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젖가슴
-젖가슴, 한복 그리고 섹스어필-
*내용 전개상 경어를 쓰지 않았으며, 정보전달을 위해 과감무도한 사진이 쓰였습니다. 사진의 제거나 수정이 요구된다면 운영진의 지시에 따르겠습니다.
구한말 사진 중에 짧은 저고리와 치마 사이로 속살을 가리지 못하고 젖가슴을 드러낸 조선여인 사진들이 있다. 이 사진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물동이를 머리에 인 처녀, 양반집에서 다림질 하는 마나님 등등의 조선총독부 한인풍속 사진엽서들인데, 이런 양식은 스튜디오에서 연출한 작위적인 사진이다.
두 번째의 사대부가 여자는 첫 사진과 같은 사람이 같은 장소에서 촬영했고 세 번째는 장소가 같다.
어렵게 구한 세 번째 사진의 측면 사진도 있지만 옆면으론 앞의 두장과 동일인물인지 판별이 어렵다. 참하다.
더해서, 예민한 사람은 이러한 스튜디오 사진들의 일부에서 에로틱한 연출의 시선을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사진은 연출임은 확실하나 찍은 주체가 누구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외에도 구한말에 다녀간 서구인들이 남긴 사진이나 그림이나 글에서 조선여자가 젖가슴을 드러낸 것에 주목한 기록은 많이 있고, 당대에 젖가슴을 드러낸 조선여자가 실존한 것도 사실이다. 대개 그런 사진들은 더 적나라하고 어떤 에로틱한 연출도, 정서도, 삶도 찾기 어렵다.
조선총독부의 엽서와 여행객을 통해 이런 이국적인 풍경은 동양에 호기심 많던 서구에 널리 퍼졌던 모양으로, 프랑스 신문에서 러일전쟁 국제만평을 보면 조선을 옷 다 멀쩡히 차려입고 굳이 젖가슴을 드러낸 여인으로 묘사한다.
젖가슴을 노출한 여인이란 캐릭터는 어디 하나 나사가 빠져서 열강이 보호해줘야 하는 백치미의 그리고 때로는 야만의 조선을 표현하는 주요 포인트였던 모양이다.
이 기록들이 너무 충격적이기 때문에 혐오는 아니라 해도 ⓐ조선여자들이 일반적으로 젖가슴을 드러내었다거나 ⓑ조선시대에 젖가슴 노출은 문제가 되지 않았으며 젖가슴이 섹슈얼한(性愛的) 요소가 아니었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한다.
예를 들어 –약 100년 전만 해도 한국의 거리의 대부분의 여자들은 젖가슴을 내놓고 다녔다. 그것이 '야만'과 '비위생’으로 정의되기 시작한 것은 서양의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부터다-라는 양식의 언술은 문화상대주의적인 뉘앙스로 조선의 젖가슴을 변호하기 위한 입장에서도 쓰인다.
물론 조선은 성리학의 나라였고, 남녀칠세부동석 등으로 성애에 대해 꽤나 보수적인 나라였다. 이런 나라에서 여성이 속살을 사정없이 대놓고 보여준다는 것은 그것이 성애적인 부분이 아니더라도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인지 드러난 젖가슴 문제를 다루는 한 논문 ("조선 여성의 ‘젖가슴 사진’을 둘러싼 기억의 정치 : 그녀들의 ‘미니저고리’가 ‘아들자랑’이 된 사연", 전보경)을 보면 문화상대주의를 반영하는 여러 가지 보충 설명이 나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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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여성의 젖가슴에 대한 조선의 섹슈얼리티 규범은 19세기 후반 이후 제국의 침략과 서구문물의 유입이 이루어지면서 현대와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조선 후기부터 1930년대까지 나타나는 조선 여성의 미니저고리에 대한 논의들을 분석해본 결과, ‘젖가슴’의 성적 위상은 통시적 변화를 겪어온 것으로 보인다.
