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은 학교에서는 매우 바쁜 달이다. 오죽하면 초등학교 교사인 친구는 3월과 5월만 넘어가면 한숨 돌렸다고 할까.
그 친구가 5월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바쁜 것도 있지만, 스승의 날이 있기 때문이다.
스승의 날은 교사로서는 굉장한 부담이다. 가르쳐주신 은혜에 감사해야 하는 날이 혹시라도 학부모께 뭘 받지 않나,
교사인 친구는 스승의 날만 되면 자신이 무슨 죄인같단다.
주위에 교사인 친구들이 많은데, 최소한 내가 아는 한에서는 아이들에게 뭘 바라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더 사랑을 주지 못해 걱정하는 교사들은 많았지만.
나는 네이버 웹툰 스쿨홀릭에 나오는 말처럼 친구에게 농담으로 스승의 날에 강남아파트 키, 차키 이하로는 선생님은 시시해서 안 받는다고 애들한테 얘기하라 했더니 웃긴다고 자지러진다.
얼마 전 4학년 남자아이 하나가 자기와 애들 앞에서 괜히 떼를 쓰다가 울었단다. 얼마나 당황스러웠는지 모르겠다는 친구에게 그럼 너도 선생님도 아침에 출근하기 싫고 너네 가르치기 싫다고 애들 앞에서 울어. 엉엉엉
그럼 교장선생님이 아니 이선생님 왜 우세요 하고 물어보면 교장선생님 저 요즘 너무 힘들구요 애들이 괴롭혀서 사는 게 힘들다고 울으라고 말했더니 깔깔 웃다가 언니 진짜 해볼까? 나 진지해 하고 정색을 한다.
안돼 그러지마...너 이상한 애로 찍힌다.
얼마 전에 카톡을 하나 받았다. 내용상으로는 아주 평범한 카톡이다.
‘Julia야 잘 지내지? 요새 세월호 일 때문에 쌤이 마음이 영 안좋네. 선생님으로서 내가 그 자리에 있었어도 똑같이 행동했을 것 같은데 말이야.
목숨의 경중은 없지만 어린 애들한테 어른으로서 뭘 보여줘야 할지 암담하다. 잘 지내고 언제 집에 오면 연락하렴, 샘이 맛있는 거 사줄게 ^^’
카톡을 보내신 분은 중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이시다.
나는 바로 답장을 보냈다.
‘쌤. 저는 비싼 게 좋습니다. 비싼거 사주세요 우훗 ^-^’
내가 초등학교 때, 우리 집 주변에는 공학이 전혀 없어서 당연히 남녀가 갈라져서 중학교를 간다고 생각했었다.
소위 ‘뺑뺑이’로 우리 학교 여자애들은 주변 3개 중학교에 배정되었는데, 하필이면 내가 배정된 학교는 집에서 버스로 3~40분 걸리던 먼 학교였다.
그것도 내가 졸업한 다음 해부터는 배정되지 않을 정도로 마이너하게 배정되던 학교였는데, 그 이후에도 그렇지만 학교 뺑뺑이 운은 참 없던 나는 덜컥 그 학교에 배정되었다.
그나마 위안이 되었던건 초등학교 때 절친했던 두 친구와 함께 간다는 거였지만, 막상 학교에 간 첫날 반 친구들끼리는 대부분 서로 이미 아는 듯했다. 근처 두 초등학교에서 그 중학교로 다 왔기에 다른 친구들은 동네 친구, 초등학교 친구로 이미 안면이 있었나 보다.
그때 막 ‘왕따’라는 개념이 생길 때였다. 완전히 따돌림.
여학교에서는 대놓고 때리거나 괴롭히는 경우는 아주 막나가는 애들 빼고는 드물다. 그냥 없는 사람 취급하는 게 흔하다.
말을 걸어도 들은 척도 안하고, 투명인간 취급을 하는 것이다.
지금 내 모습으로는 다들 말도 안된다고 하지만 그때 나는 말이 거의 없고 조용히 구석에서 책만 읽던 아이였다.
초등학교 5학년 때 학교 문집에 담임 선생님께서 나의 특징으로 ‘공부를 잘하는 Julia' 라고 써주셨고, 어린 마음에 그게 속상했다.
