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삼계가 스스로 변발을 자르고 자신에게 민족 지사의 광휘를 덮어씌운다 하여도, 이는 기본적으로 한편의 블랙 코미디에 지나지 않습니다. 산해관을 열어 도르곤을 맞아 들인 사람이 오삼계입니다. 그 도르곤의 앞에서 머리를 자르고 변발을 한 사람도 오삼계 입니다. 틈왕 이자성을 몰락하게 한 사람도 오삼계 입니다. 남명정권을 격파하고 영력제를 최후의 최후까지 추격하여 살해한 자는 또 누구입니까. 바로 오삼계 입니다. 천하 사람들 중에 이 사실을 모르는 이는 가히 단 한사람도 없었을 테니, 근본적으로 오삼계의 격문은 황당 무계한 것입니다.
이를테면 오삼계는 호남과 형양으로 진격하는 동안, 당대의 위대한 대사상가 왕부지(王夫之)에게 접근했으나, 일관되게 반청을 주장하던 왕부지는 오삼계와는 절대로 손을 잡지 않겠다는 입장을 보였고 급기야 산 속으로 달아났습니다. 이는 명나라 유신들이 오삼계에게 가지고 있던 이미지를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왕부지
그러나 만일 오삼계의 격문에 대한 호응이 전혀 없었느냐고 묻는다면, '그렇지도 않았다.' 라고 대답해야 할 것입니다.
청나라에 반감을 가지던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명나라의 부흥을 꾀하는 여러 인무들은, 설사 오삼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도 천하대란을 이용해 한번 세상을 뒤흔들어 볼 여지는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삼계가 거병하자 "천하가 진동하고 거짓 격문이 전해지면서, 곳곳에서 호응이 일어나" 실로 막힌 둑이 터지는 듯한 모양새가 되었습니다. 다른 이번(二藩)이나 대만의 정씨왕조는 제외하더라도, 반란에 동조하는 총독과 순무, 제독, 총병 등 지방 관리 26명 중에 과거 명나라 조정의 무장이었던 인물만 무려 20명에 달했습니다. 그들로서는 복잡한 기분이겠지만 오삼계만큼 청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높은 사람은 당대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명말 유신들을 끌어모으는 동시에, 오삼계는 소수민족에 대해서도 영향력을 보였습니다. 운남과 귀주에 있던 묘족(苗族), 토가족(土家族), 이족(彛族) 등은 오삼계의 협박과 그 영향력 때문에 협조 할 수 밖에 없었고, 그 숫자만 수만명에 이를 지경이었습니다.
오삼계의 번이 진동하자 가장 놀란 사람은, 당초에 강희제가 파견한 관리인 감문혼 입니다. 경악을 금치 못한 감문혼은 우선 진원(鎭遠)에 있는 병력을 이용해 오삼계의 기세를 잠시나마 억누르고, 그 시간동안 사방의 병사를 불러와 운남과 귀주의 요충지를 지키려 하였습니다. 하지만 가족들을 데리고 이동한다면, 오삼계의 추격을 뿌리칠 수 없습니다.
마침내 감문혼은 결단을 낼렸습니다. 그는 비통한 심정으로 자신의 가족 일곱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였고, 자신은 넷째 아들과 함께 밤낮으로 말을 달려 진원에 도달하였습니다. 진원의 병력만으로 오삼계의 세력을 상대하는것은 역부족이지만, 최소한 시간이라도 끌어볼 요량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감문혼은 진원에 도착할 순간, 필시 온 몸에서 힘이 빠져버렸을 것입니다.
진원을 지키는 장수는 강의(江義)였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강의는 이미 오삼계의 패거리가 된지 오래였고 당연히 감문혼의 필사적인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일이 그르치게 되었음을 알게 된 감문혼은 절망하여 아들과 같이 자살했습니다. 오삼계는 감무혼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하였다고 합니다. 이제 그는 아무런 고생없이 운남과 귀주를 완전 장악하여 자신의 세력을 공고히 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의 병력은 무려 20만여만에 달하였습니다.
