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에 고향집에 다녀 왔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거실에 누워 TV를 보고 있는 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 왔다.
"어. 형. 나 왔네"
형이 고개를 슬쩍 들어 내 얼굴을 보더니
"이 새퀴가. 어른을 봤으면 인사를 해야지"
라고 날 반겨 준다.
뭐지? 방금 내가 한 것은 인사가 아니었나? 혹시 내 인사에 혼이 실리지 않았나?
이렇게 집에 온지 2초만에 욕을 얻어 먹었다.
형 하고는 나이차가 좀 나는지라 늘 어렸을 때부터 형에게 늘상 당하기 일쑤 였는데...... 곰곰 생각해 보니 이제 나도 적은 나이가 아니고 언제까지 이런 푸대접을 받을 수는 없겠다 싶었다.
까딱하다가는 환갑 지나서까지 당할터였다.
안되겠다. 뭔가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
주방에 들어섰다.
엄마가 큰 물고기를 가지고 회를 치고 있었다.
"어. 왔냐? 씻어라. 회 한접시 하자."
"아따. 엄마. 지금 방사능 땜에 물고기 먹으면 안된당께. 내 말하니까는"
"잉빙하네. 그러면 세상에 먹을거 하나도 없어"
아. 난 왜 우리집에서 이다지도 발언권이 약할까.
내가 첫사랑에만 성공했어도 지금쯤이면 한 가정의 가장이 되어 있었을텐데...... 우리집에선 난 권위따윈 없고 그냥 막둥이다.
안되겠다. 뭔가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
이런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엄마가 회 한점을 들어 내 입에 넣어준다.
내키지 않았지만 한점 먹어 본다.
오랜만에 먹어서인지 무지하게 맛있다.
"야. 나가서 술 하나 사와."
거실에서 들려오는 형의 목소리
회가 목구멍에 넘어가려다 콱 막힌다.
난 언제까지 심부름을 도맡아서 해야 하는가.
안되겠다. 뭔가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
털레털레 슈퍼에 가서 소주랑 맥주를 몇병 집어든다.
소주3병, 맥주3병으로 사려다 오늘 왠지 형을 보내 버려야 겠다라는 생각이 들어 소주를 5병 들었다.
뭐 항상 먼저 맛탱이 가는건 나였지만... 오늘은 마음가짐이 다르기에 보낼수 있을것이라 생각했다.
그래.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
집에 오니 회 세팅이 끝나 있었다.
나 혼자 안 먹는다 할 수는 없고 해서 오늘만 물고기를 먹기로 마음 먹었다.
술을 까려는데 형이 지그시 날 쳐다보더니 말한다.
"엄마. 야 좀 보소. 서울에서 쫌 살드만 서울 사람 다 되었네. 참이슬하고 하이트여"
엇. 그러고 보니 내가 사온 술이 그러했다. 무의식중에 집었는데......
원래 우리 동네는 잎새주하고 OB다. 이유는 없다.
아놔. 초반부터 기선을 제압 당했다.
횟감이 좋아서인지 아니면 엄마, 아빠의 웃는 얼굴을 봐서인지 술이 쭉쭉 들어간다.
술에 취하면 안돼. 라고 이를 앙다물고 있는데
조카 녀석이(형 아들) TV 앞으로 가더니 덩실덩실 춤을 춘다.
이 녀석이. 아직 어른들이 취하지도 않았는데 지가 분위기에 취해서 춤을 춰?
안되겠다. 조카 녀석에서 술자리 예법을 알려줘야 겠다.
이렇게 술이 한잔 두잔 들어가다 내 눈빛이 흐리멍텅 해질 때쯤
형이 나에게 술을 안 권하고 자작으로 술 먹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결국 내가 먼저 GG를 치고 일어났다.
아. 저 아저씨는 왜케 술이 쎈겨.
방으로 들어와 털썩 누웠다.
천장을 바라보며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할 사항들을 곱씹어 보았다.
이것도 해야되고 저것도 해야 되고... 아 왜케 많지?
하지만 엄마, 아빠 웃는 모습을 보았고
형하고 되도 않는 개그로 농담 따먹기 했고
조카 녀석의 재롱을 보았더니
만사가 귀찮아 졌다.
스르르 눈이 감기는데 역시 집에 오니까 좋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되겠다. 그냥 이대로 살아야 겠다.
* 라벤더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4-03-13 18:04)
* 관리사유 : 안 되겠네요. 이런 글은 추게에 있어야죠!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