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90년대의 아이돌이라고 할수 있는 소녀가수들, 즉 10대의 나이에 데뷔한 하이틴여가수는 김완선, 이지연, 강수지, 하수빈, 이상은이 유명하였고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하수빈, 강수지, 이지연이 청순가련형의 미소녀아이돌스타일로 인기를 얻었다면 김완선은 섹시하고 도도한 팜므파탈적인 매력으로, 이상은은 보이시한 톰보이적인 매력으로 인기를 얻었습니다.
1978년 한백희는 인순이를 희자매로 데뷔시킨후에 김완선, 이주노, 박철우를 발굴하여 혹독하게 트레이닝을 시켰습니다. 김완선은 한국가요계에서 최초의 연습생이며 1983년14살의 나이에 발탁되었습니다. 한백희는 희자매가 해체되자 인순이를 솔로로 전향시키면서 "인순이와 리듬터치"라는 백댄서팀을 구성하고 로드매니저로 김광수(현 코어사장)를 채용합니다. (1985년, 리듬터치의 백댄서멤버: 이주노, 김완선, 박철우) 한백희는 김완선을 백댄서로 기량을 가다듬게하고 1986년 김완선을 17세의 나이에 데뷔시킵니다. 김완선의 등장은 한 마디로 쇼킹 그 자체였습니다. 그녀가 들고 나온 음악과 스타일, 컨셉, 안무, 무대 구성등은 예전의 기성 가요와는 궤적을 달리하는 파격적이고 신선한 시도였죠. 그 후 인순이, 이주노, 박철우는 한백희곁을 떠나게됩니다. 이때 리듬터치에서 안무를 맡았던 안무가는 이주노와 박철우를 데리고 브레이크 댄스팀 스파크를 창단합니다.
1987년 한국의 조용필과 김완선, 필리핀의 루 보네비, 홍콩의 알란탐, 일본의 다니무라 신지, 후세아끼라등 아시아의 정상급 가수등이 참여하는 팍스 뮤지카 87(PAX MUSICA)을 개최합니다. 이때 김완선은 놀라운 기량을 선보이자 NHK에서 한국의 최고아이돌이라는 주제로 10분이나 김완선을 다뤘습니다. 결국 일본에서 진출제의가 들어왔고 이때 김완선은 일본의 프로덕션에서 녹음을 하였는데 일본의 프로덕션에서 춤추는걸 봐야된다고 해서 춤을 추었습니다. 그런데 일본 가수의 안무에 김완선의 안무를 그대로 빼긴후 미국에 데려가 영상을 찍은 사건이 발생하여 크게 실망한 김완선은 한국으로 귀국을 합니다. 이때 라이벌인 이지연이 돌연 은퇴를 하였습니다. 1990년 김완선은 5집을 발표하면서 큰 인기를 끈 후 1991년에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 가장무도회가 대히트를 기록하면서 100만장을 팔아치웠고 MBC 10대 가수에 선정되어 최정상의 여가수가 됩니다.
김완선 - 리듬 속의 그 춤을
한국의 최고아이돌 김완선 - 일본 NHK뉴스 방영
김완선 - 가장무도회
이들은 현재 유행하는 아이돌가수들의 모태가 되었습니다. 이지연, 강수지, 하수빈은 SES, 핑클, 장나라같은 아이돌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이상은같은 특이한 스타일은 훗날 F(x)의 엠버로 재탄생하였고 엠버도 보이시한 톰보이스타일로 소녀팬들의 추종을 얻었죠. 특히 김완선에게 선보인 연습생시스템은 현재 아이돌기획사의 표준이 되었습니다. 이수만이 김완선을 모델로 보아를 프로듀싱한것은 유명한 애기입니다. 참고로 걸그룹으로는 세또래가 있었습니다.
