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UM < 4 >
온게임넷은 고심하고 있었다.
박정석, 마재윤, 김택용이 8강에서 연달아 떨어져버렸다. 송병구가 올라간다면 '차기 본좌' 후보로서 밀어보기라도 했을 텐데, 설마 변형태가 셧아웃으로 제압할 줄이야 짐작이나 했을 것인가.
김준영 대 이영호. 이쪽에서는 영건 이영호가 로열로더다, 진짜 차기 본좌다 해서 더 기대를 걸어볼만한 카드이지만 한 편에 이미 변형태가 올라온 이상 이영호가 올라가도 테테전이다. 아무래도 암울하게 그지없다. 가뜩이나 지방에서 벌어지는 결승전인데, 도무지 솟아날 구멍이 보이지 않았다.
결국 눈 딱 감고, 깔끔하고 안전하게 끝맺는 쪽이 가장 나으리라.
결승 장소, 울산 문수 국제 양궁장.
수용 인원 : 1000명.
명가의 이름으로
「그와 같은 혈통을 지닌 젊은이에게는 다른 길이 없었다.」
- 이자벨 아옌데,『조로』中
테란은 이영호라는 신성에게 열광하고 있었다. 마재윤에게 빼앗긴 시대를 김택용에게 잃었으나, 그 김택용을 단 10분으로 무너뜨린 어린 테란이 있었다.
데뷔한 지 겨우 3개월, 그 3개월 만에 로열로더로서 스타리그의 4강을 밟았다. 이 무슨 재목이란 말인가.
사람들은 앞 다투어 이름 높은 테란 군주들과 이 신성의 공통점을 찾아내려 애썼다. 임요환처럼 대담하고, 이윤열처럼 분방하며, 최연성처럼 묵직했다. 무얼 갖다 붙여도 그 샘솟는 재능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 없었다. 테란은 복에 겨워 희희낙락했다.
다만, '제국' SKT T1의 사람들은 한편으로는 기꺼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꺼림칙한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 그토록 재기 넘치는 테란이 하필이면 KTF 매직엔스, 테란 제국의 숙적에서 나올 것은 또 뭔가.
그 불안감은 심하다 싶을 정도로 적중했고, 그로부터 채 5년이 지나지 않아 제국은 이 신성과 지긋지긋한 싸움을 이어가게 되지만, 이는 여담으로 넘어가야 하리라. 여하튼 그 말대로 이영호는 KTF 매직엔스에서 데뷔한 테란이었고 그때껏 KTF 매직엔스에서 데뷔한 선수들을 통틀어 가장 두각을 나타낸 떡잎이었다. 그 재능을 KTF의 갈락티코, 이름난 선배들이 알아차리지 못할 리 없었다. 그들은 이제 그들 동맹의 미래가 될 작은 거인을 소중히 아꼈고, 이영호 또한 쟁쟁한 선배들을 익숙하게 따랐다.
박정석이며 강민, 조용호, 변길섭, 김정민, 홍진호 등 세월 속에 잔뼈가 굵은 베테랑들 사이를 쭐레쭐레 겁도 없이 누비는 어린 아이의 모습은 퍽이나 이채로운 것이었다. 그와 같이 천진한 모습을 보고 있자면 이 소년이 그토록 악마 같은 재능을 가졌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볼 눈이 있었던 이들, 특히 프로토스와 저그의 문필들은 이미 이영호라는 싹에 대해 경계를 곤두세우고 있었다. 테란이 열광하는 만큼 그들은 긴장하고 탄식했으며 그 행보에 흔들림 없이 시선을 고정했다. 또한 몇몇 테란 - 최연성을 위시한 제국의 주인들도 이영호의 발걸음을 주시했다. 그들은 단 하나의 질문만을 가지고 있었고 그 답을 갈망했다.
이영호라는 테란은 매직엔스의 운명을 바꿀만한 역량의 소유자인가.
제국은 그가 최소한 제국이 따라잡을 수 있는 곳에서 그 발걸음을 멈추길 바랄 뿐이었다.
세상이 이영호라는 신성에 눈길을 빼앗긴 동안, 그의 반대편에서도 조용하지만 착실한 준비가 이어지고 있었다.