하지만 운귀 지방에 남아있던 청나라 조정의 관리들이 감문혼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오삼계의 철번을 돕기 위하여 식량, 선박 문제를 담당하려고 온 관리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병부 낭중 당무례(撒木合), 호부 원외랑 살목합, 호부 낭중 석란태, 병주 주사 신주, 필첩식 살이도 등은 사태의 심각성에 경악하여 몰래 도망쳐 진원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진원을 지키는 강의는 이미 오삼계의 명령으로 출입을 엄금하고 있었고, 그들의 말을 빼앗아 버렸습니다.
난관에 봉착했지만, 지금 여기서 머뭇거릴 수는 없는 일입니다. 살목합과 당무례는 몰래 말 두 필을 얻어 이를 타고 황급히 달아나 오삼계의 통제 구역을 간신히 벗어난뒤, 호남에 진입하여 역마를 갈아탔습니다. 또한 석란태는 진원에서 조그만 배를 타고 얻어서 탈출에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운이 좋지는 못했는데, 신주와 살이도는 탈출이 늦은 나머지 반란군에게 체포되어 살해되고 말았습니다.
살목함과 당무례는 죽을 힘을 다해 11일 동안 쉬지도 않고 말을 달려, 12월 21일 북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다지 날씨가 선선하지 않은 엄동설한의 북경이었지만, 말에서 내린 둘의 얼굴에는 땀이 송글공글 맺혀 있었습니다.
너무나도 지치고 숨이 막혀 정신이 혼미한 나머지 두 명은 문기둥을 붙잡고 아무런 말도 못했고, 영리(營吏)들은 이 모습을 보고 크게 놀라 그들을 부축해주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물 두 그릇을 가져와서 억지로 입에 물을 넣어 주었고, 한참이 지나자 두 사람은 간신히 정신을 차렸습니다. 정신이 돌아온 그들은 또다시 죽을 힘을 다해 소리를 질렀습니다.
"반란이 일어났다! 오삼계가 반란을 일으켰다!" 한참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그들은 이윽고 오삼계가 운남 순무 주국치를 살해한 일, 그리고 소속 관병이 반란을 일으킨 사태를 설명했습니다. 이 두 사람의 노력으로 조정은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오삼계의 거병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지만, 그 파장은 실로 충격적이었습니다. 온 조정은 전율을 느끼며 혼란에 빠져습니다.
경악스러운 정보에 대해 놀라움을 표시하던 조정의 대다수 대신들은, 곧 대학사 색액도를 중심으로 오삼계의 철번을 취소하고, 또 철번 계획에 대해 사죄하는 방식으로 화의를 맺자고 주장했습니다. 대다수 조정 대신들은 이미 패닉 상태였습니다. 그들은 과거 한나라 오초칠국의 난에서 한경제가 조조(晁錯)를 죽여 반란군을 누그러 뜨리려던 계책에서 본받아, 철번을 주장하던 관리들을 처벌하자고 주장했습니다.
사실 놀라기는 강희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이미 철번에 대하여 확실하게 마음을 굳힌 강희는 그 제안에 단호하게 반대했습니다. 그는 난리 속에서 마음을 안정시키고 철번을 주장하던 소수 대신을을 보호하며 대책을 세우는데 골몰했습니다. 이제 사태는 벌어졌고, 19살의 강희에게 요구되는것은 침착함과 대세를 봐야 하는 식견이었습니다.
일단 오삼계와 화의 없이 싸우기로 결정한 조정은 토오격문(討吳檄文)을 발표하여 오삼계의 격문에 있는 불합리한 내용을 신랄하게 비판하였습니다.
……그대가 명 황실의 부흥을 그리도 원한다면, 옛날에 청이 산해관을 통해 중원으로 들어왔을 때에는 어찌 명 황실의 후손을 황제로 옹립하라는 상소를 올리지 않았는가? 게다가 청이 천하를 통일하고 나자, 그대는 명 황실의 후예를 제거해 후환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을 옛 주인에 대한 충정이라고 할 수 있는가? 또한 신하된 자로서 두 주인을 섬기고, 또 두 주인을 모두 배반했는데, 이를 과연 도의(道義)라고 할 수 있는가?