이지연 - 난 사랑을 아직 몰라
http://goo.gl/ikEzAt 이지연 - 바람아 멈추어다오 http://goo.gl/KVpb8 이지연 - 그 이유가 내겐 아픔이었네 (1988) http://goo.gl/bR3Zjp 이지연 - 늦지 않았어요
강수지 - 보라빛향기
https://goo.gl/ulWBri 강수지 - 혼자만의 겨울
하수빈 - 더이상 내게 아픔을 남기지마 ('92)
http://goo.gl/xZFrS7 하수빈- 노노노노노
https://goo.gl/42B6tG 이상은 - 담다디 http://goo.gl/Taz6dv 이상은 - 담다디 (강변가요제: MC 이수만) https://goo.gl/Bc873C 세또래 - 그대를 사랑해
2. 이시대의 가요계 상황들
이 당시 김희애, 양수경, 김혜림, 윈준희가 데뷔하여 솔로여가수의 전성시대가 도래했습니다. 특히 김희애, 원준희, 하수빈은 가수, 연기자, 모델의 영역을 넘나들며 활동하였습니다(김희애: 모델→연기자→가수, 원준희: 연기자→가수, 하수빈: 모델→가수). 김희애는 모델로 데뷔하여 연기자로 크게 성공하였으며 가수로도 활약을 했습니다. KBS2 라디오의 DJ들이 옴니버스 앨범을 만들었는데 수록곡중 김희애가 부른 '나를 잊지 말아요'가 인기를 얻어 가요프로그램에 반짝활동을 하게 됩니다. (모델:1982, 연기자:1983, 가수:1987). 안도희는 86년에 영화로 데뷔한후에 원준희이라는 예명으로 88년에 가수로 데뷔합니다. 뒤이어 엄정화와 장나라가 가수와 연기자의 두 영역에서 큰 성공을 거두면서 큰 영향을 끼쳤는데 아이돌들이 가수, 연기자, 모델등의 광범위한 영역에서 활동하는 것이 매우 당연하게 되어버렸습니다.
1988년 신해철은 아기천사라는 밴드로 강변가요제에 참여했으나 결선에 실패하지만 그해 12월에 다시 서울대, 연세대, 서강대을 연합한 무한궤도를 결성한후 대학가요제에 참석하여 ‘그대에게’를 열창하며 대상을 거머쥐게 됩니다. 이때 프로페셔널 뮤지션 활동을 계획하는 신해철과 젊은 시절의 추억으로 여기는 무한궤도의 나머지멤버들간에 괴리가 생기자 신해철은 새멤버를 영입하기로 마음먹습니다. 정석원과 장호일등이 새로 가입하고 여러명의 멤버들이 교체되었지만 결국 몇 달만에 무한궤도는 완전해체를 합니다.
해체이유는 신해철은 정석원과 음악적견해차이였는데 신해철이 무한궤도를 탈퇴하면서 정석원과 장호일, 나머지 무한궤도멤버들은 015B를 결성합니다. 솔로로 전향한 신해철은 댄스곡 "안녕"과 발라드 "슬픈 표정 하지 말아요", "재즈 카페" 등을 히트하며 인기가수로 자리잡습니다. 그러나 락밴드을 하고 싶었던 신해철은 솔로로 2장의 앨범을 낸 뒤 넥스트라는 락밴드를 결성합니다.
무한궤도 - 그대에게(신해철 데뷔무대)
http://goo.gl/haKcEC 신해철 - 재즈까페 http://goo.gl/wWRxqv N.EX.T - 날아라 병아리 (신해철) http://goo.gl/lWtYFc N.EX.T - The Ocean : 불멸에 관하여 (신해철)
양현석은 평범한 직장을 다니다가 우연히 TV에서 백댄서를 하는 친구를 보고 충격을 받아 직장을 그만두고 브레이크 댄스팀 "스파크"에 입단합니다. 당시 80년대 후반에는 수많은 브레이크 댄스팀이 있었는데 스파크, 노피플, 노파킹, 엑스레이등 여러팀이 이태원의 문나이트라는 클럽에서 춤을 췄고 점점 유명해지자 댄서들이 몰리면서 문나이트의 인맥이 형성됩니다. 이때 박남정, 이주노, 박철우가 유명했는데 춤꾼사이에 명성을 떨치면서 양현석, 현진영, 구준엽, 강원래, 이현도, 김성재가 문나이트에 등장하게 됩니다. 또한 이 시기에 이수만이 인재를 발굴할려고 문나이트에 출입을 합니다.
