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
[탕수육으로 본 조선시대 붕당의 이해]에 대한 스포일러 있습니다.*
*리뷰 특성상 반말체인 점 양해바랍니다.*
[리뷰] 조선탕수실록 - 그들은 왜 탕수육을 찍어먹을 수밖에 없었나
<조선탕수실록>과 콜럼버스의 달걀, 그리고 '강남 스타일'
<똥셉션>의 뒤를 잇는 또 하나의 초대형 걸작, <조선탕수실록> 붕당편을 감상하였다. 온라인 상에 공개된 이후로 피지알을 뒤흔들며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에 일파만파 뿌려지며 뜨거운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이 문제적 대작의 흥행 파괴력은 어디서 기인하는 것일까? 오늘 리뷰는 이러한 궁금증과 고민에서 출발하였다.
우선 이 작품의 흥행 원동력의 핵심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자면 이렇다.
콜럼버스의 달걀, 그리고 '강남 스타일'.
콜럼버스의 달걀이 의미하는 바는 간단하다. 따지고 보면 누구나 실행할 수 있지만, 사실 아무도 감히 생각해내지 못하는 것. 모두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자. 이 작품을 감상하기 전, 이 작품의 제목을 목격하기 전, 당신은 탕수육의 부먹과 찍먹 갈등을 조선 역사의 붕당정치로 연결시킬 생각을 해보았는가? 적어도 나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결국 무엇이든, 따라하긴 쉽다. 본 리뷰처럼-_-누군가의 참신한 시도에 무임승차하긴 쉽지만 시초가 되긴 어렵다는 얘기다. 결국 이 작품을 감상한 또 다른 누군가가 탕수육 논쟁을 우리 역사의 또 다른 다른 정치세력에 비유하거나 혹은 역사를 벗어나 아예 새로운 다른 소재에 비유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 발 늦었다. 그것인 이미 <조선탕수실록> 붕당편이 저술된 뒤의 일일 뿐이다. 그리고 이런 것들을 우리는 흔히 아류라 부른다.
2004년 스프리스배 MSL 패자 준결승전 2세트를 기억하는가. 반섬맵인 페럴라인즈에서 열린 강민 대 이병민의 경기에서 선보인 몽상가 강민의 환상적인 할루시네이션 리콜. 지금은 누구나 할 수 있고, 떠올릴 수 있는 이 할루시네이션 리콜이 당시에 우리에게 얼마나 커다란 충격과 놀라움을 줬는지를 떠올려보자. 그만큼 위대한 상상력을 통해 발휘되는 첫 시작점, 이른바 상상력의 시초의 임팩트는 그만큼 강렬하다. 그리고 이러한 강렬함이, 탕수육이란 소재로 조선의 붕당정치를 한방에 관통시킨 역작 <조선탕수실록>에는 고스란히 담겨있다.
키치와 유머, 그리고 전문성의 절묘한 결합
더불어 이 작품이 당대의 많은 피지알러들에게 무수한 찬사와 반향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한 '기발함'에서 기인하는 것은 아니다. 우선 이 작품은 재밌다. 아무리 기발한 상상력을 통해 탄생한 작품이라 하더라도 작품 자체의 재미와 재기발랄함이 없다면 그 작품은 큰 반향과 찬사를 이끌어내는데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결국 나는 <조선탕수실록>에서 <강남스타일>의 향기를 느꼈다. 유치함이 깔린 기발함과 키치적 유머의 적절한 결합이 얼마나 폭발적인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지를, 우리는 이미 싸이의 <강남스타일>을 통해 목격하지 않았는가?
<강남 스타일>과 마찬가지로 <조선탕수실록>을 뒤덮고 있는 키치적인 정서와 그 밑에 깔린 깨알 같은 유머와 난무하는 각종드립, 그리고 이에 더불어 그 밑바탕을 든든히 받치고 있는 역사적 전문성은 매우 적절하고도 절묘하게 결합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힘의 원동력은 결국 순수하게 글쓴이의 필력에서 기인했다해도 가히 틀린 말은 아니다. 결국 키치와 유머, 그리고 전문성이라는 삼위일체의 성스럽고 위대한 감동을, <강남 스타일>에 이어 <조선탕수실록> 붕당편이 우리에게 생생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순두부, 대중의 언어로 이야기하다
그리고 또한 주목할 만한 지점은, 이 작품의 역사라는 딱딱한 껍데기와 틀을 깨고 이른바 친근하고 평범한 '대중의 언어'로 쓰여졌다는 사실이다. 흔히들 조선 역사, 혹은 붕당정치라고 하면 조선 역사 가운데서도 가장 어렵고 복잡한 파트라고 여기며 지레 겁먹고 포기하곤 한다. 넘치는 객기로 조선의 정치사를 이해하겠다며 붕당정치 원정대에 합류를 선언하며 덤벼온 많은 이들이 대부분 조선 중기 예송논쟁의 벽을 넘지 못하고 좌절하였으며 어찌어찌 이 고비를 넘긴 후에도 벽파와 시파로 나뉘어지는 조선 후기 미로에서 헤매다 자신도 모르게 시파-_-를 연발하며 고개를 떨구곤 했다. 수학으로 치자면 러시아의 천재수학자 야코블레비치 페렐만에 의해 증명되기 전까지 수세기 동안 풀리지 않았던 푸앵카레의 추측에 비할만 하며, 연애로 치자면 "나 요즘 살찐 거 같지 않아?"라는 여친님의 가볍고도 묵직한 일성에 비할만 한 것이다.
