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이는 봄비를 좋아해 이전 이야기 :
https://pgr21.com/?b=1&n=2617
한 줌씩 한 줌씩 항마를 보내면서 나는 몇 가지 중요한 것을 결심했다.
내가 멍청하고 약하니까 연이 아빠가 고생만 하다가 그렇게 가버렸다.
항마도 치료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하고 결국 돈 걱정에 치료를 포기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보내선 안 되는 사람들이었는데 모두 나 때문에 이렇게 됐다.
이제 남은 건 연이 뿐인데 내가 계속 이모양이면 연이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는 정말로 죽어서 연이 아빠 볼 면목이 없다.
나는 충분히 슬펐다. 이제는 강해져야 한다.
턱없이 약했고 당연히 대가를 치렀다. 연이마저 대가로 치를 수는 없다.
연이 아빠와 항마가 지켜보는 그곳에서 나는 맹세했다.
반드시 연이를 지키겠다고.
그리고 다시는 울지 않겠다고.
그러나 돌아와서 항마의 짐을 정리하다가 800만원이 들어있는 통장과 새거나 다름없는 운동화를 보고는
이게 마지막이라고 다짐한 뒤 한참 울었다.
세무사님이 나를 불러 이런저런 위로를 건내면서
사정도 알고 내가 일도 열심히 하니 월급을 5만원 올려주겠다고 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월급은 지금도 충분하니 대신 15분만 일찍 보내달라고 했다.
15분 일찍 퇴근하면 어린이집에서 늦지 않게 연이를 데려올 수 있으니까.
세무사님은 별 고민도 하지 않고 두 가지를 모두 약속해주었다. 나는 너무 고마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
화분에 물을 더 열심히 줘야겠다고 다짐했다.
다음 날엔 사무장님이 부인께서 보시던 책을 몇 권 가져다 주셨다. 공인중개사 교재였다.
연이가 학교에 들어가면 지금 돈으로는 아무래도 어려우니 퇴근 후에 짬짬히 공부를 해서 나중에 복덕방을 하나 차리라고 했다.
공인중개사가 뭔지도 몰랐지만 마냥 고마웠고 그 이후로 내 꿈은 복덕방 사장이 되었다.
복덕방 이름은 연이 아빠 이름을 따야지.
어린이집 영아반 선생님이 살며시 나를 불러 조용히 말하길
이제 남은 동요에는 모두 아빠라는 단어가 들어간다고.
동물과 과일이 나오는 동요만 일단 먼저 가르쳤는데 이제 슬슬 설명해줘야 한다고 했다.
어차피 동요나 한글공부가 아니더라도 다른 아이들이 모두 아빠라는 말을 한다고.
그리고 결정적으로 연이의 표정에서 난처함이 드러난다고.
나는 선생님 드릴 딸기 봉지를 떨어뜨릴 뻔 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한참동안 결정하지 못했다.
연이에게 무어라 말해야 하나.
거짓이건 진실이건 그 어떤 방식도 나는 자신이 없었다.
항상 미루기만 했던 일, 연이 눈치를 보면서 스스로도 애써 외면했던 일이다.
연이가 아빠를 닮아 똑똑한데다 사려깊기까지 해서 오히려 날 배려하고 있었나 보다.
내가 설명해줄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나는 너무 많은 생각들이 엉켜버려 한참 동안 목석처럼 서 있었고
선생님은 그래도 얼마 간은 시간이 있으니 잘 고민해보라고 했다.
그리고
연이가 토마토송 노래하는 모습을 찍은 동영상을 보내줄 테니 스마트폰을 사라고 했다.
카카오톡에 올린 연이 사진을 보고 학창시절 같은 반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내가 공장으로 갔던 사이 대학교에 갔던 친구다. 지금은 휴학하고 편의점에서 일을 한다고 했다.
어찌어찌 소식이 전해졌고 카카오톡에 뜨길래 봤더니 연이가 너무 이쁘다고 한다.