1988년 문나이트에서 춤을 추던 박남정은 기획사의 눈에 띄어 가수로 데뷔한 후 양현석, 이주노, 박철우, 김영완을 백댄서로 영입해 프렌즈팀를 구축합니다. 또한 문나이트에서 DJ를 하던 신철은 나미를 만나 나미와 붐붐(1990년)을 결성하여 "인디언 인형처럼"으로 댄서와 랩퍼를 오가면서 활동을 하였습니다. 그후 신철은 미애를 만나 철이와 미애(1992년)로 가수로서의 활동을 시작하여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박철우는 R.ef로 데뷔, 김영완은 콜라로 데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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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한밭기획의 이사였던 이호연은 소방차를 기획하여 성공하였고 그걸 발판으로 독립하여 1991년에 대성기획(後身:DSP)를 창립합니다. 그후 일본의 개그맨인 다운타운이 소방차의 어젯밤 이야기를 오쟈파멘이라는 커버곡를 발표하였는데 일본에서 괘 인기가 있었습니다. 또한 도시아이들도 유명한 가수였습니다.
그당시 가요계는 소방차와 박남정, 김완선이 톱으로 군림하였고 이들은 댄스음악계의 최정상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뒤이어 현진영도 큰 인기를 얻어 그들의 뒤을 바짝 추격하고 있었죠. 그러나 서태지의 등장으로 박남정과 현진영, 소방차의 운명은 바뀌게 됩니다.
소방차 - 어제밤이야기
박남정 - 널 그리며, 사랑의 불시착
http://goo.gl/EmA0k 다운타운 - オジャパメン http://goo.gl/Bhl1BF 이지연 - 난 사랑을 아직 몰라, 박남정 - 사랑의 불시착 http://goo.gl/5yYtK9 나미와 붐붐 - 인디언인형처럼 http://goo.gl/qkmCP2 철이와 미애 - 너는 왜 https://goo.gl/KlX7SQ 도시아이들 - 달빛 창가에서
3. 연예기획사 SM의 탄생
1981년 이수만은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 컴퓨터공학으로 유학을 떠납니다. 이때 이수만은 미국의 MTV와 미국의 음반산업을 보며 연예기획자로 꿈을 꿉니다. 85년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이수만은 방송활동을 재개합니다. 다시 가수로 데뷔하기 위해 홍종화라는 작곡가를 설득 끝에 섭외하며 앨범을 발표했으나 실패한 후 가수를 그만두고 프로듀서로 전향하기로 마음먹습니다. 본격적으로 연예기획사를 설립하기 위해 인천 월미도에 헤밍웨이 까페와 방배동 까페를 차려 기획사의 사업자금을 마련한 다음 한동준과 김광진을 영입합니다.
여기서 이수만은 한국에 흑인음악을 도입하기로 마음먹고 바비 브라운을 참고합니다. 바비 브라운은 두명의 댄서와 삼각편대를 이루어 춤을 추는 형태로 큰 인기를 끌었는데 여기서 영감을 얻은 이수만도 3인조 그룹을 기획합니다. 구체적인 구상이 끝난후 이수만은 이태원이나 여러 유명클럽에 찾아다니고, 문나이트에서 최진열을 고용한후 "음반을 낼까 하는데 주변에 춤되고 노래되는 애 있으면 찾아달라"고 일을 시킵니다. 최진열은 평소에 알고 있던 이주노와 현진영을 이수만에게 소개합니다. 이주노와 현진영을 저울질하던 이수만은 현진영이 이주노보다 노래를 잘하는 점에 현진영을 발탁합니다. 이때는 1988년이며 현진영은 당시나이가 16세였습니다. http://goo.gl/oWteTF Bobbi Brown - Every Little Step: The Arsenio Hall Show
얼마후 이수만은 나머지멤버를 영입하기위해 댄스페스티벌을 개최하였는데 이주노, 양현석, 구준엽, 강원래, 유영진, 미애등 여러명이 참가하였고 구준엽•강원래팀이 우승하여 최진열의 제의로 SM에 입사하게 됩니다. 당시 김승현이 사회자를 보았고 구준엽•강원래는 와와1기이며 훗날 클론이 됩니다. 이수만은 이들에게 트레이너를 고용해서 기량을 가다듬게 합니다. 1989년 이수만은 송파에서 SM기획를 창립합니다. 최진열에게는 SM기획의 경영과 매니지먼트를 맡기고 홍종화에게는 수석프로듀서를 담당합니다.
