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만의 군대만 있으면 충분 합니다.
621년 호뢰관 전투 虎牢之戰 Battle of Hulao - 619년 11월, 당나라는 최악의 형세에 놓여 있었다. 수나라 말기의 대혼란 시기에 기세좋게 거병한 것은 좋았으나, 돌궐의 지원을 받는 군웅이었던 유무주 - 송금강의 공세에 산서의 전 지역을 잃어버린 풍전등화와 같은 상태였던 것이다. 유무주 - 송금강의 부대가 미친듯이 하동으로 몰려오는 상황에서, 단 3만의 병력을 이끌고 나선 미래의 당태종 이세민은 그들을 물리치고 산서 전지역을 수복한 후, 쉴틈도 없이 하남으로 남하하였다. 당대 최강의 군웅 왕세충을 상대로 치열한 전투 끝에 그를 낙양 성내에 가둔 이세민은, 그러나 하북의 두건덕이 왕세충을 돕기 위해 남하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절체절명의 상황이었지만, 되려 이세민은 왕세충을 낙양에 포위한 채 병력을 나눠 그 잘게 쪼개진 병력으로 호뢰관에서 두건덕의 대군을 격파하였다. 단 한번의 출정으로 중원을 평정한 것이다.
"몰락한 왕조의 지지자들이 부하라와 소그다니아, 그리고 페르가나에서 당군의 원조를 받아 반란을 일으켰으나 사마르칸트 지사 즈이야드 이븐 사리프에 의해 진압당했다."
751년 탈라스 전투 怛羅斯會戰 Battle of Talas - 중화문명의 당과 이슬람 문명의 압바스 왕조가 충돌한 중세 세계의 이례적인 케이스. 당나라의 지휘관 고선지는 파미르 고원을 넘나드는 진군을 계속하고 있었고, 개원 연간 당현종 치세의 번영은 이를 가능케 해주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탈라스 전투에서 패배함으로서 고선지 개인으로서도, 그리고 당 제국으로서도 더 이상의 서진은 저지되고 말았다. 그러나 끝이 없을것 같던 당나라의 서진이 종결되었다는 현재의 의미와는 달리, 이 전투는 당시로서는 그리 큰 사건이 아니었다. 당나라의 사료는 탈라스 전투를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을 뿐이며, 압바스 왕조 측에서도 우마이야 왕조의 잔당이 당군을 끌어들여 일으킨 소란 정도로만 여겼을 뿐이다.
"방사고와 갈종주는 내 적수가 되지 못하니, 공이 친히 와서 결전을 해보시구려."
879년 청구(淸口)의 전투 - 당나라 말기의 군웅 쟁패에서 가장 앞서 나가던 군웅인 주전충은 막강한 군단을 거느렸고, 이제 남하하여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려는 야욕을 보였다. 마침내 주전충의 수하 방사고가 7만의 대군을 이끌고 움직이기 시작하자, 회남은 두려워 하며 진동하였다. 그러나 양행밀은 자신의 3만 군사로 적군을 모조리 격파하여 살아서 돌아간 병력은 1천이 되지 못하였다. 이로서 주전충의 남하는 저지되었고, 강남은 여러 소국들이 난립하는 형태가 좀 더 오랫동안 지속되게 되었다.
"이극용은 죽었으나 이아자 같은 아들이 있으니 죽었다고 할 수 없겠구나. 아들을 낳는다면 실로 이아자와 같아야 한다. 나의 아들들은 개, 돼지에 지나지 않으니……"
908년 협채(夾寨) 전투 - 908년 진(晋)의 지도자 이극용이 사망할 무렵, 이극용의 적수였던 후량의 주전충은 그를 궁지에 몰아 넣고 압박을 가하면서, 노주를 포위하고 있었다. 위태로운 상황에서 이극용의 후계자가 된 이존욱은 곧바로 말을 달렸다. 협채라는 요새를 세우고 노주를 공격하던 후량의 군대는 눈 깜짝할 사이에 격파되었으며, 그 순간 시대의 바람은 급변했다. 이존욱의 위풍당당한 모습을 본 주전충의 탄식처럼 후량은 이후 단 한번도 이존욱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이존욱은 후당을 건국하여 925년까지 후량, 전촉, 연, 기나라를 모조리 진의 영역에 포함하였고, 형남에도 종주권을 가졌으며 거란 야율아보기의 남하를 수차례 저지하였다.
"제가 군사를 주십시오. 만일 성공하지 못하면, 그때 퇴각해도 늦지 않습니다."
