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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보니 예전에 단종애사 썼던 게 생각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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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오사화의 배경은 좀 이색적입니다.
선왕이 죽은 후 임시로 만들어지는 실록청, 이들은 사관들이 쓴 사초를 중심으로 실록을 만듭니다. 왕이 믿는 이들이 맡길테니 기본적으로 왕 편이 될 수밖에 없죠. 실제 어떤 실록이든 편찬 당시의 지배세력의 주장이 강하게 들어갑니다.
그런 점에서 왕을 대충 비판하는 수준이 아니라 정통성 자체를 공격한다는 건 정말 특이한 일이었습니다. 정말 전무후무했죠.
왕이 사초를 못 본다 해도 실록을 아예 못 보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남길 이유도 없었겠죠. 최대한 필터링을 걸쳐서 필요할 때만 신하들이 찾아서 왕에게 보여주는 식이었습니다.
신하들로 가면 실록의 내용을 모를 수가 없습니다. 실록을 편찬하는 작업 자체가 결코 작은 게 아니었고 많은 이들이 참가합니다. 문제가 되는 내용이 있다면 이들은 물론 이들과 친한 이들이 모를 수 없는 상황인 것이죠.
이극돈이 사초를 공개한 이유는 김일손과 개인적인 원한으로 적고 있습니다. 그가 아첨을 잘 했느니 불교를 믿었니 하는 부분이 있어 개인적으로 삭제를 요구했고 김일손이 거부하자 문제되는 내용을 퍼뜨렸다는 겁니다. 유자광이 이걸 받아 강력한 스파이크를 날렸구요.
+) 그리고 이 내용은 그의 졸기에 그대로 적힙니다. 하지만 나쁜 내용만 적힌 게 아니라 능력에 비해 진급이 늦었다는 식의 서술도 함께 있죠
하지만 실록에서 대신들의 말을 보면 그들 역시 어느정도 알고 있었고 처벌에도 동의한 것으로 나옵니다. 행동대장이야 유자광이었지만 그들 역시 동참한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는 대간들에서도 마찬가집니다. 문제된 사초의 관련 인물들에 대한 처벌은 대간들도 반대하지 않았고, 동참합니다. 심지어 김종직의 제자들까지도 그랬죠.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더 이상 임금이 사초를 보면 안 된다는 원론적인 것이었습니다. 바꿔 말하면 사초를 보는 초유의 사태임에도 어느정도의 명분은 있었다는 것이죠.
사초의 문제가 임금의 귀에 들어간 게 처음은 아닙니다. 예종 때도 성종 때도 한 번씩 있었죠. 전자는 자기에 대한 기록이 안 좋아서 개인적으로 바꾼 게 들통난 거였고 후자는 대신들이 두려워 내용을 바꾼 거였습니다. 후자의 경우 대신들의 권위가 그만큼 셌다는 증거로도 쓰입니다만, 어쨌든 사초의 내용이 그렇게 비밀은 아니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서 너무 강한 모험이었습니다. 뭐 그대로 갔다면 우리입장에서야 세조에 대한 반감이 꽤 강했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 때는 경악 그 자체였죠.
그리고 그 과정을 보면 지금의 상식에 비해 좀 다른 걸 보게 됩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그 명성에 비해 참 싱겁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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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사화, 이 사건으로 거대한 옥사가 있었고 사림은 큰 피해를 입었으며 연산군은 독주를 시작했다... 이게 무오사화에 대한 설명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 사건으로 죽은 이는 얼마나 될까요? 어느 정도 생각하세요?
7명
입니다. -_-; 딱 세븐갤 털 수 있을 정도군요.
7월 11일에 시작된 무오사화는 7월 29일에 끝납니다. 그 중 사형당한 이는 7명, 유배간 이는 30명, 파직된 이는 7명이었습니다. 다 합쳐 44명이었죠. 피가 철철 흘렀다는 이미지와는 좀 다르죠?