내가 얼마나 특징이 없으면 단지 선생님께서 공부를 잘한다고 쓰셨을까 하고 말이다. 그것도 충분히 특징인데.
나는 그 문집을 찢어버렸다. 지금 생각하면 조금 아쉽지만.
아는 친구도 거의 없고, 사춘기 여중생 특유의 집단문화, 집단은 꼭 짝수로 다녀야 하고, 화장실과 교무실 갈 때 항상 친구를 하나 끌고 다녀야 한다는. 그런 문화에도 익숙하지 않았던 나는 자연스럽게(?) 따돌림을 받았다.
뭐 대놓고 폭력을 행사했던 건 아니다. 또래 치고는 큰 편이었던 내게 그런 친구는 없었고.
단지 투명인간 취급을 받았을 뿐이다.
다른 시간은 그럭저럭 넘길 수 있었는데, 가장 힘들었던 건 점심 시간이었다.
아직 급식을 하지 않고 다들 도시락을 싸서 다니던 그때 점심시간은 아이들에게 가장 즐거운 시간이었을 것이다.
4교시 끝나는 종이 울리면 아이들은 끼리끼리 모여 도시락 뚜껑을 열면서 지지배배 수다를 시작했다. 그 아이들 틈에 내 자리는 없었다.
참 우스운게, 뭐 다른 학교도 그렇겠지만 여학교는 특히 학년 초에 모든 게 다 결정된다.
같이 밥먹는 무리, 같이 어울리는 무리가 학년 초에 다 결정되어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변경이나 추가 또는 탈퇴(?)가 없다.
서로 눈치를 보기 때문이다.
특히 밥먹는 무리는 정말 중요하다. 나중에 다른 친구와 친해지더라도 점심 먹는 무리는 그대로 유지되는 게 보통이다.
40명이 채 안되는 반에서 어떤 아이가 항상 같이 밥먹던 무리가 아닌 다른 친구와 갑자기 먹거나 혼자 먹게 되면 다른 애들은 ‘쟤네 무슨 일이 있었구나’ 하고 속으로 생각만 하게 된다. 다 생각은 하고 있지만 겉으로 표현은 하지 않고.
학년 초에 적극적으로 밥 먹을 친구(표현이 좀 웃기지만)를 찾았어야 하는데 소극적이었던 나는 자기네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먹는 반 애들 사이에 끼지 못하고 다른 반이었던 초등학교 동창한테 가서 먹었다. 그렇지만 그것도 한 두 번 이지 그 친구도 자기 반 친구하고 먹어야 할 게 아닌가.
힘든 건 배고픔이 아니었다. 모두가 삼삼오오 모여서 떠들고 있는 다른 아이들을 바라보며 멍하니 앉아있어야 하는 외로움, 그렇다고 혼자 꺼내 먹기는 창피하고.
결국 내가 택한 것은 화장실에서 점심을 먹는 것이었다. 다른 반 친구와 먹는 것처럼 도시락을 들고 밖으로 나가서 화장실 문을 잠그고 변기에 앉아 혼자 먹었다. 보온도시락이었음에도 화장실에서 먹는 밥은 너무나 차가웠고, 그때 느꼈던 먹먹함은 16년이 지난 지금도 아릿하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렇게 멍청했을까 하고 웃게 된다. 지금같으면 얼굴에 철판깔고 아무나 하나 잡아서 같이 먹을래? ^^ 하면서 친해졌을 텐데.
원체 소심했지만 당시에는 오빠의 방황과 나에 대한 폭력으로 마음이 극도로 힘든 상태였다. 마땅히 하소연할 만한 곳도 없었고, 집안 얘기를 밖에서 하면 니 얼굴에 침뱉는 거라는 엄마의 말씀을 나는 우직할 만큼 잘 따랐다.
그때 내가 고팠던건 배가 아니라 사랑이었던 것 같다. 내가 사랑받을 만큼 괜찮은 사람이라는 확신. 한창 사춘기 시절이었으니까 더욱더.
나중에야 들은 얘기지만 선생님께서는 내가 1학년 때 옆반 담임이셨고, 국어를 가르치시던 쌤은 1학년 때부터 나를 유심히 보셨다고 하셨다.