979년, 고량하 전투 高梁河之戰 - 오대 후진의 석경당이 연운십육주를 거란에 팔아먹고 황제가 된 후부터, 연운십육주의 수복은 중원의 군주들에게는 하나의 과제와도 같았다. 야망에 불타던 송나라의 태종은 979년 요나라의 위성 국가이던 북한을 멸망시켰으며, 그 기세를 타고 곧바로 요나라를 공격하여 유주를 함락시키기 직전의 형세가 되었다. 이에 요나라 황제인 경종은 유주를 포기할 마음을 먹었으나, 야율휴가는 이를 만류하고 병력을 얻어 공격을 감행, 송나라 군에게 재앙을 안겨주었다. 연운십육주를 수복하겠다는 송나라의 야망은 여기에서 종결된 셈이나 다름 없었다.
"신명(神明)께서 내게 경고하시는구나."
1114년 출하점전투 出河店之战 - 비록 금나라와의 전쟁에서 요나라의 병력 동원력에 대한 기록은 상당히 오락가락하고 부풀려져 있어 믿기 어렵다고 해도, 1114년과 1115년 무렵에 벌어진 아골타의 전투가 경이로운 수준이었음은 부정하기 어렵다. 단 몇번의 전투로 동북아시아의 강국이었던 요나라는 멸망으로 길로 접어들고 말았고, 그 시작은 바로 출하점 전투였다.
"영웅의 삶은 마땅히 왕의 패업이 있을 뿐, 비단옷이 여기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1041년 호수천 전투 好水川之战 - 서하의 이원호는 번(番 : 오랑캐)과 한의 문자 모두를 유창하게 사용할수 있었고, 호쾌한 성격에 깊은 지략을 갖춘데다 그림을 좋아했고 실로 걸물이라 말 할 수 있는 사내였다. 넘치는 야망으로 황제가 된 이원호는 천수예법연조(天授禮法延祚)라는 요란한 연호를 사용했고, 이는 황제국으로 군림하는 송으로서는 좌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송나라의 장수 임복은 이를 물리치기 위해서 군사를 이끌었지만, 서북의 지리를 속속들이 잘 알고 있는 이원호는 호수천의 싸움에서 송나라군을 전멸시켰다. 이로 인해 동아시아의 국제 역학 관계는 요 - 서하 - 북송 - 고려로 이어지는 복잡한 형태로 전개되게 되었다.
"그대들이 고립된 성에서 저항하기를 어언 5년이다. 그대들의 주인이 힘을 펼 수 있는 상황이라면, 물론 그것도 좋다. 허나 세력은 다하고 지원도 끊겼다. 그대들은 수만의 백성을 어찌할 것인가?"
1267년 ~ 1273년 양양 공성전 襄陽之戰 Battle of Xiangyang - 역사상 가장 장렬한 공성전 중 하나. 초원에서 시작된 몽골의 폭풍은 세계를 집어 삼켰다. 1270년이 되기전까지 몽골은 막북, 금, 서하, 서요, 토번, 중동, 대리, 고려, 동유럽을 굴복시켰으며 세계의 절반이 그들의 손에 있었다. 전세계가 몽골의 별동대에 유린되는 동안 가장 앞선의 송나라는 40여년의 세월을 버텼으나, 야심만만한 쿠빌라이 칸의 시대에 이르러 이제는 한계에 달하였다. 몽골군의 기마와 투항한 한족의 부대, 중동에서 도착한 회회포(回回砲) 의 앞에서 양양성은 고립되어 5년을 버텼으며, 그 5년은 하루하루가 절망과 사투의 세월이었다. 더 이상의 지원도, 원군도 기대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을때, 양양성의 수장 여문환은 백성을 살리기 위해 항복하였다.
"진우량은 태조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포위를 풀고 파양호(鄱陽湖)에서 역습하여 싸웠다. 진우량의 군대를 스스로 60만이라 칭했는데, 큰 전선을 이어 진(陣)을 형성하고, (배) 누의 높이가 10 여장이나 되어서, 서로 이어진 것이 수십이나 되었으며, 깃발과 창, 방패들이 바라보면 실로 산과 같았다."