1990년 이수만은 제1집 "New Dance"를 발표하며 현진영과 와와(구준엽,강원래)를 데뷔시킵니다. 그후 한동준과 김광진의 앨범도 발표합니다. "현진영과 와와"의 야한여자는 그당시 대세였던 박남정과 김완선, 소방차에 밀렸지만 어느정도 인기를 얻었습니다. 이수만은 후속곡 '슬픈 마네킹'을 발표했는데 인기를 얻어 현진영은 단숨에 그당시 대세였던 박남정의 라이벌로 급부상합니다. 그리고 활동도중에 구준엽과 강원래가 군대문제로 입영하게 되자 이수만은 새로 이현도, 김성재를 와와2기로 발탁합니다.
사나위에서 활동을 하던 서태지와 김종서는 신대철과 마찰로 시나위를 떠나게 됩니다. 그후 서태지와 김종서는 무궁화밴드에 입단하고 여러 나이트클럽에 진전합니다. 무궁화밴드는 캐피탈호텔에 공연하게 되었는데 우연의 일치인지 그때 "박남정과 친구들"도 공연을 하러왔습니다. 무궁화밴드의 공연이 끝난후 박남정과 친구들이 공연을 하였는데 이때 서태지는 "박남정과 친구들"라는 댄스그룹팀의 춤에 반하여 춤을 배울려고 직접 양현석에게 말을 걸었고 양현석은 문나이트에 가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서태지는 한달동안 문나이트를 출입해서 지켜보다가 결국 양현석에게 춤을 가르쳐달라고 하는데 이때 양현석은 레슨비로 한달에 150만원을 부르며 3달 레슨비 450만원을 선불로 요구하여 서태지는 지불하게 됩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레슨을 하기전에 양현석에게 군대영장이 날라왔고, 서태지에게 받은 돈을 돌려주지 못한 채 군대에 가게 됩니다. 이때 서태지는 낮에는 작곡을 하면서 밤에는 연주을 하는 생활을 하였고 드디어 곡을 완성하였는데 때마침 양현석도 의가사제대를 합니다. 8개월간의 군대생활을 마친 양현석은 방정리를 하는 도중에 수첩을 발견하였고 레슨을 해줄려고 서태지에게 연락을 합니다.서태지는 데모음악을 양현석에게 들려주고 양현석은 서태지에게 "노래가 좋다. 그런데 이 노래는 혼자 하는 것보다 팀을 이뤄하는 게 훨씬 좋을 것 같다"고 조언했고 서태지는 양현석의 조언에 3명의 팀을 결성하기로 결정하고 나머지 멤버를 구합니다. 5명정도의 후보를 탈락시킨후 결국 이주노까지 영입하면서 서태지와 아이들이 탄생하게 됩니다.