이는 핵심을 찌른것 입니다. 오삼계에게는 딱히 반론할 논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사실상 선전포고인 오삼계의 '격문' 에 대응해 이쪽의 전쟁의지를 말로서 보여준 강희제는, 이제 실제적인 군사력인 팔기군을 형주(荊州), 좀 더 세밀하게 말하자면 호북성 강릉에 보내었습니다.
강희가 있는 본영이 커다란 전략의 틀을 짜고 지시를 내리는 기지라면, 형주의 대본영은 오삼계 군의 북상을 저지하는 전진기지임과 동시에 오군 정벌을 위하는 일선의 최고지휘부 입니다. 형주는 장강 남북의 길목에 자리잡아, 이곳을 점령하면 중국의 어느곳이든 병사를 향해 진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강희는 이곳을 중요시하게 여긴 것입니다. 이 중요한 자리의 사령관으로는 순승군왕(順承郡王) 늑이금(勒爾錦)이 영남(寧南) 대장군에 임명되었습니다. 그리고 패륵 찰니(察尼), 도통 각라주만, 호군 통령 이이도재 등이 형주로 파견되었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 과거의 용사, 용맹한 만주팔기들은 실상 이빨 빠진 호랑이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중임을 맡은 이들은 대부분 오랫동안 편안하고 부유한 생활을 하던 왕공 및 귀족들이었고, 어려운 환경에 대처할 만한 훈련을 하지 못했으며, 전쟁의 경험도 부족했습니다.
그러나 오삼계는 어떻습니까?
과거 명나라의 원숭환이 2만의 군대로 16만 누르하치 군단을 돌려세운 기적, 북경을 오고가며 홍타이지를 11번에 걸쳐 막아내던 긴박한 순간등을 보면서 자랐고, 홍승주가 홍타이지에게 대패하던 순간에 참가하여 간신히 목숨을 건졌으며, 지원조차 없던 5만의 군대로 청나라의 노도와도 같은 기세를 홀로 산해관에서 저지하였습니다. 또한 세상을 뒤엎은 호걸 이자성과 존망을 둔 격전을 벌여 그를 몰락시켰으며, 군대를 몰고 장헌충을 물리치고 버마까지 추격하여 명나라 잔존세력을 뿌리뽑았습니다. 게다가 최근까지도 소수민족 토벌등으로 실전 감각을 잃지 않았으니, 애시당초 지휘관의 그릇으로 보자면 양측은 가히 상대도 되지 않을 역량과 경험의 차이가 있습니다.
사태가 이러할진데, 대장금 늑이금은 출발하면서 전혀 상황 파악이 안되는 말을 자신있게 내뱉었습니다.
"운남과 귀주의 토벌은 8월을 넘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삼번의 난은 8년동안 이어졌습니다.
다만 사태에 대한 준비가 부족한 점을 지적하자면 장수들이나 관리들 뿐 아니라, 심지어 강희 본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강희제는 경험이 부족했습니다.
그러나 강희가 호언장담하는 지휘관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사태가 벌어진 이후 좀 더 꼼꼼하게 대응에 나섰다는 점입니다. 강희는 여러 방면의 전선을 수비하기 위해 공유덕의 사위였던 손연령(孫延齡)에게 광서의 수비를 맡겼고, 또한 한중(漢中)에 군대를 파견, 사천으로 진군하게 했습니다. 사천은 운남과 이웃하고 있으니 오삼계가 반드시 점령해야 하는 곳입니다. 강희는 이 서북 전선을 매우 중요한 요소로 생각했습니다.