1363년 파양호 대전 鄱陽湖大戰 Battle of Lake Poyang - 중국 역사상 극히 보기 드물게 당대 최강의 세력들이 모든 전력을 수군에 기울여 맞붙은 중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수전. 진우량은 압도적인 거선들을 동원하여 주원장을 압박하였으나, 갑자기 불어온 동북풍은 오히려 거선들이 화공의 표적이 되게 만들었다. 전투에 앞서 퇴로를 막아 놓은 주원장의 기민함 탓에 진우량은 탈주조차 불가능 했으며, 거대한 파양호에 있으면서도 늪지에 잘못 들어간 어린아이처럼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한고조는 열 번 싸워 아홉 번 졌는데, 끝내 천하를 가졌소. 우리는 거사을 일으키고 연이어 이길 수 있었소. 약간 불리한다고 계속 돌아간다면, 결국엔 남을 섬길 것이오!”
1402년 5월 정난의 변 靖難之役 Jingnan Campaign 마지막 한달 - 명나라 초기를 뒤흔든 거대한 내전인 정난의 변은 시종일관 황제군의 압도적인 우세 속에 전개되었다. 중국의 부는 강남에 있었으며 그 강남을 장악하고 있고, 사실상 전중국을 판도에 넣고 있는 황제군은 계속해서 수십만의 대군을 동원했으며 아무리 격파되어도 마르지 않는 셈과 같았다. 그러나 절대적인 전력의 열세 속에서도 정난군은 총지휘관인 연왕 주체의 카리스마 아래 굳게 뭉쳐 있었으며, 황제군이 정보의 혼선으로 잠시 전력의 공백기가 생긴 그 순간, 그 조그만 빈틈을 기어코 놓치지 않았다.
"남쪽으로 도망하여 멸망한 송의 예를 보지 못했는가? 북경은 반드시 사수해야 한다!"
1449년 10월 북경 공방전 - 토목의 변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대사건으로 명나라는 엄청난 국가 위기 상황에 놓여졌다. 오이라트족의 손에 황제 정통제가 사로잡힌 상황에서, 대신들은 패닉을 일으키며 강남으로 도주할 계획까지 내놓았으나 병부시랑 우겸은 이를 저지하고 사태를 수습한 다음, 모든 전력을 북경 한 곳으로 모으기 시작했다. 이윽고 도착한 오이라트의 에센은 북경을 수차례 공격해보았지만 명나라의 화기를 도저히 당해낼 수 없었다. 만일 이 싸움에서 에센이 승리하고 북경이 함락되었다면, 중국은 원나라에 이어 또다른 유목제국의 지배 하에 놓이고 말았을 것이다.
"횡시(橫屍)가 산야를 덮었다. 피는 흘러 도랑을 이루었다. 기치(旗幟), 기계(器械), 그리고 죽은 사졸들이 혼하를 덮으며, 마치 물이 없는 듯했다."
1619년 사르후 전투 薩爾滸之戰 Battle of Sarhu - 임진왜란은 여진의 누르하치에게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절대적인 강국 명나라가 조선의 상황에 신경을 곤두세운 사이, 누르하치의 만주집단은 급속도로 거대해졌고, 이윽고 명나라는 이 늑대들을 서둘러 눌러놓지 않는다면 큰 재앙에 직면하고 말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명나라의 거대한 규모의 원정군은 전력만 보자면 후금의 군단을 격파하고도 남았으나, 지휘관들의 졸렬한 지휘 탓에 분산되어 각각 호랑이 아가리 속으로 들어가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노련한 누르하치는 승리의 냄새를 놓치지 않고 따라가 만주족의 기동력과 각개격파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짐은 25세부터 병을 일으켜, 정벌한 이래 싸워서 이기지 못한 적이 없으며, 공격하여 극복하지 못한 적이 없었다. 어찌, 이 영원 한 성을 끝내 떨어뜨리지 못하는가.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1626년 영원성 전투 宁远之战 Battle of Ningyuan - 사르후 전투의 승리 이후 후금의 기세는 가히 노도와 같았다. 요동의 중심지인 요양이 무너졌고, 50여개의 요새와 70개의 성이 함락되었다. 요하 동쪽에서 명나라의 영역은 급속도로 사라지고 있었으며, 후금의 기마대가 산해관에 이르는것은 시간문제처럼 보였다. 그러나 명나라에는 원숭환이 있었다. 산해관에서부터 100km 앞 거리에 영원성을 새로 축조한 그는 16만에 가까운 누르하치의 엄청난 부대에 최대로 잡아 2만도 되지 않는 병력으로 맞섰다. 그러나 그에게는 홍이포가 있었다.
"행군의 제승(制勝)이나 이(利)는 신속 함에 있다. 짐은 적이 이를 듣고 곧 달아날까 두려울 뿐이다. 만약 달아나지 않는다면, 이를 깨는 것은 개를 풀어 짐승을 쫒는 것처럼 얻기 쉬운 일이다."
