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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13/08/07 16:52:31
Name 신불해
Subject 주관적으로 선정한 중국 역사상 35개의 주요 대전투.jpg
이런 종류의 게시물이 그렇듯 그저 주관적일 뿐입니다.




"용庸과 촉蜀과 강羌과 무髳와 노盧와 팽彭과 복濮의 사람들아, 그대들의 손창을 들고, 그대들의 방패를 나란히 하며, 그대들의 긴 창을 세우고, 내 훈시를 하리라."


BC 1046년, 목야지전牧野之战 , Battle of Muye - 중국 고대 세계를 결정 지은 전투이자, 소위 상주혁명(商周革命)이라는 고대 의식의 거대한 변화를 부른 전투. 이후 중국 문화에 비해 극도로 이질적인 상나라의 문화는, 이 전투로 인해 그 후 중국 문화의 원류가 되었던 주나라로 흐름이 바뀌게 되었다. 
 
 

 
 
 
 
"진나라의 공자는 어질고 따르는 자들은 모두 나라의 뛰어난 신하다. 만약 하늘이 바야흐로 이를 흥하게 한다면, 누가 하늘을 거스르겠는가?"
 
 
BC 632년, 성복지전城濮之战 Battle of Chengpu - 춘추 시대의 가장 거대한 역사적 흐름은 압도적인 전력으로 북진하는 남방의 패자 초나라와, 중원의 맹주로서 이를 저지하는 진의 대결이다. 성복의 대전에서 초나라는 진(陳) · 채(蔡) · 정(鄭) · 허(許)의 나라들을 연합하여 진군했고, 진나라의 문공은 천하의 패자로서 송(宋) · 진(秦) · 제(齊)를 연합하여 대결에 나섰다. 이전 초나라 왕에게 받은 은혜로 인해, 문공은 군대를 뒤로 물리고도 초나라군의 좌우를 붕괴시켜 승리에 거두었다. 중원의 패자가 초나라의 북진을 저지한 것이다.
 


 
 


"나는 죽어야 마땅하구나! 장평의 싸움에서 항복한 조나라의 수십만 군사를 속여 산채로 묻었으니, 이것만으로도 죽어 마땅하도다!"
 
 
BC 262 ~ BC 260 장평지전長平之戰 Battle of Changping - 문헌의 기록을 믿는다면, 중국의 역사는 물론 세계 역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전대미문의 대학살극. 전국시대 최강국인 진은 이미 다른 모든 열국을 압도하는 괴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염파 - 인상여 - 조사 등 뛰어난 인재를 가진 조나라는 격렬하게 진나라에 저항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에 미치지 못하던 조괄은 판단을 그르쳐 패배를 당하였고, 진나라의 사령관 백기는 수십만의 조나라 포로를 생매장하는 참극을 저지르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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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楚)의 전사들은 한 명이 열 명을 당해내지 못하는 사람이 없었고, 부르짖는 소리는 천지(天地)를 흔들었으며, 제후들의 군사들은 서로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이미 진(秦)의 군사를 깨뜨리고 항우(項羽)는 제후들의 장수들을 불러 보았는데, 원문(轅門)으로 들어오는 제후들의 장수들 중 무릎으로 기어서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감히 올려다보는 사람도 없었다."


BC 207년 거록지전巨鹿之战 Battle of Julu - 전국칠웅을 모두 병합한 통일 진나라의 종말을 알린 전투이자, 여러 군웅 중 하나였던 항우가 당대 최강의 세력으로 떠오르게 된 혈전. 이미 종말의 길로 치닫고 있던 진나라는, 최후의 명장 장한의 활약으로 마지막 저항을 계속하고 있었다. 장초를 무너뜨리고 위나라를 멸망시켰으며, 제나라의 왕을 죽이고 항량을 참살하며 무적의 기세를 이어가던 장한은, 그러나 항우의 초나라 군대에 저지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순간 춘추전국을 거치며 살아남았던 강국, 진나라의 멸망은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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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군이 퇴각하여 초군에게 쫓기게 되자, 수많은 군사들은 때죽임을 당했고, 그 중에 10여 만의 군졸들은 수수로 뛰어 들었다. 이로써 수수는 죽은 한군의 시체로 가득찼고, 물조차 흐르지 못하였다."


BC 205년 팽성지전彭城之戰 Battle of Pengcheng - 서초패왕이 되어 당대 최강의 세력으로 군림한 항우와, 이에 대항한 한왕 유방의 대결. 그러나 그 실체는 전투라기보다는 차라리 살육이었다. 제나라의 전역에 항우가 매달린 사이, 한신을 앞세운 유방은 삼진을 평정하고 관중을 장악하여 기세 좋게 팽성에 이르렀으나, 이윽고 귀환한 항우는 자신이 왜 패왕으로 군림하는지를 증명하였다. 초나라 군 3만과 제후연합군 56만의 차이는 문헌상 기록을 신뢰한다면 도합 19배에 가까운 차이가 나지만, 승자는 19분의 1 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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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은 산을 뽑고, 기개는 온 세상을 덮을 수 있지만, 시운을 못 만나니, 오추마는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구나. 아, 오추마가 앞으로 나가지 않으니, 어찌 해야 한단 말인가! 우미인이여, 우미인이여! 그대 또한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BC 202년 10월 해하지전垓下之战 Battle of Gaixia - 최초의 패배가 최후의 패배가 될 줄이야. 어마어마한 기세로 중원에 군림하던 항우는 그러나 지독한 독선과 아집, 좁은 시각으로 인해 자멸하였고 그 대착점에 존재하던 유방은 계속되는 전투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승부의 추를 점점 자신으로 옮겨놓고 있었다. 마침내 한신이 북방을 평정하여 그 추가 완전히 기운 순간, 유방은 팽월, 경포, 주은, 한신을 모조리 합류시켜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였다. 이 전투의 승리자가 초한쟁패를 종식시키고 고대 중국 세계를 확립시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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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땅히 번쾌(樊噲)를 참수형에 처해야 합니다! 일찍이 사십만의 장병을 이끌고 계셨던 고제(高帝)께서도 평성(平城)에서 곤경에 처하셨는데, 오늘날 번쾌는 오직 병사 십만으로 흉노(匈奴)를 유린하겠다고 호언장담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찌 가능하겠습니까?"


