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갑자기 동생이 집에 들어오더니, 앉아서 펑펑 우는 거야. 보니까 얘가, 아침에 베이지색 블라우스를 입고 나갔는데, 그 블라우스에 피가 팍 여기저기 튀어 있어. 다행히 걔가 다친 건 아니더라. 물어보니까, 학교 앞에서 데모하고 있었는데, 앞에 있던 남자애 머리를 군인이 곤봉으로 퍽 때렸대. 그래서 그 남자를 다른 사람들하고 같이 병원으로 옮겨놓고 오는데, 놀란 거지.
긴 줄을 서서 함께 기다리고 있었던 엄마는, 갑자기 그렇게 얘기를 시작했다. 80학번이었던 이모 얘기를 하다가 말이다.
- 이모는 계속 집회 나가셨어요?
- 아니. 니 외할머니가 절대 못 나가게 했지. 솜이불로 창문 다 덮어놓고, 방 안에만 있게 했다더라.
- 엄마는요?
- 나는 학교 근처(* 광주시 외곽의 시골 중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면서 자취하고 있었지. 주말에만 집에 다녀오고. 그 주말(* 1980년 5월 18일은 일요일)에도 갔었는데, 그 당시까지만 해도 그렇게 무서운 상황이라고 받아들이질 않았어. 그냥 여느 때처럼 데모하고 경찰들이 진압하는구나, 싶었고, 다만 좀 정도가 심해서 저 나쁜 놈들, 하고 있었고. 월요일 새벽에 일찍 터미널로 가서 버스를 타고 출근하려고 했는데, 외할머니가 무서운 생각이 드셨던지 택시를 타고 같이 터미널로 와 주셨지. 근데 군인들이 터미널 앞에 주욱 늘어서서는 택시를 멈추는 거야! 다행히 나랑 엄마(* 외할머니)만 있다는 걸 확인하고는, 그냥 보내줬어. 터미널 안에 들어가 보니까, 군인들이 터미널 안에 좍 늘어져 있더라.
- 안 무서우셨어요?
- 내가 잘못한 것도 없었고, 뭣보다, 왜 남자 한 명은 여자 무리 앞을 못 지나가지만, 여자 한 명은 남자 무리 앞을 지나간대잖아. 흥, 하고 콧방귀 뀌면서 내 갈 길 갔지.
늘어진 줄은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터덕터덕 나아가고 있었지만, 아직도 우리 차례는 요원해 보였다. 엄마는 얘기를 계속했다.
- 학교에서 라디오를 듣는데, 계속 무서운 얘기가 나오니까, 자꾸 걱정이 되어서 집에 전화를 했어. 다행히 별 일 없다더라. 다른 선생님들도 다 전화기 붙잡고 집에 전화를 하고 있었는데, 내 옆 자리 선생님 한 명이 펑펑 울고 있었어. 동생이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집에 들어오질 않는다고. 나중에 겨우 군인들한테 끌려갔던 걸 찾았다더라. 그때는 어디 안 다친 걸 다행으로 여겼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살아있던 걸 다행으로 여겼어야 했었지.
- 그러게요.
- 근데 그 다음부터는 전화가 아예 안 됐어. 먹통이더라고. 나중에, (* 진압이) 다 끝나고 나서야 전화가 됐는데, 다행히 아무도 안 다쳤다고 해서 얼마나 가슴을 쓸어내렸는지 몰라.
- 그럼 그 주에는 집에 못 가셨겠네요.
- 응. 무서워서 갈 수가 없었지. 근데 오히려 그쪽에서 사람들이 트럭을 타고 왔었어.
- 군인들이요?
- 시민군이. 트럭에서 막 노래 부르면서 와 가지고는, 물 좀 달라고, 그래서 사람들이 다들 나와서는 바가지로 물 떠다가 줬지.
- 참, 그때 아빠는 광주에 계셨어요?
- 니 아빠는 울산에 있었지. 현장근무 하느라.
여전히 줄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오히려 우리 뒤로 기나긴 꼬리가 주욱 늘어서 있다. 자원봉사자들이 계속해서 작은 스티커, 포스터, 배지를 나누어 준다. 별로 예쁘지가 않아서, 나는 그냥 가방에 집어넣었지만, 엄마는 기어코 가방에 배지를 단다.
- 생각해 보면 참 용감한 사람들이었는데, 밖에서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게 너무 속상했어. 내가 너를 충남에서 낳았는데, 그때 집주인들하고 얘기하면, 광주 그거 다 빨갱이들 아니냐고, 북한에서 조작한 거라고, 그러면 나는 너무 화가 나는데 언론에서 제대로 방송하는 곳이 하나도 없으니까 뭐라 할 말이 없는 거야. 요즘에야 겨우 사람들이 진실을 보기 시작했는데, 아직도 그거 다 가짜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더라.
- 그때 광주에 들어갔던 독일 기자 한 사람이 기사를 써 준 덕분에, 다행히 진실이 좀 보도가 되었죠. 참, 그 기자가 도청에서 시민군 대표를 만났었는데, 그 사람이 윤상원 씨라고, 제 고등학교 선배님이었어요.
- 응 알아. 내가 기순이랑 친했었거든.
휘청, 했다. 뭐라고?
- 네? 박기순 씨하고요?