김준영은 2003년 질레트의 나도현 이후 약 4년 만에 등장한 한빛의 4강 리거였다. 그 때 나도현은 박정석에게 패하면서 결승 진출이 좌절되었기에, 만일 김준영이 이번에 결승을 밟는다면 2002년 이후 5년 만에 한빛이 내놓는 결승 진출자가 된다. 헌데 공교롭게도, 2002년 한빛의 마지막 결승 진출자이자 우승자 또한 박정석이다. 그러니까 한빛 스타즈는 그동안 자신들의 마지막 우승자에 의해 앞길을 저지당한 셈이다.
그 아이러니야말로 한때 IS와 함께 이 세계를 양분했던 명문 중의 명문 - 한빛 스타즈가 걸어온 고난의 역사를 보여주는 단면일 것이다.
한빛 스타즈가 배출한 면면들을 살펴보면 양대 명문이라는 그 칭호에 자연히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프로토스로는 김동수, 박용욱, 박정석이며 저그를 강도경과 박경락이요, 테란으로는 변길섭이며 나도현이다. 그 이름들을 다 한데 모아놓고 보자면 갈락티코라 불린 KTF 매직엔스에도 그다지 뒤지는 진용이 아니다. 2003년에는 저 박용욱이 설 자리를 찾지 못해 오리온즈로 떠났을 정도다.
하지만 김동수의 공익근무행을 기점으로 몰락이 시작되었다.
이재균 감독은 선수의 의사를 최우선으로 존중하는 감독이었다. 그는 팀을 떠나려는 선수들을 깨끗하게 보내주었다. 박정석과 변길섭이 '이 바닥 최고의 스타군단 창설'이라는 웅대한 꿈에 이끌려 팀을 떠났고, 나도현은 이윤열-이병민의 테란 듀오를 강화하여 제국 테란에 맞서려던 팬택 앤 큐리텔 큐리어스와 뜻이 맞았다. 박용욱은 이미 제국의 기둥이었으며, 그나마 남은 박경락은 한 때 시대를 풍미한 그 이름도 무색하게 자기 관리 실패로 인한 도태에 빠졌다.
만일 한빛 스타즈의 감독이 이재균이 아니었다면, 스타즈는 파국을 맞아도 진즉에 맞았을 것이다.
이재균 감독은 프로게이머란 단어조차 생소한 시절부터, 팀이라는 개념조차 희박했던 무렵부터 자신의 선수들을 이끌어왔다. 그에게는 주훈 감독과 같은 치밀한 심리전과 엔트리 배치, 언론 플레이 능력이 없다. 하태기 감독과 같이 조직에 혁신적인 요소를 도입하고 발전시켜가는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는 그 오랜 시간동안 숱한 위기를 견디며 팀을 이끌었고, 그 과정에서 이 판에 몸담은 젊은이들의 내면과 여러 번 맞닥뜨렸다. 때로는 금전적인 문제, 때로는 미래에 대한 불안. 이재균 감독 자신도 자유로울 수 없었던 근심들을 선수들과 나누어가며 싸워왔다.
이상할 정도로 감독과 선수들의 유대감이 강하다 - 한빛에 대한 전력 분석에는 이 내용이 항상 다양하게 변용되어 포함되어 왔다. 그 긴 싸움의 시간 속에서 감독과 선수들은 서로 닮아간 것인지도 모른다. 한빛의 선수들은 대개 대범하면서도 집요하고 강인하며, 그들 감독이 그러하듯 그 어떤 폐허 속에서라도 길잡이가 되어줄 빛을 발견하는 능력을 가졌다.
대개.
그리고 본디 김준영은 그 '대개'에 포함되지 않는 예외에 속하는 선수였다.
김준영은 누구인가
「너 자신을 알라.」
- 소크라테스
대담하게 임하라.
이영호라는 천재가 두려운 것은, 그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상대하는 것은 테란이다. 저그이다. 프로토스다. 그러나 그 이전에, 저 반대편 자리에 앉아있는 누군가이다. 뻔한 것이기에 많은 사람들이 잊는 것 중 하나다. 표적은 화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에 있다. 게임은 게이머와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기기 위해서는 게임만큼이나 상대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김준영은 누구인가.