1700년대 ‘미니저고리’가 처음 유행하기 시작할 무렵 조선 남성 지식인들은 짧은 저고리의 ‘요사스러움’에 대해 수차례 언급하고 있지만, 그 표현을 보면 신체에 대한 금기가 지금과는 조금 달랐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장옷으로) 얼굴을 가리지 않은 여자일 경우에는 젖가슴까지 드러내놓고 있었다”(그렙스트, 2005: 175-78, 강조는 인용자), “놀랍게도 (저고리가) 대부분 가슴 위께에서 수평으로 들쳐 올려져 유방이 온통 드러난 모습이었다”(바라․롱, 2001: 55, 강조는 인용자), “벌거벗은 젖가슴만이 나와 있다”(겐테, 1999: 145, 강조는 인용자), “꼭 끼는 윗저고리와 바짝 당겨 맨 폭 넓은 치마끈 사이로 젖가슴까지 비죽이 드러내놓고(후략)”(앞의 책: 83, 강조는 인용자) 등 ‘젖가슴’에 집중하고 있는 서구인들의 글과 대조적으로, 이 시기 조선 남성들의 글에서는 ‘젖가슴’이나 ‘가슴’ 혹은 ‘유방’이라는 단어를 찾아보기 어렵다. 예를 들어, 안정복(1712-1791)은 “우리나라 부인들의 의복은 저고리와 치마가 연결이 안 되고, 저고리가 짧아서 허리를 가리지 못한다. 이 의복은 요사스러운 것이니 마땅히 못 입도록 금하여 아주 없애야 한다”(조희진, 2003: 66에서 재인용)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문장에서는 ‘허리가 드러난다는 사실’이 ‘요사스러움’의 핵심이 된다.7) 물론, 과거에 여성의 젖가슴이 성적인 장소가 아니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새로운 성적 규범이 수입되기 이전에는 현재처럼 여성의 젖가슴, 특히 유두가 성기만큼이나 엄격하게 노출이 제한되는 금기의 장소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주7)또한 이덕무(1741-1793)의 사소절 에는 “지금의 의복 상의는 매우 짧고 좁으며(중략) 소매가 너무 좁아 옷을 입으려 할 때 한번 팔을 구부리기만 하면 솔기가 터지고 심하면 입고서 얼마 안 되어 팔의 기운이 돌지 않고, 팽창하여 벗기가 어려워서 옷소매를 째고서야 벗게 되니 어찌 그리 요사스러운가?(서효미․김인자, 1990:56 재인용)” 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덕무는 저고리의 길이보다는 소매가 너무 좁다는 점 때문에 ‘미니저고리’를 요사스럽다고 비난하고 있다. 물론, 이 시기에는 기생과 양반계급 여성들만이 젖가슴을 가려주는 ‘허리띠’와 함께 ‘미니 저고리’를 입었고, 혹 하층계급 여성이 젖가슴을 드러냈더라도 이들의 관심은 양반 여성의 몸에 대한 규율에만 집중되었었기 때문에 언급할 필요가 없었다고 생각해볼 수도 있다. 그러나 김홍도, 신윤복의 풍속화를 살펴보았을 때, 저고리의 길이가 워낙 짧았기 때문에 움직임이 클 경우 불가피하게 허리띠 위로 조금씩 살이 드러날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류한당 권씨는 “옷깃과 치마 뒤를 항상 여미어 살과 속옷이 보이지 않게 하며 자식 젖 먹일 적에 옷가슴을 풀어헤치지 말고 눈을 거듭 뜨지 말며 까닭 없이 두루 돌아보지 말며 팔 드러나게 소매 걷지 말며 가려워도 훔치적거리며 긁지 말며 자식 똥 싸거든 개가 따라 붙지 못하게 해야 하니 이것이 다 어른 앞에서 못하는 일이니라”(양숙향․김용서, 1998:28 재인용)라며 여성의 덕목을 강조하는데, 어른 앞에서 젖먹일 적 옷가슴을 풀어헤치는 것과 ‘팔 드러나게 소매를 걷는 것’을 같은 위상에서 지적하고 있는 모습은 이 시기에 존재했던 다른 모습의 성적규범을 상상하게 한다. 덧붙여 어떤 행동을 금지하는 언설의 존재는 그 행동이 사회적으로 널리 행해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역으로 증명한다는 점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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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한다. 즉, 짧은 저고리로 인한 허리부분의 노출이나 좁은 소매가 문제였지 젖가슴의 노출은 부차적인 또는 관심 밖의 문제였다는 것이다.