그후 서태지는 데뷔를 하기위해 여러기획사와 접촉을 하였는데 이때 반도음반사의 기획실장인 유대영은 서태지의 음악을 듣고 제작을 결심하여 서태지와 계약을 합니다. 그후 유대영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총괄매니저가 된후 로드매니저로 최진열을 고용합니다. 당시 최진열은 현진영의 대마초사건으로 큰 곤욕을 겪은 상황이였죠. 그후 서태지가 MBC 특종TV연예에 출연을 합니다. 쇼의 반응은 놀라웠으며 1992년 4월에 서태지의 1집 난 알아요를 발표합니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방송 3사의 가요 순위 프로그램을 모두 석권하였으며, 그해 가요계에 부여된 모든 상을 휩쓸었고 데뷔 음반으로는 최다판매량인 170만 장의 판매량을 기록하는등 대성공을 거둡니다. 그러나 유대영은 서태지와 의견충돌로 결별하였고 그후 서태지는 자신의 기획사를 차린후 최진열을 총괄매니저로 고용합니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엉청난 열풍을 일으키는데 그 여파로 소방차와 박남정, 김완선이 지배하는 기존의 댄스가요계는 무너지면서 새로운 댄스그룹들이 우후죽순처럼 데뷰합니다. 소방차는 해체하였으며 박남정은 완벽한 몰락의 길을 걷게되었고 김완선은 돌연 은퇴을 선언합니다. 김완선은 1992년 11월 MBC <특종 TV 연예>에서 은퇴를 선언하여 사람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습니다. 얼마후 홍콩, 대만으로 해외진출을 합니다. 그 후 김완선은 대만에서 진위엔쉬안(金元萱;김원훤)이란 이름으로 활동을 시작했는데 큰 인기를 끌면서 원조 한류가수가 됩니다.
또한 서태지의 파격적인 등장으로 가요계는 변화를 거듭했는데 80년대 유로댄스스타일 가수들이 90년대 힙합댄스스타일 가수들로 세대교체하던 시대였으며 또한 이당시에는 Star TV와 M TV의 등장으로 90년대 초는 한해가 바뀔 수록 음악도 패션도 엄청나게 바뀌던 시대였습니다. 또한 문나이트출신댄서들이 연달아 가수로 데뷔하는데 박남정, 현진영, 양현석의 성공적인 데뷔이후 듀스, 클론, 룰라, DJ DOC등이 대성공을 거두면서 문나이트출신들은 90년대가요계에 큰 축을 형성하였습니다. 그리고 문나이트의 출신들로 이루러진 SM, YG, JYP의 기획사들이 3대기획사로 군림하면서 현 가요계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5. 이수만 힙합과 결별하다.
1991년 부산의 야외무대에서 현진영과 와와가 공연을 하는 도중에 갑자기 건장한 남자들이 무대 위로 뛰어올라 현진영을 무대 아래로 끌어내려버립니다. 이 모습을 지켜본 이현도와 김성재는 현진영의 모습에 큰 실망을 하였다고 합니다. 당시 현진영은 대미초혐의로 구속되었는데 SM기획이 경찰의 수사를 받아 최진열, 정해익같은 SM의 임직원들이 큰 고초를 껶었으며 회사의 모든 활동이 정지되었고 와와의 활동마저 중단되고 맙니다. 그 후 최진열은 반도음반사의 유대영의 제의로 SM기획을 그만두고 서태지와 아이들의 매니저가 됩니다. SM의 대표이사였던 최진열은 몇년동안 SM기획에서 경영과 매니지먼트를 관리하는 총책임자라 인맥과 노하우가 상당했죠. [SM의 대표이사들: 최진열(1988) - 정해익(1992 ?) - 김경욱(1998) - 김영민(2005)]
이때 현진영의 무책임한 행동에 분노한 이현도는 그때부터 다른 기획사로 오디션을 보면서 가수로써 독립을 꿈꾸게 되며 나중에 가수가 된후 현진영을 디스합니다. 한편 자신의 1호 가수가 이대로 무너지는 것을 볼수없었던 이수만의 노력으로 현진영은 1년만에 출소를 합니다. 그후 부활을 꿈꾸던 현진영은 이탁과 함께 여러 곡을 공동작곡을 하였습니다.