BC 200년 백등산 포위전白登之戰 Battle of Baideng -  동북아시아에서 유목제국의 시대를 활짝 열어 유목사의 흐름에서 실로 기념비적인 전기를 마련한 전투. 초한쟁패를 승리로 이끈 유방은 중국의 지배자로 군림하였으나, 한왕 한신의 반란을 격파하는 과정에서 흉노 묵돌 선우와의 대결로 끌려왔고 그 결과는 처참한 패배였다. 이후 흉노는 향후 100여년 동안 중국에 대한 우위를 확립하였으며, 전한은 권토중래를 꿈꾸며 치욕을 감수해야만 했다. 






"흉노를 아직 멸하지 못했는데, 저택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BC 119년 막북 전투 漠北之战 Battle of Mobei -  선조들이 남긴 과제를 그 후손들은 상상 이상으로 해결하여 현실에 구현해 내었다. 개국 후 80여년 간 '문경지치' 의 번영으로 힘을 키우고, '오초칠국의 난' 을 겪으며 중앙 집권을 확립한 전한은 그들이 저력이 어느정도인지, 이제 청동기 시대를 지나고 있는 고대의 주변 세계에 그대로 각인 시켰다. 한무제라는 야심찬 군주와, 그의 쌍검이었던 '위청' 과 '곽거병' 은 불가능한 임무를 압도적인 물자와 엄청난 행동력으로 실행에 옮겼고, 흉노의 선우가 패배하여 달아나고 곽거병의 기마대가 바이칼 호에 이르렀을때 그들의 과제는 완수되었다. 






"한번의 전투로 종묘를 온전하게 지키고 곧이어 천하의 광복을 가져오게 되었다. 광무제는 정말 불세출의 인물이다!"


23년 곤양전투 昆陽之戰 Battle of Kunyang - '42만' 과 '1만' 이 맞붙어 '1만' 이 승리한 유례없는 전투. 외척 왕망의 집권으로 유씨 정권은 무너졌고, 천하는 곧이어 대혼돈의 새도로 접어들었고, 이에 대항하는 군웅들은 우호죽순으로 들고 일어섰고 왕망은 이를 막기 위해 왕읍, 왕심으로 하여금 모든 전력을 다한 42만 대군을 이끌고 곤양으로 향하게 했다. 곤양의 수비 병력은 고작 9천여명. 이에 광무제 유수는 13명의 부하를 이끌고 성 밖으로 나서, 1만여명의 병사를 수습해서 귀환하였다. 그리고, 전설은 현실이 되었다.






“적이 등 뒤까지 오거든 그때 말하라!”


200년 관도대전 官渡之战 Battle of Guandu - 조조를 전중국 최강자로 만들어준 전투. 기주, 유주, 병주, 청주의 4개주를 다스리고 있던 원소는 가히 당대 최강의 군웅인 동시에 걸물이었고, 이에 비해 조조는 여러가지 불리한 여건하에서 등 뒤의 유표와 유비의 유격군까지 신경을 써야 했던 최악의 상태였다. 그러나 투항해 온 허유의 정보 제공으로 조조는 순우경이 지키는 오소의 식량고를 기습하게 되고, 원소의 보급선은 모조리 불타버리게 되었다. 운명은 조조를 향해 미소짓고 있었다.







"지금 조조는 큰 어려움을 제거하고 대략 평정을 끝냈습니다. 마침내 형주까지 격파하여 그 위세는 가히 전국을 진동합니다."


208년 11월 적벽대전 赤壁大戰 Battle of Red Cliffs - 아마도 동아시아인들의 역사인식에서 가장 유명할 전투. 관도대전에서 원소를 격파하고 그 아들들의 분쟁을 틈타 하북을 손아귀에 집어 넣은 조조는 이후 유표 사후 형주까지 장악하며 천하통일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평생에 걸쳐 지리한 패배를 반복하던 유비와 애송이와 같던 동오의 새 군주, 손권의 동맹은 난세의 간웅에게 씻을 수 없는 패배를 안겨주었다. 이로 인해 조조는 자신의 생에 천하 통일을 이루지 못했으며, '삼국지' 는 불멸의 이야기로 후세에 전해지게 되었다.







"어린 자식들이 마침내 적군을 물리쳤답니다."


383년 비수대전 淝水之战 Battle of Fei River - 하루가 멀다하고 나라들이 세워지다 멸망했던 오호십육국의 난세, 전진의 군주 부견은 '모든 사람들이 감동할 수 있는 감동의 정치를 하면 그들은 자연히 귀복할 것이다.' 라는 이상주의적 생각 아래 천하를 평정하였다. 부견은 자신이 공격 받았을때 돕지 않았던 전연을 돕기 위해서 기꺼이 지원군을 내었으며, 전량(前凉)을 멸망시키면서 전량의 군주 장천석을 극진하게 대접해주었다. 스스로도 저족이면서도 다른 민족 위에 군림하지 않고, 오히려 저족의 권력자들을 탄압하였다. "나는 이제 영웅들을 수교하여 사해를 맑게 하고자 하오" 라고 외친 부견은 한족, 강족, 저족, 선비족의 모든 종족이 한데 어우러진 세상을 꿈꾸던, 터무니 없을 정도로 대단한 이상주의자였다. 


 그러나 부견은 목표를 눈 앞에 두고 패망하였다. 최후의 목적인 동진을 멸망시키기 위해 100만의 대군을 동원했던 그는, 부대의 대혼란 끝에 패배하고 말았고, 부견이 몰락한 순간 그가 잘해주고, 관대하게 대해주고, 관용을 베풀었던 이민족들은 모두 그를 배신했다. 최후의 부견은 그가 관대하게 대해주었던 요장의 손에 목 졸려 죽고 말았다.  






 "승리다! 승리다!"


