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비빔밥이 싫었다
아버지는 면사무소의 계약직 공무원이었다. 이십대 초중반이었던 1971년 맹호부대 사병으로 베트남에 파병되어 성실하게 군복무을 마친 아버지는 제대 후 이런 저런 일을 하다 스물아홉에 지금의 엄마를 만나 결혼을 하고 우연한 기회에 지역 면사무소에서 계약직으로 일을 하게 된다. 그렇게 그는 삼십대 초반부터 사십대 중반까지 15년가량의 세월 동안 매일 오토바이를 타고 면사무소로 성실하게 출퇴근하며 그렇게 가정을 꾸렸다. 당시 내가 살던 시골 마을에서 유일한 면사무소 직원이기도 했던 아버지를 마을 사람들은 든든하게 여겼고 이에 부응하듯 마을의 대소사에 팔 걷어붙이고 적극적으로 나서던 그 모습이 나는 어린 마음에도 항상 멋지고 좋았다.
아버지는 면사무소에서 산림 담당 업무를 맡았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동네의 마을 유지였던 한 목사가 공유지였던 산의 흙을 자꾸만 마음대로 퍼가서 제멋대로 사용하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된 아버지는 산림 담당 직원으로서 이를 제지하게 된다. 뭐 딱히 대단한 제지랄 것도 없이, 그렇게 퍼가면 안 된다는 수준의 공적인 통보 정도였다고 한다. 따지고 보면 아버지에겐 당연한 일이었고 면사무소 공무원으로서 해야 하는 업무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를 기분 나쁘게 여기고 괘씸하게 생각한 목사는 자신과 친분이 있던 군의원을 이용해서 면장을 뒤에서 압박했고, 결국 아버지는 이 일로 인해 면사무소를 그만두게 된다. 표면적인 사유는 계약직 공무원의 계약 해지였으나 그 이면에 숨겨진 실제 이유는 달랐던 것. 공무원으로서 자신에게 맡겨진 업무를 성실히 수행한 까닭으로, 그리고 계약직이라는 이유로 아버지는 그렇게 갑작스럽고 허무하게 15년 동안 성실하게 다니던 직장에서 하루아침에 잘리게 된다. 그때가 내 나이 아홉 살 때의 일이었으니, 아무 것도 모르던 어린 나는 사실 그땐 그냥 아버지가 직장을 관두었다는 사실만 알았을 뿐 자세한 내막 같은 건 알지 못했다. 왜 아버지가 어느날 갑자기 동네 분교의 흙먼지 날리는 운동장에 가서 물주전자로 S자, T자를 그려놓고 빌린 트럭으로 운전연습을 하는지 의아했을 뿐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당시 면사무소 측에서는 계약 해지 대신 청소트럭 운전을 권유했던 모양이다. 당장 먹고살 일이 막막했던 아버지는 고민 끝에, 일단 면허라도 따두자 라는 심정으로 그렇게 운전 연습을 했다고 한다. 내가 아버지의 퇴직에 얽힌 이러저러한 사연을 알게 된 건 그로부터 이십년도 더 지난 후에 엄마의 입을 통해서였다.
어쨌든 그렇게 가정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아버지가 직장을 잃게 된 후 우리 가족은 친척의 권유로 수도권의 중소도시로 이사를 오게 된다. 친척 한 분을 빼고는 아무런 연고도 없던 이 도시에서 아버지는 동네 시장 골목에 작은 구멍가게 슈퍼를 개업하게 되지만 벌이는 신통치 않았다. 결국 보다 못한 엄마는 가계에 보탬이 되고자 일용직 식당 종업원으로 이 식당, 저 식당을 전전하며 일하기 시작했고 내가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쯤엔 아버지의 슈퍼는 결국 문을 닫게 된다. 그렇게 아버지의 직업은 면사무소 공무원에서 작은 슈퍼마켓 주인으로, 그리고 다시 백수로 점차 변하게 된다. 그렇게 가장으로서의 날개가 꺾인 아버지는 그 시절 집 밖으로의 외출을 자제하고 집안에서 두문불출하곤 했는데 그 당시 아버지가 좁은 반지하 집에서 기껏해야 할 수 있는 일이라곤 TV로 유선방송을 보는 일과, 때가 되면 삼시세끼를 차려먹는 일이 전부였다. 그렇게 집안에서의 답답하고 단조로운 생활이 지루했던 아버지는 어느 순간부터 중학생인 내가 학원을 마치고 귀가하는 시간에 맞춰 늦은 저녁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학원을 마치고 9시쯤에 귀가하는 배고픈 아들을 위해 아버지가 차려놓은 메뉴는 바로 비빔밥. 콩나물과 무생채, 그리고 상추로 시작해서 고사리와 취나물, 호박 등 각종 야채와 나물을 푸짐하게 넣고 계란 후라이로 완성시킨 아버지표 나물 비빔밥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시절 아버지가 식탁에 차려놓는 이 비빔밥이 싫었다. 입맛이 까다로운데다 어린애 입맛이었던 나는 비빔밥에 과도하게 들어간 고사리나 취나물 등의 각종 나물이 부담스럽고 싫었다. 그리고 조금 더 솔직히 얘기하자면, 아들에게 용돈 한번 제대로 주지 못하고 이렇게 집에서 계란 후라이나 부치고 비빔밥이나 만드는 아버지의 모습이 구질구질해보이고 더 보기 싫었는지도 모르겠다. 평소 밖에서 먹던 비빔밥보다 더 푸짐한 느낌의 아버지표 비빔밥이 오히려 내겐 아버지의 '무능의 상징'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내가 원하는 우리 아버지의 모습은 밖에서 일하고 저녁에 들어와 술기운을 풍기며 용돈과 선물을 턱턱 주던 유년시절의 아버지였지, 하루 종일 집안에만 틀어박혀서 TV나 보고 아들에게 혼자 비빔밥을 만들어주는 그런 초라한 아버지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 몰래, 내가 싫어하는 나물들을 씽크대 수채 구멍에 전부 버리고 내가 좋아하는 계란 후라이, 콩나물, 무생채 정도만 남겨서 대충 먹곤 했다. 항상 낮에도 부엌에서 밥을 챙겨드시던 아버지가 그런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을 텐데도 아버지는 한 번도 내 그런 행동을 가지고 뭐라 하신 적이 없었다.
