들어가서 덮쳤으며, 마음에 안 드는 백성이 있으면 폭행하는 것도 예사였죠.
이를 간언하는 건 간관들 정도, 이게 우왕의 귀에 박힐 리가 있겠습니가. 제대로 조회도 안 하면서 신하들을 만나지도 않는데요. 이인임이 이를 말릴 생각이나 하겠습니까. 오히려 이인임을 아버지라 하고 그 아내를 어머니라 하면서 심심하면 이인임의 집에서 잤습니다.
하지만 나이를 더 먹으면서 그의 생각도 바뀌어 갔나 봅니다.
"충혜왕께서는 여색을 좋아했으나 반드시 밤에만 즐김으로써 남들의 이목을 피했습니다. 충숙왕께서는 놀러 다니기를 좋아했으나 반드시 농사철을 피해 백성들에게 원망을 사지 않았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절도 없이 노시다가 말에서 떨어져 몸을 상하였는데, 제가 재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제대로 바로잡지 못했으니 무슨 면목으로 남들을 대하겠습니까?"
대신들 중에서 그의 비행을 강하게 반대하는 이가 있었으니 최영이었습니다. 우왕 13년 이인임이 노환을 이유로 사직했고, 우왕은 최영과 밀담을 거친 후 이인임 일당을 숙청합니다.
이인임과 최영의 사이는 참 묘했습니다. 최영은 그의 부패를 싫어하고 까긴 했지만 적대적이진 않았습니다. 이인임은 최영을 추켜세우며 (최영의 군공이 커서 그런 것도 있겟지만) 동반자로 대우했구요. 이인임이 문하시중으로 최고의 자리에 있었을 때 최영은 그 다음인 수시중이었습니다. 분야는 다르지만 공민왕 때부터 함께 활동해 온 사이고, 고려의 상황에서 서로가 필요한 존재다고 생각한 사이였을 겁니다.
하지만 우왕이 칼을 뽑자 최영도 역시 생각을 바꿉니다. 이인임의 횡포는 그만큼 심했으니까요. 이렇게 임견미, 염흥방 등 이인임 일파가 멸족됩니다. 하지만 개인적인 정인지 최영은 이인임을 공 또한 크다고 옹호했고, 이인임의 일족은 살아남죠.
조선 태조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
우왕 14년 정월, 최영을 문하시중으로, 이성계를 수시중으로 임명하는 등 정권이 완전히 교체되니 우왕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나 싶었습니다. 3월에는 최영의 딸을 왕비로 들이면서 최영에게 권력을 확실히 줌과 동시에 자신의 보호자가 되게 했죠. 하지만... 곧바로 큰 문제에 부딪히니 요동 정벌이었습니다. 철령위를 내놓으라는 명의 요구에 왕과 최영은 요동 정벌을 결심했지만, 이성계가 4불가론으로 반대한 것이죠.
계속되는 이성계의 반대, 하지만 왕도 최영도 그대로 밀어붙입니다. 그것도 이성계를 그대로 기용하면서 말이죠. 그렇게 고려의 모든 힘을 쏟은 요동정벌군, 우왕은 여기서 자신을 파멸시킬 떼를 씁니다.
"경이 가버리면 내가 누구와 함께 국내를 다스리겠는가?"
그러면서 정 가겠거든 자신도 같이 가겠다고 나선 거죠. 어쩔 수 없이 최영은 평양까지 우왕을 동행시킵니다. 거기서 자신은 평양에 남아서 지휘할테니 우왕은 개성으로 돌아가라 하자 이렇게 말하죠.
"선왕(先王)께서 시해를 당한 것은 경이 남쪽으로 정벌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가 어찌 하루라도 그대와 함께 있지 않겠는가?"
+) 공민왕이 죽었을 때 최영은 제주도의 목호의 난을 토벌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둘 다 평양에 남았고, 이성계가 계속 회군해 달라고 요청하는 걸 거부합니다. 그러다 이성계가 회군하자 급히 개경으로 도망갔고, 거기서 남은 병력이라도 모아서 맞섰지만 그게 됐겠습니까. 이성계는 (자기가 원하진 않지만 부하들이 최영이 나와야 군사를 물릴 거라고 주장했다면서 -_-;) 최영을 내놓으라고 했고, 우왕은 안 된다고 맞섰지만 포위망이 계속 좁혀지면서 최영을 보내게 됩니다. 최영은 절하고 우왕을 떠났죠.