 507년 종리전투 鍾離之戰 - 양나라의 지휘관 위예(韋叡)는 몸이 허약해 말도 타지 못했지만 용맹한 지략가로 기습에 능했다. 북위 사람들은 이에 두려움과 경외심을 담아 위호(韋虎)라고 그를 호칭했다. 507년, 북위의 중산왕 원영과 맹장 양대안은 수십만 군사를 100만 대군이라 일컫으며 남하하였고, 그 목표가 된 종리성은 수비를 맡고 있는 장군 창의지만이 절대적인 병력의 열세 속에 힘겹게 공세를 제지하고 있었다. 지원병을 이끈 위예는 가마에 탄 채 지팡이를 두드리며 지휘를 하였고, 북위군이 회하에 놓은 다리를 엎어 버리며 적에게 무참한 패배를 안겼다. 참수당한 북위군이 10만, 익사한 북위군이 10만이었다. 종리성에서 이 모습을 지켜본 창의지는 "승리다! 승리다!" 라고 외치며 환호하였다.








"이만 만족함을 알고 돌아가는 것이 어떠한가?"


 612년 살수대첩 薩水之戰 The Battle of Salsu River - 고구려 역사상 가장 거대한 승리. 야심만만한 수양제는 100만이라는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침공하였으나, 고구려의 대응과 자신의 졸렬한 지휘 탓에 요동성 앞에서 시간만을 보내며 전역에 별다른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다. 결국 그는 난국을 돌파하기 위해 30만의 별동대를 구성하여 평양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 30만의 군대에 보급을 해야할 내호하의 수군은 고건무의 활약으로 격파되었기에, 30만의 군대는 속 빈 강정이 되고 말았다. 이윽고 후퇴하기 시작한 수나라 군이었지만, 을지문덕은 이들을 그냥 보내줄 생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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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만의 군대만 있으면 충분 합니다.


621년 호뢰관 전투 虎牢之戰 Battle of Hulao - 619년 11월, 당나라는 최악의 형세에 놓여 있었다. 수나라 말기의 대혼란 시기에 기세좋게 거병한 것은 좋았으나, 돌궐의 지원을 받는 군웅이었던 유무주 - 송금강의 공세에 산서의 전 지역을 잃어버린 풍전등화와 같은 상태였던 것이다. 유무주 - 송금강의 부대가 미친듯이 하동으로 몰려오는 상황에서, 단 3만의 병력을 이끌고 나선 미래의 당태종 이세민은 그들을 물리치고 산서 전지역을 수복한 후, 쉴틈도 없이 하남으로 남하하였다. 당대 최강의 군웅 왕세충을 상대로 치열한 전투 끝에 그를 낙양 성내에 가둔 이세민은, 그러나 하북의 두건덕이 왕세충을 돕기 위해 남하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절체절명의 상황이었지만, 되려 이세민은 왕세충을 낙양에 포위한 채 병력을 나눠 그 잘게 쪼개진 병력으로 호뢰관에서 두건덕의 대군을 격파하였다. 단 한번의 출정으로 중원을 평정한 것이다.






"몰락한 왕조의 지지자들이 부하라와 소그다니아, 그리고 페르가나에서 당군의 원조를 받아 반란을 일으켰으나 사마르칸트 지사 즈이야드 이븐 사리프에 의해 진압당했다." 


751년 탈라스 전투 怛羅斯會戰 Battle of Talas - 중화문명의 당과 이슬람 문명의 압바스 왕조가 충돌한 중세 세계의 이례적인 케이스. 당나라의 지휘관 고선지는 파미르 고원을 넘나드는 진군을 계속하고 있었고, 개원 연간 당현종 치세의 번영은 이를 가능케 해주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탈라스 전투에서 패배함으로서 고선지 개인으로서도, 그리고 당 제국으로서도 더 이상의 서진은 저지되고 말았다. 그러나 끝이 없을것 같던 당나라의 서진이 종결되었다는 현재의 의미와는 달리, 이 전투는 당시로서는 그리 큰 사건이 아니었다. 당나라의 사료는 탈라스 전투를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을 뿐이며, 압바스 왕조 측에서도 우마이야 왕조의 잔당이 당군을 끌어들여 일으킨 소란 정도로만 여겼을 뿐이다. 






"방사고와 갈종주는 내 적수가 되지 못하니, 공이 친히 와서 결전을 해보시구려."


879년 청구(淸口)의 전투 -  당나라 말기의 군웅 쟁패에서 가장 앞서 나가던 군웅인 주전충은 막강한 군단을 거느렸고, 이제 남하하여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려는 야욕을 보였다. 마침내 주전충의 수하 방사고가 7만의 대군을 이끌고 움직이기 시작하자, 회남은 두려워 하며 진동하였다. 그러나 양행밀은 자신의 3만 군사로 적군을 모조리 격파하여 살아서 돌아간 병력은 1천이 되지 못하였다. 이로서 주전충의 남하는 저지되었고, 강남은 여러 소국들이 난립하는 형태가 좀 더 오랫동안 지속되게 되었다.




"이극용은 죽었으나 이아자 같은 아들이 있으니 죽었다고 할 수 없겠구나. 아들을 낳는다면 실로 이아자와 같아야 한다. 나의 아들들은 개, 돼지에 지나지 않으니……"


 908년 협채(夾寨) 전투 - 908년 진(晋)의 지도자 이극용이 사망할 무렵, 이극용의 적수였던 후량의 주전충은 그를 궁지에 몰아 넣고 압박을 가하면서, 노주를 포위하고 있었다. 위태로운 상황에서 이극용의 후계자가 된 이존욱은 곧바로 말을 달렸다. 협채라는 요새를 세우고 노주를 공격하던 후량의 군대는 눈 깜짝할 사이에 격파되었으며, 그 순간 시대의 바람은 급변했다. 이존욱의 위풍당당한 모습을 본 주전충의 탄식처럼 후량은 이후 단 한번도 이존욱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이존욱은 후당을 건국하여 925년까지 후량, 전촉, 연, 기나라를 모조리 진의 영역에 포함하였고, 형남에도 종주권을 가졌으며 거란 야율아보기의 남하를 수차례 저지하였다.







