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친구랑 만난지도 벌써 5년이 넘었다. 같은 한국인 친구라고 해도 5년이나 만남도 연락도 없다면 친구라고 부르기가 민망해지는 편인데, 내가 2008년에 일본에 일주일간 놀러가 함께 지냈던 것이 마지막이니 이젠 친구는 커녕 아는사이라고 하기도 좀 그렇지 않나 싶은 그런 친구. 그가 이번 겨울 한국에 놀러온다고 연락이 왔다. 알고보니 그 친구는 페이스북으로 한국인 친구들과 계속해서 연락을 했었다고. 내 소식은 종종 다리건너서 들었다고 했다. 그 친구와 나 사이에는 또 다른 친한 형님 한분이 계셨는데, 아마 그 형이 연락에 도움을 줬던 것 같다.
어쨌거나 미리 연락을 받은게 아니라 한국에 도착해서 모르는 번호로 걸려온 전화를 통해 다짜고짜 '선물 사왔어! 술먹자!'하고 불러내다니, 일본인들은 예의와 순서를 중요하게 여긴다는 말은 얘한테는 확실히 예외로 적용해야할 듯 하다. 하긴, 그렇다고 내가 불쾌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미리 연락을 했으면 어떻게든 일을 빼서라도 만나서 즐겁게 술먹고 놀았을 텐데 당장에 나오라고 하면 누구나 그렇듯 쉽게 시간을 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더구나 지금 하는 일의 특성상 미리 쉬는 날을 조절해서 근무교대를 짜 두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라, 결국 저녁비행기로 돌아가는 날에 잠깐 밥이나 먹기로 했다.
내 친구의 별명은 시부야의 이자까야 마스터. 그 커다란 번화가에 모르는 술집이 없다고 해서 붙여준 별명이다. 당시 일본으로 놀러갔을때 술자리 도중에 핸드폰을 가지고 계속해서 다음 술자리를 새 멤버들과 세팅하는 그의 능력은 정말 놀라울 정도였다. 막차가 끊겨도 한참 끊긴 시간까지 시부야 에서만 7차까지 매 회차 사람을 바꿔가며 놀았으니.. 그만큼 술자리에서 그의 매력은 상당한 편이었다. 다시 만나서 즐겁게 술 마실날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마지막 공항 나가는 날, 나는 비번을 받아 그와 함께 점심식사를 하기로 했다. 공항까지 가는 시간이 있어서 종각 숙소 근처의 고기집에서 삼겹살을 먹었다. 그 친구는 까먹을 뻔 했다며 쇼핑백에 따로 포장된 상자를 넣어 건네주었다. 선물이야. 솔직히 굉장히 감동했다. 5년간 별반 연락도 없는 사이였는데 선물까지. 게다가 그는 밥값마저 자기가 계산하겠다며, 일본은 병역이 없기 때문에 자긴 이미 3년차 회사원이라고, 학생인 내가 돈을 쓰게 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밥까지 얻어먹는건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것 같아서, 억지로 내가 계산을 했다.
공항버스 리무진을 기다리며, 그 친구는 내게 페이스북을 하기를 권유했다. 페이스북은 워낙 여기저기 사람과 얽혀서 별로 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보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씨익 웃으며, 선물은 집에가서 뜯어보라는 말을 남기고 인천공항을 향해 떠났다. 대체 무슨 선물일까? 무게가 아주 가볍지도 않고 아주 무겁지도 않은게, 과자나 그릇은 아닌 것 같고. 상자 크기가 딱 전자제품 같기도 한데.. 게임기? 괜시리 기대감이 커져갔다. 한시라도 빨리 집에 가서 선물을 뜯어보고 싶었으나, 저녁에는 또 다른 약속이 있어서 꾹 참고 다음 약속장소로 향했다.
서울대입구 사거리에 나가자, 그녀는 왠일로 학교 과잠이 아닌 꽤 여성스런 사복차림이었다. 사실 교내에서 볼때는 겨울에는 과잠, 나머지는 약간 캐주얼한 느낌의 티셔츠,청바지,후드티,츄리닝 등으로 설명할 수 있는 스타일의 아이였기에 더욱 생소한 느낌이긴 했다. 오랜만에 만나는데다 옷까지 예쁘게 입고 나와서 그런가 약간 설레였다.
