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은 '나름대로' 즐겁게 끝났다. 우리는 프로도 아니고 그저 스쿨 취미 밴드였고 음도 실컷 틀리고 박자도 실컷 틀렸다. 나중에는 관객 친구중 흥에 겨운 친구 몇이 무대까지 올라와 춤도 추고, 어깨동무하고 노래도 부르기까지 했다. 비록 지금처럼 술 같은게 없이도 우리는 충분히 즐겁고 신났다. 고교 2학년이 정말로 끝나가고 있었다. 아마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때를 꼽으라면, 절대 빼놓을 수 없을 시기였다고 확신한다.
관객이 다 빠지고, 우리는 손가락 하나 움직일 기운도 없었지만 장비를 대충 정리하며 무대에 주저앉았다. 아예 벌러덩 드러누운 베이스는 내게 '야, 너 멋있더라? 차였지만.' 하고 낄낄대었고, 쩡이는 그런 베이스의 허벅다리를 발로 뻥 차버렸다. 그리고는 내게 와서 딱밤을 딱 치고는, '진짜 사람 난감하게 한다니까.' 하며 배시시 웃었다. 기타를 치던 친구는 내 얼굴에 피크를 탁 던지며, '늦게도 저지른다 새끼야.'라고 퉁명스레 말했다. 나는 씨익 웃으며, 내가 요령이 좀 없냐. 하고 말했다. 베이스를 따라 벌러덩 드러누으니, 무대의 바닥이 생각보다 엄청 차갑다는걸 느꼈다. 온 몸이 땀으로 젖은 찝찝함을 달래주는 기분좋은 시원함이었다.
처음에는 뒷풀이를 하려고 했지만, 다들 이미 녹초가 되어있었기 때문에 각자 집에 돌아가서 주말에 모이기로 했다. 서로 한번 꽉 껴안아주며, 수고했다는 한 마디가 새삼 정말 끝났다는것을 실감하게 해 주었다. 각자 차례차례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돌아가며, 마지막에는 쩡이와 나만 남았다. 우리는 공연때 삑사리가 난 이야기나, 춤을 추러 올라온 관객으로 온 친구의 이야기를 하며 집까지 도착했다. 쩡이네 아파트 앞에서 헤어지려는 찰나, 쩡이는 잠깐만 더 이야기 하자며 날 벤치로 끌고갔다. 추운데 감기걸릴거라는 내 말에, 아직 너무 아쉽고 꿈만같다는 그 아이의 손길을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근처 편의점에서 따뜻한 캔 커피를 두개 사서 서로 나눠쥐었다. 쩡이는 날 툭 치면서, '나한테 한 마디 말도 없이 어쩜..' 하고 날 흘겨보았다. 나는 씨익 웃으며 능청스레 캔커피를 마셨다. 쩡이는 옆에 앉아서 이제 우리 다시 모이는 것도 별로 없겠다며 아쉬워했다. .. 나도 이제 고 3이니까 대학 갈 생각해야지. 하는 말에, 오빠 공부는 잘 해요? 라고 물어왔다. ...잘 못하니까 열심히 해야지. 라고 하자, 쩡이는 헤헤, 웃으며 손을 번쩍 들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누군가가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낯설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잠시 말이 없다가, 쩡이는 동당대며 입을 열었다.
"아- 유학 가기 싫다.."
나는 그 말에 쩡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 꿈이잖아?"
쩡이는 볼멘 소리로 대답했다.
"알아요. 당연히 갈건데.. 오늘처럼 좋으면 그냥.. 오빠들이랑 떠나기 싫고 그래요. 내일 되면 괜찮아 지겠지만. 지금은 그래요."
나는 피식 웃으며, 이번엔 내가 쩡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쩡이는 금세 웃으며, '오빠도 이런걸 다 하네.'하고 키득댔다.
"아. 이제 진짜 오빠랑도 얼마 못보겠다. 나 2월 초에 출국하거든요. 한달도 안남았어."
"정신 없겠네.."
"그다지? 준비는 미리 거의 끝내놨어요. 공연에 집중하려고 미리 착착 다 해놨지. 누구누구 씨 때문에 집중하기 힘들었지만."
"그거 내 얘기?"
"음... 누구누구가 두명이니까 누구누구 들~인가? 히히."
"인기 좋다고 자랑하는거 봐라~."
쩡이는 헤헤, 하고 다시 웃었다.
"오빠랑 좀 더 일찍 만났으면 좋았겠다."
나는 괜시리 그 말에 조금 설레며, 장난스레 되물었다.
"그럼 나랑 사귀었을거야?"
"음-귿쎄. 오늘 같았으면..넘어갔을지도? 오늘 쫌 멋있었어요. 감동했어."