"제가 군사를 주십시오. 만일 성공하지 못하면, 그때 퇴각해도 늦지 않습니다."


979년, 고량하 전투 高梁河之戰  - 오대 후진의 석경당이 연운십육주를 거란에 팔아먹고 황제가 된 후부터, 연운십육주의 수복은 중원의 군주들에게는 하나의 과제와도 같았다. 야망에 불타던 송나라의 태종은 979년 요나라의 위성 국가이던 북한을 멸망시켰으며, 그 기세를 타고 곧바로 요나라를 공격하여 유주를 함락시키기 직전의 형세가 되었다. 이에 요나라 황제인 경종은 유주를 포기할 마음을 먹었으나, 야율휴가는 이를 만류하고 병력을 얻어 공격을 감행, 송나라 군에게 재앙을 안겨주었다. 연운십육주를 수복하겠다는 송나라의 야망은 여기에서 종결된 셈이나 다름 없었다.








"신명(神明)께서 내게 경고하시는구나."


1114년 출하점전투 出河店之战 - 비록 금나라와의 전쟁에서 요나라의 병력 동원력에 대한 기록은 상당히 오락가락하고 부풀려져 있어 믿기 어렵다고 해도, 1114년과 1115년 무렵에 벌어진 아골타의 전투가 경이로운 수준이었음은 부정하기 어렵다. 단 몇번의 전투로 동북아시아의 강국이었던 요나라는 멸망으로 길로 접어들고 말았고, 그 시작은 바로 출하점 전투였다. 






"영웅의 삶은 마땅히 왕의 패업이 있을 뿐, 비단옷이 여기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1041년 호수천 전투 好水川之战 - 서하의 이원호는 번(番 : 오랑캐)과 한의 문자 모두를 유창하게 사용할수 있었고, 호쾌한 성격에 깊은 지략을 갖춘데다 그림을 좋아했고 실로 걸물이라 말 할 수 있는 사내였다. 넘치는 야망으로 황제가 된 이원호는 천수예법연조(天授禮法延祚)라는 요란한 연호를 사용했고, 이는 황제국으로 군림하는 송으로서는 좌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송나라의 장수 임복은 이를 물리치기 위해서 군사를 이끌었지만, 서북의 지리를 속속들이 잘 알고 있는 이원호는 호수천의 싸움에서 송나라군을 전멸시켰다. 이로 인해 동아시아의 국제 역학 관계는 요 - 서하 - 북송 - 고려로 이어지는 복잡한 형태로 전개되게 되었다.






"그대들이 고립된 성에서 저항하기를 어언 5년이다. 그대들의 주인이 힘을 펼 수 있는 상황이라면, 물론 그것도 좋다. 허나 세력은 다하고 지원도 끊겼다. 그대들은 수만의 백성을 어찌할 것인가?"


 1267년 ~ 1273년 양양 공성전 襄陽之戰 Battle of Xiangyang - 역사상 가장 장렬한 공성전 중 하나. 초원에서 시작된 몽골의 폭풍은 세계를 집어 삼켰다. 1270년이 되기전까지 몽골은 막북, 금, 서하, 서요, 토번, 중동, 대리, 고려, 동유럽을 굴복시켰으며 세계의 절반이 그들의 손에 있었다. 전세계가 몽골의 별동대에 유린되는 동안 가장 앞선의 송나라는 40여년의 세월을 버텼으나, 야심만만한 쿠빌라이 칸의 시대에 이르러 이제는 한계에 달하였다. 몽골군의 기마와 투항한 한족의 부대, 중동에서 도착한 회회포(回回砲) 의 앞에서 양양성은 고립되어 5년을 버텼으며, 그 5년은 하루하루가 절망과 사투의 세월이었다. 더 이상의 지원도, 원군도 기대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을때, 양양성의 수장 여문환은 백성을 살리기 위해 항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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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량은 태조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포위를 풀고 파양호(鄱陽湖)에서 역습하여 싸웠다. 진우량의 군대를 스스로 60만이라 칭했는데, 큰 전선을 이어 진(陣)을 형성하고, (배) 누의 높이가 10 여장이나 되어서, 서로 이어진 것이 수십이나 되었으며, 깃발과 창, 방패들이 바라보면 실로 산과 같았다."


 1363년 파양호 대전 鄱陽湖大戰 Battle of Lake Poyang - 중국 역사상 극히 보기 드물게 당대 최강의 세력들이 모든 전력을 수군에 기울여 맞붙은 중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수전. 진우량은 압도적인 거선들을 동원하여 주원장을 압박하였으나, 갑자기 불어온 동북풍은 오히려 거선들이 화공의 표적이 되게 만들었다. 전투에 앞서 퇴로를 막아 놓은 주원장의 기민함 탓에 진우량은 탈주조차 불가능 했으며, 거대한 파양호에 있으면서도 늪지에 잘못 들어간 어린아이처럼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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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고조는 열 번 싸워 아홉 번 졌는데, 끝내 천하를 가졌소. 우리는 거사을 일으키고 연이어 이길 수 있었소. 약간 불리한다고 계속 돌아간다면, 결국엔 남을 섬길 것이오!”


1402년 5월 정난의 변 靖難之役 Jingnan Campaign 마지막 한달 - 명나라 초기를 뒤흔든 거대한 내전인 정난의 변은 시종일관 황제군의 압도적인 우세 속에 전개되었다. 중국의 부는 강남에 있었으며 그 강남을 장악하고 있고, 사실상 전중국을 판도에 넣고 있는 황제군은 계속해서 수십만의 대군을 동원했으며 아무리 격파되어도 마르지 않는 셈과 같았다. 그러나 절대적인 전력의 열세 속에서도 정난군은 총지휘관인 연왕 주체의 카리스마 아래 굳게 뭉쳐 있었으며, 황제군이 정보의 혼선으로 잠시 전력의 공백기가 생긴 그 순간, 그 조그만 빈틈을 기어코 놓치지 않았다. 





"남쪽으로 도망하여 멸망한 송의 예를 보지 못했는가? 북경은 반드시 사수해야 한다!"