그녀와 처음 알게된 건 학교에서의 작은 해프닝 때문이었다. 나는 당시 서울대에서 2년정도 일을 했었는데, 우체국까지 상자에 책과 서류를 가득 담아 낑낑대며 언덕길을 내려가던 그녀의 짐을 들어주면서 알게되었다. 평소에 그렇게 오지랖이 넓은 것은 아니었지만, 몇걸음 가다 서류가 후두둑, 몇걸음 가다 책이 투투둑. 결국 우체국까지 둘이 짐을 나눠 가져가며, 그녀는 정말 고맙다고 자기가 밥을 사겠다고 연락처를 교환했고, 그렇게 가끔 학식당에서 그녀의 공강시간에 같이 밥먹는 사이가 된 셈이다. 서울대 일거리가 끝나고 나서는 한 번도 못 만났었고, 학교에서만 만나다가 밖에서 보니 느낌이 좀 새롭긴 했다.
근처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함께 저녁식사를 하고도 시간이 꽤 남았기에 영화라도 볼래요? 하고 넌지시 말을 건넸다. 그러자 그녀는 고개를 젓더니, 술이나 한잔 더 해요. 하고 일어섰다. 화장실에 들렸다가 계산대로 갔더니, 그녀는 자기에게 할인 카드들이 있다며 이미 계산을 싹 해버린 것이다. 어머나.....그 늠름한 뒷모습에 또 다시 한번 설레였다. 가게를 나가기 전에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들었는데, 아차. 선물! 그런데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자기가 챙겼다고 쇼핑백을 건네주었다. 이럴수가, 설레이는 이마음은 뭘까 왠지 잠을 이룰수가 없어 하는 BGM이 귓가에 울리기 시작했다.
흔하디 흔한 프렌차이즈 술집에 단 둘이 앉아, 우리는 한잔씩 술을 기울였다. 그녀는 술이 조금씩 들어가자 약간은 콧소리가 섞인듯한 목소리로 애인은 생겼냐, 크리스마스는 어떻게 보냈냐, 맨날 인사치례용 카톡만 보내지 말고 자주 연락좀 하고 지내자는 등의 아쉬운 이야기를 토로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이미 그 상황에서 점점 얘랑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갈 수 있을까 하는데에 정신이 팔렸기에 그 아이의 말에 적극적으로 동조하며 조금씩 다가서려 했다. 남자친구를 왜 안만드냐거나, 그렇게 괜찮은데 왜 남친이 없을까 따위의 간보는 멘트들을 던지며 조금씩 간질거림이 올라오고 있었다.
분위기가 솔찬히 달아오를 무렵, 그녀는 취기어린 말투로 근데 그 쇼핑백 선물 뭐에요? 라고 물었다. 아까 식사를 하며 일본인 친구에게서 받았다는 것은 이야기 했는데, 나도 내용물을 몰랐기에 잘 모른다고 했다. 친구가 나중에 뜯어보라던데.. 5년이나 연락이 안된 내게 이런 선물까지 챙겨다 주는걸 보면 진짜 좋은 사람인것 같다는 칭찬을 늘어놓으며 그녀는 여기서 선물을 열어보지 않겠냐고 물었다. 솔직히 나도 무슨 선물인지 상당히 궁금했기 때문에 흔쾌히 승낙했다.
쇼핑백을 열고 선물을 꺼내었다. 한 손으로 휙휙 흔들어 보았는데 별 소리는 나지 않았다. 뭘까 하며 조심스레 포장을 뜯기 시작했다. 그러자 포장지 너머로 플라스틱의 차가운 느낌과 비닐의 미끌거림이 느껴져서 포장지 사이로 그것만 뾱 하고 꺼냈다. 그리고 난 눈이 두배쯤 커져 재빠르게 등 뒤로 그것을 숨겼다. 내가 잘못 본게 아니라면 그건 AV였다. 어떤 배우인지 어떤 표지인지도 모르지만 아무리 어두침침한 술집에서 술이 좀 들어갔다고 해서 그 AV표지에 실리는 살색 젖가슴을 못 알아보지는 않으니까. 그 애는 대체 뭐길래 그리 급하게 숨기냐며, 영화같은거 아니냐고 내게 손을 뻗었다. 난 양손으로 그 dvd를 재빨리 가방속에 밀어넣고 어색한 웃음으로 무마했다. 하하, 아 이거. 그러니까.. 그러자 앞에있던 그 애는 눈을 흘기며, 뭐 야동씨디라도 되나봐요~ 하고 웃었다. 철렁 하고 가슴이 주저앉는 느낌이었지만 어색한 웃음만 지었다. 선물이 아니라 사다달라고 부탁한거 아니에요? 하고 장난스레 웃는 그녀에게 난 손사래를 치며 아니라고 변명했다.