한편 신윤복(1758-?)의 기생그림을 보면 짧은 저고리와 치마허리→가슴까지 칭칭 동여감은 천과 끈을 볼 수 있는데, 이 짧은 저고리가 구한말기에 보편적인 여성한복의 짧은 저고리와 같은 형태라는 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의복사에 따르면 짧은 저고리는 조선 문예부흥기인 18세기 영정조에 기생들로부터 유행되어 사대부와 평민과 천민에게 전파되었다고 한다.
위선적인 양반을 상대로 하는 직업상 기생에겐 노출을 하면서 노출을 안 한 것처럼 장식하는 게 중요한 문제였을 터인데, 확실히 신윤복 그림에서 기생의 짧은 저고리는 움직임에 따라 살짝살짝 올라가서 겨드랑이와 등의 속살이 슬쩍슬쩍 드러나는 형식이다. 여기에 곧바로 떠오르는 의문점이 다섯 가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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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렇다면 기생들이 유행을 퍼뜨리기 전의 한복은 짧은 저고리가 아니었으며, 보편적으로 젖가슴을 가리는 형태였을 것이다.
2. 기생들은 섹스어필을 해야 하는 직업이다. 짧은 저고리에 성애적으로 어필하는 요소가 없었다면, 왜 굳이 기생들이 그런 스타일의 한복을 발명/선택 했고 또 유행이 되었을까?
3. 허리의 속살 노출이 문제였다면 과연 겨드랑이 높이까지 천으로 동여맬 필요가 있는가?
4. 익히 알려지고 구한말 외국의 기록에서도 드러나는 것처럼 사대부 여성은 외출 할 시에 장옷(양민은 쓰개치마를 이용)을 덮어서 아예 온몸과 머리를 가려버린다. 그런데 사대부 여성이라고 하여도 집안에 그 남편과 부인 둘만 사는 것이 아니며 대가족 집안인데, 진짜로 사대부 여성 허리의 속살이 드러나는 옷을 입었다가는 느긋한 지탄과 금지논의의 대상이 아니라 즉각적인 체벌과 소박의 대상이 되어야 일관성이 있다.
5. 유두는 성적 흥분을 하면 노골적으로 모양이 변한다. 성적 흥분에 대한 공개가 터부로 잡은 문화권에서 유두는 성적 흥분이 드러나는 신체부위라서 의식적으로 의식 안 할 수가 없고, 사대부가 아니더라도 남녀가 만날 때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유두가 노출된다는 주장엔 이해하기 어려운 지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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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선 우선 조선시대 문서들의 문맥을 제대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인용된 안정복(1712-1791)의 “저고리가 짧아서 허리를 가리지 못한다.” 발언은 ‘허리’라고 한 것이지 살이라고 칭한 것이 아니다. 그건 그냥 허리부근을 말한 것일 수 있다. 짧은 저고리로 허리를 가리지 못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는 안정복 보다 앞선 사람인 이익(1681-1763)의 성호사설 16권-인사문(人事門)-부인복(婦人服)의 다음 발언에서 파악할 수 있다.
“지금 부녀자의 의복은 짧은 적삼에 소매가 좁은데 어느 때부터 생긴지는 알지 못하며 귀천이 통용하니 해괴한 일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습속에 젖어 예사로 알고 있다. 또 여름에 입는 홑적삼은 아래를 줄이고 위로 걷어 올려 치마 말기를 가리지 못하니 더욱 해괴한 일이다. 이는 의복의 요물이니, 마땅히 금지하여야 할 것이다.”