한빛 스타즈가 내세우는 에이스이며, 후반 운영에 장점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받는다. 따라서 안정적이고 정석적인 게임 양상을 선호하며 후반 지향적이다.
이토록 알기 쉬운 적이라면, 사양 없이 허점을 내찔러주는 게 마땅한 예의라 할 것이다.
이영호의 선택은 노배럭 더블이었다.
김준영의 선택은 9드론이었다.
- DAUM 스타리그 2007 S1 4강 1경기 김준영 VS 이영호 in 몽환.
이영호는 한 번 고개를 갸웃거렸다.
9드론 저글링이 용서 없이 들이닥쳤다. 이영호는 저글링들이 실컷 앞마당 커맨드를 두드리게 놔두었다가 아무런 주저 없이 앞마당을 취소하고 방어선을 본진으로 당겼다. 그 시점에서 선택할 수 있는 최선책이었다.
어째서.
이영호는 쉬지 않고 손을 움직이면서도 질문을 던졌다. 맵은 몽환, 테란 절멸의 전장이다. 이런 곳에서 김준영 같은 저그가 안정적인 운영 대신에 9드론이라는 노림수를 던졌다.
오히려 불리한 맵이니까 이쪽에서 도박적인 선제공격을 할 것이라 생각했을까?
그랬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노배럭 더블 : 자원 선점이라는 이름의 선공은 이 몽환이 아닌 다른 곳에서 펼치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이제 와서 후회해봐야 소용없는 일이지만.
그럼, 반성 끝.
이영호는 깨끗하게 정리하고 더없이 바르게 결단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그대로 움직였다. 후회하며 시간을 보낼 바에야, 조금이라도 타이밍을 당겨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찔러볼 작정이었다.
김준영은 연달아 몰아쳐오지 않았다. 늘어나느 해처리가 중반으로 이끌고 가겠다는 그 의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초반에 벌어진 적지 않은 격차는 틀림없이 게임이 끝날 때까지 좁혀지지 않고, 안전하게 김준영에게 승리를 선사하리라.
- 역시 사람이란 건 쉽게 변하는 게 아니다.
이영호는 생산한 머린은 물론 SCV들까지 몰아 김준영의 본진으로 진군했다. 아니나 다를까, 역시 다수 저글링과 성큰 콜로니의 방어에 막혀 실패했다. 남김없이 내던진 뒤, 깔끔하게 손을 털어내고서 이영호는 GG를 선언했다.
다시 한 번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김준영은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적중이었다. 8강에서는 진영수에게 먹히지 않았던 9드론이라, 불안감이 더했다. 이영호가 몽환에서 평범하지 않은 승부를 걸어올 것은 명명백백했고, 성공할 확률은 높았다. 이런 때를 대비하며 몇 번이나 위험한 한 걸음을 내딛는 연습을 해온 것이었다.
그럼에도 미친 듯이 가슴이 뛰었다. 만에 하나라도, 혹시나 몽환을 놓쳤다면 오늘 게임은 상당히 기울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래도 이제 이쪽도 기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으니 어린 천재도 쉽게 승부를 걸어오지는 못하리라.
위험한 길은 넘어왔다.
김준영은 자신을 안심시켰다.
다음맵 히치하이커.
김준영의 선택은 12드론 앞마당이었다.
이영호의 선택은 8배럭이었다.
어떻게.
김준영은 손을 멈추지 않고 질문을 던졌다.
대답은 없었다.
이영호는 누구인가
「"너는 말이지, 너무 칸을 아껴. 그래서 못 이기는 거야."
보리스는 더 설명해보라는 듯 오른손을 펴 보이고는, 자신도 과자 한 개를 집어먹었다.
"이런 게임은 과감함이 핵심이야. 아버지가 예전에 말해줬어. '버릴 돈이라면 아예 손에 닿지 않을 곳으로 내팽개쳐버려라. 미련 남지 않게'라고 말이지…"
"좋은 말이야. 네게는 적당한 방식일거야."
"그럼 너한테는 적당하지 않다는 말이야?"」
- 전민희, 『룬의 아이들 : 윈터러』中
김준영은 마땅히 질문을 바꿔 던졌어야 했다.
