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오랜만에 pgr 에 글을 쓰네요. 개인적인 페이지에 끄적였던 글인데, 더 많은 분들과 기억을 나누고 싶어 올려봅니다.
욕설과 다소 거친 언사들이 있습니다만, 원문 그대로 옮겨봅니다. 문제가 된다면 삭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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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를 다녀와서도 서태지를 대장이라 칭하고, 신해철을 마왕이라 부른다면 열외 없이 병신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동의한다. 모두가 중2를 보냈었고 기형도와 하루키를 빨던 시절을 가졌듯, 서태지가 대장이고 신해철이 마왕이던 때가 있었겠지.
소년에겐 영웅이 필요한 법. 지금 돌아보면, 그는 내게 삼촌쯤이 아니었을까. 많은 이들에게 그랬을 것이다. ‘좀 놀아본’데다 똑똑한, 꽉 막힌 나의 아버지와는 달리 젊고 멋진 어른. 분명 어른인데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주던 놀라운 사람. 그렇게 한때 나의 영웅이고 마왕이던 자는 좀 더 머리가 큰 내겐 유치한 어린 시절의 흑역사가 됐다. 마치 유년기의 영웅이던 아버지가 무너져 내리듯. 그럼에도 내 소년기의 영웅은 평생을 흔드는 법.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나는 신해철의 비판적 지지자다. 그런데 비판적 지지라는 것을 알려준 사람이 그인 것 같다.'
천재 뮤지션이냐고? 주저 없이 아니라고 답하겠다. 이 사람은 노력으로 음악을 했으며, 평생을 천재 컴플렉스에 시달렸다. 그의 재기는 20대 초중반에 모두 소진됐으며, N.EX.T 4집 이후의 신보는 자극이 되지 못했다. 그의 삶에서 음악이 지워지고 언설만 남았던 것이 그때 즈음부터일 것이다. 하지만 도리어 그것이 지금 신해철의 부고에 이리도 많은 이들이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이유다. 이 사람은, 하늘 위의 고고한 천재가 아니라 라디오에서 욕설을 섞어가며 반말로 사연을 읽어주고 만화와 게임 이야길 나누던 동네 삼촌이었다. 동시에 단순한 뮤지션이 아닌 아티스트의 삶을 살았다. 난 ‘대학가요제가 낳은 최후의 스타’ 라는 수식을 이렇게 바꾸고 싶다. ‘한국 대중가요 씬 최후의 락스타’
태도의 문제다. ‘맘대로 살아. 하고 싶은 걸 해’를 외치고 그대로 살던 그 태도. 재능이 말라붙었을 때조차 끊임없이 사운드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고 이를 실험하던 음악에 대한 열정. 장관직을 제의해도 ‘내가 고작 장관 따위 하러 음악을 하는 줄 아는가’ 라며 역정을 내는 자부심. ‘나는 NL도 PD도 아니었다. 굳이 얘기하자면 IS쪽’ 이라 말할 수 있는 곤조 같은 것 말이다. 그는 20대 초반에 이미 음악으로 일가를 이뤘다. 초기작에서 빛나는 미디의 활용은 대중음악의 방법론을 갈아 엎었고(째즈 카페를 들어보라.) N.EX.T의 볼륨감 넘치는 메탈 사운드는 다신 메인 스트림에서 시도될 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신해철이 나 같은 평범한 리스너에게 남겨준 건 이런 ‘음학’적인 것들이 아니라, 그가 말하고 쓰고 노래하던 섹시한 삶의 태도와 가치관 같은 것이었다. 구라 좀 보태서, 나와 당신의 중2를 키운 것은 팔 할이 신해철이다.
다른 386들이 그렇듯 그 또한 낡았고, 때론 틀리기도 했다. 그래, 까놓고 유치했다. 하지만 ‘유치하다고 말하는 건 더 이상의 꿈이 없어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책상과 필통 안에 붙은 머리 긴 락스타’중 하나가 내겐 신해철이었다. 그렇게 불멸을 노래하고 스스로 불멸이 되어도 인간은 죽는다. 다만 그 죽음의 때와 방식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의료사고에 인한 황망한 죽음 따위는 도저히 납득이 되질 않는다. 이게 이 나라 최후의 락스타가 세상을 떠나는 법이란 말인가.
‘눈을 뜨면 똑같은 내 방 또 하루가 시작이 되고, 숨을 쉴 뿐 별 의미도 없이 또 그렇게 지나가겠지’를 읊는 요즘이다. 창 밖에 돌아온 서태지는 예전과는 달라 보이고, 이젠 주저 없이 아이돌의 힘을 빌린다. 그리고 신해철은 죽었다. 20대 초반에 세상을 뒤엎고 대체 불가능한 존재감을 가졌던 이들이 결국 스스로의 대체재를 찾지 못한채 사라지고 있다. 직관으로, 한 세상이 끝나가는 것 같다. 그와 함께했던 누군가들의 유년기와 함께.
* 라벤더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4-12-18 19:47)
* 관리사유 :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