그럼 유학 가지마. 라고 하고싶은말을 꿀꺽 삼키고, "이게 선배를 놀리네."하고 웃어버렸다. 쩡이는 살짝 미소짓더니, 손에서 데굴거리고만 있던 캔커피를 내게 주었다. "따줘요, 나 지쳐서 힘이 잘 안들어가요."
따뜻했던 캔커피는 꽤 식어서, 딱 정이의 손 온도겠거니 싶은 미지근함이 남아있었다. 찰칵-하고 캔커피를 따 주자, 쩡이는 캔커피를 받는 대신 갑작스레 입을 맞추었다. 나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채, 그녀와 키스했다. 납뜩이가 본다면 뽀뽀라고 했을 것 같은, 그런 키스였다. 살짝 파르르 떨리던 그녀의 입술은 잠깐동안 내게 머물러갔다.
쩡이는 키스를 끝내자마자,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는 '첫 키스에 커피냄새 나는건 싫으니까..'라고 중얼거렸다. 나는 멍하니 정이를 바라보았다. 정이는 이내, 고개를 살짝 들어 날 보고는 말했다.
"오빠의 마음을 받아줄 수는 없었지만, 만약 내가 여기 계속 있었다면 오빠를 더 좋아하게 됐을거에요. 그러니까, 음. 이건 나름의 보답. 오빠한테 내 첫 남자친구의 자리를 주지는 못했지만.. 첫 키스는 오빠한테 준거니까."
그리고는 '악-내가 미쳤지!' 하고는 잡을 새도 없이 벌떡 일어났다. "캔커피는 오빠 줄게요. 뒷풀이날 봐요!!"하고는 현관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나는 멍청하게, 잡다 만 손을 허공에 뻗은채로 그녀의 뒷모습을 보았다. 입가에 남은 말랑한 감촉이 현실인가, 꿈인가 하고 의심하게 만들었지만,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미지근한 캔 커피는 여전히 내 손에 있었다.
며칠 뒤, 우리는 다 같이 연습실에 모여 치킨과 피자를 잔뜩 시켜두고 뒷풀이를 했다. 베이스를 치던 친구는 몰래 가져온 거라며 맥주피쳐를 네개나 들고왔다. 우리는 에라 모르겠다- 하며 종이컵에 맥주를 담아 마시며, 한 해의 시작을 우리의 1년을 보내면서 맞이하였다. 다들 술을 마시기엔 조금 어렸기에 금세 혀가 꼬부라졌고, 무슨 말을 했는지 지금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단지 기억나는 건, 거기서 마지막으로 다 같이 노래를 불렀고, 쩡이는 울었으며. 기타치는 친구가 쩡이를 안아주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런 기타에게 좋냐며 쿡쿡 찔러대었고. 물론, 내가 쩡이와 키스를 했다는건 여전히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쩡이는 그날, 자기가 왜 밴드를 했으며, 내게 했던 이야기들을 다 털어놓았던 것 같다. 유학이야기나, 할머니 이야기 같은 거. 그날, 우리는 공연이 끝났음에도 여전히 '한 팀'으로 남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뒤로 우리는 각자 고3으로 돌아갔다. 다른 친구들은 벌써 한참 공부를 했을텐데 우리는 벌써 한달가까이 늦은셈이었다. 웃기는건, 그와중에 각자 따로 끊었다고 생각한 사설독서실이 같은 곳이었다는 점이다. 지독한 것들이라며 서로를 놀려대면서도, 우리는 그 독서실에서 다 같이 공부했다. 뒤풀이 후에 유학준비에 바쁜 정이는 두어번 독서실에 놀러와서 우리에게 출국일과, 이메일 등을 알려주며 손수 만든 김밥을 주고는 했다. 예전처럼 문자도 주고받고, 통화도 자주 하는 정이는 하루 하루가 지날수록 뭔가 새롭게 변해가는 것만 같았다.
시간은 순식간에 흘렀다. 정이의 출국일에 우리는 다 같이 배웅을 가기로했다. 그리고 그 전날, 정이는 내게 '나 다음에 한국 돌아왔을때 잊어버리면 가만 두지 않을거야.' 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출국일 아침, 나는 친구들에게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핸드폰을 꺼버렸다. 배웅을 갔다간 울음이 터졌을 테니까. 정이는 유학에 가면 한국으로 못 돌아올지도 모른다고 했다. 아마 이렇게 멀어지는 거겠지. 하며 정이가 들어보라고 녹음했던 시디를 틀고 이어폰을 꽂았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노래를 못 불렀던 때부터 공연 직전에 꽤 그럴싸한 목소리까지. 정이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아,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렇게 우리는 일상으로 돌아갔다. 친구들은 정이가 끝까지 아쉬워했다고 했다. 나는 메일 주고받으면 되는거라고, 이제 오로지 공부..공부뿐이라며 웃었다. 고3이 지나고, 수능을 보고. 재수를하고. 대학을 가고. 정이가 프랑스로 떠난지 거의 10여년이 다 될때까지 우리는 여전히 친구로 남아있었다. 그동안 새로운 사랑도 맞이하고, 여자친구도 생겼다. 그치만, 매번 어떤 여자아이를 좋아하게 될 때마다 17세의 쩡이가 떠올랐다. 그때는 진짜 아무것도 몰랐었는데. 하며, 스스로도 놀랄만큼 여자아이 앞에서 태연해진 내 모습이 재밌었다. 쩡이가 지금 날 보면 뭐라고 할까. 그렇게 쩡이는 점점 잊혀져갔다. 앨범 속 빛 바래가는 사진처럼.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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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쩡이는 사실 가명이죠. 본명은 다르지만. 글에서도 100% 사실만 있지는 않아요. 실제 이 이야기와 관련된 애들이 보면 좀, 아닐거 같아서. 그래도 굵직굵직한 이야기는 전부 사실이니까, 알아볼수도있겠네요.