이영호가 김준영은 누구인가를 물은 뒤 내린 결단이었으니, 김준영 또한 이영호를 이해해야만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영호는 누구인가?
사실 이영호란 신성에 대해서 많은 것을 떠올리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데뷔한 지 채 몇 달조차 지나지 않은 중학생에 대해 얼마나 많은 정보가 있겠는가. 이영호는 임요환처럼 과감하다고들 한다. 이윤열처럼 자유롭다고들 한다. 최연성처럼 영리하다고들 한다. 결국 이영호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김준영은 이영호가 어떤 선수인지 쉽게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 무엇보다도 - 그는 아직 이영호가 패배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는 달리 말하자면, 이영호가 무언가를 잃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는 의미다. 그래서 김준영은 이영호를 이해하는 게 더 힘들었다.
- DAUM 스타리그 2007 S1 4강 B조 2차전 김준영 VS 이영호 in 히치하이커.
노배럭 더블의 실패 다음에는 가뿐하게 8배럭.
임요환이나 이윤열 시대, 낭만 시대 테란의 간웅들이나 보여줬을 법한 대담함이다. 변화무쌍함이다. 다른 것이 있다면, 그들은 아무 것도 짊어진 것이 없었기에 그토록 가벼운 몸놀림으로 적들의 숨통을 노렸으나 이영호는 너무 많은 것을 가졌기에 이토록 대답할 수 있다는, 그 사실 뿐.
1경기, 이영호는 9드론 저글링 앞에 앞마당을 버렸다.
하지만 2경기, 김준영은 그대로 앞마당을 완성시켰다. 해설진은 대인의 대담한 마음가짐을 칭찬하면서, 이영호가 8배럭 압박 움직임으로 얻어내려던 것이 이로써 무위로 돌아갔다고 선언했다.
그는 물론 사실과 달랐다.
김준영은 이영호가 이대로 멈추지 않을 것임은 알고 있었고, 이제 그가 어떻게 공격해올 것이며 그를 어떻게 막아야 할 것인가는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끝끝내 앞마당 해처리를 완성시킨 건 머릿속 한 구석에서 울리는 고함 때문이었다. 두려워하지 마라, 도망치지 마라. 그 목소리는 참으로 야속했다. 구체적인 방법은 한 마디도 입에 담지 않으면서, 그저 버틸 것만을 종용해오고 있었다. 발이 땅에 붙어버린 듯 움직이지 않았다. 그사이 멍하니 서 있던 저글링 몇 기가 속절없이 터져나갔다. 이건 멍청한 짓일지도 모른다. 몇 번이고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렇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여기서 물러선다면 어디까지 밀려날지 알 수 없었다. 힘겹게, 힘겹게 지난 2년간 앞으로 내딛어 온 걸음이건만 뒤로 밀려나는 건 순식간이었다.
뭐가 되던 간에 버텨보자. 김준영은 그렇게 마음먹었고 배수의 선을 그어 내렸다.
경의를 표할만한 각오였지만, 또한 다만 그뿐이기도 했다.
이영호는 주저 없이 팩토리를 올렸다.
2배럭에서 계속해서 찍어낸 바이오닉 병력에 한 기 탱크를 합류시킨 뒤, 그대로 히치하이커의 협곡을 주파하여 김준영의 앞마당에 이르렀다. 눈앞의 크립 위로 여기저기 성큰 콜로니가 건설되고 있었지만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아주 천천히, 한 기 탱크를 공성 모드로 변환시켜 포격을 개시했다.
계속해서 건설되는 성큰들은 버틸 수 있는 데 까지는 버텨보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승부는 첫 일합으로 이미 결정되었는데도.
그 미련을 없애주기 위하여 이영호는 진격했다.
앞마당이 날아간 뒤에도 성큰 라인 차곡차곡 본진 언덕에까지 이어졌다. 그 사이 깨어난 뮤탈리스크들이 증원 병력을 끊어놓기 위해 협곡으로 이동했지만, 용서 없이 본진으로 파고들어오는 이영호의 본대를 막기 위하여 소득 없이 다시 귀환해야만 했다. 게임의 주도권은 단 한 번도 이영호의 손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김준영의 각오는 가소로운 오기로 그쳤다.