한편, 안정복의 인용구는 동사강목 제12상 무인년 충렬왕 4년의 부분으로 원지배기 고려사를 다루면서 당대 조선의 짧은 저고리의 유래도 추측하는 것이다. 원이 아닌 중국(명) 스타일로 바꾸길 덤덤하게 말하고 있으며, 원문엔 요사스러운 것이니 금지해야 한다는 발언은 없다. 논문이 성호사설 부인복의 마지막을 잘못 따온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나오는 치마 말기가 무엇인진 한복 패션의 역사에서 대체적인 답을 찾을 수 있다. 논문에서 허리띠라고 칭한 부분은 엄밀하게 말해서 허리띠가 아니라 ‘치마 말기(또는 말기치마)’ 거나 ‘가슴띠(또는 가슴가리개, 젖싸개, 帶子)’라고 불리는 것이다. 두 명칭은 특히 요사이 혼용되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치마 말기는 치마의 끝부분에 둘러서 이어댄 천 부분이고 가슴띠는 말기가 분리 된 것과 유사한 모양의 넓적한 띠다. 帶子 라는 명칭 때문에 허리띠라고 불린 것 같고, 치마가 허리에 걸리지 않는 조선한복의 특성과 시너지를 일으키며 오해가 많았다.
帶子는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저건 허리가 아니라 가슴을 감싸라고 만든 것이다. 치마 말기와 가슴띠는 아주 타이트하게 젖가슴을 압박해서 납작하게 만든다. 치마 말기는 치마 위에 덧댄 넓적한 천을 ‘허리 위 갈비뼈~가슴’에 대고 끈으로 동여맨다. 조선전통치마는 치마를 걸칠 수 있는 배꼽 허리가 아니라 갈비뼈 부분까지 올라가는 형태기 때문에 끈으로 묶어 고정하는 치마 말기가 두드러지는 모양이 되는 것이다. 신윤복의 풍속화를 보면 알겠지만 치마 말기 아래 외관상 치마의 끝으로 보이는 부분을 지금의 해부학적 허리라고 생각하면 상체3:하체7 정도의 비례가 나올 것이다. (물론, 조선여인은 그런 체형을 가지고 있지 않음) 이상의 이유로 허리 부근의 속살은 치마 말기가 있는 한 저고리 길이가 어찌되었든 보여질 수 없다. 가슴띠는 저고리와 치마를 입기 전에 하의 속옷들을 입고 속옷들의 말기 위에 가슴띠를 둘러서 한쪽 옆구리에 끈을 묶는 것이므로 풍속화 기생들의 저고리 밑 젖가슴을 덮는 표면은 가슴띠가 아니라 치마 말기다.
여성한복은 풀 세트 하의 속옷이 8가지이나 상의 속옷은 0~1개(여름은 홑저고리만 입음) 밖에 안될 정도로 하의 집중적이고, 가슴을 가리는 치마 말기도 그 이름처럼 상의라기 보다는 하의의 연장에 가깝다. 하의로 가슴을 덮는 특성은 치마 말기를 자르고 치마를 극도로 길게 하고 어깨끈을 달아 통치마로 가슴을 가리는 구한말의 유관순 한복에서도 나타나고 치마 말기에 어깨 끈을 주고 가슴통을 넓힌 지금의 개량한복도 그렇다.
http://file.instiz.net/data/file/20140721/b/8/d/b8da992db731ab59107e97aa4d3015b8.gif
조선한복은 짤막하고 달라붙는 저고리-치마 말기-길고 풍성한 치마의 삼단 구성을 가지며, 겨드랑이 아래로 치마까지의 라인에 일자로 딱 붙이는(외관상 아녀자의 허리가 실제보다 위에 위치해 있고 허리에 군살이 없는 것처럼 보임) 치마 말기를 상정하고 한복 본래의 fit이 구상되어 있다. 더해서 치마 말기 라인이 드러나면 그 늘씬한 가짜허리의 맵시는 배가 된다. 예나 지금이나 여성 한복의 기본인 하후상박(下厚上薄)의 복장에선 가슴이 풍만하면 작은 상체가 뚱뚱해 보이며, 따라서 아녀자가 후덕지지 않은 완벽한 fit으로 입으려면 절벽가슴을 만들어야 한다. 여기서 신윤복의 기생들이 저고리를 짧게 하고 치마 말기를 늘려 끈으로 꽉꽉 말아감은 이유와 가린다기 보다는 조이기에 더 가까운 가슴가리개가 왜 발전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오늘날엔 치마 말기에 가슴공간을 두고 있고, 가슴가리개가 잘 쓰이지 않는 관계로 압박붕대를 쓰기도 함) 미뤄보아 대체로 빈유가 조선여자들의 보편체형이거나 조선남자들이 빈유를 선호하는 취향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겠다. (미인도를 다시 보라) 그러나 가슴의 커다람은 가문에서 혼사를 정할 땐 고려요소가 되기도 했는데 이는 모유 수유하는 ‘어머니’를 상정한 것이다.