마지막으로 무오사화를 주도하면서 힘이 실린 유자광은 반년도 안 돼 파직됩니다. 다름아닌 대간의 탄핵으로 말이죠.
뭐 어쨌든 피는 흘렀습니다만, 뭔가 대규모라느니 흐름을 바꾸니 하기엔 부족한 게 사실이죠.
이 때 연산군과 대신, 대간들의 생각을 보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노사신은 연산군 집권 때부터 그의 강력한 지지자가 돼 줬습니다. 대간들에 대한 비판을 멈추지 않았고 연산군의 각종 정책들을 지지했으며 폐비 윤씨 문제에서도 강력히 밀어붙였죠.
이 때도 그는 "세상이 어쩌다 이렇게 됐나" 하면서 슬퍼했으며 사화를 주도, 끝난 후 포상을 받습니다. 하지만 계속 확대를 요구한 유자광이나 딱히 딴지를 걸지 않았던 다른 대신들에 비해 그는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종직이 시문을 지어서 (중략) 대역으로써 논단하는 것이 진실로 당연하오나, 일손 등은 단지 종직의 시문만을 찬양하였으니, 종직과 더불어 죄과를 같이 하는 것은 부당하옵니다."
"연루자는 마땅히 국문해야 할 것이오나 만약 제자라 해서 모조리 추핵한다면 소요를 이룰까 걱정이옵니다."
"일손 등이 시문을 자작한 것이 아니옵고 단지 종직만 찬양하였사온즉 그 죄가 마땅히 가벼워야 하옵니다. 그러므로 감히 아뢰는 것이옵니다
그는 사화를 확대하려는 유자광과 계속 맞섰고, 사관은 이 사건을 정리하면서 노사신의 말을 많이 옮겨둡니다.
(유자광이 사건을 키우려 하니 다들 침묵하는데 노사신만 나서서) "저 당고(삼국지 오프닝 - -a)의 일을 들어보지 못했소. 금망을 날로 준엄하게 하여 선비들로 하여금 족적을 용납할 곳이 없게 하다가 한나라도 역시 망하고 말았으니,
청론을 하는 선비가 마땅히 조정에 있어야 하오, 청론이 없어지는 것이 국가의 복이 아니거늘, 무령은 어찌 말을 어긋나게 하오"
"당초에 우리가 아뢴 것은 사사(史事)를 위함인데, 지금 지엽(적인 것)에까지 만연되어 사사에 관계되지 아니한 자가 날마다 많이 갇히고 있으니, 우리들의 본의가 아니지 않소"
대간들의 최고의 표적이자 그의 살을 씹고 싶다는 말까지 들었던 노사신이지만, 정작 그들을 구한 것 역시 노사신이었다는 거죠. 연산군으로서는 화딱지 날 일이었을 겁니다. 김종직이 이미 죽었으니 벌 적당히 주자고 했던 대간들을 그 자리에서 국문한 게 연산군이었습니다. 하지만 노사신은 그렇게 다루긴 어려웠죠. 노신이기도 했고 그 자신의 측근이나 다름 없었으니까요. 사관들은 연산군이 유자광의 편을 계속 들었다고 적었지만, 노사신이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미친듯한 확대는 힘들었겠죠.
하지만 그 혼자의 활약으로 그렇게 규모가 줄기는 힘듭니다. 더 이상 확대하기 힘든 환경이 있었다고 봐야죠.
일단 윤필상, 성준 등의 대신들, 그들은 연산군의 말에 예예 하면서 따르긴 했습니다. 하지만 제대로 강경 드라이브를 탄 건 유자광 뿐이고, 다른 이들은 그저 예에 수준이었죠. 자신들의 적이었던 대간을 죽이기 아주 좋은 상황이었는데 말이죠. 무엇보다 사건의 시작이라는 이극돈은 시종일관 소극적으로 나왔고, 사초를 더 이상 공개하는 걸 꺼립니다. 때문에 사초 공개가 늦었다는 이유로 파직당하죠. 그 역시 무오사화의 피해자 중 하나였습니다. 자기의 원한 때문이든 (김일손과 대립한 건 맞는 거 같거든요) 왕의 딸랑이가 되기 위해서든 더 공개하는 게 맞을텐데요.