김준영은 지그시 아랫입술을 깨물며 GG를 선언했다.
이영호는 패배를 받아들일 때만큼이나 가뿐하게 승리를 받아들였다.
이영호는 누구인가.
이영호는 테란이다. 임요환이 홍진호에게서 패자(覇者)의 운명을 약탈한 이래 테란은 언제나 이 판의 주인이었다. 저그는 집요한 침공으로, 프로토스는 전설과 기적을 타고 테란에게 도전해왔으나 임요환-이윤열-최연성의 군림은 그 누구도 막지 못했다. 그랬기에 마재윤의 등장은 크나큰 충격이었지만 그때조차도 테란은 자신들의 '정당한' 통치권을 빼앗아간 불확정 요소로서 마재윤을 대했다. 이영호는 그 테란의 일원이다.
이영호는 천재다. 진영수는 자신의 전부를 그 발도에 걸음으로써 백척간두의 자리에서 한때나마 테란의 톱에 올랐다. 전상욱은 최연성의 아래에서 현존하는 테란의 온갖 무기와 수싸움을 마스터했지만 후반 난전에서 마재윤을 당해낼 수 없었다. 변형태는 두려움도 좌절도 몰랐지만 그렇다고 해서 패배도 고통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영호는 그들 중 누구와도 같지 않은 길을 걸어왔다. 마재윤 이후 그 어떤 테란도 그와 같은 길을 걷지는 못했다. 이영호는 그러한 재능의 소유자다.
이영호는 KTF 매직엔스다. 그의 곁에는 많은 선배들이 있었다. 그것도 최소한 한번쯤은 이 판의 정상에 근접해본 경험이 있는 쟁쟁한 위명들과 함께하고 있었다. 이영호는 그들의 후계자로 여겨졌고, 그들 선배들이 받았던 지지도 관심도 그대로 이어받았다. 실패하면 격려 받았고, 승리하면 어김없이 애정 어린 칭찬이 뒤따랐다. 이영호는 그들 거목이 들어선 숲을 누비며 자랐다. 이영호는 그 매직엔스를 선택했다.
그리고 이제 이영호는 로열로더다.
지금까지는 그 누구도 그 길을 가로막지 못했다. 이영호는 대담하고 거침없이 자신의 깅를 헤치며 여기까지 왔다. 패배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김준영은 아직 임요환에게 패배했을 때 힐끔힐끔 눈을 돌리던 이영호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짓궂은 장난을 저지른 뒤 어른들에게 혼날 것을 두려워하는 천진한 아이의 그것에 가까웠다. 이영호는 그 패배로 조금의 자신감도 잃지 않았을 것이다.
금수저를 물고 나온 온실 속의 화초.
그렇게 믿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씁쓸한 웃음 밖에는 지을 수 없었다. 이영호는 그런 부류가 아니었다.
잃을 것이 없는 자의 마지막 발악이 가장 두렵다고들 한다.
그렇다면 잃어본 적이 없는 자의 대담무쌍함은 어떤가.
자신이 그 어떤 마인드 컨트롤을 한다 해도, 이영호의 그것에는 미치지 못할 것임을 김준영은 직감했다.
이미 사람들이 '본좌'의 계보를 차지할 다음 이름으로 이영호를 들먹이고 있었다. 혁명의 주인인 김택용을 제치고, 양대 리그 4강을 밟은 송병구를 제쳤다. 그 이유는 위에 열거한 그 전부다. 이영호는 모든 부분에서 완벽했고, 모든 조건을 충족시키는 재목이었다.
세상이 그를 주목하고 있었다. 세상이 그를 이해하려고 애쓰고, 그를 받아들이려 애쓰고 있었다.
그러나 김준영은 그 세상에 없었다. 있을 수 없었다.