1449년 10월 북경 공방전 - 토목의 변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대사건으로 명나라는 엄청난 국가 위기 상황에 놓여졌다. 오이라트족의 손에 황제 정통제가 사로잡힌 상황에서, 대신들은 패닉을 일으키며 강남으로 도주할 계획까지 내놓았으나 병부시랑 우겸은 이를 저지하고 사태를 수습한 다음, 모든 전력을 북경 한 곳으로 모으기 시작했다. 이윽고 도착한 오이라트의 에센은 북경을 수차례 공격해보았지만 명나라의 화기를 도저히 당해낼 수 없었다. 만일 이 싸움에서 에센이 승리하고 북경이 함락되었다면, 중국은 원나라에 이어 또다른 유목제국의 지배 하에 놓이고 말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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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시(橫屍)가 산야를 덮었다. 피는 흘러 도랑을 이루었다. 기치(旗幟), 기계(器械), 그리고 죽은 사졸들이 혼하를 덮으며, 마치 물이 없는 듯했다."


1619년 사르후 전투 薩爾滸之戰 Battle of Sarhu - 임진왜란은 여진의 누르하치에게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절대적인 강국 명나라가 조선의 상황에 신경을 곤두세운 사이, 누르하치의 만주집단은 급속도로 거대해졌고, 이윽고 명나라는 이 늑대들을 서둘러 눌러놓지 않는다면 큰 재앙에 직면하고 말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명나라의 거대한 규모의 원정군은 전력만 보자면 후금의 군단을 격파하고도 남았으나, 지휘관들의 졸렬한 지휘 탓에 분산되어 각각 호랑이 아가리 속으로 들어가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노련한 누르하치는 승리의 냄새를 놓치지 않고 따라가 만주족의 기동력과 각개격파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짐은 25세부터 병을 일으켜, 정벌한 이래 싸워서 이기지 못한 적이 없으며, 공격하여 극복하지 못한 적이 없었다. 어찌, 이 영원 한 성을 끝내 떨어뜨리지 못하는가.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1626년 영원성 전투 宁远之战 Battle of Ningyuan - 사르후 전투의 승리 이후 후금의 기세는 가히 노도와 같았다. 요동의 중심지인 요양이 무너졌고, 50여개의 요새와 70개의 성이 함락되었다. 요하 동쪽에서 명나라의 영역은 급속도로 사라지고 있었으며, 후금의 기마대가 산해관에 이르는것은 시간문제처럼 보였다. 그러나 명나라에는 원숭환이 있었다. 산해관에서부터 100km 앞 거리에 영원성을 새로 축조한 그는 16만에 가까운 누르하치의 엄청난 부대에 최대로 잡아 2만도 되지 않는 병력으로 맞섰다. 그러나 그에게는 홍이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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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군의 제승(制勝)이나 이(利)는 신속 함에 있다. 짐은 적이 이를 듣고 곧 달아날까 두려울 뿐이다. 만약 달아나지 않는다면, 이를 깨는 것은 개를 풀어 짐승을 쫒는 것처럼 얻기 쉬운 일이다."


1641년 금주 전투 - 청나라의 군대가 산해관을 돌파하려면 그 전에 뚫어야 하는 것이 바깥의 네개 성인 송산, 행산, 금주, 탑산의 방위 시스템이었다. 산해관은 이들 네 성과 유기적으로 연락을 취하고 있었기에, 성 하나를 함락시키는것조차 쉽지가 않았다. 이를 돌파하려는 청나라에 맞서 명나라는 홍승주를 사령관으로 하는 10만이 넘는 대군을 구성했으나, 지구전을 원한 홍승주와는 달리 이미 바닥이 난 국가의 재정 상태는 그를 억지로 야전에 나서게 만들고 말았다. 이를 절호의 기회로 여긴 홍타이지는 코피를 흘리면서도 말을 달려 현장으로 출동했고, 마침내 5만 이상의 병력을 격파하고 홍승주를 항복시켰으며, 4개의 성을 모조리 함락시켰다. 명나라의 최후 전력마저 소멸해버린 것이다. 이제 남은것은 오직 산해관의 오삼계 뿐이었다.





"만 마리의 말이 튀어 올랐다."


1644년 일편석 전투 一片石之战 - 오삼계의 명나라 잔존 부대와 도르곤의 청나라 군이 힘을 합쳐 대순 황제 이자성을 격파한 전투. 명나라가 멸망한 시점에서 천하의 세력은 북경을 차지한 이자성, 산해관에서 버티고 있는 오삼계, 중국 진출을 노리는 청나라의 삼대 세력이 되었다. 청나라와 이자성은 각각 오삼계를 끌어들이려고 노력했으나, 오삼계가 선택한 것은 청나라였다. 그의 애첩 진원을 이자성의 부하에게 빼앗긴것도 그 원인 중 하나였을 것이다. 이로서 그토록 열리지 않던 산해관은 성 밖이 아닌 성 안에서 열렸으며, 양군의 연합은 이자성을 격파하여 몰락시켰다.  







"친히 대군을 이끌고 벽력처럼 그를 쫒을 것이다. 그는 다시는 달아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확실히 가르단을 절멸할 것이다!"


1696년 차오모드 전투 -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 중에 한 사람인 강희제는 오이라트 준가르의 가르단을 물리치기 위하여 수차례 몽골 원정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과 수하 장수 피양구의 부대로 양군을 나누어 가르단을 조심스레 토끼몰이 하기 시작했으며, 이 과정에서 가르단과 강희제, 피양구 모두는 극도의 보급 부족으로 인해 서로 말라죽기 직전까지 몰리게 되었다. 모든것이 허사로 돌아가려는 듯 할때, 6월 2일 피양구의 1만 4천 부대는 극적으로 가르단의 도주로를 막아세웠고, 마침내 그를 파멸시키는데 성공했다. 가르단의 죽음은 하나의 신호탄이었으며, 이후 100여년간, 지난 수천년의 세월동안 강력한 한 축으로 존재해왔던 유목 세계는 종말을 향해 달려갔다. 더 이상 그들의 말은 절대적인 도주 수단이 되지 못했으며, 초원 역시 적의 공격을 피할 수 있는 안식처가 되지 못하였다.