그 후 아버지는 내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무렵, 어머니가 종업원으로 일하던 식당을 직접 넘겨받아 어머니와 함께 식당을 꾸리게 됐고 그 시절부터 집안 형편도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청년 시절부터 시작해서 가정을 꾸리고 자식들을 키워내기까지 대여섯 번의 직업을 거친 아버지는 막내인 내가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던 해에 식당을 접게 된다. 장사가 잘 안되거나 내가 합격을 해서가 아니라, 엄마의 건강 문제로 10년 넘게 해오던 식당을 정리하신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덧 아버지는 60대 후반이 됐고 막내 아들은 30대 초반의 직장인이 됐다. 어린 시절부터 어색하고 버름했던 아버지와의 관계는 시간이 흘러도 마찬가지라서 주말에도 아버지가 먼저 아침식사를 하고나면 느즈막히 내가 방에서 나가 낮도둑처럼 조용히 늦은 아침을 챙겨먹곤 했다. 마치 서로 약속이나 한 듯이 거의 마주치는 일 없이 거실과 부엌을 서로 순차적으로 드나들며 이용하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 엄마는 통역사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신다. 하지만 이렇게 데면데면한 부자 사이에서도 서로간의 무언(無言)의 싸인은 남아있어, 아버지가 아침식사를 하고 과일을 냉장실에 넣어두시면 뒤늦게 밥을 먹는 내가 알아서 그 과일을 찾아먹곤 하고, 가끔 퇴근길에 아버지가 좋아하는 붕어싸만코를 몇개 사서 냉동실에 조용히 넣어두면 말하지 않아도 아버지께서 알아서 가끔 찾아드시곤 한다. 조금 우습게도 이 냉장고가 (엄마와 더불어) 아버지와 나를 이어주는 유이한 소통의 창구이자 일종의 우리집 동시 통역기쯤 되는 셈이다.
어쩌면 이렇게 냉동실에 넣어놓는 '붕어싸만코'가 평생 신세만 지고 살아온 박봉의 막내 아들이 아버지에게 해드릴 수 있는 부끄러운 마음의 한 조각 표현인 것처럼, 지금와 생각해보면 중학생 시절의 '나물 비빔밥'은 아버지의 무능의 상징이 아닌 그 시절 '아버지의 최선'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 것도 해줄 것이 남아있지 않은, 힘없는 빈털터리 가장이 막내 아들에게 유일하게 해줄 수 있었던 비빔밥 한 그릇. 만약 지금 내가 그때의 중학생 시절로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이런 아버지의 속마음을 깊이 다 이해하고 먹기 싫은 비빔밥의 나물들을 매일 억지로 다 먹지는 못했을 것이다. 못 먹는 건 못 먹는 거니까. 하지만 대신 매일 수채 구멍에 몰래 나물들을 버리기 보단, 어느 날 아버지에게 솔직하게 털어놨을 것 같다. "아버지, 아버지가 해주시는 비빔밥이 참 맛있는데 저는 나물들을 별로 안 좋아해서 그냥 무생채랑 콩나물 정도만 넣어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전 그걸로도 충분히 맛있어요."
이 말을 차마 하지 못했던 열다섯의 막내 아들은 서른둘의 직장인이 되어서야 아버지의 비빔밥 값을 조금씩 치르고 있다. 얼마 전 퇴근하고 집에 들어오는 내게 엄마가 지나가는 말로 "아버지가 틀니를 교체할 시기가 지났는데 요즘 돈이 없어서 교체를 못하신단다."라며 슬쩍 얘길 꺼내셨다. 그 말을 듣고 월급 통장을 확인해보니 백만원 가량의 현금이 남아있었다. 곧바로 스마트폰을 이용해서 그 돈을 아버지 통장으로 부치고는 우리집 공식 통역사에게 "방금 아버지한테 돈 부쳤어. 부족한 돈은 나중에 월급 타는 대로 더 드리겠다고 전해줘."라고 얘기했다. 그리고 '그 때 그 비빔밥 값은, 남은 평생을 통해 어떻게든 천천히 갚아나가겠다고 해줘.'라는 말은 가만히 주워삼켰다. 이기적인 아버지는 못난 아들을 그렇게 평생 갚지 못할 빚쟁이로 만들어 버린 셈이다.
이렇듯 평소 서로를 어색하게 피해다니는(?) 채권자 아버지와 채무자 아들이라지만 언젠가 기회가 되면 어느 퇴근길에 아버지에게 "그때 그 비빔밥.. 나물 때문에 좀 부담스럽긴했어도, 그래도 맛있게 잘 먹었어요."라며 차가운 붕어싸만코를 슬며시 건네드리고 싶다. 그때는 우리집 동시 통역사와 통역기를 거치지 않고 직접 말해야겠다. 꼭 그러고 싶다.
* 라벤더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5-06-05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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