"이번 사태는 내 본심에서 일으킨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요동정벌이 대의에 거역되는 일일뿐만 아니라 나라가 불안해지고 백성들이 고통을 겪어 원한이 하늘에 사무쳤기 때문에 부득이 이런 일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부디 잘 가십시오." - 이성계
"이인임의 말이 정말 옳았다."
+) 이인임은 "이성계가 필시 나라의 주인이 될 게다."는 말을 했었는데, 최영은 이 말을 듣고 화를 냈다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최영을 유배보내고, 명의 연호와 복식을 다시 쓰며, 이성계와 조민수를 좌우시중으로 삼습니다. 이렇게 위화도 회군이 완료된 게 6월, 이인임을 내쫓은 지 몇 달 됐다고 모든 권력을 다 빼앗겨버린 것이죠.
그래서일까요. 그는 말도 안 되는 시도를 합니다. 내시들을 무장시켜서 이성계와 조민수의 집을 습격한 것이죠. 어차피 그들은 집에 없었고, 있더라도 뭘 할 수 있었겠습니가. 이렇게 폐위됩니다.
"해가 이미 저물었구나" - 강화도로 유배되면서
그나마 조민수와 이색이 틈을 노려 우왕의 아들 왕창(9살)을 왕으로 세우니 창왕입니다. 하지만 아비처럼 제대로 된 시호도 없이 이름에 왕을 붙인 것일 뿐이죠. 그의 재위도 즉위한 후 1년을 갓 넘은 정도입니다.
"울적한 심사를 견디지 못하겠으니 여기 있으면서 속수무책으로 그냥 죽을까보냐? 역사(力士) 한 명만 구해 이성계를 살해할 수 있다면 내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평소 예의판서 곽충보와 잘 지냈으니 너희들이 가서 만나보고 일을 추진하라"
강화도에 유배된 김저와 정득후가 우왕에게서 들은 말이었죠. 우왕이 폐위된 후 얼마 안 가 최영은 사형당했고, 조민수는 이성계와의 파워게임에 밀려 쫓겨났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이성계를 죽이면 해결될 거라 생각했다니 그냥 복수심일까요 뭐였을까요? 우왕은 곽충보를 만나서 얘기해 보라 했지만 곽충보는 이를 바로 이성계에게 알렸고, 김저와 정득후는 함정에 빠집니다. 정득후는 바로 자살, 김저는 반이성계파가 모두 개입했다는 진술을 내놓고 죽죠.
이 때가 1389년 11월, 이성계는 거명된 사람들을 일망타진했고, 왕을 다시 바꿉니다. 흥국사에 9대신이 모였고, 여기서 폐가입진이라는 명분이 만들어지죠. 가짜를 내쫓고 진짜를 들여야 된다는 거였습니다. 여기서 결정된 것이 정창군 왕요, 고려 최후의 왕 공양왕입니다.
"우리 태조께서 개국하신 이래 자손들이 그 뒤를 이어 능히 종묘의 제사를 받들어 왔다. 그러나 공민왕대에 와서 불행히 아들을 두지 못하고 별세하게 되자 역적 이인임이 굳이 어린 서자를 내세워 정권을 독점하려는 욕심으로 신우를 왕씨라 사칭하고 그를 왕으로 옹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 어리석고 광패한 신우는 명나라 요양을 침범하려고 했으나, 시중 이성계 등이 국가를 위한 큰 계책을 세워 군사들을 설득해 회군한 다음 왕씨를 다시 세울 것을 의논했다. 그러나 이인임의 일당인 주장 조민수가 다시 권력을 농단하면서 간특한 음모로 여론을 저지시킨 다음 우의 아들인 창을 세우니, 왕씨의 제사가 끊어져 신(神)과 사람이 함께 분노한 것이 열여섯 해나 되었다.