"……그 원인이 이다지도 부정한 전쟁, 이다지도 영속적인 불명예가 될 전쟁을 나는 지금껏 알지 못했고, 읽은 적도 없습니다. 지금 나와 의견을 달리하는 신사는 광저우에서 영광에 가득 차 휘날렸던 영국 국기를 언급했습니다. 그러나, 그 국기야말로, 악명 높은 금제품의 밀수를 보호하기 위해 펼쳐진 것입니다. 현재 중국 연안에 게양되어 있는 것처럼만 그 깃발이 휘날린다면, 우리는 그야말로 그것을 보기만 해도 공포를 느끼고 전율하지 않을 것입니다."


1841년 진강전투 - 가장 추악한 이유로 일어났다고도 이야기되는 1차 아편 전쟁의 종말은 진강(鎭江)에서 마무리되었다. 파죽지세로 진군하는 영국군은 7천여명의 병력이 장강으로 진입해 진강으로 진군했고, 이미 쇠퇴하여 몰락해가고 있던 청나라의 진강 방어 부대는 2,000여명도 되지 않았다. 진강을 수비하던 주방만주기병 부도통(副都統) 해령(海齡)은 갖은 힘을 다해 저항하여 아편전쟁 기간 영국군을 막아선 청나라 지휘관 중에서는 가장 많은 피해를 안겼으나, 그렇다고 해서 승패를 바꿀 힘은 없었다. 진강이 무너지자 청나라는 항복 선언을 했다. 중화제국이 세계의 중심이라 자부하던 시대는 이제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이다.




"유주가 즉위한 이후, 병사들에게는 줄 곡식이 없었고, 군대는 그야말로 혼돈상태였다……군주는 어렸고, 판단할 능력이 없었다. 문관과 무관을 막론하고, 천경에는 해결책을 생각해낼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1864년 남경 공성전 - 이 해 7월 19일, 천지를 뒤흔듯한 소리와 함께 마침내 남경 성벽의 한 쪽이 무너졌고, 청군은 이를 통해 성 내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성내의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이 학살당했다. 이로써 거병의 기치를 세운 이래 전중국을 뒤흔들어 2,000만명이라는 어마어마한 사상자를 낸 태평천국이 최후를 맞이했다. 태평천국을 상대하는 과정에서 청나라는 군벌의 존재가 생겨났으며, 그 영항을 직, 간접적으로 받은 혁명가들도 탄생하였다. 



파일


"정원은 아직 가라앉지 않았습니까?"



1894년 9월 17일 황해해전 黃海海戰 Battle of the Yalu River - 평양 전투와 함께 청일전쟁의 마지막을 장식한 전투. 청나라 북양 함대군은 일본의 연합함대에 비해 중포는 두배 이상을 갖추었으나, 배수량, 철갑선 숫자, 평균 속력, 실제 마력, 속사포 등에서는 크게 밀렸다. 특히 속사포는 청군이 6문이었지만 일본군은 67문을 갖추고 있었다. 또한 불행하게도 기함이었던 정원은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신호 마스트가 포탄을 맞고 부러졌는데, 해전에서 지시를 내릴 정원의 신호 마스트가 부러졌기에 북양 함대는 오합지졸이 되어 서로 각자 싸울 수 밖에 없었다. 결국 황해해전은 청나라의 대패로 끝났고, 이는 전중국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


 아편전쟁의 패배는 대부분의 중국인들에게 해프닝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들에게 있어 이는 그저 과거에도 종종 있었던 이민족의 침략이나 다를바가 없었다. 그러나 자신들 문명의 수혜자로 밖에 생각하지 않았던 일본에게 패배했다는 사실은, 가장 보수적인 유학자라고 할지라도 무엇인가 크게 잘못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청일전쟁의 패배 이후 중국의 근현대사는 숨가쁠 정도로 빠르게 전개된다.



File


"당, 국가의 존망, 이념의 성패, 인민의 화복, 동지들의 영욕은 모두 이번 전쟁에 달려 있다." 



1928년 4월 7일 북벌 北伐 Northern Expedition 산동 공격 - 장제스의 상해 사변 이후 잠시 분열되었던 북벌군은 다시 수습되었고, 1928년 1월 8일 장제스는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에 취임했다. 장제스, 풍옥상, 염석산, 이종인, 양수장으로 구성된 북벌군은 노도와 같은 진격을 감행하여 손전방, 오패부, 장종창등을 모두 물리쳤다. 이제 최후로 남은것은 80만의 군대를 가지고 있는 최강의 북양계 봉천 군벌 장작림이었으며, 4월 7일 북벌 총공격령을 내린 이후 산동의 봉천군은 산이 무너지듯 고꾸라졌다. 장작림은 결국 패배를 직감하고 산해관 밖으로 이동했으며, 이로서 원세개의 시대로부터 중국을 장악하던 북양군벌의 힘은 거의 꺾이게 되었으나, 중국의 혼란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었다.



File


 "동북야전군은 피로와 소모에 구애받지 말고, 추위와 기아에 굴복하지 말것이며, 오로지 신속한 속도로 전군을 이끌고 입관, 화북야전군과 협력하여 화북의 국민당군을 포위 섬멸하라."