따라서 -1)조선에서 빈유는 당대의 섹시함을 구성하는 요소지만, 풍만한 (그리고 임신-육아기에 부풀어 오르는) 젖가슴은 섹스어필이 아니라 모성어필일 수 있다. OR 2)조선 개국 후 성리학 사회에서 신체와 굴곡을 드러내는 것을 규제했기 때문에 절벽가슴을 만드는 치마 말기가 도입되었다.- 두 가지를 가정해 볼 수 있다. 조선에서 여성의 신체 노출을 막느라 겹겹의 속옷을 입게 한 역사(비교적 규제가 약했던 양민 조선여자도 치마 안에 속바지는 반드시 입음)를 보면 후자도 가능성이 있지만 이전 시대 복장의 정보가 부족하므로 확언할 순 없다. 다만 그러한 억압이 몸보다는 얼굴을, 몸에선 굴곡진 몸매가 아닌 가냘픈 몸매, 가녀린 목-어깨-허리로 떨어지는 가녀린 취향의 방향을 이끌었을 수는 있겠다.
한반도 미인화의 역사를 조사한 논문("화용월태의 표상 : 한국 미인화의 신체 이미지", 홍선표)을 보면 한반도에서 미인화는 드물지만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에서 신녀(神女), 선녀(仙女), 시녀(侍女), 궁녀(宮女), 기녀(妓女) 등을 그린 고분벽화와 불화, 풍속화 등의 전통그림엔 육덕진 풍만한 미인상이 그려졌다. 이후 “고려조엔 궁중문화의 발달과 송원대 사녀화의 영향으로 말기 무렵부터 단정하고 기품 있는 전아한 미인상이 대두되어 조선전기까지 이어진다. 후기에는 서울의 유흥문화를 주도하는 새로운 세력으로 부유한 중서층의 향락적 풍류성과 결부되어 기녀들의 관능적인 염요한 미인상이 전개되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화월용태의 표상>에 따르면 조선의 미인에 대한 평가에서 젖가슴과 엉덩이 언급이 안되고(드물게 엉덩이의 풍만함을 요구하기도 한다) 대부분 얼굴이 그 외로는 목과 어깨와 허리가 찬양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어떤 경우이든 조선한복의 복장구성에선 젖가슴을 의식하고 의도적으로 가리거나 누르는 물건이 있다.
사진은 16C 초기 한복은 저고리가 몸을 덮는 느낌으로 풍성했고 17C 한복은 짧아지면서 상체의 라인에 맞추었고 18C 한복은 더 짧아지면서 상체에 달라붙었으며 19C엔 저고리 끝이 아예 가슴 위로 올라가는 흐름을 보여 준다. 그러나 풍속화와 기록을 고려하면 기생을 기준으로 긴 말기를 노출하는 말기치마 패션의 완성은 반세기 정도 앞당겨야 할 것 같다. 19C 말~20C 초의 사진을 보면 기생과 사대부는 말기치마를 기본으로 하되 각자 다른 한복패션을 발달시키고 있고, 양민 이하가 저고리와 말기 둘 다를 보다 짧게 하고 치마를 가슴 바로 밑까지 올리는 열화버전으로 잇고 있다.
이익(1681-1763)의 당시에는 본래 치마 말기란 저고리에 감춰지는 것이었으므로 요사스럽다고 이야기한 것이고, 그럼에도 속살은 노출하지 않았으므로 칠거지악인 음행(淫行)으로 처벌을 주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즉, 일종의 속옷 노출 패션이었고 만들어진 몸매를 보여주는 장치였다. 조선은 엄격한 성리학 사회였으나 조선여인의 매혹적이고자 하는 욕망을 막을 순 없었다. 조선 초중기와 다른 영정조의 개방적인 분위기를 타고 이 욕망은 후기에 만개한다.