그런데 중요한건 아직 선물이 다 나온게 아니었다. 왠지 느낌이 안좋아서 선물을 다시 쇼핑백에 넣으려고 했는데, 그녀는 재빨리 뜯다 만 선물을 낼름 가져가서는 '이건 내가 확인해볼게요' 하고 열린 포장지 안을 쳐다보는 것이다. 뭐 솔직히 나도 벌써 20대 중반이고, 그녀도 20대 초반은 이미 지난 나이였기에 야동cd가 더 나온다고 해도 이미 어느정도는 무마될 느낌이 있어서 어떻게든 되겠지 라는 생각이 들었고 난 적당히 안절부절하며 말리는 척을 했다. 그런데 그녀는 한참 그 포장지 안을 들여다 보더니, 뭔지 모르겠네.. 이거 그냥 포장지 뜯을게요? 하면서 조금씩 포장지를 뜯었다. 포장지 너머로, 분홍색과 녹색등의 컬러풀한 일본어 글자들과, 왠 애니메이션 캐릭터 같은 얼굴이 붙은 상자의 끝부분이 드러났다. 나는 아, 피규어같은건가? 난 애니메이션 좋아하지도 않는데 하며 안도했다. 그래, 친구가 av는 장난친거고 저게 진짜 선물인가보다. 애니메이션 강대국이니까 일본은.. 그러나 그것은 너무 성급한 결론이었다. 포장지를 다 뜯은 상자의 겉면에는, 한 애니메이션 여자캐릭터가 교복을 입고 있었고 그 옆에는 세븐틴 이라는 글자가 적혀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여성의 자궁부 구조 단면이..... 후. 그래, 그것은 그 유명한 '보르도 세븐틴 에볼루션'이라는 남성용 성인용품이었다. 이게 뭔지 궁금한 사람이 있다면, 구글을 통해 검색해보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나는 정말 전성기 무하마드 알리의 속도보다도 빠르다고 느껴질 만큼 그녀에게서 그 상자를 낚아챘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 말도 잇지 못하고 얼어있었다. 그래. 그녀는 인문학 전공이었고 일본어실력은 두 말할 것도 없이 뛰어났다. 그때의 그 분위기를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황급히 상자를 쇼핑백 안에 꾸겨넣고, 그녀와 나는 어떤 일종의 합의된 침묵을 지켰다. 하루종일 일본인 친구에게 가졌던 호의가 악의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그때 문득, 2008년에 그 친구와 아키하바라 관광을 갔던게 떠올랐다. 아키하바라의 어떤 건물은 성인물만을 취급하는 곳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온갖 av타이틀들과 성인용품들이 엄청나게 많았다. 그때 그 친구에게, 다음에 한국 놀러올때는 이런것좀 사다줘. 하며 장난을 쳤던 기억. 아, 제기랄. 일본의 최고 명문대중 하나인 게이오 대학 출신 다운 기억력이다 XX...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마치 그게 없는 일 처럼 적당히 무마시키며 지나갈 수 있었던 것 같다. 물론 그 만남뒤로 그 애와 다시 만난 적은 없다. 그리 오래되지 않았으니까 싶으면서도 차마 다시 약속을 잡자니 도무지 용기가 나지 않아서.. 당연히 나는 아직도 여자친구가 없다. 어쨌거나 그 세븐틴의 상자와 포장용기는 그날 바로 싸그리 버려버렸다. 하지만 내용물은 그러니까 그 강렬한 호기심 때문에 차마 버리진 못했다. 썸녀는 없어지고 세븐틴은 남고..비참하다. 하지만 선진과학기술이란 언제나 배움의 대상이 아니던가. 게다가 어쨌거나 친구의 성의가 있는데.. 물론 그러한 최첨단 과학기술 학습의 내용은 이 글과는 주제가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성진국의 문화란 참으로 대단하다고, 친구의 기억력은 그보다 좀 더 위협적이라는 것만을 기술하려한다. 그래, 이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 라벤더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4-03-05 14:10)
* 관리사유 :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