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반 년쯤 전에 내가 운영하는 바 건물의 지하에 바가 하나 더 들어왔다. 경쟁자, 라고 하긴 뭐한 부분이 조금 있다. 아무래도 거기는 속칭 '아가씨 바'니까. 그리고 며칠 전부터 그 바에서 거대한 풍선형 입간판을 세웠다. 덕분에 함께 사용하는 건물 입구가 좀 심하게 가려지는 느낌이라, 위치 조정 및 기타 사항을 좀 상의하기 위해 나는 지하로 내려갔다.
언젠가 한번 인사를 나눈 사장이 나와서, 조만간 조치를 취하겠다고 했다. 부산에서 아가씨바로 단단히 한몫 잡아 서울로 올라와 또 한몫 잡아보려는, 심지어 나보다 나이가 어린 건실한 부산 청년들이다. 본건 외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사장이 갑자기 물었다. 혹시 이러이러하게 생기고 학원 강사로 일하는, 이 주변에 사는 이러이러한 사람을 아냐'고. 왜요, 라고 나는 되물었다. 아는 사람이었다. 우리 가게에도 몇 번 온, 사실 딱히 좋은 손님에 속하지는 않는 기억에 남는 사람이었으니까. 뭐, 거기 가게에서 행패라도 부렸으려나. 지하의 사장은 내게 말했다. '아니 그 미친 XX가 술을 쳐마실꺼면 곱게 마시지 와서 술마시다 우리 아가씨들한테 일 그만두고 나랑 결혼하자느니, 갑자기 뭐 떨어뜨렸다고 테이블 아래로 내려가서 우리 아가씨들 다리를 만지질 않나, 계산할 때 괜히 몸에 손대면서 찝적대질 않나. 진짜 패버리려다가 참았네 내가 지금 전과가 많아가지고 사람 패면 안되서....'
하긴, 어린 나이에 부산에서 칠십 평 짜리 아가씨바를 하며 한달에 칠팔천씩 벌다가 칠성파가 짜증나고 국제파가 짜증나고 경찰이 짜증나고 칠성파 아는 형님 하나가 장사 잘되니까 자꾸 내한테 돈쫌 달라꼬 지랄해싸는게 짜증나서 서울에 올라온 건실한 청년들이 폭력전과 한두개 없으면 좀 이상하기도 하다. 그는 말을 이어갔다. '우리 일하는 아가씨들 때문에 내가 돈 벌고 장사하는 건데, 진짜 내한테 뭐라 시비거는건 내 참겠는데 우리 아가씨들 건드는 새끼들은 내가 가만 안둡니다 진짜.' 걸걸한 부산 사투리로 그는 말했다. 직원을 챙길 줄 아는 좋은 사장이다. 그리고 원대한 사업 계획도 세우고 있다 '우리 다음주부터 이미지 클럽으로 나갈라고예. 아가씨들한테 교복이나 모 비키니 이란거 사다 입혀 놓고 하면 손님들이 더 좋아하지 않겠심까.' 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동안 우리 가게에 손님이 한 명 올라갔고, 그쪽 가게로 손님이 세 테이블 들어갔다. 후, 저 부산 사나이는 좋은 사람인데다 돈도 잘 버는구만. 부럽네.
-
2. 뭐, 아가씨 바가 딱히 나쁠 건 없다. 룸싸롱도 딱히 나쁠 거 없고. 다만 이를테면 이런 건 기분이 나쁠 수 있다. 언젠가 새벽 세 시인가, 일을 끝내고 가게 문을 닫고 몸이 너무 힘들어서 가게 입구에 주저앉아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있었다. 담배 한대 피고 가야지, 하고 있는데 누가 내 뒤통수를 툭 쳤다. 뒤를 돌아보니, 세상에, 김형이었다. 학생 운동 비스무레한 걸 하다 만난 대학 선배 김형. 단과대 학생 회장도 한번 했던, 엄청난 정치력과 사람좋은 웃음을 지을 줄 아는 그 김형이었다. 취기로 얼굴이 불그스레한 채로. 그는 '어 너 여기서 뭐하냐. 오랜만이다. 잘 지내지?' 라고 인사를 건냈다. '뭐, 방금 전까진 그럭저럭 잘 지냈는데 방금 전에 아는 선배 하나가 지하의 아가씨 바에서 혼자 술처먹고 얼굴이 벌개져서 기어올라오는 걸 본 직후론 딱히 기분이 좋지 않네요.' 라고 대답하는 대신 대충 잘 지낸다고 하고 피던 담배를 빨리 꺼버리고 형 저 지금 약속있어서 가봐야됨. 다음에 봐요 하고 도망나왔다. 운동권 출신은 아가씨 바 가면 안되나. 운동권 출신은 룸싸롱 가면 안되나. 김민석이었나, 518기념식날 룸싸롱인지 어딘지 틀어박혀서 술먹다가 쌍욕 먹었던 정치인. 그런 양반들도 있는데 뭐. 듣자 하니 김형은 어디서 논술학원을 열어서 꽤 잘 산다고 한다. 그게 나쁜가. 나도 한 동안 사교육 시장에서 세대간 계급 승계를 원활하게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먹고 살았는데.