여성한복은 명백하게 억압을 역이용해 자연적인 볼륨을 없애거나 비자연적인 볼륨을 더해서 상체 어깨-가슴의 연약한 라인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하의에 대한 규제는 강화되다 못해 둔부의 굴곡을 무시(치마말단 밑으로 내려가는 부분이 엉덩이가 아니고 갈비뼈-허리의 연속임))하고 속살을 속옷으로 겹겹이 쌓아 종 모양으로 부하게 부풀려 상체와 대비시킨 것을 보면 대체로 하체의 속살과 굴곡이 상체보다 강력한 터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신윤복의 풍속화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지점은, 똑같이 치마 말기를 두르지만 어떤 여자들은 철저하게 젖가슴과 유두를 가리고 어떤 여자들은 드러낸다는 것이다. 김홍도(1745-1806?)의 그림(3,4번째)이나 신윤복의 아버지 신한평(1726-?)의 그림(5번째)도 유사하다. 기생은 감춰지고 노동하는 여자는 드러난다. 남자와 밀당하는 여자는 감추고 남자와 관계 없는 여자는 드러낸다. 아가씨는 감추고 아기엄마는 드러낸다. (첫번째 그림은 기생이면서 아기를 낳은 경우로, 신윤복의 그림 중에서도 각별히 독특한 느낌을 준다) 반도에선 조선→구한말→근대에 이르기까지 젖먹이를 가진 어머니들에 한해서 모유수유를 하는 과정 중에 젖가슴의 노출은 문제삼지 않는다. 양민 이하의 농사짓는 옛 세대들이 자식을 열 몇 명씩 낳았던 것을 고려해 보면 임신기와 육아기가 생애 동안 길게 이어진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경우에 부풀어오르는 젖가슴에 압박을 주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젖몸살을 예방하고 노동하는 어느 때든 모유 수유를 하기 위해 강력하게 가슴을 압박하는 치마 말기를 내려두어야 했을 문제점은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젖가슴 노출이 남아선호에 따른 아들 출산 자랑이라는 말이 있지만 여자아기도 젖은 먹어야 살 수 있으니 의미 없는 주장이다. 즉, 젖먹이를 가진 양민 이하 ‘노동하는 어머니’들은 기능적인 문제 때문에 일반적으로 젖가슴의 노출이 허용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모성의 문제이기 때문에 양민이 속살을 드러내는 ‘어머니의 일’을 사대부 층은 천박하게 생각은 해도(류한당 권씨는 어른 앞에서 수유 중에 옷가슴을 풀어헤치지 말 것을 요구하나 드러나는 것 자체는 문제 삼지 않았음) 누구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반대로 말하자면 가슴을 드러낸 여자는 아이를 낳은 육아기의 여성이고 아이를 낳았다는 것을 표시하는 것이다. 이때 그는 여성이라기 보다는 어머니로서 인식되는 것이다. 풍속화에선 거꾸로 남자와 썸을 타는 여자는 젖가슴이 꽉꽉 눌려 가려져 있다. 전문적으로 남자를 만나는 기생은 늘 그러하다.
한편 짧고 타이트한 저고리와 꽉 조이는 치마 말기 콤보의 복장을 보면 노동환경을 그닥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육아의 문제가 없더라도 딱 붙은 저고리는 곧 늘어질 것이고 끈으로 묶은 치마 말기는 팔을 크게 움직이거나 올림(물동이나 보자기나 물건을 머리에 이는 동작)에 따라 치마 말기가 벌어지느라 단정히 가슴을 눌러 가려지고 평평한 라인을 나타내지 못한다. 또한 노동에 따라 살집은 너무 일상적으로 노출된다. 하여 노출하지 않으면서 노출한다는 본래의 목표는 달성될 수가 없다. 그들은 기생의 옷을 모방하였지만 기생의 매혹은 모방하지 못한 것이다. 한편 천민 이하로 가면 실상 종-노예이고 구한말의 서구인 여행기에 따르면 천민이나 빈민 여성들은 복장의 형식적인 완성도도 갖추지 못해서 누더기 같은 저고리와 치마로 끝나는 경우를 보게 된다.
