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관하여를 뒤늦게 정주행했는데 -_-a 좀 울었네요.
역사 속의 인물들은 어떻게 죽어갔는지 좀 들춰보려구요. 조선시대 왕들 다 해보려고 했는데, 일단 대왕님만 해 보도록 하죠. 간만에 대왕님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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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저래 유명한 게 많은 대왕님입니다만, 최근에 좀 뜨고 있는 게 바로 고기사랑이죠.
요런 것도 나오구요 ( - -)a
"주상이 젊었을 때부터 고기가 아니면 밥을 먹지 못하였으니, 이제 초상을 당하여 소찬(素饌)한 지가 이미 오래 되었으니, 내가 어찌 어여삐 보지 않겠는가?"
세종 2년, 정종이 죽었을 때 태종이 한 말입니다.
"태종께서 유교(遺敎)하시기를, ‘주상의 성질은 소선(고기 없이 소식하는 것)을 하지 못한다.’ 하시어, 태종의 유교가 귀에 쟁쟁하온데, 그 유교를 따르지 아니하심을 어찌하시겠습니까?"
이런 말도 남겼다고 하죠 (...)
뭐 이게 그냥 '쟤는 고기 없으면 못 사니까'라고 챙겨준 것만은 아닐 겁니다. 세종은 상중에 소식하는 것을 지켰고, 그게 유교에서 옳은 자세긴 하지만 임금에게는 위험한 일이었죠. 그러다 쓰러지면 나라가 어찌 될 지 모르는 거니까요. 그래서 초상날 때마다 세종은 고기 안 먹겠다, 신하들은 태종 유언을 지켜서 고기 드셔요 하는 싸움이 곧잘 일어났습니다.
아무튼... 고기 덕후라는 건 태종이 제대로 인증해 준 거죠.
고기 없으면 밥을 안 먹고 언제나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상황... 비만이 올 수밖에요.
"주상은 사냥을 좋아하지 않으시나, 몸이 비중(肥重)하시니 마땅히 때때로 나와 노니셔서 몸을 존절히 하셔야 하겠으며, 또 문과 무에 어느 하나를 편벽되이 폐할 수는 없은즉, 나는 장차 주상과 더불어 무사를 강습하려 한다."
태종은 이러면서 세종과 함께 사냥을 갔는데, 이 때가 세종 즉위년(1418), 그의 나이 22살 때입니다. 이미 이 때부터 비만이었다는 거죠. 뭐 태종이 놀러가려고 꼼수 쓴 걸로 보기도 합니다만 (...)
그리고 비만으로 오는 병... 그의 증세를 보면 현대에도 유행하는 어떤 병과 참 닮았습니다.
"내가 젊어서부터 한쪽 다리가 치우치게 아파서 10여 년에 이르러 조금 나았는데, 또 등에 부종으로 아픈 적이 오래다. 아플 때를 당하면 마음대로 돌아눕지도 못하여 그 고통을 참을 수가 없다. 지난 계축년 봄에 온정(온천)에 목욕하고자 하였으나, 대간에서 폐가 백성에게 미친다고 말하고, 대신도 그 불가함을 말하는 이가 있었다. 내가 두세 사람의 청하는 바로 인하여 온정에서 목욕하였더니 과연 효험이 있었다. 그 뒤에 간혹 다시 발병할 때가 있으나, 그 아픔은 전보다 덜하다.
또 소갈증(消渴症)이 있어 열 서너 해가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역시 조금 나았다. 지난해 여름에 또 임질을 앓아 오래 정사를 보지 못하다가 가을 겨울에 이르러 조금 나았다. 지난봄 강무한 뒤에는 왼쪽 눈이 아파 안막을 가리는 데 이르고, 오른쪽 눈도 인해 어두워서 한 걸음 사이에서도 사람이 있는 것만 알겠으나 누구누구인지를 알지 못하겠으니, 지난봄에 강무한 것을 후회한다. 한 가지 병이 겨우 나으면 한 가지 병이 또 생기매 나의 쇠로함이 심하다." (세종 21년 6월 21일)
"소갈병을 앓아서 하루에 마시는 물이 어찌 한 동이만 되었겠는가."