1992년 4월에 서태지가 등장하면서 거대한 돌풍을 일으키자 이수만은 잊고 있던 현진영을 찾게되고 8월에 이수만은 현진영의 2집 앨범 "New Dance 2"를 발표합니다. 타이틀곡은 문나이트에서 친한 이탁이 만든 "흐린 기억 속에 그대"였는데 당시 현진영은 커다란 후드티와 한껏 내려 입은 청바지로 코디한 후 빨라진 음악에 맞춰 현란한 댄스를 선보입니다. '흐린 기억 속의 그대'는 높은 완성도와 함께 굉장한 인기를 얻었으며 같은 앨범의 '너는 왜'는 '현진영 고 진영고'라는 후렴구와 랩도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또한 과소평가되었던 싱어로써의 자질을 "너는 왜"에서 여성 백댄서와 격렬한 권투춤을 추면서 현진영 Go 진영 Go를 하면서 라이브로 빠른 랩을 소화해내며 대단한 인기를 끌었죠. 이미 서태지와 아이들의 랩과 음악에 익숙한 대중들은 "흐린 기억 속의 그대"에도 커다란 지지를 보냈고, 현진영은 서태지와 아이들을 라이벌로 급부상합니다. 하지만 SM은 2집앨범이 유통사인 서라벌레코드의 부도로 인해 큰 손해를 입어버립니다.
1993년 성공을 확신한 이수만은 현진영의 3집 "두근두근 쿵쿵"을 발표하였고 서태지와 아이들 2집과 현진영 3집이 정면대결을 펼칠 93년 가요계는 모두를 설레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발표한지 일주일 만에 필로폰 투약 혐의로 현진영은 구속되었고 방송정지를 당합니다. 이때의 여파로 무려 40만장을 찍었던 현진영의 음반은 검찰에 압류되고 상품은 소각처리되어 SM은 큰 손실을 보게 되었고 월미도와 방배동의 까페를 매각하여 부도위기를 넘기게 됩니다. 그러나 소속 연예인인 한동준, 김광진, 신동엽, 김승현, 이홍렬이 회사에 미래가 없다고 여겨 떠나게 됩니다. 이수만은 사력을 다해 현진영을 띄웠으나 그때마다 대마초와 필로폰으로 무너졌으며 결국 최종적으로 서태지가 이수만과 힙합주도권 경쟁에 승리하게 됩니다.
6. 이현도 SM을 떠나면서 힙합을 완성하다.
1991년 현진영의 대마초사건이 터지면서 이현도는 자신의 가요활동이 끝장나게되자 현진영에 대한 분노와 갑작스러운 활동정지로 인한 좌절감으로 고통스러워하다가 이대로 댄서로서 끝날수없다고 마음먹게되면서 음악을 만들고 싶은 강렬한 열망에 붙타올라 신디사이저를 구입하여 곡을 쓰기 시작합니다. 그후 진로를 고민하기 시작한 김성재는 대학진학을 목표로 공부을 하기시작했고 이현도는 다시 문나이트에 다시 출입을 하면서 춤을 추게 됩니다. 이때 춤을 추면서 울분을 풀고 있는 이현도를 아는 지인이 안타까워하며 오디션을 권유합니다. 그래서 가수로 데뷔하기로 마음먹고 김성재와 함께 코어의 김광수에게 오디션을 보지만 퇴짜를 맞습니다. 미안해진 이현도의 지인은 다시 뮤즈기획을 소개하면서 들어갔으나 사무실이 없어 환경이 매우 열악하였으며 안무를 연습할 무용실이 없어 무용실을 빌려 연습했다고 합니다.
시간이 지난후 현진영이 교도소를 출소합니다. 때마침 자신의 첫곡인 "너에게만"을 완성하여 현진영에게 들려주었는데 매우 좋다면서 곡을 달라고 하였죠. 이에 반신반의하며 이수만에게 들려주었는데 이곡을 극찬하면서 현진영의 "New Dance 2"의 앨범에 수록을 합니다. 이때 현진영이 와와를 다시 하자고 제안을 하지만 큰 자신감을 얻은 이현도는 거절합니다. 이현도와 김성재가 떠나면서 이수만은 2인조였던 와와를 다인원 백댄서팀으로 개편합니다. (와와팀에 션이 있었으며 훗날 지누션으로 데뷔). 그후 김성재는 한양대에 진학하였고 이현도는 실용음악과에 응시를 했으나 떨어지면서 더욱더 작곡활동에 매달립니다. 그러나 악기만으로는 편곡까지 완성한다는 게 무리여서 유대영의 작업실을 빌려 작곡을 하였죠.