나는 너무너무 기쁘고 자랑스러웠지만 대수롭지 않은 척 하며 연이가 노래하는 동영상이랑 연이 사진을 100장도 넘게 보냈다.
편의점이 한산해 심심하다고, 놀러 오면 외국 맥주랑 맛있는 것을 사주겠다고 했다.
나는 연이 그림공부랑 내 공인중개사 공부 때문에 아무래도 거절하려고 했지만
연이가 보고 싶다는 친구의 말에 당할 수가 없었다.
연이의 이쁜 짓을 보여줄 수만 있다면 나는 미국도 갈 수 있다.
일요일 아침에 연이와 집을 나선다.
제일 이쁜 옷, 노란 티셔츠와 하얀 호박바지에 항마가 사준 손수건을 이쁘게 둘렀다.
때늦은 봄비가 올지도 모른다는 예보에 연이가 제일 좋아하는 초록색 개구리 우비도 챙겼다.
연이는 잘 걷지는 못하지만 삐약이 신발을 신으면 항상 즐거워했다.
터미널에서, 버스에서 연이를 보는 사람마다 밝게 웃고 이쁘다고 칭찬을 한다.
연이는 웃을 때 정말 까무라칠 정도로 이쁘고
어딘가를 바라볼 때 눈빛은 정말 말로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예쁘다. 가끔 심통 부릴 땐 밉기도 하지만.
이렇게 예쁘고 착한 아이가 내 몸에서 나왔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버스에서 잠든 연이를 안고 등을 토닥이면서 나는 신께, 내 삶의 모든 것에 감사했다.
어떻게 내가 연이 아빠를 만날 수 있었을까?
어떻게 내가 항마를 만나고 어떻게 내가 연이의 엄마가 되었을까?
어떻게 연이가, 이런 축복이 나에게 와주었을까?
세상에 잘난 여자가 그렇게 많은데 이런 행운들이 나에게 오다니 너무 감격스러워서 연이를 꼬옥 안았다.
연이 따뜻한 숨소리랑 파우더 냄새가 차창 밖의 진달래들보다 훨씬 이쁘다.
친구는 정말 맛있는 거라며 수입 맥주와 전자레인지에 돌린 만두를 들고 나왔다.
한산한 시외라서 정말로 인적이 드물다.
도로 옆에 편의점을 짓고도 공간이 남아 널찍하게 공터도 있었다.
비가 슬슬 오기 시작하는 오전에
파라솔 아래 셋이 앉아 나와 친구는 맥주를 마셨다.
연이는 빨아먹는 요구르트가 아주 입맛에 맞는지 나한테도 먹어보라며 들이밀고 난리다.
비가 점점 많아져 나는 연이 조끼를 입히고 담요망토를 씌워준 뒤 연이가 가장 기다렸던 초록색 개구리 우비를 꺼냈다.
우비도 입고 요구르트도 먹으니 연이는 숨이 넘어갈듯이 좋다며 웃는다.
잠깐 손님이 와서 친구가 들어갔기에
나는 연이와 둘이 앉아 하염없이 내리는 비를 보고 있다.
아주 작은 빗방울들이 촘촘하게 내리고 있다. 파라솔 지붕에 부딪치는 빗소리가 피아노처럼 들린다.
친구와 나눴던 학창시절 이야기가 너무나 오래 전 일처럼 느껴졌다. 그런 일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파라솔 끝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멍하니 보고 있자니
그 동안 일어났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연이가 태어나기 10주 전에,
그러니까 연이 아빠 장례식 이틀째 밤
나는 연이 아빠가 무사히 집에 돌아오는 꿈을 꿨었다.
나는 잠시,
연이 아빠가 몹시도 그리워 목이 메었다.
한 번도 원망해본 적이 없는데 지금만큼은 그저 원망스럽다.
힘들어서가 아니라 같이 있지 못해서 나는 너무 억울하다.
시간이 갈수록 왜 더욱 더 그리워지는지 모르겠다.
