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 대한 스포일러 있습니다.*
*반말체인 점 양해바랍니다.*
[리뷰] 꽃잎(1996) - 80년 5월은 가고 여기, 한 소녀만이 남다
여기 한 소녀가 있다.
짧은 단발머리는 풀어헤쳐져 있고 동공은 풀려 저 멀리를 응시하고 얼굴과 온몸에 지저분한 먼지와 때가 덕지덕지 묻어있는 소녀. 이 소녀는 가끔 꺄르르 웃기고 하고 또 가끔은 두려움에 덜덜덜 떨며 비명을 지르기도 하며 또 가끔은 실실 웃기도 하고 또 가끔은 자신의 몸을 스스로 자해하기도 한다. 이 소녀는 왜 그럴까. 이 소녀는 왜 이러한 모습을 하고 여기에 있을까?
저기 소리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
장선우 감독의 <꽃잎>을 봤다.
장선우 감독은 영화 속 주인공인 한 소녀의 가슴 깊이 새겨진 상처를 통해 '5.18 광주 민주항쟁'이라는 우리 역사의 씻을 수 없는 아픔을 들추어내고 있다. 장선우 감독의 <꽃잎>은 내가 중학교 1학년이던 1996년 봄에 개봉을 했다. (참고로 이 영화는 1988년 『문학과 사회』에 발표된 최윤의 소설『저기 소리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96년 이 영화가 개봉될 당시 이 작품은 영화 최초로 '5.18 광주민주항쟁'을 다루었다는 그 자체로 많은 화제를 뿌렸다. 심지어 그 당시 중학교 1학년생이었던 나 또한 (이 영화를 볼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여서 영화의 자세한 내용은 잘 몰랐지만) 미친 소녀를 리얼하게 연기했던 이정현을 통해 <꽃잎>이라는 영화의 존재를 익히 알고 있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사실 당시만 해도 1980년 5월의 광주를 직접적으로 다룬 영화가 없었기에 이 영화의 존재 자체가 커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었고 많은 이들이 80년 5월의 광주를 장선우 감독이 어떻게 묘사했을 지를 크게 궁금해 했다. 결국 영화는 최윤의 소설 원작을 충실하게 따르면서도 영화라는 매체 특유의 영상의 힘을 잘 부각시켰다는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초반에 바로 등장한 미친 소녀는 막노동 일로 하루하루 먹고 살아가는 공사장 인부 정씨의 뒤를 졸래졸래 쫓아다닌다. 정씨는 소녀가 쫓아오지 못하게끔 화를 내고 심지어 성폭행까지 휘두르지만 결국 소녀는 정씨의 뒤를 따르고 정씨의 숙소 한 켠에 자리를 잡고 정씨와 함께 생활하게 된다. 한편 강제 징집되었다가 죽은, 소녀의 오빠의 친구들은 이 소녀를 찾기 위해 소녀의 흔적을 찾아서 떠돌아다닌다. 이렇듯 이 영화는 두 개의 이야기를 번갈아 가며 보여주는 이중 구성의 내러티브 형식을 취하고 있다. (또한 중요하면서도 추상적인 부분은 애니메이션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그러면서 영화는 천천히, 이 소녀가 왜 미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그 이유, 그 인과 관계를 천천히 보여준다.
그렇다면 왜 소녀는 이런 모습이 될 수밖에 없었을까?
한 소녀의 이야기
소녀는 엄마와 오빠와 함께 살아가는 15살짜리 귀여운 아이였다. 하지만 어느 날 오빠가 강제 징집 되어 죽고 난 이후로 집안의 분위기는 많이 달라졌고 이 소녀는 엄마가 자기를 버리고 떠날 것을 염려하게 된다. 그리하여 어느 화창한 봄날, 소녀의 애원을 뿌리치고 광주 시내에 나가는 엄마를 억지로 따라 나섰던 소녀는 광주 시내에서 계엄군과 마주하게 된다. 결국 12시 정오에 울려 퍼지는 애국가 소리와 함께 계엄군의 총격이 시작되고 소녀의 손을 잡고 함께 도망치던 엄마는 계엄군의 총에 맞아 쓰러져 죽게 된다. 바로 눈앞에서 엄마의 죽음을 목격하고 자신 또한 죽음의 위기에 맞딱뜨린 소녀는 패닉상태에 빠지게 되고 자신의 손을 부여잡고 있는 엄마의 손을 발로 짓밟으며 그 곳을 빠져나와 도망치게 된다. 결국 이러한 상황은 소녀의 마음속에 커다란 충격과 상처, 그리고 일종의 트라우마로 남게 되고 결국 소녀를 비정상적인 상태로 만들어버린다.