세상을 이해하는 자
「"네 말처럼 버릴 것을 쉽게 버리려면 곧 다시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이 필요해. 나는 그렇게 살아오질 못했어. 지금 것을 버리면 다음엔 굶어죽을 것이 틀림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하나를 버리기 위해서는 무한한 용기가 필요했지. 마지막 한 수, 내일이란 건 좀처럼 마음대로 되지 않아. 아무리 멋진 승리가 유혹한다고 해도 손에 쥔 마지막 빵을 내기에 걸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어. 나라면 절대 걸지 않아."」
- 전민희, 『룬의 아이들 : 윈터러』中
김준영은 사라져가는 너무 많은 것을 보았고, 자신 또한 그렇게 될 것을 두려워한 선수였다. 무수한 전설과 기적을 남긴 스타즈의 선수였지만 그는 이 세상이 항상 드라마 같지는 않음을 너무나 잘 알았다. 타고난 영리함과 침착함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최악의 가능성을 염두에 둘 수 있는 통찰력을 그에게 선사했다. 그는 그 재능을 통해 그 동료들 중 언제나 가장 멀리 볼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빛 스타즈가 처한 암담한 상황을 다른 그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박성준 정도 되는 선수도 순식간에 웨이버에 붙여지는 작금, 자신과 같은 선수들이 처해 있는 상황을 너무나도 잘 알았다.
그는 So1 - 전설의 리그에도 발딛었었다. 김준영은 오영종에게 패했고, 홍진호와도 인상적인 승부 끝에 패했다. 마지막으로 최연성을 잡아냈지만, 결국 진출자는 최연성과 오영종이었기에 빛바랜 승리였다.
스타리그 두 번째 진출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렇게까지 좌절할만한 결과는 아니었다. 하지만, 김준영은 말했다.
이것이 마지막일지도 모르니까.
"연습할 때 감독님이 4드론도 준비해보라고 이야기해서 4드론을 할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할 만 했기 때문에 4드론은 안 했다. 스타리그에서 마지막 경기가 될 수도 있기 때문에 4드론은 하고 싶지 않았다."
-2005. 8. 26 김준영, 최연성과의 So1 16강 경기 승리 후
어쩌면 그가 한빛 스타즈에 있었던 점이 좋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스타즈는 몰락해가는 명가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황금 세대는 각자의 이유를 대고 팀을 떠나갔고, 이재균 감독은 그래도 남은 것들에서 팀을 이끌어갈 톱니바퀴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러나 홀로 팀의 운명을 바꿔낼 선수라는 건 모든 곳에 있지는 않았다. 오리온에 임요환이, 팬택에 이윤열이, P.O.S에 박성준이, 그리고 PLUS에 오영종이 있었건만 한빛에는 아무도 없었다. 모두를 구원할 영웅 따위, 한빛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김준영은 암담한 미래를 쏘아보았다.
사람들은 So1에 열광하며 이듬해 가을에도 황제와 프로토스의 대결에 이어질 것을 꿈꾸었으나 그는 임요환의 마지막 결승이었다.
사람들은 테란의 시대가 영원히 이어질 것이며 오직 테란만이 시대의 톱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으나 마재윤이 나타나고 말았다.
사람들은 SKT T1와 KTF 매직엔스가 이 시대를 양분한 채 끝없이 싸우리라 생각했으나 그 둘은 나란히 몰락하고 말았다.
영원한 것은 없다, 그 무엇이라도.
전설도 드라마도 없다, 그 어디에도.
그 동안 김준영은 두 번을 더 스타리그에 발 딛었으며 그 두 번도 모두, 그러니까 데뷔 이래 총 네 번에 걸쳐 16강에서 고배를 마시고 말았다.
16강 저그 - 이것이 그의 그릇이리라. 언제 잃어버릴지 모르는 그의 알량한 그릇이리라. 때가 되면 이름 모를 누군가에게 내어주어야 할, 그에게 주어진 자리이리라.
그에게 주어진 세상이리라.
상실의 불안과 두려움 앞에, 김준영은 그에게 주어진 세상에서 살아가기로 했다. 그것은 일종의 타협이었다. 나는 여기서 독야청청 안빈낙도 할 테니, 마음대로 해봐라. 끌어가면 끌려가주고, 내팽개치면 팽개쳐져 주겠다. 그리고 그는 세상이 원하는 대로 그를 내맡겼다. 16강 저그로서. 그저 그런 게이머로서. 안타까운 또 한 마리 개똥벌레로서.