하루도,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다. 밤이고 낮이고 난 연이아빠 생각을 했다.
연이 아빠에게 투정도 부리고 싶고 핀잔도 주고 싶다.
뽀뽀해주고 머리도 쓰다듬어 주고 깍지 끼고 세게 안아보고 싶다.
목소리도 너무나 듣고 싶다. 꿈속에서 말고 지금. 내가 기억하는 그 목소리가 맞는지 확인해보고 싶다.
마주보고 대화하고 싶다. 손잡고 나란히 앉고 싶다.
고맙다는 말도, 사랑한다는 말도 충분히 하지 못했다. 왜 그리 서둘러 가버린 건지 야속하기만 하다.
비오는데 같이 앉아서 맥주 마시면 얼마나 좋아.
연이 저렇게 이쁜데 정작 오빠에게는 못 보여주잖아.
나는 그렁그렁한 눈으로 연이를 봤다.
없다.
연이가 자리에 없다.
나는 깜짝 놀라서 일어나느라 맥주 캔을 쏟았다.
연이가 앉아있던 자리에 빈 의자만 있다.
나는 전생체험에서 갓 깨어난 사람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연이는 보이지 않았다.
아니
보였다.
저 멀리 공터 한복판을 아장거리는 초록색 개구리!
전속력으로 빗속을 내달렸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나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났다.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저런대.
그러나 그 이전에
나는 너무 놀랐고 또 무서웠다.
아주 잠깐동안 연이가 내 곁에 없는 것 같아서
연이가 또 내 인생의 대가로 사라질까봐서
너무 무섭고 또 무서워서
당장 힘껏 뛰어가 재빠르게 낚아채 안고 다시는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나는 달렸다.
젠장할 싸구려 신발이 또 벗겨졌다.
연이야! 연이!!
초록색 개구리가 천천히 돌아선다.
나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빗소리로 가득 찬 온 세상에
작은 두 손을 꽃잎처럼 펼치고 비를 맞고 있는 연이의 웃는 얼굴이
태어나서 가장 행복하게 웃고 있는 그 모습이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 되었다.
너무나 아름다워서 나는 움직일 수 조차 없었다. 스마트폰 카메라 따위가 아니라 내 눈에 영원히 담아두고 싶었다.
다그치고 원망하려던 마음 같은 건 있었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빠
연이가 빗속에서 작은 두 손을 여전히 펼친 채 말했다.
나는 정확히 듣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 들었다. 그래서 눈물이 났다. 구멍난 댐처럼 펑펑 쏟아졌다.
우두커니 얼간이처럼 서서 내 얼굴은 울음범벅에 화장도 엉망진창이 됐다.
연이는 나를 한 번 보고 비 내리는 하늘을 봤다.
아빠
그리고 다시 나를 봤다.
연이가 나에게 묻고 있다.
다짐도 약속도 맹세도 걱정도 원망도 슬픔도 빗물에 눈물에 모두 녹아내린다.
날카롭게 얼어붙은 모든 겨울을 깨고 초록색 개구리가 봄을 알린다.
난 허리를 펴고 주먹을 쥐었다.
말하기로 했다.
내가 진작 연이에게 말해줬어야 하는 것
지금 연이가 가장 궁금해 하는 것
그리고 연이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을
바로 지금 말해주기로 했다.
눈물은 그치지 않았지만 최선을 다해 웃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크게 숨을 들이켜고
온 세상 사람들이 다 들을 수 있도록
연이가 죽을 때까지 절대 잊어버리지 않도록
매우 힘있는 또한 단호하며 변치 않을 목소리로
연이에게 외쳤다.
응! 아빠도 연이 많이 사랑한대!
연이는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지금 보니
웃을 때
아빠를 닮았다.
저 멀리 내 신발 한 짝을 들고 어리둥절해 있는 친구를 모른 척 한 채
나와 연이는 봄비 속에서 한참이나 뛰어 놀았다.
* 라벤더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5-07-27 12:26)
* 관리사유 :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