동시에 강남과 강서에 장군들을 파견하여 수비하게 함으로서, 오삼계 군이 강소 및 절강으로 이르는것을 막으려고 했습니다. 동남의 물자와 세금이 넉넉한 지역을 막아내야만 군수 물자의 징집을 원할히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강희의 이 조치는 또다른 효과도 가져왔는데 경정충의 번이 강서를 공격할때, 이 지역을 지켜 경정충과 오삼계의 연합을 막고, 경정충을 절강과 강서의 교차 지역에 묶어 둠으로서 장강으로의 진출을 막을 수 있던 것업니다.
일단 가장 빠르게 진행해야 할 현지에 대한 인사 파견이 일단락이 되자, 황제는 연주((兗州)와 태원(太原) 등지에 정예병을 주둔시켜 유사시의 구원병으로 준비시키는 치밀함도 보였습니다.
예컨대 호북과 사천으로 진격할 경우, 필요한 병사가 있으면 따로 파견하기엔 너무 시간이 많이 걸린데다 병사와 말도 피곤하여 제대로 싸우기가 힘이 듭니다. 반면에 연주는 강남, 강서, 호광과 가깝고, 태원은 섬서 및 사천에 가까워서 병사를 주둔시키고 말을 대기시키기엔 적절한 장소 입니다. 편의성를 극대화시킨 것입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역참 시스템 역시 한번 다시 정비하여 수천리에 이르는 연락 체계가 문제없이 작동하는지 점검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사태가 너무 빠르게 전개되었던지라, 아무리 빠르게 움직여도 적절한 조치를 취하기가 힘들었던 것입니다. 젊은 강희가 진땀을 흘리며 만반의 준비를 갖추는 동안, 오삼계의 오군은 폭풍같은 기세를 살려 호남으로 진격, 원주(沅州)를 압박했습니다. 원주를 지키는 인물은 총병관 체세록이었습니다.
원주는 운남과 귀주로 통하는 길목이라는 중요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체세록이 오삼계의 대군을 막아낼 수단이 거의 없다는 사실은 황제 역시 이미 파악하고 있던 바입니다. 강희는 재빨리 호광 제독 상아에게 군사를 이끌고 원주를 구원토록 했지만, 아무리 황제가 판단을 빠르게 내린다 하여도 현장에서의 급박함에 비할수는 없는 일입니다.
결국구원병이 당도하기도 전에 원주는 함락되었고, 체세록은 체포되었습니다. 원주가 무너지자 장사(長沙)까지 영향이 미쳤습니다. 순무 노진이 겁을 먹고 악주까지 달아났던 것입니다. 강희는 즉각 노진을 체포해 사형을 처하도록 했지만, 여기서도 한발 늦어버렸습니다. 오삼계가 조금 더 빨랐던 것입니다.
순무가 달아난 마당에 싸우려는 사람이 있을리 없습니다. 장사의 성내 민심은 당연히 흉흉했고, 이를 틈타 오삼꼐는 장사의 병선(兵船)을 모두 수중에 넣었습니다. 이와 동시에 오군의 수하 장국주는 수륙 양군을 통솔하고 동정호 근처의 악주를 공격했고, 악주의 참장 이국동이 "사사로이 헌납" 함에 따라 악주까지 평정했습니다.
요동치는 전선을 지켜보던 강희는 전략적 혜안으로 호남성의 상덕(常德)을 요충지로 인식, 호군 통령 석대에게 선봉대를 이끌고 방어하라고 명령을 내렸고, 또한 무창(武昌)은 도통 주만에게 방어의 명령을 내렸습니다. 오삼계가 너무나 빠르게 움직이는 만큼 강희 역시 빠르게 결정을 내려야만 했습니다.
황제의 판단 자체는 틀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전혀 다른 문제가 발목을 잡았는데, 현장 지휘관들의 무능과 태만이라는 악재가 겹친 것입니다. 수비의 임무를 명령받은 지휘관들은 느즈막히 출발하여, 느즈막히 도착했습니다. 그렇게 게으름을 피웠으나 다행이 아직까지는 오군은 당도하지 않았기에, 그 두명이 즉시 상덕 등으로 진입해 민심을 안정시키고 싸울 준비를 했다면 어느정도 전력이 되었겠지만 이들은 그렇게 움직이지 않아습니다. 적의 위세를 너무나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백전노장인 오삼계가 이런 기회를 놓칠리가 없습니다. 예민한 후각으로 기회의 냄새를 맡은 오삼계는 친히 상덕과 풍주(현재의 호남성 풍현豊縣)로 친히 진군하여 전투를 독려했고, 오군이 이르는 곳 마다 청나라 관군은 비참한 오합지졸로 전락해 투항하기 바빴습니다.