그렇기에 대간들 역시 아예 수그러들지 않습니다. 김일손부터 김종직 등에 대해서는 엄벌을 주장했지만 더 이상 사초를 공개하는 걸 막은 것이죠.
종합하자면 이렇게 되겠죠.
김일손의 사초는 대신들이 보기에 왕에게 알려야 될 정도로 위험한 것이었고, 대간들 역시 그걸 비판하지 못 할 정도로 중대한 문제였습니다. 왕의 정통성을 깨뜨리려는 시도였으니까요. 그것도 좀 계획적으로 하면 모를까 김일손이 독단으로 저지른 것이었죠. 한마디로 사초를 공개하는 금기를 범할 정도로 중요한 명분이 있었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 명분은 거기까지였습니다. 왕이 사초를 보면 안 되는 건 역시 유교의 근본적인 원칙이었고 대신들도 그걸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대간들은 그 명분을 계속 밀어붙였구요. 연산은 이걸 넘어설만한 명분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연산군의 생각은 어땠을까요?
일단 그는 시종일관 김종직의 죄를 문제삼습니다. 자기가 가진 최고의 명분이었죠. 감히 세조까지 올라가는 정통성을 위협한 거니까요. 하지만 유자광과 노사신의 대화에서 나온 키워드 '청론하는 선비'를 보면 다른 생각이 듭니다. 무오사화의 목적이 김종직 일파를 넘어서 대간 전체가 아닐까 하는 것이죠.
이게 나타나는 건 7월 17일, 대간들 중 김종직이 이미 죽었으니 작호를 없애고 자식들이 과거 응시 못 하게 하자는 주장이 있었습니다. 이에 연산은 이렇게 말했죠.
"종직의 대역이 이미 나타났는데도 이 무리들이 논을 이렇게 하였으니, 이는 비호하려는 것이다. 어찌 이와 같이 통탄스러운 일이 있느냐. 그들이 앉아 있는 곳으로 가서 잡아다가 형장 심문을 하라"
그러면서 곧바로 군사들을 끌고 가 국문합니다.
이런 점들과 전후에 계속 나타나는 대간에 대한 경계를 보면 무오사화를 대간 숙청으로 넘기려고 한 것 같죠. 이게 통설이기도 합니다. 확실한 증거까진 못 찾겠습니다만 그게 의도였다면 확실히 실패하긴 했습니다. 그게 의도가 아니었다면 대충 이쯤 패면 말 듣겠지 정도가 아니었을까 싶네요.
그리고 그 의도가 맞았다면, 즉위 초기 같이 놀았던 대신들과 틈이 벌어지는 계기가 됐겠죠.
무오사화 때 피해 입은 이들을 보면 확실히 애매합니다. 김종직 일파가 중심이긴 했지만 성종실록을 맡은 이들도 포함됐고, 기타 다른 사건에서 김일손과 함께 했다는 이유로 잡힌 이들 역시 있었죠. 이 중 처형된 건 7명 정도, 연산군의 목적을 어디까지 보느냐에 따라 평가가 다르겠지만 대간 전체에 대한 응징이었다면 참 적고도 간접적인 것이었습니다.
표면적으로 본다면 그냥 말이 프롤로그지 갑자사화부터 시작되는 기나긴 숙청과는 차이가 큽니다. 어쨌든 명분 있는 것이었고 그 대상은 크게 제한돼 있었으니까요. 갑자사화 때 숙청된 이들이 무오사화 때의 공신들이라는 걸 생각하면 역시 관련이 얼마나 있을까 싶어요.