이것은 마치 2001년 <메멘토>로 새 시대, 참신한 영화적 문법을 겁 없이 제시한 젊은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의 등장, 혹은 1999년 <매트릭스>로 가상과 현실을 넘나들며 전세계 관객들을 충격과 흥분의 도가니에 빠뜨린 워쇼스키 형제의 등장과도 일맥상통한다. 정치인으로 보자면 어렵고 복잡한 정치-경제적 담론을 매우 쉽고 친근한 대중의 언어로 풀어낼 줄 아는 유시민의 면모와도 닮아있다. 결국 글쓴이는 그동안의 매니악하면서도 전문적인 본인의 기존 집필 스타일의 장점을 그대로 살리면서도 그 위에 탕수육이라는 대중적 언어를 비벼넣으며 재미와 전문성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들은 왜 탕수육을 찍어먹을 수밖에 없었나
하지만 이러한 글쓴이의 뛰어난 역량과 대작의 감동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아쉬운 점은 있다. 글쓴이는 단지 어떻게 하여 조선시대 탕수육 부먹파와 찍먹파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갈등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이 과정 속에 어떻게 탕수육을 소스에 찍어먹는 것이 정석이 되었고 그 이후 이러한 부먹과 찍먹이 어떠한 갈래와 줄기로 다양하게 파생되었는지를 거시적이고 객관적 견지에서, 즉 '어떻게'의 관점에서 서술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점이 아쉽다. 우선 글쓴이는 본인이 부먹파인지 찍먹파인지에 대해 명확하게 밝히고 있지 않다. 이는 우리가 이 작품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음에도 글쓴이는 철저히 가치중립적인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 조선 시대 서인들은 왜 탕수육을 소스에 찍어먹을 수밖에 없었는지, 광해군과 북인은 피범벅이 된 짬뽕국물을 왜 탕수육에 부어버리는 패륜적 만행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사도세자는 왜 소스를 찍은 탕수육을 간장에 또 한번 찍어먹을 수밖에 없었는지 등등 '왜'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 이른바 붕당정치의 역사와 논쟁 이면에 담겨있는 그들 나름의 탕수육 철학과 인간적 고뇌, 그리고 탕수육을 대하는 그들의 소스적 이데올로기가 제대로 설명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작품 <조선탕수실록> 붕당편이 탕수육을 통해 붕당정치의 흐름을 짚어주는, 기본적 개론서적인 측면에서 쓰여졌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결국 이 작품을 통해 조선 붕당정치의 흐름을 이해하게 된 독자들의 궁금증은 결국 '왜'라는 의구심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독자들의 이러한 궁금증과 목마름에 대한 충분한 해설과 답변 또한, 결국 글쓴이의 몫으로 남겨졌다.
옛 소스에 젖은 탕수육은 죽은 탕수육이다
거장이 거장일 수 있는 까닭은 간단하다. 언제나 그렇듯 진정한 거장은 한번의 성공, 하나의 성취에 만족하지 않는다. 할리우드 최고의 감독으로 칭송받는 거장 제임스 카메론이 진정으로 위대한 이유는 <터미네이터>, <타이타닉>등 작품들의 초대박 흥행 성공에 만족하지 않고 <아바타> 등을 통해 끊임없이 발전하고 노력하는 뜨거운 도전 정신과 갈증어린 열정에 있다. 결국 <조선탕수실록> 붕당편이라는 문제적 대작을 탄생시킨 글쓴이 또한 끊임없이 허기지고 갈증해야 하며 또 그러길 빈다.
뛰어난 상상력과 재기발랄함을 지닌 글쓴이가 '옛 소스에 젖은 탕수육은 죽은 탕수육'이라는 진리적 명제를 언제나 명심하길 바라마지 않으며 끝으로, 조선 역사의 흐름과 붕당정치의 핵심을 탕수육 하나로 후련하게 꿰뚫어낸 글쓴이의 통찰력과 관통력(?)에 다시 한번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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