마침내 앨범을 완성하여 듀스를 결성하고 93년 4월1일에 데뷔앨범인 '나를 돌아봐'를 발표합니다. 그러나 앨범을 발표한지 한달이 지나도 방송국에서 불러주지 않아 방송활동을 할수없는 절망적인 상황이였습니다. 그때 sbs의 PD가 듀스의 곡을 높게 사면서 sbs의 가요프로그램에 출연을 하게되면서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으며 이후 듀스는 힙합계에 큰 족적을 남깁니다.
한편 구준엽은 이탁과 함께 탁이준이를 결성(1993년)하여 활동하다가 이탁이 마약문제로 수감되면서 실패를 합니다. 그후 구준엽은 강원래와 함께 프로듀서 김창환 사단에 들어가 클론이라는 댄스그룹을 결성(1996년)해 큰 성공을 합니다. 그당시 프로듀서 김창환이 이끄는 라인음향은 김건모, 신승훈, 노이즈, 박미경이 맹활약하며 90년대를 지배한 유명한 기획사였습니다. 이 시기의 발라드는 변진섭이 집권했으며 뒤이어 신승훈이 집권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승환, 윤상, 윤종신이 유명했습니다. 참고로 이탁은 출소한후에 현진영과 I.W.B.H를 결성(1997년)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수만은 힙합외에 알앤비, 포크록, 발라드등 여러장르를 기획합니다. 이때 한동준과 김광진의 장점을 최대한 살린 1집앨범을 기획합니다. 특히 김광진은 작곡능력까지 있었죠. 김광진은 1991년 한동준에게 <그대가 이 세상에 있는 것만으로>라는 곡을 줬고, 같은 해 김광진 본인도 1집 앨범을 발표합니다. 하지만 1993년에 현진영의 필로폰사건으로 회사가 부도위기에 몰리면서 김광진과 한동준은 회사에 미래가 없다고 여겨 그만두게 됩니다. 그후 김광진과 한동준은 명곡을 발표하며 뛰어난 뮤지션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김광진의 대표곡으로 편지, 마법의 성등이 있습니다. 한동준의 대표곡으로 사량의 서약이 있습니다.)
https://goo.gl/OCD12T 한동준 - 그대가 이 세상에 있는 것만으로 http://goo.gl/Kwt4XJ 윤하가 부른 한동준의 명곡 - 사량의 서약
1980년대 후반 춤을 추고자 서울로 상경한 유영진은 MBC 무용단에 합격하여 활동을 하게 됩니다. 1992년 유영진은 군대제대후 가수가 되고자 여러 기획사에 여러 오디션을 봤지만 탈락의 고배를 거듭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유영진은 SM기획에 자신이 작곡한 음악 CD를 보냈습니다. 이때 이수만은 유영진에게 3일 정도 “곡이 더 있냐”고 물어보면서 유영진은 하루에 10곡씩 준비해 들려줍니다. 실력을 인정받은 유영진은 스스로 원해서 종신계약을 맺습니다. 1993년 1집에서는 한국 R&B 역사의 초기작이라 할 수 있는 ‘그대의 향기’가 나왔는데 유영진은 뮤직비디오에서 턴을 하기도 하였고, 1995년 2집에서는 댄스음악 ‘너의 착각’을 내놓는 등 R&B뮤지션과 댄서의 모습을 함께 보여줬습니다. 당시 그의 뒤에는 문희준과 강타가 춤을 췄죠.