하지만 기분은 딱히 좋지 않지. 김형, 잘 지내지?
-
3. 개인적으로 여자보다는 술을 좋아하는 편인지라, 아가씨 바나 룸싸롱이나 안 가봤다. 그런데 뭐 여자를 좋아한다고 그런 데 가는 건 아니지. 금융계에 종사하는 친구 한명이 한 일년 전에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줬다. 자기가 오랜만에 친구를 하나 만났단다. 대학 시절 친구인데(그는 명문대를 나왔다), 정말 바른생활 사나이 그 자체고, 학점도 좋고 영어도 잘하고 욕도 안하고 여자도 없고 적당히 소심한 그야말로 전형적인 친구. 대학 졸업 후 바르게 살던 그답게 좋은, 그러니까 하청 회사에 갑질할 수 있는 회사의 갑질할 수 있는 포지션에 취직했다고 한다. 편의상 이 친구의 친구를 김형이라고 해보자. 아무튼 내 친구는 김형을 오랜만에 만나 '술이라도 마실까' 했단다. 김형은 '그래 그럼 내가 살께' 라고 하고 내 친구를 룸싸롱에 데리고 갔단다. 뭐 이런델 가냐, 라는 내 친구의 말을 무시하며 능란하게 아가씨들과 술을 마시던 김형은 몇 가지 시덥잖은 농담을 하다가 갑자기 테이블을 쾅 내리쳤는지 아가씨 귀싸대기를 후려갈겼는지 하며 '내가 씨X 지금 호구로 보이냐?' 라고 일갈했단다. 그리고 조금 후에, 바른생활 사나이 김형은 평소의 바른 얼굴로 내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단다. '이렇게 해야 돼 안그러면 X년들이 일을 똑바로 안하더라고'
그러다 한번 제대로 걸려서 골통 찢겨져 봐야 정신 차리지 김형. 조심하라구. 하지만 뭐 바른 생활 사나이니 앞으로도 바르게 잘 먹고 잘 살겠지. 뭐, 김형이 여자가 좋아서 그런 델 간 걸까. 아니면 일 때문에 항상 접대받던 그런 곳이 익숙해지게 된 걸까. 글쎄, 기형도의 시구 하나가 떠오르네.
...그러나 서울은 좋은 곳입니다. 사람들에게
분노를 가르쳐주니까요. 덕분에 저는
도둑질 말고는 다 해보았답니다...
아무튼 우리 바른생활 개새끼 김형을 위해 건배.
-
4. 그래. 술마시면 실수할 수도 있는거고 실수하다 술마실 수도 있는거고. 삶이 다 그런거지. 남자가 그런거지. 교수쯤 되면 술마시다가 옆에 여학생 불러앉혀 시중시킬 수도 있는 거고, 조교도 뭐도 아닌 다만 인정욕구에 불타는 한 남자 학부생은 '술마시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거지. 이거 가지고 여성주의네 뭐네 쓸데없이 문제 삼지 맙시다'할 수도 있는 거 아니겠어. 단체로 해외 학회에 나간 술자리에서 술먹고 개가 되서 다른 학교 연구원들에게 개새끼 소새끼 말새끼 하면서 손찌검을 할 수도 있고 그런거지 뭐. 흔히 있는 일이잖아. 직장 생활은 안 해본 덕에 직장은 또 어떤지 모르겠네. 대학원은 잠깐 다녀 봐서 재미있는 일을 많이 보고 들었거든.
