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씨가 눈물을 닦아 피묻은 수건을 그 어머니 신씨에게 주면서, “우리 아이가 다행히 목숨이 보전되거든 이것을 보여 나의 원통함을 말해 주고,또 거동하는 길 옆에 장사하여 임금의 행차를 보게 해 주시오.” 하므로 건원릉(태조 무덤)의 길 왼편에 장사하였다. 인수대비가 세상을 떠나자 신씨는 나인들과 서로 통하여 연산주의 생모 윤씨가 비명으로 죽은 원통함을 가만히 호소하고 또 그 수건을 올리니 폐주는 일찍이 자순대비를 친어머니인 줄 알고 있다가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라며 매우 슬퍼하였다." 기묘록
"윤씨가 죽을 때에 약을 토하면서 목숨이 끊어졌는데, 그 약물이 흰 비단 적삼에 뿌려졌다. 윤씨의 어미가 그 적삼을 전하여 뒤에 폐주에게 드리니 폐주는 밤낮으로 적삼을 안고 울었다. 그가 장성하자 그만 심병이 되어 마침내 나라를 잃고 말았다. 성종이 한 번 집안 다스리는 도리를 잃게 되자 중전의 덕도 허물어지고 원자도 또한 보전하지 못하였으니 뒷 세상의 임금들은 이 일로 거울을 삼을 것이다." 파수편
윤씨의 피눈물이나 피를 토한 게 묻었다는 피 묻은 적삼, 윤씨의 한과 연산군의 슬픔, 분노를 이어주는 매개체입니다. 실록에는 없고 야사에만 있는 기록이죠. 이걸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 겁니다. 어쨌든 참 극적인 물건이라 안 쓰는 데가 없죠. 유명해진 건 역시 박종화의 소설 금삼의 피일 거구요. 저도 제목으로 삼았구요.
하지만 그걸 받고 바로 갑자사화를 일으켰다는 식의 줄거리는 잘못된 것이죠. 기묘록이 저렇게 쓰여 있지만 역시 많이 틀려요. 연산은 즉위 초부터 어머니 신원에 신경썼고, 난리를 일으킨 건 인수대비가 살아 있었을 때입니다. 파수편은 어릴 때 보고 큰 후 그렇게 됐다는 식으로 쓰고 있네요.
어릴 때부터 아팠던 연산, 그래서 숭례문 밖 강희맹의 집에서 2년여간 삽니다. 8년부터 11월 초까진 살았던 것 같네요. 폐세자 논의는 없었습니다. 한명회가 11년(5살 때) 세자 책봉에 대해 물어봤을 때 몇 년 있다 한다고 했지만 원래 세자는 8살은 돼야 하는 거니까요.
조야첨재(숙종까지를 편년체로 묶은 거)에는 손순효가 술자리에서 성종에게 귓속말로 폐세자를 건의했고 성종도 능력이 부족한 건 알지만 폐할 수 없다고 답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하지만 연려실기술의 저자 이긍익은 이를 엮으면서도 따로 출처가 없다면서 의심하고 있죠.
성종 14년, 윤씨가 죽은 다음 해 세자는 여덟 살이 됩니다. 세자 책봉은 무리없이 이루어졌습니다. 연초부터 한명회를 중국으로 보냈고 2월 6일에 정식으로 세자로 책봉됩니다. 그 해로 서연을 시작, 공부를 하게 됐죠. 다음 해에 소학을 뗐지만 아직 성균관에 입학은 하지 않았습니다. 어리면 8살, 적어도 10살엔 하는 거였는데 말이죠. 입학하게 된 건 성종 18년, 세자 12살 때의 일이었습니다.
일단 세자가 아픈 것도 있었을 겁니다. 서연을 시작할 때도 몸이 좋지 않으니 적당히 하자는 논의가 있었고 (반대했던 게 그 유명한 김종직) 성종 자신도 여름에는 적당히 하라고 명령했었죠. 그 외에 역시 좀 미안하니까 풀어주자는 생각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주 빡빡한 공부를 했던 성종이니만큼 자식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도 있겠죠. 이건 전에 썼었죠?
그 해에 세자는 관례를 치뤘고 세자빈을 뽑습니다. 다음 해에 정식으로 혼인하게 되니 폐비 신씨입니다. 영의정 신승선의 딸이었죠. 그리고 이 해부터 슬슬 조참에도 참석하면서 정치를 배워갑니다.
바로 이 때, 성종은 폐비 윤씨의 문제를 다시 꺼냅니다.
시작은 역대 폐비된 이들의 제사를 어떻게 했는지 상고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그녀의 무덤을 보고 풍수로 따져 어떤지 알아보게 하죠. 상고해본 결과 그런 예는 없었지만 의(義)로써 참작해 특별히 제사를 베푸자는 의견이 나왔고 생각해보겠다고 합니다. 또한 그녀의 무덤이 흉한 곳에 있다고 하니 옮기기로 결정하죠. 이 때 성종의 말입니다.