2학년이 되었을 때 선생님이 우리 반 담임이 되셨고, 첫 개인 상담날 선생님이 나한테 한 말씀은 그거였다.
"너는 왜 말할 때 사람 눈을 안보고 땅만 쳐다보니? 사람을 볼 때 눈을 보면서 얘기해야지,“
나는 내가 그렇다는 것도 몰랐다. 억지로 선생님 눈을 쳐다보면서 얘기하려 하는데 자꾸 시선이 땅에 꽂혔다.
그날 무슨 내용의 상담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나는 건
항상 다른 사람하고 대화할 때는 그 사람의 눈을 쳐다보면서 얘기하렴,
그럼 그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어. 이 사람이 진실된 사람인지 아닌지. 하는 선생님의 말씀이었다.
전술했지만, 당시 집안에서 나는 너무나 힘든 상태였다.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아서 학교 끝나자마자 근처 도서관에서 닥치는 대로 책을 읽고 도서관 문 닫은 후에는 거리를 쏘다니다가 집에 가곤 했다. 밤늦게까지 방 밖에서 들려오는 싸우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기에.
그런 나에게 학교는 유일한 구원이었다.
학기 초에 선생님의 조언(?)으로 적극적으로 행동한 덕분에 많은 친구들과 친해졌고, IMF 이후의 여파로 우후죽순 생겨났던 만화 대여점 때문에 저렴한 가격에 만화를 실컷 볼 수 있었다. 친구들끼리 만화를 서로 빌려서 돌려 보기도 하고.
집에서는 항상 우울하고 힘들었지만 학교에서 나는 누구보다 밝았고 행복했다.
성적도 계속 상향세를 그리면서 2학기 중간고사 때 중학교 올라와서 처음으로 전교1등을 했다.
사실 내게 그때 중요했던 건 성적이 아니라, 자신감이었던 것 같다.
뭔가 할 수 있다는 마음. 선생님께 뭔가 보여드리고 싶은 마음.
나이가 들고 계속 선생님을 찾았지만, 선생님께서 두 번의 출산휴가 이후에 남편분을 따라 해외로 나가 계셔서 작년에야 학교로 복귀하셨다.
작년 가을에 드디어 벼르고 벼르다 선생님을 찾아갔다. 손에는 음료수를 들고.
선생님께서 계시는 학교는 한 남자 중학교였다. 30대 초반의 젊으시던 선생님은 이제 50이 다 되셨다.
선생님은 나를 보시고는 넌 어떻게 중학교 때랑 변한 게 없니? 성형도 좀 하고 그러지. 하고 말씀하셨고,
나는 썜은 예전에도 작으시더니 아직도 작으시네요. 계속 내려다봐야 하잖아요. 하자 니가 너무 커서 그래 이녀석아.
그쪽 위에 공기는 신선하니? 하고 웃으셨다.
선생님들 퇴근하기 전에 잠깐 드시라고 중국집 음식을 시켰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교무실 구석에서 벌 받던 남자아이 둘이 배고플 것 같아 안쓰러워서
선생님, 쟤네도 좀 주면 안될까요? 하고 말했더니 선생님은 너네 둘 이 누나가 먹으라고 하니까 주는거야! 다음부터 그러면 안돼? 엉! 하고 짐짓 화를 내시며 두 녀석에게 당신의 짜장면 그릇을 밀어주셨다.
마음 속으로 느꼈던 건 아직 그래도 누나구나...다행이다 하는 안도감이었다. 이모가 아닌 게 어디야.
식사를 한 끼 대접하고, 선생님 가방에 상품권을 넣어드리면서 이러면 안 된다고 난처해하시는 선생님께 말씀드렸다.
예전에 선생님께서 세상에서 가장 가치있는 행동은 죽은 사람의 묘지에 찾아가는 거라고 하셨잖아요. 보답을 바라지 않는 행동이라고요.
저는 이미 죽은 사람이니까 괜찮습니다. ^^ 그리고 교육청에 안 찌를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드리는 상품권은 안전합니다.
하고 너스레를 떨며 받으시라고 말했다. 선생님은 웃으면서 안전한 건 챙겨야지. 고맙다. 하고 상품권을 넣으셨다.