아무튼 그런 걸 생각하다 보면 내가 지금 술을 팔고 있는 게 나쁜 짓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하지만 나는 굉장히 바르게 사는 바텐더에 속하는걸. 준법 정신도 투철하고 술을 속인 적도 없어. 심지어 태어나서 경찰서를 세 번 밖에 안 가봤다고. 약에 취해서 길에서 행패부리는 외국인놈 하나 패죽여놓고 신고했는데 통역이 필요하다고 해서 경찰서 간거 한번, 무전 여행을 하다 얼어 죽을거 같아서 유치장에서 어떻게 하루만 재워 줄 수 없겠냐고 부탁하러 한 번, 여자 친구가 데모하다 잡혀가서 면회하러 한 번.
경찰과 대치한 적도 지난 5년간은 없는 것 같...지 않구나. 작년인가 또 인근의 취객들이 난동을 부려놔서 가게 정문의 홍보물이 또 부서지고 가게 앞이 난장판이 되서 새벽에 빡쳐서 가게에 있던 야구 배트를 들고 나가서(나는 훌륭한 한마리 진성 솩충이다) 난장판을 더 난장판으로 만든 적이 있지. 아, 그 일이 있기 3일 전에 가게에 도난사건도 발생해서 진짜 기분이 매우 똥같은 그런 날이었어. 경찰이 출동했고, 건물주가 출동했고, 나는 '아 성교할 진짜 남근같아서 장사 더 안하련다' 하며 계속 고성방가를 하다가 달려나온 옆 가게 형님에 의해 진압되었지. 아. 이렇게 1년을 못채우고 가게 문 닫는건가, 했는데 다행히 아무 일 없이 2년째 가게는 굴러가고 있어. 술 먹고 실수...라고 하긴 좀 뭐한 일들을 벌인 내가 본 그 많은 사람들처럼 말야. 후, 앞으로는 더 바르게 살려고.
그래, 술 마시면 실수할 수도 있는 거지.
5. 바텐더라는 직업상 술 먹고 실수한 사람들 이야기를 말하자면 한도 끝도 없는 게 아니라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개인적으로 법이나 윤리나 별로 즐겨하지 않지만, 그래도 '직업 윤리'는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먹고 사는 것에 대한 예의거든요. 바텐더라는 직업 상, 술 먹고 실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이를테면 전번 글에서 열거한 교수놈들이 내 술집에서 저런 행패를 부렸더라면 아쉬워서 어쨌을 뻔했어 어디가서 말도 못하고. 참 다행이다.
나는 대체로 바르게 사는 편이고 더 바르게 살고 싶어. 사람들이 바르게 살았으면 좋겠기도 하겠고. 근데 뭐랄까, 나이를 먹어 갈수록 뭐가 바르게 사는 건지 모르겠어. 난 지하의 청년들이 꽤 좋은 친구들이라고 생각해. 조만간 한잔 할까 하는 생각도 들어. 비록 전과가 좀 있고 아는 형님들이 좀 무섭긴 하지만. 그 친구들이 처음 가게를 차리고 나와 인사를 나눴을 때, '빠라는게 모 아가씨들 모아가지고 좀 벗기고 장사 하면 장사 뭐 안되겠습니까. 근데 꼭 빠에 와서 룸싸롱 온거처럼 아가씨들 막 만질라카고 이런 진상들이 있어서 참 이기 쉽지가 않지만 말입니더..' 라고 내게 말했을 때의 순박한 얼굴을 잊지 못한다. 뭐, 적어도 이십대 젊은 시절에는 '여자도 자기 일 하고 주체적으로 살아야지' 어쩌고 말하다가 서른 넘어가고 나니 '아 진짜 여자친구때매 빡친다 진짜 내가 회사다니는데 나한테 시간을 좀 맞추고 감정 케어도 해줘야지 아주 자기 회사일 바쁘다고 지 멋대로야' 라고 멍청한 얼굴로 투덜대는 친구놈들보다야 바른 생활이지.
6. 바르게 살아야겠어. 그리고 오늘도 랭겜 큐를 돌려. 드디어 3시즌 최초로 1400점 중반까지 올라갔어. 저 정글갈께요. 정글 나오면 서폿감 하고 서로 픽 조율하고 대충 픽 맞아가고 있는데 아무 말도 안하던 우리 1픽이 당당하게 강타텔포 정글마이를 선픽했어.
후, 바르게 살아야 하는데. 후우.
* 信主님에 의해서 자유게시판으로 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3-02-18 06:07)
* 관리사유 :
* 信主님에 의해서 ACE게시판으로 부터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13-02-18 19:43)
* 관리사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