1948년 요심전역 辽沈战役 Liaoshen Campaign - 1948년 가을, 중국 공산당의 가장 뛰어난 군사 지휘관인 린뱌오는 돌연 공세로 전환하면서 금주와 장춘을 함락하고 11월 경에는 심양을 점령하였다. 이 한번의 전역의 승리로 100만이 넘는 린뱌오의 군대는 관내로 진입, 화북야전군과 합류하였다. 이후의 전쟁은 더 이상 전투라기보다는 일방적인 소탕전에 지나지 않았다. 양자강 이북 지역은 모조리 공산당에 손에 들어가게 되었고, 장제스는 최후의 결단을 내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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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8/07 16:58
수정 아이콘
일단 추천!
13/08/07 17:02
수정 아이콘
정말 대륙의 기상이 느껴지는 글이네요. 정말 중국은 거대한 나라입니다. 지금도 한나라로 있다는게 거의 믿어지지가 않네요.
13/08/07 17:02
수정 아이콘
와우 굉장히 잘 읽었습니다 정말 생동감넘치는 글이군요..
개깡다구
13/08/07 17:02
수정 아이콘
아이고 분량보소....
softcotton24
13/08/07 17:03
수정 아이콘
추천합니다!
곰성병기
13/08/07 17:08
수정 아이콘
재밌게 잘봤습니다.
13/08/07 17:11
수정 아이콘
다시 읽다가 글쓴이를 보니 딱.... 순간 다리에힘풀려주저앉았네요
설탕가루인형형
13/08/07 17:11
수정 아이콘
탈라스 전투는 정말 신기해요.
당나라가 그 멀리까지 원정을 가서 이슬람군과 싸운것도 이상한데, 하필 대장이 고구려 유민이라니...
더구나 종이때문에 역사책에도 등장하고...뭔가 한만두 스러운 기연의 연속이랄까..-_-
13/08/07 17:17
수정 아이콘
일단 추천!
지금뭐하고있니
13/08/07 17:25
수정 아이콘
오랜만에 쓰시네요. 기다리고 있습니다. 가능하다면 자주 부탁드립니다.
13/08/07 17:33
수정 아이콘
추천드립니다...정말 재밌게 읽었습니다.
고구려 시대 이후 우리는 다시 중국과 1:1로 대등하게 싸우지를 못했군요..
통일신라는 여러모로 참 아쉬운 나라인거 같네요..

고구려가 통일을 했다면 역사가 어떻게 되었을런지..
중국이라는 용광로속에 통합이 되었을런지..아니면 만주를 모두 차지한 큰영토를 가진 국가가 되었을런지..
13/08/07 17:58
수정 아이콘
솔직히 고구려가 중국과 대등했던 건 아닌 것 같습니다. 국력의 차이가 워낙 커서요.
수-당과의 전쟁에서 물론 매우 선전했지만, 결국 '겨우 버텨냈다'는 느낌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동원할 수 있는 물자와 국력의 차이가 워낙 엄청났으니까요.

그리고 만일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으면, 이후 고려나 조선처럼 외교를 잘 했으면 계속 유지되었겠지만
고구려 말기처럼 계속 중국과 전쟁을 벌였다면 십중팔구 현재 우리는 중국인이 되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낭만토스
13/08/07 22:45
수정 아이콘
LOL로 치면 타워에서 CS 잘 챙기는 느낌이죠.
그리고 우리가 아는, 고구려가 강성했던 시절을 보면
중국은 분열되어있거나 뒤에 위험이 있거나 그런 경우가 대부분이죠.

통일이 되고 안정되었을때는 굉장히 위험한데
그렇기에 살수대첩같은 이런것들이 의미를 가지죠.
13/08/07 17:45
수정 아이콘
댓글보다 많은 추천수..
저도 추천 드리고 갑니다. 내공이 묻어나는 좋은 글 감사드려요.
13/08/07 17:46
수정 아이콘
같은 인물이 세 번 나온건 항우밖에 없군요. 그것도 주인공으로. 그러고보니 항우 모에화 팬픽을 이 분이 쓰셨던가...재밌게 보고 있었는데.
13/08/07 17:51
수정 아이콘
와. 진짜 멋진 글입니다. 이런 글 진짜 감사합니다.
그런데 관도대전에서 인용된 대사는 혹시 복양 전투에서 전위의 대사가 아닌지요?
관도에서도 비슷한 경우가 있었나요?
신불해
13/08/07 19:37
수정 아이콘
겨울 10월, 원소가 수레를 보내 곡식을 운반하며 순우경(淳于瓊) 등 5명에게 군사 만여 명을 이끌고 가 이를 호송하게 하니 원소의 둔영 북쪽 40리 되는 곳에서 숙영했다. 원소의 모신(謀臣)인 허유(許攸)가 재물을 탐내었으나 원소가 이를 능히 충족해주지 못하자, 달아나 공에게로 와서 순우경 등을 공격하도록 설득했다. 좌우에서 이를 의심했으나 순유(荀攸), 가후(賈詡)는 공에게 (이를 따르도록) 권했다. 이에 공은 조홍(曹洪)을 남겨 수비하게 하고는 친히 보기 5천을 이끌고 밤중에 길을 떠나 날이 밝을 무렵 도착했다.

순우경 등은 공의 군사가 적은 것을 멀리서 보고 진문(陳門) 밖으로 출진했다. 공이 급히 들이치니 순우경은 물러나 둔영을 지켰고, 다시 이를 공격했다. 원소는 기병을 보내 순우경을 구원하게 했다. 좌우에서 어떤 이가 말했다,

“적 기병이 점점 접근하니 군사를 나누어 맞서십시오.”

공이 분노하며 말했다,

“적이 등 뒤까지 오거든 그때 말하라!”

사졸들이 모두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 순우경 등을 대파하고 모두 참수했다.