1641년 금주 전투 - 청나라의 군대가 산해관을 돌파하려면 그 전에 뚫어야 하는 것이 바깥의 네개 성인 송산, 행산, 금주, 탑산의 방위 시스템이었다. 산해관은 이들 네 성과 유기적으로 연락을 취하고 있었기에, 성 하나를 함락시키는것조차 쉽지가 않았다. 이를 돌파하려는 청나라에 맞서 명나라는 홍승주를 사령관으로 하는 10만이 넘는 대군을 구성했으나, 지구전을 원한 홍승주와는 달리 이미 바닥이 난 국가의 재정 상태는 그를 억지로 야전에 나서게 만들고 말았다. 이를 절호의 기회로 여긴 홍타이지는 코피를 흘리면서도 말을 달려 현장으로 출동했고, 마침내 5만 이상의 병력을 격파하고 홍승주를 항복시켰으며, 4개의 성을 모조리 함락시켰다. 명나라의 최후 전력마저 소멸해버린 것이다. 이제 남은것은 오직 산해관의 오삼계 뿐이었다.
"만 마리의 말이 튀어 올랐다."
1644년 일편석 전투 一片石之战 - 오삼계의 명나라 잔존 부대와 도르곤의 청나라 군이 힘을 합쳐 대순 황제 이자성을 격파한 전투. 명나라가 멸망한 시점에서 천하의 세력은 북경을 차지한 이자성, 산해관에서 버티고 있는 오삼계, 중국 진출을 노리는 청나라의 삼대 세력이 되었다. 청나라와 이자성은 각각 오삼계를 끌어들이려고 노력했으나, 오삼계가 선택한 것은 청나라였다. 그의 애첩 진원을 이자성의 부하에게 빼앗긴것도 그 원인 중 하나였을 것이다. 이로서 그토록 열리지 않던 산해관은 성 밖이 아닌 성 안에서 열렸으며, 양군의 연합은 이자성을 격파하여 몰락시켰다.
"친히 대군을 이끌고 벽력처럼 그를 쫒을 것이다. 그는 다시는 달아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확실히 가르단을 절멸할 것이다!"
1696년 차오모드 전투 -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 중에 한 사람인 강희제는 오이라트 준가르의 가르단을 물리치기 위하여 수차례 몽골 원정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과 수하 장수 피양구의 부대로 양군을 나누어 가르단을 조심스레 토끼몰이 하기 시작했으며, 이 과정에서 가르단과 강희제, 피양구 모두는 극도의 보급 부족으로 인해 서로 말라죽기 직전까지 몰리게 되었다. 모든것이 허사로 돌아가려는 듯 할때, 6월 2일 피양구의 1만 4천 부대는 극적으로 가르단의 도주로를 막아세웠고, 마침내 그를 파멸시키는데 성공했다. 가르단의 죽음은 하나의 신호탄이었으며, 이후 100여년간, 지난 수천년의 세월동안 강력한 한 축으로 존재해왔던 유목 세계는 종말을 향해 달려갔다. 더 이상 그들의 말은 절대적인 도주 수단이 되지 못했으며, 초원 역시 적의 공격을 피할 수 있는 안식처가 되지 못하였다.
"……그 원인이 이다지도 부정한 전쟁, 이다지도 영속적인 불명예가 될 전쟁을 나는 지금껏 알지 못했고, 읽은 적도 없습니다. 지금 나와 의견을 달리하는 신사는 광저우에서 영광에 가득 차 휘날렸던 영국 국기를 언급했습니다. 그러나, 그 국기야말로, 악명 높은 금제품의 밀수를 보호하기 위해 펼쳐진 것입니다. 현재 중국 연안에 게양되어 있는 것처럼만 그 깃발이 휘날린다면, 우리는 그야말로 그것을 보기만 해도 공포를 느끼고 전율하지 않을 것입니다."
1841년 진강전투 - 가장 추악한 이유로 일어났다고도 이야기되는 1차 아편 전쟁의 종말은 진강(鎭江)에서 마무리되었다. 파죽지세로 진군하는 영국군은 7천여명의 병력이 장강으로 진입해 진강으로 진군했고, 이미 쇠퇴하여 몰락해가고 있던 청나라의 진강 방어 부대는 2,000여명도 되지 않았다. 진강을 수비하던 주방만주기병 부도통(副都統) 해령(海齡)은 갖은 힘을 다해 저항하여 아편전쟁 기간 영국군을 막아선 청나라 지휘관 중에서는 가장 많은 피해를 안겼으나, 그렇다고 해서 승패를 바꿀 힘은 없었다. 진강이 무너지자 청나라는 항복 선언을 했다. 중화제국이 세계의 중심이라 자부하던 시대는 이제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이다.