유영진- 그대의 향기
어느날 이수만은 메이저라는 3인조 락밴드를 기획하였고 1993년 하반기에 새로 오디션을 벌여 서연수와 임범준, 유한진을 발탁합니다. 성공을 확신한 이수만은 데뷔쇼케이스를 하였고 반응이 매우 좋았습니다. 그러나 방송국에서 이들이 선보인 파격적인 헤어스타일과 도발적의상에 제재를 가했고 단정하게 나오지 않으면 방송활동을 할수 없다고 통보를 하였습니다. 이수만이 사활을 걸고 그들을 설득해도 그들은 비굴하게 음악을 할수없다고 거절하였고 결국 공중분해가 되어버렸죠. 이때의 아쉬움으로 이수만은 훗날에 트랙스라는 락밴드를 기획하게 됩니다. (서연수:메인보컬,프로듀싱; 임범준:백 보컬, 베이스; 유한진:드럼)
1994년 마지막으로 이수만은 2명의 재미교포로 이루어진 J&J라는 그룹을 선보입니다. 하지만 시장의 반응이 없어 처참하게 망하고 이 모든 기획들이 실패한 SM은 나락에 빠집니다. 결국 수석프로듀서인 홍종화는 SM을 떠나는데 유영진이 그의 자리를 맡게 됩니다
Early spring day (이른 봄날), 1994 - 메이저(Major) 서연수, 임범준, 유한진
http://goo.gl/uvhyK3 J&J 강준식, 김주현 - 미지수야 미지수.1994
남은건 유영진뿐. 결국 이수만은 아이돌을 기획하기로 마음먹고 회사의 모든 역량을 쏟아붓기로 합니다. 그래서 장우혁, 토니안, 강타, 문희준, 이재원등을 연습생으로 캐스팅하여 H.O.T를 결성합니다. 이수만이 이런 기획을 하게 된 계기는 1992년경에 뉴 키즈 온 더 블럭이 내한을 하면서 한국에 큰 파장을 일으킨게 주요 계기 중 하나였는데 이수만이 예전부터 기획에 참고하던 미국의 유명 프로듀서 모리스 스타가 기획한 그룹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모리스 스타는 당시 어린 소년을 찾아 수년간 트레이닝을 거친 후 데뷔시켰는데, 그것이 뉴 에디션과 뉴 키즈 온 더 블록 등으로 5인조 아이돌 그룹이였고 바비브라운이 뉴에디션출신입니다. 이수만이 바비브라운을 참고해서 현진영 와와를 발표한 전례가 있었기 때문이죠. 또한 이수만은 걸그룹을 프로듀싱하기위해 TLC를 벤치마킹합니다. 이때 이수만은 국내뿐만 아니라 일본과 중국시장을 노리는 원대한 비전을 피력하면서 유진, 슈, 바다등의 3인조걸그룹인 S.E.S를 결성합니다.
http://goo.gl/vA9kwb New Kids On The Block - Live In Seoul http://goo.gl/FOTnV1 H.O.T.- 아이야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이수만이 기획하고 유영진이 작곡한 H.O.T와 S.E.S가 데뷔하게 되고 그야말로 빅히트를 터뜨리면서, 나락에 빠진 회사는 다시 일어서게 됩니다. 그후 1998년 신화, 1999년 플라이 투 더 스카이, 2000년 보아가 연속으로 히트하면서 아이돌기획사로 완전하게 탈바꿈을 하게 됩니다.
자율학습 땡땡이치고 집에 와서 TV를 틀어보니
김완선이 나오는데 뜨아~
"나오늘은 오늘밤은~" 하는데 노래 끝날 때까지 입벌리고 멍때렸습니다.
다리가 풀리더군요. 세상에 저렇게 섹시한 여자가 있다니.
원래 섹시한 여자보단 귀여운 여자 좋아하는데 팜프파탈이 뭔지 그날 제대로 느꼈습니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당시 바닥이 상당히 좁았다는 걸 알수 있었네요. 어쩌면 좁다기 보다는 당시 내노라하는 춤꾼들이었기에 서로 알았다고 봐야할까요. sm과 다 인연이 있는것도 재미있군요. 하수빈씨 미모는 당시 성형이 거의 발달되지 못했던 걸 감안하면 말도 안되는 미모죠. 강수지씨 하수빈씨는 사기캐릭입니다. 보라빛향기는 지금봐도 참... 말도 안되는... 포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