소갈, 동의보감에서 이 병을 어떻게 적었는지 봅시다.
소갈, 소중, 소신 병은 오장 삼초 허열일세 / 방광 홀로 얼음 같아 기화 작용 못한다네
물만 찾아 쉴 새 없고 오줌 또한 멎지 않네 / 뼈는 차고 겉은 타며 심장 폐장 터지는 듯
그 원인을 찾아보니 한두 가지 아니로세 / 술을 즐겨 지내먹고 고기 굽고 볶았으며
술 취한 후 방사하고 노력 또한 지나쳤네 / 물 마시고 밥 먹는 것 날을 따라 늘어나니
살은 점점 빠져가고 정액, 골수 마른다네 / 꿀과 같은 단 오줌은 기름같이 미끄럽고
입은 쓰며 목은 타며 혓바닥은 핏빛일세 / 삼소 증상 이러하면 위험하기 짝 없는데
신선의 처방이 진실된 묘방이라네.
여기서 볼 수 있는 건 물을 많이 마시고 소변도 많이 보며 밥 먹는 것도 느는데 살은 빠진다는 것이죠. 그리고 결정적으로 소변이 달다고 합니다.
네.
당뇨병과 소름끼치도록 닮았죠 -_-; 위를 삼다(다음 다뇨 다식) 현상이라 한다고 합니다. 자세히 보면 다른 모습도 있다 하는데, 대체적으로 역사 속의 소갈증을 당뇨병으로 보는 모양입니다.
당뇨병의 증세와 비교해본다면 이 부분 역시 의미심장하죠.
"30살 전에 매던 띠가 모두 헐거워졌으니 이것으로 허리 둘레가 줄어진 것을 알겠다. 나의 나이가 33세인데 살쩍의 터럭 두 오리가 갑자기 세었으므로, 곁에 모시는 아이들이 놀라고 괴이히 여겨 뽑고자 하기에, 내가 말리며 말하기를, ‘병이 많은 탓이니 뽑지 말라. ’고 하였다. 나의 쇠함과 병이 전에 비하여 날마다 더욱 심하니 경은 그런 줄을 알라" (세종 13년 8월 18일)
그의 말대로 이 때 그의 나이 겨우 33이었습니다. 배는 계속 고프고 먹는 건 늘어나는데 살은 되려 빠지는 병, 이게 당뇨병이죠.
이쯤되면 그가 눈이 멀어간 것 역시 의심됩니다. 당뇨병의 합병증에는 이것 역시 포함되거든요.
다만 이건 다른 병이 원인으로 보기도 하더군요. 그는 소갈과 함께 풍질에 걸렸다고 호소하는데, 이게 강직성 척수염과 닮았다고 합니다. 이 역시 눈병을 동반한다고 하구요. 이건 찾아보기가 힘드네요. 위에 옮긴 것도 사실 풍질 때문에 살 빠졌다고 하는 겁니다.
"한낮이 되어 잠시 이층에 올라가서 창문 앞에 누워 잠깐 잠이 들었더니, 갑자기 두 어깨 사이가 찌르는 듯이 아팠는데 이튿날에는 다시 회복되었더니, 4, 5일을 지나서 또 찌르는 듯이 아프고 밤을 지나매 약간 부었는데, 이 뒤로부터는 때 없이 발작하여 혹 2, 3일을 지나고, 혹 6, 7일을 거르기도 하여 지금까지 끊이지 아니하여 드디어 묵은병이 되었다."
그 외에 임질에 걸렸는데, 이걸 성병으로 볼 순 없다고 하네요. 성병뿐만 아니라 생식기에 걸리는 병을 통칭한다구요. 뭐 이것 때문에 세종은 성병에 걸렸다는 떡밥이 만연합니다. 자세히는 모르니 더 이상은 노코멘트. 그런 상황에서도 많은 자식을 낳았다는 걸 보면 -_-; 대단하기도 하네요. 당뇨에도 성기능 장애가 포함된다고 들었는데 아닌 건지...