"그것은 폐비를 위한 것이 아니고 세자가 있기 때문이다. 장차 어떻게 처리하여야겠는가?"
이후 그는 윤필상(이름 기억해 둡시다)을 불러 작은 편지를 줬고, 사관들이 이를 보여달라 하자 보여줍니다. 앞부분은 폐출한 건 맞다는 것이었고, 뒷부분은 이렇죠.
"비록 영원토록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혼령에게 어찌 원통함이 있겠으며, 내가 어찌 불쌍한 생각이 들겠는가? 다만 어미가 자식 때문에 영화롭게 되는 것은 임금의 은혜이며, 후일의 간악함을 방비하는 것은 임금의 정사이다. 지금 세자의 정리를 생각하면 어찌 측은하지 않겠는가? 지금 특별히 일정한 제사를 드려 자식의 심정을 위로하여 영혼이 감응하게 하고자 한다. 그러나 비록 내가 죽은 뒤에라도 영원토록 바꾸지 말고 아비의 뜻을 지키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신하들의 반발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당연하게 여겼죠. 그래서 명호까지 주자고 했지만 성종은 그건 추숭하는 거라면서 제사로 족하다고 답했죠. 대신 그 예는 왕비의 예로 하라고 합니다. 4월부터 5월까지 한 달만에 이를 정한 후 이렇게 마무리지었죠.
"내가 죽은 뒤에도 영원토록 고치지 말고 아비의 뜻을 지키도록 하라."
이 과정에서 도출할 수 있는 결론은 무엇일까요?
연산이 어머니의 죽음을 알게 된 건 그가 즉위한 후, 기묘록 같은 경우 인수대비가 죽은 후라고까지 적고 있습니다. 연산군일기에서도 즉위 후 3개월이 지났을 때 성종의 행장을 보다가 알게 됐다고 기록하고 있죠. 이 날 밥을 안 먹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윤씨의 제사가 성종 19년부터 시작됐고, 그 때 그는 조참에도 참석하면서 슬슬 알아가고 있을 때였습니다. 오히려 그랬기에 성종이 그토록 미워하던 윤씨에 대한 태도를 바꾼 것이겠죠. 마지막 말에서 알 수 있듯 세자가 알수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성종과 대비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요?
처음 폐출 논의가 있었을 때 그들은 투기와 실덕을 문제삼았습니다. 이쯤 되면 그냥 후궁 정도면 쫓겨날만 했습니다. 문제는 그녀가 중전이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애도 있었다는 점이겠죠. 신하들의 반대로 겨우 봉합됐지만 그게 끝은 아니었습니다.
2년 후 그들은 그래도 쫓아내야된다고 생각했고, 밀어붙였습니다. 결국 성공했죠. 진짜 윤씨가 거대한 야망이 있었는지는 둘째 문제입니다. 윤씨가 그런 모습을 보이긴 했고, 자기들이 그게 싫었던 거죠. 그리고 쫓겨난 이상 죽일 수밖에 없었구요. 그녀가 다시 돌아왔을 때 역사가 뒤집히는 게 싫었던 것이죠. 폐비 자신의 죄에서 자기를 참소한 후궁들과 쫓아낸 왕과 대비들의 죄로 바뀌는 것이요. 그녀가 해먹는대봤자 얼마나 하겠습니까. 그걸 가장 경계할 신하들도 그런 생각을 안 했는데요.
그리고 그녀가 죽은 후의 세자, 그 시대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생각했을 겁니다. 세자는 어떻게 되냐구요. 그녀가 죽은 어미를 그냥 놔 둘 것 같냐구요.
아마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어쨌든 왕자들은 모두 왕비를 어미로 모셔야 했습니다. 후궁은 자식들에게 너라고 하지 못 했고 그 자식들 역시 어머니를 어머니라 부르지 못 했죠. 연산 역시 정현왕후 윤씨를 어머니로 모셔야 했습니다. 그게 성종의 결정이었고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것 역시 효였습니다. 자기들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을 겁니다. 세자를 미워하는 정도까진 아니었고, 세자도 딱히 문제를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정현왕후나 후궁들이야 어땠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어차피 대안이 될 중종은 어려도 너무 어렸습니다.
폐비는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너를 생각해서 제사는 지내 준다, 그러니까 너도 효를 지켜 아비의 뜻을 그대로 지켜라... 뭐 이런 생각 아니었겠습니까. 최선이야 윤씨와 사이좋게 지내거나 세자가 어릴 때 죽는 것이었겠습니다만 그건 다 안 됐으니까요. 설마라고 생각하긴 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 설마는 언제나 사람을 잡는 법이죠.