- 엄마랑 기순이랑, 고등학교도 동창이고 대학교도 동창이야. 76학번. 나는 영교과 갔고 걔는 국사학과 갔지만. 고등학교 땐 별로 안 친했어. 한 반이었던 적이 없었으니까. 대학 가서야 알았는데, 얘가 참, 이쁜 거야. 샤랄라하고 뭐 그런 게 아니라, 항상 웃고 다녔고, 누구한테도 찡그리질 않았어. 커트한 단발머리였는데, 얘가 어찌나 뛰어다니던지 머리가 차분하게 앉아있질 않았어. 그래서 엄마랑 친구들이 걔더러 말 같다고, 말갈기같다고 놀렸었지.
- 어떻게 친해지셨던 거에요?
- 걔가 야학하고 노동운동 하면서, 엄마한테 같이 하자고 되게 많이 권유했었어. 세미나도 돌렸었고. 근데 세미나는 잘 안 됐지. 기순이가 그때 다른 모임도 같이 하느라 엄청 바빴거든. 그리고 엄마는 그때 그게 맞는 길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같이 할 수가 없었어. 집이 너무 어려워서, 내가 아르바이트도 뛰었었고, 빨리 졸업하고 취직해서 부모님께 돈 보내드릴 생각만 하고 있었거든. 나는 하나에 얽매일 수가 없었던 거지. 하지만, 그때만 생각하면, 기순이한테 참 미안해. 기순이가 나랑 친구 몇 명을 모임에 초대한 적이 있었는데, 거기서 하는 말들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틀린 말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 연대 의대 다니다가 내려온 사람도 있었는데, 아 저 사람은 왜 좋은 직장에 가지 않고 여기에 와 있나, 라는 조금 아쉬운 생각도 들면서도, 다른 한편, 아 저런 사람들까지 같이 하는 걸 보면 이게 그만큼 할 가치가 있는 일인가 보구나, 싶었지. 그래서 엄마는 지금도 운동하는 사람들 보면 약간 긍정적으로 봐.
- 아... 그럼 결국 같이 활동하신 적은 없는 거네요?
- 응. (잠시 침묵) 기순이는, 한 번도 구두를 신은 적이 없었어. 맨날 운동화만 신고 다녔지. 치마도 안 입었고. 뛰어다니려니까. 그런데 한 번은 걔가 구두를 신고 온 거야. 무슨 일이었더라... 아무튼 그래서 나랑 애들이 되게 놀렸었어. 그랬었는데...(침묵) 사실 걔 집은 그리 못 사는 편이 아니었어. 오빠들하고 사는, 방이 두 개짜리 집이었는데, 그 당시에 그 정도면 잘 사는 편이었지. 생각해보면, 기순이가 오빠들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 같아. 큰오빠랑 작은오빠가 있었는데, 작은오빠는 기자여서 생활이 되게 불규칙했었거든. 가끔 집에 가 보면 걔 오빠가 야근하고 집에 와서는 자고 있었어. 그래서 농담으로 그랬지, 나중에 기자랑은 결혼 못하겠다고, 저렇게 힘든데. 그랬더니 기순이도 응, 했었지.
- 박기순 씨가 어떻게 돌아가셨었죠?
- 걔가 왜였더라... 무척 피곤해하며 집에 들어갔었어. 그날 연탄가스 중독으로 죽었지.
- 아, 맞다, 연탄가스...
아마도 엄마는, 내가 이렇게 박기순 씨에 대해 호기심을 갖는 이유를 모르실 것 같았다. 그래서 약간의 부연설명을 했다.
- 엄마, 지금 제 기분이 되게 묘한데, 왜 그런지 아세요?
- 왜?
- 운동권에서, 그리고 진보적인 대학생들 사이에서, 윤상원 씨와 박기순 씨는 굉장히 상징적인 존재에요. 그런데 제 주변에 이렇게 그들과 가까운 사람이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어요.
- 그래?
엄마는 잠시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고 다시 얼굴이 무거워졌다. 줄은 어느새 많이 줄어들어 있었다.
- 나중에, 니 아빠하고 같이 망월동 묘역에 가자고 한 적이 있었어. 내 친구 보러 가야겠다고. 니 아빠는 한참 연애중이었기 때문에 뭐가 뭔지도 모르고 끄덕끄덕 했었지. 가서는, 기순이 묘 앞에서 계속 울었어. 너무 안타까워서, 내 친구는 여기 누워있는데,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사람들은 아무 일 없었다는 것처럼 살아가고... 그냥 이렇게 잊혀져 버리는 것 같아서, 너무 미안하더라. 물론 니 아빠는 손잡고 다독여줄 기회 생겨서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겠지. 요즘에야, 그때보다는 조금 덜 미안하기도 하고, 이런 생각도 들더라. 기순아, 결국엔 너가 이겼구나....
그 뒤로 나는 뭔가 더 물어보지 못했다. 짤막한 대화들만이 오갔다. 20분 정도 더 기다렸을까. 마침내 우리 차례가 왔고, 우리는 들고 있던 꽃을 영정 앞에 헌화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려는 길에, 문득 내가 줄 서 있던 곳을 보았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비는 아직도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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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에 <포트레이츠>라는 (지금은 종간한) 잡지에 실었던 글입니다. 5월 18일에 문득 생각이 나서, 일부 수정하여 글을 올려봅니다.
*표시는 설명을 위해 덧붙인 부분입니다.
* 라벤더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5-08-24 18:25)
* 관리사유 :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