오군의 맹공이 이어질 무렵, 청나라 제독 상아는 서둘러 구원병을 이끌고 현장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상덕에 진입하여 싸움을 도우려고 했으나, 상덕의 지부였던 옹응조는 이를 거절했고, 상아는 어쩔 수 없이 풍주로 물러났습니다. 그러나 이후 놀라운 반전이 벌어집니다. 기실 옹응조는 이미 오삼계에 매수되었던 것입니다. 상아를 물러나게 한 옹응조는 그 후 오삼계에게 항복했습니다.
상덕이 허망하게 무너지자 오군은 즉시 풍주로 이동했습니다. 경악스럽게도, 풍주의 내부에도 오삼계가 매수해 놓은 사람들이 있었고, 이들은 안에서 오군의 공격에 호응하여 풍주를 무너뜨렸습니다. 상아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형주로 퇴각했습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오삼계는 장국주를 보내 형양(衡陽)까지 함락시켰습니다.
이렇게 되자 오삼계는 전역이 시작된 지 불과 3개월 만에 형양, 원주, 상덕, 진주, 악주 등 전략적 요충지를 모조리 함락하고, 호남 전체를 단번에 수중에 넣었습니다. 반란군의 선봉은 형주의 코앞까지 이르러, 관군의 총지휘부와 서로 얼굴을 마주보게 되었습니다. 엄청난 쾌진격이었습니다.
충격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오삼계는 사람을 풀어 사방으로 유언비어를 퍼뜨려 혼란을 조장했고, 이 영향으로 사천 순무 나삼, 제독 정교린, 총병 담홍, 오지무 등이 오삼계를 따라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광서를 막기 위해 황제가 파견했고 손연령도 반란을 일으켰으며, 복건의 경정충도 오삼계의 움직임을 보고 청나라에 반기를 들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섬서 제독 왕보신, 광동의 상지신 등이 연이어 들고 일어섰습니다.
오삼계의 위세는 가히 하늘을 찌를 듯 했고, 천지를 진동시키고 있었습니다. 이런 기회를 노려 오군이 강북으로 진격을 한다면, 집결이 아직 완벽하지 않고 혼란에 빠진 청군은 국면을 수습하기 어려운 형세로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강희와 청조에게 있어 믿기 힘든 일이 일어났습니다. 오삼계가 진격을 멈춘 것입니다.
오삼계는 수레에 타고 위풍당당하게 점령지인 풍주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우뢰가 내리치더니, 기어코 오삼계의 수레를 맞추어 이를 몰던 사람의 의복과 모자가 전부 타버리는 괴이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역전의 무장이었던 오삼계도 이 불길한 징조에는 크게 놀라, 주위 사람들이 관련된 이야기를 꺼내는 것 자체를 엄금했습니다.
이렇게 마음 속에 한 줄기 의문이 드는 와중에, 문득 소문을 듣자니 현지의 어떤 사당에 크기가 엽전만 흰색 거북이 있는데, 사람들이 이 거북이를 이용해서 길흉을 점친다는 이야기를 들려왔습니다.
흥미가 동한 오삼계는 직접 사당으로 행차하여 거북이에게 길흉을 물어보고는 중국 전역을 그린 지도 위에 거북이를 올려 놓았습니다.
거북이는 한참동안 눈만 껌뻑이며 가만히 있었고, 오삼계 역시 앉아서 거북이를 바라보았습니다. 한참 동안 머뭇거리던 거북이는 조금씩 기어가더니 장사, 악주 사이에서 머물며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이후 다시 움직이는 듯 싶더니, 운남으로 돌아가 버리는 것입니다.