삼국지 정사 무제기에 나오는 부분입니다.
포프의대모험
13/08/07 17:53
수정 아이콘
항우는 로레알 초인인듯..
13/08/07 18:00
수정 아이콘
세간의 인식도 그렇지만 유방보단 항우의 인기가 훨씬 많죠. 저도 항우를 더 좋아하구요. 무적초인이란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현실인물이 아닐까 싶습니다.
뿌잉뿌잉잉
13/08/07 17:54
수정 아이콘
엄청나네요 대단합니다
Colossus
13/08/07 17:59
수정 아이콘
역시 대륙의 패기...
13/08/07 18:00
수정 아이콘
정난의 변은 저번에 피지알에 누가 장문의 글을 올려주셨던 것 같네요
저는 연왕이 그렇게 힘들게 제위에 올랐는지 생각도 못했습니다
신불해
13/08/07 19:35
수정 아이콘
아마 제가 쓴글 일겁니다.
로쏘네리
13/08/07 18:00
수정 아이콘
와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추천!
Cool Gray
13/08/07 18:01
수정 아이콘
아는 게 반, 모르는 게 반이네요. 역사책을 더 구해서 읽어봐야겠습니다.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13/08/07 18:17
수정 아이콘
아편전쟁, 청일전쟁은 못 들어가나요?
설탕가루인형형
13/08/07 18:19
수정 아이콘
청일전쟁은 위에 있습니다 ^^;
아편전쟁 보다도 충격적으로 받아들여 졌다네요.
밀가리
13/08/08 00:23
수정 아이콘
갑오 청일 전쟁 이후 양무운동이 시작되죠. 1840년 아편전쟁이 중국 근대사의 시작이라고 하는데, 실질적으로 중국의 근대화는 청일전쟁 이후부터! 그 만큼 대륙인들에겐 엄청난 충격이었죠.
13/08/07 18:36
수정 아이콘
1841년 진강전투 : 이게 아편전쟁의 마지막을 장식한 전투
1894년 황해해전 : 이게 청일전쟁의 마지막을 장식한 전투입니다.
둘다 포함되어 있네요.이글은 '전쟁'이 아니라 '전투'를 다룬 글이죠
기시감
13/08/07 18:26
수정 아이콘
오전에 네이버삼도카페에서 본 글이네요. 추천!
13/08/07 18:29
수정 아이콘
이런 대작이라니 덜덜덜
R.Oswalt
13/08/07 18:30
수정 아이콘
비수대전은 언제봐도 참 얼척 없습니다. 말 그대로 '이상 군주' 부견이 그 압도적인 전력을 가지고 비실비실한 남조 왕조를 때려잡기는 커녕, 이 한 방으로 사회가 무너지고, 나라가 무너지고... 요장은 무너진 부견을 직접 죽이고, 모용수도 부견 세력을 흡수하고 후연을 세우면서 제대로 통수를 때리죠.
본문에서 언급해주신 것 처럼 비수대전 결과 보고를 받은 동진 재상 사안의 반응을 보면 이 결과가 얼마나 어이없는 결과인지 알 수 있습니다. 바둑 두면서 사안의 조카 사현이 대승을 거뒀다는 보고를 받자 "어린 놈들이 이겼다는구먼 허허" 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이 양반, 말은 이렇게 간지나게 해놓고서 집에 갈 때 얼마나 신나고 흥분했는지 나가면서 문지방에 걸려 넘여저서 나뒹굴었다고 해요. 누가 봐도 승산없는 싸움을 이겼으니 저 정도도 엄청 참은거라고 봐야죠 크크
부견에 대해 평가하는 사람들 중에 남북조시대의 명군으로 엄청 호평을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어찌됐든 결과가 폭망이라 개인적으로는 손제리보다 나은 것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_-;;;
Friday13
13/08/07 19:12
수정 아이콘
덕치의 종말..?
사티레브
13/08/07 22:07
수정 아이콘
왕맹없는 부견은 손제리?...
흐흐
개미먹이
13/08/07 18:45
수정 아이콘
글이 맛깔나네요.
13/08/07 18:53
수정 아이콘
돌아오셨군요. 기다렸었습니다!! ^^
김연아
13/08/07 18:57
수정 아이콘
명불허전.
Friday13
13/08/07 19:12
수정 아이콘
분량 덜덜해...
13/08/07 20:35
수정 아이콘
분량 엄청난데 순식간에 읽히네요. 추천하고 갑니다.
안산드레아스
13/08/07 21:51
수정 아이콘
정말 알차고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13/08/07 22:26
수정 아이콘
북벌 밑에 중국의 혼란은 현재진행형이다 이 말 뜻은 뭔가요.
공산주의 국가라 혼란하다는건지 아니면 현재라고 쓰지만 장제스의 북벌이 끝난 시점의 중국상황을 얘기하는건지 모르겠습니다.
신불해
13/08/07 23:11
수정 아이콘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었다.' 라고 썻듯이 장제스의 북벌이 끝난 시점에도 여전히 혼란스러웠다는 이야기입니다.
Paul Peel
13/08/07 22:41
수정 아이콘
시간 가는줄 모르고 읽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13/08/07 22:46
수정 아이콘
근데 수십명을 생매장하는 게 가능한가요?
13/08/07 23:58
수정 아이콘
수십만명이겠죠? 중국의 부역사를 봐서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포로들에게 구덩이를 파게하고 창병으로 지킨이후에
그냥 묻어버리면 되는거니까요. 올라오는건 찔러죽이면 될일이고 ;;
Tristana
13/08/08 00:04
수정 아이콘
항우도 20만명을 묻었다고 초한지에 나오죠..
절벽쪽으로 몰아놓고 공격해서 알아서 밀려 떨어지도록 한 다음에
흙으로 묻어버리는..
13/08/07 23:58
수정 아이콘
영웅문에서 곽정이 참여한 전투가 양양 전투 아닌가요?
13/08/08 00:03
수정 아이콘
소설로만 따지만 신조협려때는 몽케가 병사(소설은 양과가 죽인걸로 나옵니다만.)하면서 막았고, 이후는 쿠빌라이 즉위후에
의천도룡기로 이어지는 사이에 양양성 함락전까지의 5년입니다.
고딩어참치
13/08/08 00:07
수정 아이콘
먼치킨들이 정말 많네요.. 그 중에서도 굳이 한명을 꼽자면 한 광무제가 아닐런지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절름발이이리
13/08/08 00:37
수정 아이콘
추천
긴토키
13/08/08 00:43
수정 아이콘
추천추천
Grow랜서
13/08/08 13:01
수정 아이콘
시간 가는줄 모르고 읽었네요 감사합니다
히히멘붕이
13/08/08 13:31
수정 아이콘
인류 역사가 다 그렇지만 특히나 중국의 역사는 뭔가 스케일을 제 머리로 상상하기조차 버겁네요;
13/08/08 13:59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근데 진강전투 밑에 있는 사진 출처인 영화 제목이 무엇인가요?
인간실격
13/08/08 20:49
수정 아이콘
제 역사 지식이 짧은 게 참 안타깝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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