어느 쪽으로 보든간에 참 종합병동입니다. 위로는 눈부터 아래로는 거시기까지...
이렇게 그는 최소 30대 초반부터 죽을 때까지 온갖 병에 시달렸습니다. 때문에 재위 20년이 넘으면서 슬슬 은퇴하려고 했죠. 위에 소갈이 나온 대화도 세자에게 슬슬 넘겨주려는 과정에서 신하들이 반대하니까 나온 말입니다. 그럼에도 신하들은 꾸준히 반대했고, 이런 말까지 나옵니다.
"큰 일은 내가 직접 다스리겠으나, 그 나머지의 서무는 세자로 하여금 대신 다스리게 하고자 하니, 이것이 몸을 보호하기에 급급히 하는 뜻이다.
경 등은 어찌하여 내 병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억지로 말하는가?"
이 때가 세종 27년, 참 징하게 반대했나 봅니다. 그렇게 나라를 생각했던 왕이 나라는 둘째치고 자기 몸 하나 지키기 힘들다고 버럭한 것이죠. 결국 이 때부터 문종이 차츰 정사를 보게 되죠. 세종은 수양 등 -_-; 왕자들의 집을 옮겨다니며 신하들과 거리를 둡니다. 주로 수양과 안평대군이 세종의 명을 전했죠.
문제는... 그렇다고 그가 쉰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위의 연도를 다시 봅시다. 그 이전부터도 그는 계속 아프다 아프다 하면서 세자에게 최대한 넘기려 했습니다. 그런데...
훈민정음이 세종 25년에 창제됩니다. -_-;
훈민정음을 반포하고 용비어천가부터 해서 훈민정음을 정착시키려고 노력했고, 정간보를 만드는 등 음악 쪽으로도 발을 넓히고, 고려사를 계속 검토하면서 죽을 때까지 다시 하라고 하질 않나... 이쯤되면 왕 일 많이 했으니 내가 하고 싶은 거 하겠다 수준입니다. 그렇다고 정사를 아예 무시한 것도 아니었죠.
병을 다스리는데 가장 중요한 휴식, 그게 그에겐 없었던 거죠. 방향만 조금 바뀌었을 뿐. 당뇨병에는 피곤과 무기력증이 동반된다는데 그런 게 없었던 건지 이겨낸 건지... 아니 그런 걸 떠나서 병 걸리면 쉬고 싶은 게 인지상정 아닙니까. 당장 쉬고 싶다고 세자에게 일 맡긴 건데 말이죠.
이러니 병이 나을 리가 있겠습니까. 거기다 문종도 심심하면 아파서 걱정했을테니 마음의 휴식도 있었을 리 없죠. 그는 결국 왕이었으니까요.
그리고 죽기 직전, 이런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
임금의 몸이 완전하게 평복되지 못하여서, 승정원에서 사건을 아뢰지 않았으므로, 일이 지체되는 것이 많았는데, 이에 이르러 비로소 사건을 아뢰매, 모든 사무를 재결하는 데 처리하기를 물흐르듯 하되, 모두 끝까지 정밀하게 하기를 평일과 다름이 없었다."
당시는 문종도 종기 때문에 몸조리하던 중이었고, 그 역시 몸이 이미 한계였습니다. 그럼에도 일어나서 쌓인 일들을 모두 처리한 것이죠. 죽기 3일 전의 일이었습니다.
딱히 남긴 유언은 없는 모양입니다. 아니 이 모습을 보면 유언이 필요나 있을까 싶어요. 온갖 병에 시달리면서도 마지막까지 일을 하다 간, 정말 그다운 마지막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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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서 좀 큰 문제가 나왔는데... 왕자들 집을 옮겨다니며 왕자들에게 의지하다보니 그들의 세력이 커져버린 거죠. 특히 둘째놈이 -_-; 하긴 문종이 바로 그의 뒤를 따를 줄 알았겠습니까마는...
다른 왕들은 그냥 한데 묶어서 하죠 뭐. 정조 같은 경우는 따로 할까 생각하고 있긴 합니다만 ( - -)a
* 信主님에 의해서 자유게시판으로 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3-04-16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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