이 글을 쓰게 된 계기는 얼마전에 쩡이가 한국에 잠깐 돌아왔었어요. 프랑스 남자친구를 데리고. 2012년이니까 작년이죠? 작년에 한국에 들렸었거든요. 사실 그 전에도 두어차례 한국에 왔었는데, 이메일을 보내도 아무도 읽지 않더라고 하더라구요. 하긴 그럴법한게, 우리가 메일을 주고받은게 한 6개월정도나 됐나? 다들 수능에, 군대에, 쩡이는 유학에 바빴으니까요. 다행히 이번엔 연락이 닿아서, 다 같이 모일 수 있었죠.
얼마나 갈궜는지 몰라요 쩡이가. 17살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지만 어째 더 예뻐져가지고 긴장했다니까요. 지금은 나름 실력이 붙어서 어느 가게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는데. 어떻게 다들 메일을 그렇게 확인을 안하냐며. 요새 누가 메일 쓰냐는 말에 그럼 다른 연락처라도 알려줘야할거아니냐고 그러더라구요. 맞는 말씀. 어쨌거나 너무 반갑더군요. 쩡이는 내게 저렇게 무관심한 남자한테 첫 키스를 주다니, 하고 술에 취해서 말했고 애들은 그 순간 이게 무슨소리냐며 왁자지껄해졌죠.
한바탕 소란이 벌어지고, 쩡이는 중대발표가 있다고 하더군요. 사실 자기 결혼한다고. 프랑스 남자랑. ..와우.
새벽이 다 가도록 신나게 부어라 마셔라 하며 놀고, 쩡이는 호텔을 잡아놨다며 제게 데려다 달라고 하더군요. 결국 같이 택시를 타고 팰리스 호텔에 데려다 주니, 이 농약같은 가시나가 유학가서 뭘 배웠는지 '아직도 날 못잊었다면, 그 때 그 다음을 계속해볼래~옵빠~'하면서 슬그머니 달라붙는거에요. 순간 엄청 긴장해서 암말도 못하자 이내 빵 터져가지고는, '어떻게 그 동안 하나도 안변했어 오빤??? 그 뒤로 설마 여자친구 한 번 못만들었다거나 그런건 아니지???'하며 놀려대더군요. 얼굴이 확 달아올라서 웃기지말라고 야 너 잊은지가 언젠데 방금은 진짜 어 어이가없어서 그런거야 참나 황당하네 이러면서 서로 웃느라 정신이 없었어요.
결혼을 축하해 달라는 말에, 비행기 표를 달라니까 적당히 지구본 보며 경건한 마음을 가지라더군요.
하하.
좋은 사람이냐는 물음에, 응 하고 대답하는 수줍은 말투만큼은 자기도 하나도 안 변했더라구요.
아마 지금쯤은 유부녀로 잘 살고 있겠죠.
이렇게 긴 이야기가 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요.
끽해야 두세번에 걸쳐 끝날 줄 알았는데, 많이 줄이고 쳐낸다고 쳐내도 이정도네요.
긴 글 여기까지 따라와 주시며 읽어주신 분들 감사드려요.
저도 오랜만에 쓰고 싶은 이야기를 실컷 쓴 것 같아 기분이 참 좋네요.
저는 이게 해피엔딩이었다고 생각해요. 뭐 드라마에 나오는 순애보처럼 지금이라도.. 이런건 완전 크크;
그 동안 저도 다른 사람들과 마음앓이도 하고, 설레기도 했으니까요. 그 애에게도 그런 20대가 있었을 거라 생각해요.
쩡이 덕분에 제 10대의 한 페이지가 엄청 풍족했고, 나름 받을것도 받았으니까? 크크
어쩄거나 여기까지 힘들게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한 편쓰는데 한시간은 훌러덩 넘게 드네요;
다들 다음주도 행복한 한 주 보내시길 바래요. 이만 줄입니다.
* 信主님에 의해서 자유게시판으로 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3-02-03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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