다음은 구한말에 조선을 여행하거나 체류한 서구인들의 기록이다. 발췌는 웹에서 찾은 것이나 원전이 실존함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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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시벌 로웰, <내 기억 속의 조선, 조선 사람들> (예담, 2001)
[천문학자]
(259쪽)
여성의복으로는 매우 짧은 저고리에 풍성한 속곳과 속치마가 있다. 속치마는 서구 여성의 것과 비슷한 형태에 기다란 치마끈이 달려 있다. 이 끈은 인간의 신체 구조를 무시한 채, 치마를 될 수 있는 한 높이 올려 묶게 만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고리와 치마 말기 사이에는 종종 2내지 3인치 가량의 틈이 벌어져 유방이 약간 노출되는 경우도 생긴다. 한 가지 반드시 덧붙일 말은 이런 뜻하지 않은 일은 우물가에서 물을 길어 머리에 인 평민 계층에서나 볼 수 있는 우연일 뿐이다.
아손 그렙스트, <스웨덴 기자 아손, 100년전 한국을 걷다> (책과함께, 2005)
[스웨덴 기자]
(175쪽)
부산에서 서울까지 오는 도중에나 서울에 있는 동안에도, 밖에 나와 있는 여자들이 드물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밖에 나와 있는 여자라 할지라도 대부분이 독특한 방식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고, 얼굴을 가리지 않은 여자일 경우에는 젖가슴까지 드러내놓고 있었다. 얼굴을 가리지 않은 여자들은 대부분이 매무 박색인 까닭으로 처음에는 이 사실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끌라르 보티에, 이뽀리트 프랑뎅, <프랑스 외교관이 본 개화기 조선> (태학사, 2002)
[프랑스 외교관]
(29쪽)
7. 여성과 복식(服飾)
중국과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 의식주의 불결함은 고질적이었다.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난 아이들은, 그 자신들의 육체를 갉아먹는 기생충처럼 우글거리고 있었다. 여름이 되면 아이들은 옷을 하나도 걸치지 않았다. 여자들은 불룩한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축 처져 늘어진 젖가슴 아래로 그것을 졸라매었다. 한국인들에게 있어서 이 처진 젖가슴을 아이를 많이 낳았다는 의미에서 영광스럽고 존경할 만한 표지가 된다.
바지 외에, 결혼한 여자들은 등에서 목까지 올라오고 가슴을 드러내는 적삼을 입고 있었다. 이 노출된 적삼 덕분에 어린애들은, 어머니가 하던 일을 멈추고 기분 전환삼아 젖을 물릴 때가 아니더라도 언제나 젖을 빨아 자신들의 주린 배를 충족시킬 수 있게 된다.
까를로 로제티, <꼬레아 꼬레아니> (숲과나무, 1996)
[이태리 총영사]
(112~113쪽)
세상의 어느 나라에도 한국에서처럼 엄격하게 여인들의 생활을 격리시키는 곳은 없다. 양반층의 여인이건 중류층의 여인이건 간에 집에서 나가는 일이 결코 없으며 할 수 없이 외출해야 할 때에는 반드시 완전히 차단된 가마를 이용해야 했다. 길에서 볼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여인들은 모두 사회적으로 최하층에 속하는 사람들이며 이들 또한 대체로 얼굴을 가리고 있다. 서울 여인들의 얼굴을 가리는 것은 머리에서부터 덮어씌운 초록색 비단외투로서 비록 소매 자락이 달려 있기는 하나 어떤 경우에도 그것을 입지는 않는다. 한편 도시 주변 농촌의 여인들은 이러한 외투 대신 흰 앞치마로 얼굴을 가리기도 한다. 이것이 한국 여인의 의복 중 가장 신기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독창적이며 어느 한국의 의상에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이 책에 실려 있는 사진들을 보면 된다. 