오삼계는 묘하다고 여기며 세번을 다시 시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거북이는 운남으로 향했습니다.
사실 오삼계는 구상해 놓은 계획이 있었습니다. 바로 운귀를 근거지로 삼고, 장강 남안을 점령하여 조정과 화의를 하여 천하를 둘로 나누려는 것입니다. 오삼계가 이런 판단을 내린것은 우선 북경에 있는 아들, 오응웅을 돌려 받고 싶었고, 또 다른 이유는 만주 군대의 실상을 아주 잘 알고 있는 오삼계는, 화북에서 100%의 힘을 발휘할 만주 기병의 무서움에 대해 몹시 경계하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완전히 승부를 내기보다는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를 지어 제 세력을 인정받고자 하는 생각이 더 컸던 것입니다.
그런 와중에 거북이 역시 자신의 구상대로 움직이자, 오삼계는 더 이상의 진격은 잠시 멈추고 북경의 황제에게 보낼 서한을 준비했습니다.
오삼계의 서한을 받아돈 강희제는, 그러나 오삼계의 모든 요구를 거절했습니다. 또한 이 시점에 이르러 오삼계의 아들에 대해서도 응분의 대가를 치루게 하였습니다. 사실 당초에 강희는 오삼계의 아들, 오응웅에 대하여 관대하게 용서하여 자신의 아량을 보이고자 하는 계획이었지만 의정왕대신회의는 이에 반대하였습니다. 오삼계의 적대적 행위가 노골화 되어 협상의 카드로도 별 의미가 없었고, 무엇보다 오응웅 본인이 일부러 북경에 변란을 일으키려 화재를 저지르는 모습도 있었기에 그는 결국 처형되었습니다. 반역자의 아들이 능지처참이 아닌 교수형이라는 점에서, 이는 가장 관대한 처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북경에서 아들이 죽었을 때, 오삼계는 그 소식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윽고 오응웅의 사형 소식을 들을 무렵 그는 식사를 하고 있던 중이었고, 음식을 먹던 중 낭패스러운 이야기를 들은 오삼계는 너무 놀라 한참을 죽은 사람처럼 있었을 정도입니다. 이제 강희제나 오삼계나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습니다. 둘 중에 하나가 죽어야만이 이 게임은 끝이 날 것입니다.
이제 타협 따위는 저 지옥에서나 울려퍼질 이야기에 지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강희제로서는 오삼계가 대단히 증오스럽겠지만, 그러나 적은 오삼계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오삼계의 반란이 복잡한 이유는 그것이 단순한 일개 군벌 세력의 반란이 아닌, 경우에 따라서 반청세력 ─ 즉 명나라 유신들과, 또 소수민족 등이 연계가 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청나라 조정의 입장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이 싸움이 한족과 만주족의 대결로 흐르는 일입니다. 중화 제국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는 무려 수억명에 다르는 한족 신민들입니다. 이들 모두가 분개하여 일어나 발을 한번 크게 구른다면, 수백만명에 부족한 만주족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쫒겨날 수 밖에 없습니다.
강희는 이 문제에 대해 본능적인 정치적 직감으로 대응했습니다. 그는 전쟁이 시작하고 8년에 걸쳐 마무리 되는 그 순간까지, 자신이 싸우고 있는 대상을 '수천 수억 명의 한족' 과, '구시대 명나라의 망령' 으로 보지 않고, 어디까지나 '반역자 오삼계' 개인으로 한정지었습니다. 분명하게 말하건대, '반란군' 이 아닙니다. 강희제는 계속해서 의식적으로 '반역자' 오삼계를 적으로 지칭했습니다.
반란군이 아닌 반역자 오삼계만을 노린다는것은 무슨 뜻인가?