성종 25년, 그는 병으로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여름에는 이질(설사)로 고생했고, 차츰 야위어갔죠. 천식 역시 계속 그를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12월 20일 그는 이세좌(하필 -.-a)를 불러 배꼽 아래 작은 종기가 생겼다며 묻습니다. 이세좌는 15년째 그 병을 앓고 있었는데 별다른 치료법을 말하지 못 했죠.
그로부터 겨우 4일, 크리스마스 이브(음력이지만)에 죽게 됩니다. 약을 제대로 쓰기도 전이었습니다. 대장암으로 추측하고 있죠.
그의 나이 겨우 서른여덟이었습니다. 왕 자리엔 꽤 오래 있었지만 그건 10대 초반부터 왕이어서 그런 것이죠. 그가 더 살았다면 어찌 됐을까요? 더 나은 정치를 보일 수 있었을까요 아니면 더 까칠해졌을까요? 연산군의 막장 짓을 좀 더 막을 순 있었을까요? 모르겠네요. 그가 살아온 모습을 보면 일찍 죽을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구요. 낮에는 신하들에 치여 살고 밤에는 여자랑 마구 놀고... 어쨌든 세종과 함께 성군으로 추앙받는 그는 이렇게 일찍 세상을 뜹니다.
이렇게 해서 나이 열아홉, 곧 스물이 되는 세자가 왕위를 이어받습니다.
야사에서 나오는 이 때의 연산은 둘로 나뉩니다.
첫째는 원래 광폭한 놈이었다는 것, 김종직은 "새 임금의 눈동자를 보니 나처럼 늙은 놈은 목숨이나 건지면 다행이다"면서 떠났다고 합니다. 성종이 아끼던 사슴 얘기도 있죠. 사슴이 연산을 핥으니 발로 찼는데 성종이 왜 그렇게 잔인하냐면서 뭐라 한 것이었습니다. 이후 연산은 그 사슴을 활로 쏴 죽였죠(이건 실록에도 나옵니다) 이를 본 박영은 병을 핑계로 낙향했다고 합니다. 이외에 세자로 가릘 때부터 공부하기 싫어했다는 것도 있구요.
둘째는 어릴 땐 좋았는데 어머니의 일을 알고 미쳤다는 것입니다. 거리에 나가 놀다가 어미소와 송아지를 보고 엄마 닮았네 하면서 부러워했고 성종이 이를 슬피 여겼다는 게 있습니다. 이게 담긴 아성잡기에는 처음에는 슬기롭고 총명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파수편의 경우에도 어릴 때 이를 알고 커서 미쳤으니 성종이 잘못했다는 투로 적고 있죠.
실록에 나오는 연산군의 모습은 참 무난합니다. 좀 아픈 것만 빼면 정해진 테크를 잘 밟고 있죠. 걱정한 사람이 아예 없었겠습니까마는, 경계한 사람은 없었을 것 같습니다.
달리 말하면, 그는 이 모든 걸 참고 기다리고 있었다는 게 되겠죠.
자기가 공부를 시작했을 때, 정치를 배워가기 시작할 때 어머니의 제사가 시작됐는데 이걸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가 왕이 된 후에도 마찬가집니다. 어머니의 추숭을 슬슬 시작하긴 했지만 갑자사화에서 보여준 미친 모습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 이전에는 대비들에게도 잘 했구요. 몰라야 했겠죠. 모른 척 해야 했겠죠. 크게 중요하지 않은 일이라 생각해야 했겠죠.
오히려 그 기다림이 그를 왕으로 만들어줬을 겁니다. 그가 어머니에 대해 캐묻고 다녔다면 그에 대한 반응이 없었을 리가 없죠. 하지만 그는 조용히 때를 기다립니다. 뭐 기다리다 기다리다 미친 게 갑자사화일 수도 있죠.
그는 그렇게 왕에 오릅니다. 하지만 그에게 바쳐진 묘호는 없습니다. 폐위된 뒤에 받은 연산만 있을 뿐이죠.
그가 간직했던 슬픔과 분노, 그가 바란 조선이라는 나라... 그걸 펼칠 때가 됐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우리가 모두 알고 있죠. 조선 역사상 최악의 암군, 연산군으로요.
이제 그의 시대로 가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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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선이다.
사림은 초토화되고, 세계는 불타리라.
오랜 기다림 끝에, 이 나라에서 복수는 내 것이 되리니
내가 바로 조선의 왕이다.
* 信主님에 의해서 자유게시판으로 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3-02-05 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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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었습니다. 이제 시작이네요.^^
다른 건 몰라도 폐주 연산이 조선의 군왕들 가운데 가장 감수성이 뛰어난(?) 감성임금이 아니었나 싶어요.
물론 그 감수성이 너무 분노 쪽으로만 치우친 것이 문제지만-_-;
어찌보면 참 애잔하고 슬픈 왕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편으론 너무하다 싶다가도 좀 짠하달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