"유주가 즉위한 이후, 병사들에게는 줄 곡식이 없었고, 군대는 그야말로 혼돈상태였다……군주는 어렸고, 판단할 능력이 없었다. 문관과 무관을 막론하고, 천경에는 해결책을 생각해낼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1864년 남경 공성전 - 이 해 7월 19일, 천지를 뒤흔듯한 소리와 함께 마침내 남경 성벽의 한 쪽이 무너졌고, 청군은 이를 통해 성 내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성내의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이 학살당했다. 이로써 거병의 기치를 세운 이래 전중국을 뒤흔들어 2,000만명이라는 어마어마한 사상자를 낸 태평천국이 최후를 맞이했다. 태평천국을 상대하는 과정에서 청나라는 군벌의 존재가 생겨났으며, 그 영항을 직, 간접적으로 받은 혁명가들도 탄생하였다.
"정원은 아직 가라앉지 않았습니까?"
1894년 9월 17일 황해해전 黃海海戰 Battle of the Yalu River - 평양 전투와 함께 청일전쟁의 마지막을 장식한 전투. 청나라 북양 함대군은 일본의 연합함대에 비해 중포는 두배 이상을 갖추었으나, 배수량, 철갑선 숫자, 평균 속력, 실제 마력, 속사포 등에서는 크게 밀렸다. 특히 속사포는 청군이 6문이었지만 일본군은 67문을 갖추고 있었다. 또한 불행하게도 기함이었던 정원은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신호 마스트가 포탄을 맞고 부러졌는데, 해전에서 지시를 내릴 정원의 신호 마스트가 부러졌기에 북양 함대는 오합지졸이 되어 서로 각자 싸울 수 밖에 없었다. 결국 황해해전은 청나라의 대패로 끝났고, 이는 전중국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
아편전쟁의 패배는 대부분의 중국인들에게 해프닝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들에게 있어 이는 그저 과거에도 종종 있었던 이민족의 침략이나 다를바가 없었다. 그러나 자신들 문명의 수혜자로 밖에 생각하지 않았던 일본에게 패배했다는 사실은, 가장 보수적인 유학자라고 할지라도 무엇인가 크게 잘못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청일전쟁의 패배 이후 중국의 근현대사는 숨가쁠 정도로 빠르게 전개된다.
"당, 국가의 존망, 이념의 성패, 인민의 화복, 동지들의 영욕은 모두 이번 전쟁에 달려 있다."
1928년 4월 7일 북벌 北伐 Northern Expedition 산동 공격 - 장제스의 상해 사변 이후 잠시 분열되었던 북벌군은 다시 수습되었고, 1928년 1월 8일 장제스는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에 취임했다. 장제스, 풍옥상, 염석산, 이종인, 양수장으로 구성된 북벌군은 노도와 같은 진격을 감행하여 손전방, 오패부, 장종창등을 모두 물리쳤다. 이제 최후로 남은것은 80만의 군대를 가지고 있는 최강의 북양계 봉천 군벌 장작림이었으며, 4월 7일 북벌 총공격령을 내린 이후 산동의 봉천군은 산이 무너지듯 고꾸라졌다. 장작림은 결국 패배를 직감하고 산해관 밖으로 이동했으며, 이로서 원세개의 시대로부터 중국을 장악하던 북양군벌의 힘은 거의 꺾이게 되었으나, 중국의 혼란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었다.
"동북야전군은 피로와 소모에 구애받지 말고, 추위와 기아에 굴복하지 말것이며, 오로지 신속한 속도로 전군을 이끌고 입관, 화북야전군과 협력하여 화북의 국민당군을 포위 섬멸하라."
1948년 요심전역 辽沈战役 Liaoshen Campaign - 1948년 가을, 중국 공산당의 가장 뛰어난 군사 지휘관인 린뱌오는 돌연 공세로 전환하면서 금주와 장춘을 함락하고 11월 경에는 심양을 점령하였다. 이 한번의 전역의 승리로 100만이 넘는 린뱌오의 군대는 관내로 진입, 화북야전군과 합류하였다. 이후의 전쟁은 더 이상 전투라기보다는 일방적인 소탕전에 지나지 않았다. 양자강 이북 지역은 모조리 공산당에 손에 들어가게 되었고, 장제스는 최후의 결단을 내려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