강희는 '사특한 반역자의 꾀임과 무력 협박으로 어쩔 수 없이' 대역죄인 오삼계의 협력자가 된 '반란군' 에 대해서, 반역에 동조한 문제에 대하여 연좌 처벌을 하지 않겠다고 공언했습니다. 오삼계가 반란을 일으키고 나서 오군에 협조를 하게 된 현직 관리들은 적지가 않습니다. 혹은 퇴역하여 고향에 머물고 있다가 오삼계에 붙은 퇴직 관원 역시 적은 숫자는 아닙니다. 하지만 강희제는 이들 모두 "마음에 의심과 두려움을 품고 연루된 것 뿐." 이라고 말했습니다. 황제는 이부와 병부에 명을 내려 분명하게 선포했습니다.
"오삼계의 반역과, 너희들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비록 부자 형제가 운남에 있어도 연좌 처벌하지 않을 것이니, 각기 마음을 편안히 가지고 직무에 충실하여 근심을 품지 않도록 하라. 각기 편안한 마음으로 분수를 지켜 위협에 넘어가지 말고, 혹시 잘못해서 적의 무리에 따랐으나 죄를 뉘우치고 돌아오면, 모두 이전의 일을 용서해 주고 죄를 묻지 않겠다."
또한 반란군에게 함락된 지역의 백성들이나 관원들이 변발을 자른 일도 그렇습니다. 본래 청나라는 변발에 대하여 병적일 정도로 엄격했고,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다 싶으면 무시무시한 즉결 처형으로 다스렸습니다. 그러나 강희는 현 상황에서 백성들이 변발을 자르는것은 오삼계의 주륙을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불쌍히 여길 만하니, 특별히 관대하게 허락하여 자수를 허락할테니 책임을 추궁하지 않겠다고 공언했습니다.
일단 반란군에 협조하게 된 관원들이나 백성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강희는 "반란 세력 그 자체" 에 대해서도 이러한 정책을 사용했습니다. 하나의 세력에도 '매파' 와 '비둘기파' 등 상이한 세력이 존재하고 있는데, 이 모든 일은 오삼계와 "강경파" 가 꾸민 일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은 모두 용서해 주겠다고 공헌하며 오삼계의 세력에 대해서도 회유를 병행했습니다.
오군과 청군, 양측의 대전략은 큰 틀에서 충돌하게 됩니다. 오삼계가 이 전쟁을 이기기 위해선 전쟁의 범위를 끊임없이 확장해야 합니다. 수많은 전선에서 적을 창검으로 괴롭히고, '한족과 만주족' '명나라 유신과 청나라 압제자' 등으로 대상을 확대해 싸움의 규모를 될 수 있는대로 크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강희에게 주어지는 과제는 명약관화 합니다. 그는 사태를 계속해서 축소시키고, 일을 오삼계 개인의 멍텅구리 같은 야욕으로 꾸미면 될 일입니다.
즉, 소위 삼번의 난이라는 주체에서 강희가 진심으로 적이라고 여기는 대상은 오삼계의 번 하나뿐이었습니다. 그에게 있어 상가희의 번, 경정충의 번은 근본적으로 적이 아니었습니다. 강희는 그들을 위험하긴 하나 회유할 수 있는 뜨거운 감자로 여겼으며, 이러한 태도로 인해 '삼번의 난(三藩─亂)'은 실질적으로 그저 오삼계의 번, 그리고 강희가 옥좌에 앉아 있는 청조의 대결 양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상가희의 번과 경정충은 그들 주변에서 오락가락하는 제3 세력에 불과 합니다.
만약 강희가 상가희나 경정충에 대해 명확하게 적대적인 태도 ─ 그들이 보이는 기만적 태도와 노골적인 적대 행위에 분개하여 ─ 를 드러냈다면, 결국 구석에 밀린 두번은 적극적인 반란 주체 세력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강희가 대상을 오삼계로 한정함에 따라, 이들은 어디까지나 자신들의 결정에 따라 오삼계와 강희를 오갈 수 있는 세력이 되었고, 이는 오삼계에게는 막대한 타격입니다. 간단하게 말해, 다른 두 번은 결코 오삼계의 "적극적인" 협력자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최소한 '지금 당장은', 청조의 협력자도 아니었습니다. 강희는 어려운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경정충의 일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