영화는 이러한 소녀의 과거와 '5.18 광주 민주항쟁'의 처절한 광경은 회상의 형식 혹은 일종의 플래시백과 같은 삽입의 형식을 통해 영화 중간 중간에 나타나게 되고 관객은 이러한 영상을 통해 소녀의 상처와 아픔의 원인을 점차 이해하게 된다. 하지만 소녀의 이러한 과거를 모르는 정씨는 소녀를 부담스럽고 귀찮게 여기며 폭력을 휘두르고 성폭행을 자행하지만 소녀는 그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 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소녀에게 모종의 아픔의 과거가 있음을 느끼게 된 정씨는 소녀에게 연민의 정을 느끼고 소녀의 아픔을 치유해주고자 하는 마음을 조금씩 갖게 된다.
'5.18 광주 민주항쟁'의 처절한 광경과 소녀에 대한 정씨의 성폭행, 그리고 소녀의 자해 행위 등을 보여주며 보는 내내 나의 눈과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던 영화는 소녀에게 정씨가 마음을 조금씩 열고 소녀의 마음을 치유하게 위해 다가가는 부분을 통해 보는 이의 마음을 점차 따뜻하게 만들어 준다. 정씨가 꼬질꼬질한 행색의 소녀에게 입히기 위해 시장을 돌아다니며 머뭇머뭇 예쁜 옷과 신발을 사는 모습은 개인적으로 영화를 보는 나를 웃음 짓게 만들었다. 집에 돌아온 정씨가 커다란 대야에서 소녀의 몸을 억지로 씻겨주기 위해 소녀와 치열하게 씨름하는 모습은 이 영화에서 가장 훈훈한 광경일 것이다. 그렇게 깨끗하게 소녀를 목욕시키고 예쁜 옷과 신발을 입히고 맛있는 저녁을 함께 먹지만 수줍은 듯 밥을 먹던 소녀는 이내 실성한 듯 크게 웃음을 터뜨린다. 결국 이러한 모습을 통해 소녀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 그리 쉽고 간단한 문제가 아님을 영화는 보여준다.
그들은 왜 '창밖의 여자'를 목놓아 불렀나
한편 소녀를 찾아 헤매는 소녀 오빠 친구의 일행들은 소녀를 쉽게 찾아내지 못하고 허송세월을 보내게 된다. 이들이 이 소녀를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영화에서 그들은 그 이유를 확실하게 얘기하지 않는다. 그냥 왠지 찾아야만 할 것 같은 사명감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 사명감이란 '80년 5월 광주에 대한 일종의 부채의식'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이러한 그들이 소녀를 찾지 못한 가운데 술을 마시며 절규하듯 목놓아 부르던 조용필의 '창밖의 여자'와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라는 이 노래의 가사는, 이러한 그들의 소시민으로서의 무력함과 무기력함을 자연스럽게 드러내준다.
한편 정처 없이 숙소 밖으로 떠나는 소녀를 뒤따라간 정씨는 오빠와 엄마 무덤 앞에서 서럽게 울며 80년 5월, 그 날의 일을 얘기하는 소녀의 모습을 통해 소녀의 사연을 알게 된다. 그 후로 소녀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소녀의 흔적을 찾아 정씨의 숙소까지 찾아온 소녀 오빠의 친구들에게 정씨는 소녀를 꼭 찾아달라고 부탁하지만 그들은 냉담한 반응을 보이며 그 곳을 떠난다. 영화는 엔딩 부분에서 내래이션을 통해 관객들에게 소녀에 대한 당부를 하며 영화를 마무리하고 있다.(참고로 이 부분은 원작 소설의 시작 부분이기도 하다.)
꽃잎, 한 소녀의 가슴에 새겨진 역사의 상처
결국 영화는 '왜?' 라는 질문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즉, '왜 소녀가 이렇듯 비정상적인 상태가 되었는가?', '소녀 오빠의 친구들은 왜 이 소녀를 찾는가?' 등등. 그리고 이에 대한 해답은 영화 중간 중간에 드러나는 '5.18 광주 민주항쟁'의 생생한 참상에 있다. 결국 영화는 한 소녀의 가슴 깊이 새겨진 아픔을 통해 5.18이라는, 우리 역사의 씻을 수 없는 상처를 관객들 앞에 들추어내고 환기시킴으로써 우리의 역사와 우리 자신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이러한 지점에서 영화는 관객의 마음을 불편하게 많드는 많은 장면에도 불구하고, 한 개인을 통해 근현대사의 어두운 그림자를 들추어내고 반추하게 만드는 촉매제로서의 역할과 소임을 충분히 다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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