한편 가슴을 드러내놓고 거리를 활보하는 여인들은 모두 예외 없이 최하층 계급인 칠반에 속하는 사람들인데, 지금은 영국과 미국 선교사들의 노력으로 거리에서 이들을 거의 볼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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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와 기록을 종합하면, 18세기 기생의 소형저고리-치마 말기 패션은 상향으로 하향으로 퍼져나갔는데, 정작 기생들 자신은 의도적인 연출의 필요에 따라 평상시엔 철저하게 속살의 노출을 가렸고, 사대부 여인들은 치마 말기 라인의 노출만 받아들이면서 저고리가 충분히 덮이는 것을 쓰거나 가슴가리개를 더해 속살의 노출기능은 완전히 거부했고, 양민에겐 그것이 본디 노동과는 상관없는 복장인 탓에 매혹엔 별 득이 못되었으나 육아의 편리성 때문에 저고리와 말기를 보다 짧게 하는 형태로 더 퍼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천민은 대세에 따라 짧아진 저고리를 흉내만 내었고 성리학적 규율과 통치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있는 (이것이 조선 성리학의 가장 위선적인 지점인데) 노비 또는 비농민의 살갗 노출은 비하의 대상일 뿐 이슈는 아니었다. 상황을 고려하면 대체로 후기 조선사회에서 어떤 여성 스스로의 젖가슴 노출에 대한 무던함은 고된 육체노동의 수행 여부와 임신-육아기에 집안에서 쉴 수 있는 경제안정성의 차이에 따른 신분의 차를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모방의 욕구는 강렬하지만 신분의 차이는 그보다 강력하다. 구한말의 길거리에서 보이는 젖가슴 노출의 빈도는 당대 부의 불균등 정도에 따를 것이다.
서민도 살만했다는 영정조 시대 이후로 상황이 얼마나 악화되었을지는 모르나 그들은 가난한 농민과 노비 그리고 천민 사이에 걸쳐져 있을 것이다. 물론 조선 이전이나 조선 초는 긴 저고리를 통용했으니, 영정조 부흥기에 가장 매혹적인 패션으로 소저고리-말기치마가 선택되지 않았다면 또는 조선한복의 최종진화형인 소저고리-말기치마가 완성되지 않았다면, 그들이 부의 불균등에 시달린다고 해서 길거리에서 젖가슴이 노출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재수없는 놈은 뒤로 엎어져도 코가 깨진다고, 이렇게 보면 자업자득인 구한말이지만 여러모로 아이러니한 악운이 겹쳤다.
중세 성당과 교회의 젖을 먹이는 동정녀 마리아 그림처럼 젖가슴이 터부가 아니었던 유럽에서 르네상스 이후 여성의 젖가슴이 터부화 된 것에 대해선 이런 말이 있다. 엉덩이는 성교와 출산의 부위이나 문명의 발달에 따라 라인은 드러나도 직접적인 노출은 사회적으로 가려져 왔다. 그래서 여성들은 코르셋 등을 통해 모아진 젖무덤의 계곡 모양의 노출로 풍만한 엉덩이 살집을 암시했다는 것이다. 사실, (기본적으로 중력과 수태 때문에) 암시되지 않고 보정되지 않고 교정되지 않고 연출되지 않고 적나라하게 드러난 자연산 젖가슴이 섹시하기란 매우 어렵다. 근대 패션에서 젖가슴은 어떤 면에선 노출된 것보다 더 드러나 있다. 노출금기-굴곡강조와 노출금기-굴곡평탄화 중 어느 쪽에 서느냐는 공식적 사회가 쾌락적 취향인가 아니면 금욕적 취향인가에 강한 영향을 받는 것 같다. 조선의 경우엔 그 금기가 엉덩이 굴곡 라인에 대한 금기가 아예 엉덩이의 굴곡을 드러내지 못하게 하는 방향이었기 때문에 굴곡진 가슴이 굴곡진 엉덩이의 전이로서는 발전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겠다. 오히려 성애적 신체로서의 젖가슴은 모성과 분리되도록 가능한 작아야 하고 젖가슴의 굴곡은 암시되긴 보단 눌러지고 감춰져야 했으리라.
그 외- 정황을 보니 이익은 기생집에 그닥 드나들지 않은 듯.
* 라벤더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4-12-18 19:50)
* 관리사유 :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