사람들은 그를 동정했고 그에게 이름을 주었다.
대인(大人).
그것은 세상을 이해하는 자, 또는 세상을 포용하는 자, 그리고 세상을 받아들이는 자를 의미한다.
김준영은 그걸로 좋았다. 텅 빈 그릇인 걸로 좋았다. 사람들은 빈 그릇의 바닥에 지 얼굴을 비춰보고는 그것이 김준영이노라 알았다고 만족하면서 돌아갔다. 그것이 김준영이 바라던 것이었다.
그런데-.
딱 한 명이 이와 같은 김준영의 평온을 방해했다. 그는 '대인배' 외에 또 다른 이름을 자꾸 김준영에게 주려 했다. 김준영의 텅빈 그릇에 무언가를 자꾸 채워 넣으려고 했다. 패배가 뻔한 사지로 그를 내몰았고, 죄책감과 책임감을 그 등에 얹으려 들었다. 김준영은 그를 중오할 수도 있었고, 떨쳐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는 이재균이었다.
세상이 이해하는 자
「테란이 다양한 빌드와 운영을 모조리 습득하고 각 상황에서 최선의 판단을 내리고 과단성 있게 실행해 쇼부치는 것만큼 무서운 게 없다. 여기서 상대를 심리전에서 읽고 그것을 섞어서 맞춰 타격할 수 있다면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내가 그토록 이영호란 테란의 싹을 밟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 Judas Pain, 「이영호+송병구/김동수」中
승부처는 파이썬. 그걸로 정해져 있었다.
1경기, 테란 절멸의 전장, 몽환.
2경기, 히치하이커는 저그 우세 - 라곤 하나 Z:T - 13:11.
4경기, 몬티홀은 테란 우세.
5경기, 다시 몽환.
이영호는 미련없이 1경기 몽환을 버렸고 접전 지역인 히치하이커를 쥐었다. 이 승부, 이영호의 승리 시나리오는 2, 3, 4경기를 잡는 것이다. 김준영의 시나리오는 물론 그를 저지하는 것이다.
김준영은 몽환의 힘으로 이겼다는 말이 듣고 싶지 않았던지 셧아웃을 공언했으나 이미 어그러졌다. 테란 우세의 몬티홀이 있으니, 1:1 상황에서 3경기 파이썬을 누가 잡느냐에 승부가 달렸다 해도 과언은 아니리라.
3:1로 이기던가, 3:2로 지던가, 아니면 그 반대던가.
이영호도 김준영도 일합 승부를 접었다. 가만히 서로를 살폈다.
- DAUM 스타리그 200 S1 4강 B조 이영호 VS 김준영 in 파이썬.
김준영은 더 이상 그 누구도 '김준영을 안다'고 가볍게 말하게 놓아둘 생각이 없었다. 이전이었다면 오히려 그를 자신이 바랐을 것이나 이제는 달랐다.
자신이 이영호처럼 대담해질 수 없음은 알았으나, 이영호가 만일 그 대담함으로 세인들과 다름없이 김준영을 속단한다면, 그리하여 그 또한 '김준영을 알았다' 믿고 있다면 - 이영호는 여기서 피할 수 없는 대가를 치룰 것이다.
단칼에 베일 것이다.
파이썬의 원배럭 더블을 성공시킨 뒤,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이영호는 스스로에게 다시 한 번 질문을 던졌다.
김준영은 누구인가.
[한빛 스타즈가 내세우는 에이스이며, 후반 운영에 장점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받는다. 따라서 안정적이고 정석적인 게임 양상을 선호하며 후반 지향적이다.]
그리고 잠시 고민한 뒤, 몇 줄을 덧붙인다.
[…라곤 하나, 진가는 레어 테크에서 벌이는 정교한 컨트롤 싸움에 있으며 실상 그로써 승부를 결정짓는다. 하이브에서 보여주는 현란한 디파일러 운용과 임팩트 있는 울트라 러쉬는 굳히기로 이끄는 피니싱 무브, 끝내기의 일환이다.]
이로써 충분하다.
이영호는 고개를 들어 다가오는 적을 응시한다.
만반의 준비는 이미 마쳤다.
- 시작은 뮤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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