홍무 22년(공양왕 원년 ; 1389) 11월 15일, 시중 이성계가 분연히 충의를 떨쳐 일어나 심덕부·정몽주·지용기·설장수·성석린·박위·조준·정도전 등과 함께 천자의 명령대로 종친·기로·문무신료와 함께 계책을 정한 후 공민왕 정비께 아뢰고 그 분부를 받들어 우·창 부자를 폐위시켰다. 그리고 왕씨 중에서 가장 가까운 친척이라 하여 나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하게 했던 것이다." - 공양왕 즉위 후의 교서
이렇게 결론이 난 것이죠. 공양왕은 즉위 한 달만에 우와 창에게 사형을 내립니다. 이성계야 빠른 사형은 반대했지만 공양왕에겐 그 편이 나았겠죠. 그의 나이 스물다섯, 아들 창의 나이 열살 때였습니다.
왕은 물론 왕씨인 걸 부정당했기에 그와 창의 기록은 왕의 기록인 세가가 아닌 열전에 기록됩니다. 신우, 신창으로 말이죠.
정말 그가 신돈의 아들이었냐 하면 모르겠다 하겠습니다. 하지만 공민왕이 아무리 망가졌어도 바보는 아니니 신돈의 자식을 데리고 오진 않았을 겁니다. 신돈의 아이를 이미 배고 있었다는 식의 이야기라면 모르겠지만요.
궁에 데리고 와서 제왕교육을 시키긴 했지만, 일곱살까지 제대로 보지도 못 한 아버지한테 사랑을 제대로 받진 못 했을 것 같네요. 궁에 데리고 온 것도 뒤를 잇기 위한 거지 망가진 공민왕이 사랑을 쏟았을 것 같지도 않구요. 그런 아버지도 얼마 안 가 죽었고, 자기 어머니는 죽은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으며, 그걸 막으려 했던 어머니는 강에 던져집니다. 그나마 정 붙이고 살았을 유모도, 엄하면서도 자상했을 할머니도 얼마 안 가 죽었죠. 공민왕의 네번째 왕비인 정비 안씨에게 심심하면 찾아가서 추문이 돌았는데, 정말 일을 벌였을수도 있겠지만 모성애를 원해서라는 얘기도 있습니다. 저도 이 쪽이 더 마음이 가구요.
열 살이지만 자신의 위치는 충분히 알았을 겁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 그리고 누구에게 절대적으로 기대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것을요. 그 대상이 이인임이었고, 최영이었습니다.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주고 자신을 이용해 절대권력을 누린 이인임, 나이가 들면서 그를 떨쳐내는데 성공했지만 홀로 설 수 없었습니다. 최영에게 그렇게 기댔고 그것 때문에 이성계에게 대군을 주는 최악의 선택을 한 것도 그것 때문이었겠죠. 그러다 그가 떠나자 이성계의 집을 습격하는 어이없는 일을 저지르죠. 음모가 얼마나 섞여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다음 이성계의 암살을 추진한 것도 너무나도 허술합니다. 성공은 물론 사는 걸 포기한 느낌이에요. 어차피 그를 지켜줄 사람은 더 없었으니까요. 이성계와 신진사대부는 전혀 다른 목표를 가지고 있었으니.
제대로 된 제왕교육도, 제대로 정사를 펼칠 기회도 없었습니다. 그의 막장 행각은 과장됐을 가능성이 크지만, 부정할 순 없을 것 같네요. 그 때 그에게 그거 말고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었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최영의 요동정벌은 뭐라도 할 수 있다고 신나서 추진한 게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보호자 최영을 곁에 두기 위해 떼를 썼지만요. 이 때 평양에서도 놀았다는 기록만 있습니다.
다른 환경이었다면 더 제대로 된 왕이 될 수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죠. 잘 됐다 해도 암군으로 남았을 겁니다. 하지만 그럴 기회도 박탈당했죠. 그의 왕이었던 때는 모두 흑역사가 되었고, 왕은 물론 왕씨인 것도 부정당했습니다.
용의 눈물에서 그의 최후
정도전에서의 최후
왕씨에게 이어지는 용의 비늘, 죽기 전에 그걸 내보이며 죽었다는 야사는 그에 대한 그 시대 사람들의 연민이 담긴 것이겠죠. 자신을 부정당하는 것보다 더한 비극은 없을 것인데, 왕이었던 사람이 그걸 부정당했으니까요.
왕우는 그렇게 한 많은 세상을 살다 갑니다.
* 라벤더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5-12-30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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