선생님과 헤어져서 집에 오는데 선생님으로부터 문자가 왔다.
‘Julia야, 오늘 오랜만에 너 만나서 반가웠고, 상품권 잘 쓸게.
상품권보다 샘이 좋았던 건 네가 준 편지였어. 네 편지를 보면서 내가 처음 교직에 들어오면서 품었던 마음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단다. 10년도 전에 가르친 학생이 이렇게 와서 나를 잊지 않아주니 내가 교사로서 헛되게 살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 내가 오히려 고맙다. 잘 지내렴.‘
역시 국어 선생님 아니시랄까봐 문자도 시적이시다.
다는 기억나지 않지만 선생님께 쓴 편지는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신경숙의 소설 ‘풍금이 있던 자리’에서 주인공 여자는 수많은 형제들 속에서 자라서 거의 아무에게도 주목을 받지 못했는데, 수많은 사람 속에서 그 여자를 알아보고 특별하게 여겨준 사람을 사랑하게 되죠.
선생님은 수많은 아이들 중에 저라는 아이를 알아봐 주셨고, 저라는 아이에게 관심을 기울여서 사랑해 주셨습니다.
지금 생각나는 건 선생님께서 수업하신 내용이 아니라, 저에게 보여주셨던 관심입니다.
다른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할 때 항상 눈을 바라보면서 얘기하라는 그 말씀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힘들었던 그 어린 날에, 저는 나라는 아이를 특별하게 바라봐 주신 선생님 덕분에 용기를 얻었고 힘들 때마다 항상 선생님을 생각했습니다.
앞으로 교직 생활을 하시면서, 저와 같은 아이들 하나하나를 알아봐 주세요. 고맙습니다.
차마 말로는 부끄러워서 하지 못하고, 편지에 선생님께 그동안 하고 싶었던 말을 했다.
언젠가 친구가 말했다. 교직 생활을 하면서 힘든건 일이 아니라, 보잘 것 없는 자기를 한없는 신뢰로 바라봐 주는 아이들의 눈빛이라고.
그 아이들에게 혹시라도 자신이 무심코 한 행동이 상처로 남을까 걱정스럽고, 최근에는 한부모 가정이나 조부모 가정이 너무 많아서 애들 상처될까봐 섣불리 부모님 오시라는 말도 못하겠다고.
그 친구에게 이렇게 얘기했다.
니가 할 수 있는 한 아이들에게 진심으로 대해. 그럼 그 아이들도 분명 알아줄거야.
어떤 아이는 그때 나처럼, 선생님이 주신 사랑을 평생 마음 한구석에 간직하고 사는 아이도 있을것이다.
그게 그 아이의 삶에서 한 조각 희망이 될 수도 있는 것이고. 수많은 별들 중에 나란 별들도 빛나는 별이라고, 너라는 별도 밤 하늘 한 구석이지만 충분히 빛날 가치가 있다고 말이다.
또 그 녀석들이 알아주지 않으면 어떤가. 그 작은 별들을 세상으로 보내면서 느끼는 뿌듯함이면, 그거면 충분하지 않은가
스승의 날에 선생님들이 더 이상 죄인이 아니었으면 한다.
학창 시절 좋은 기억만 있었던 것은 물론 아니다. 아이들의 코묻은 돈을 도박빚 갚는다고 빼돌린 교사,
연세도 지긋하신 분이 손녀같은 여자애들을 노골적으로 만지작거려서 변태로 소문이 자자했던 교사(선생님이란 말을 붙이기 싫어서 교사라고 쓴다)도 있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이 아이들에게 어떻게 하면 내가 도움이 될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하고 노력하는 선생님들이 훨씬 많다.
나의 은사님께 감사하고, 오늘도 노력하는 내 친구와 같은 많은 선생님들께 감사드린다.
물론 이 친구는 황금연휴에 학교장 재량으로 일주일에 이틀만 일하고 다시 주말이라고 매우 행복해하고 있다.
그리고 출근하기 싫다고 또 징징댄다. 에잇 일년에 방학 두달이나 쉬는 주제에. 쳇
뭐 살다보면 그런 소소한 즐거움도 있어야지. 그렇지 않은가?
* 라벤더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4-06-26 13:28)
* 관리사유 :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