하지만 이 때 무오사화의 규모가 이 정도인 걸 왕과 대신들의 대립으로 본다면 얘기가 또 달라지죠. 애초에 그 둘은 지향점이 달랐습니다. 노사신의 태도에서 그걸 볼 수 있죠. 김일손 등이 막나간 건 사실이고 그걸 벌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이걸 대간으로 확대하는 건 안 된다는 것이었죠.
유자광과 함께 사건을 확대한 것으로 지목되는 윤필상, 그 역시 1년 후 이런 말을 합니다.
"김종직의 죄를 의논할 때에, 대간이 그릇 의논하였다 하여 죄를 입었습니다. 이것은 잘못 생각하고 망령되어 의논한 것뿐입니다. 무슨 딴 정상이 있으리까. 용서하여야 하옵니다"
여기서 생각해 볼점이 있습니다. 대신과 대간이 대립을 넘어서 출신과 이해관계가 아예 다르며, 서로를 아예 없어져야 될 적으로 여겼을까 하는 부분인 거죠. 흔히 훈구=대신, 대간=사림으로 둘의 대립으로 얘기하지만요. 이건 이후 사림파들이 훈구파와의 연결을 아예 끊어버린 것으로 더 심해집니다. 당장 김종직만 해도 훈구파로 분류된 대신들에 대해 좋게 보는 기록들을 남겨놨지만 이후 다 삭제했죠.
그리고 이런 연결이 없었더라도 대간들이 쑥대밭이 되는 게 과연 대신들에게 유리했냐는 문제도 있죠. 결국 중요한 건 균형이니까요. 그들은 유학자였기에 아무리 싫어도 대간을 부정할 수 없었고, 왕을 견제할 수 있는 것 역시 대간이었습니다.
여기다 무오사화 이후 연산군은 슬슬 사치를 부리기 시작합니다. 아무리 현실적인 대신이라 해도 봐주지 못할 왕이 돼 간 것이죠.
어느 쪽이 중요했든 무오사화 이후 대간들은 다시 고개를 들었고, 대신들은 이를 돕습니다. 관계가 조금씩 바뀌어갔죠. 그 이전이 왕+대신 vs 대간이었다면 이후는 왕 vs 대신+대간이 돼 갑니다.
애초에 둘의 목적이 달랐던 게 클 겁니다. 대신이 바란 건 연산에 비해서 적당히였고 유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이었죠. 반면 연산은 그 이상을 노렸습니다. 그리고 그가 말한 위를 능멸하는 풍습, 능상은 대간들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었습니다. 대신이고 대간이고 모두 그의 신하였고, 절대 복종을 바쳐야 될 이들이었죠.
무오사화는 이렇게 끝이 납니다. 연산이 이 모든 걸 계획했던 것일지 무오년과 갑자년 사이에 갑자기 불타오른 것일지는 모릅니다. 어쩄든 보기로는 연산 자신도 크게 확대 안 하고 끝난 거니까요.
어찌됐든 차라리 다행인 게 맞는 거 같긴 하네요. 이 때는 어느정도 이해는 가는 일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어떤 이유가 있든 왕이 사초를 보는 건 금지된 것, 다른 왕도 아닌 연산이 봤기에 후대의 왕들은 이를 더 못 하게 됐죠. 뭐 그래도 왕이 사초를 볼 정도로 실록에 위험한 내용이 적히는 일이 후대에 없기도 했습니다.
그로부터 6년, 연산군 10년에 다음 사화가 시작됩니다. 그 이전까지 연산군은 좀 사치하긴 했지만 큰 문제는 없는 왕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날 이후, 그 어느 때보다 강한 공포정치가 시작됐죠.
그 때로 가 보도록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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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자광에 대한 설명이 더 필요할 거 같은데 -_-a 남이 얘기랑 같이 할까요?
조광조는... 고민해보겠습니다 ㅠㅠ;; 하는 게 재밌겠죠?
* 信主님에 의해서 자유게시판으로 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3-03-26 0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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