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
2012/11/28 23:14:40 |
Name |
tyro |
Subject |
화미 |
1.
봄날의 기운이 가득한 어느 날의 일입니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나무의자에 앉아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정류장에는 아무도 없고, 화창한 날씨와 달리 분위기는 적막하기만 합니다. 듣고 있던 노래의 음량을 살짝 높여봅니다. 가락에 맞추어 기분을 끌어올리는데 어디에선가 세련된 향기가 풍겨옵니다. 음량을 다시 내립니다. 점점 향은 짙어져 가고 가슴은 두근두근 뛰기 시작합니다. 옆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살짝 고개를 돌려봅니다.
2.
문득 어렸을 때 추억담 하나가 떠오릅니다. 때는 바야흐로 설날. 공식적으로는 일가족이 모이는 날이고, 저에게는 세뱃돈을 받는 날입니다. 세종대왕을 바라보며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 것도 한순간. 곧이어 나타난 엄마에게 소중한 지폐를 빼앗기게 됩니다. 그리고 매년 반복되는 광경을 떠올리며 자신을 책망합니다. 저는 왜 이리도 멍청할까요. 속으로 "내년에는 설레지 않을 거야"라고 다짐해봅니다.
어느새 남자 어르신들은 거실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시고 계십니다. 저도 남자니까 살짝 껴서 앉아봅니다. 왠지 모를 눈초리가 느껴집니다. 하지만 기세에 눌리지 않고 꿋꿋이 있어봅니다. 저는 어린아이니까요. 하지만 무언가 범접하지 못할 말들이 오고 갑니다.
'경제가 어쩌구......'
'정치는 저쩌구......'
'...'
어린 나로서는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생소하게만 느껴집니다. 자욱한 담배 연기에 콜록콜록하며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는 다시 다른 곳을 찾아 이리저리 움직입니다. 부엌에서는 여자분들이 모여서 수다를 늘어놓고 계십니다. 저는 그런 분위기가 좋아 살며시 다가가 봅니다. 그리고 사과를 먹으러 온 척하며 자연스럽게 식탁의 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그리고 가만히 이야기하는 내용을 들어봅니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아까보다는 가볍게 느껴집니다.
'#$%^&...'
'&^%$#...'
당시에는 마치 암호를 주고받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저는 열심히 머리를 굴려 무슨 말인지 추측해봤지요. 그리고 마침내 실마리를 발견하고는 고모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습니다. 사실 머릿속에 남은 것은 희미한 이미지뿐입니다. 그래도 잊지 않고 지금까지 기억할 수 있었던 건 제가 의미를 깨달으면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요새 유행하는 표현으로 말하자면 문화컬쳐라고 해야 할까요? 물론 정확한 뜻은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야 알게 되지만 그것을 미리 밝혀보면 수수께끼 같은 문장의 비밀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눈썹 좀 다듬어야겠다.'
'차라리 눈썹을 지우고 새로 그리는 건 어때?'
이후로 이런 기분을 다시 느낀 적이 딱 한 번 있었는데 고대 이집트에서는 삭발하고 가발을 쓰는 문화가 있었다는 내용을 책에서 보았을 때 입니다. 멀쩡한 신체발부를 없애버린다는 건 어린 저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죠. 만약 누가 제 눈썹을 지운다고 하면 울면서 난리를 쳤을 겁니다. 반대여도 그랬겠죠. 그보다도 어린 시절인데 오죽하겠습니까? 다행히도 그때 저는 아직 순수했던 터라 다른 세계를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신기하게 쳐다봤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이것이 시초가 아니었나 합니다.
3.
나이가 들면서 많은 말이 들어오고 나갔습니다. 그런 기억 중 하나는 연애입니다. 로미오와 줄리엣부터 오락실의 그녀까지 많은 이야기가 들락날락했지만, 관심을 버리지 못했던 이유는 단 하나의 무언가를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이야 그 대상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그려지지만, 처음에는 막연했습니다. 연애라는 범주의 이야기를 보다 보니 무언가 걸린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런 느낌이 오는 것들을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 몇 가지를 옮겨보면 이렇습니다.
겨울 이야기, 전차남, 모테키,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등등
곰곰이 공통점을 고민해보니 처음에는 초식남 이야기를 좋아했었나 싶었습니다. 그 생각은 유사했지만 달랐습니다. 그런 이야기에서 느낌은 왔지만, 제가 찾고 싶었던 것은 그것을 넘어서는 무언가였던 것이죠. 이는 다른 연애 소설을 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고 전혀 관계없다고 생각했던 곳에서 단초를 찾게 됩니다.
4.
사실 저는 연애 이야기를 잘 모릅니다. 오히려 제가 좋아하는 쪽은 무협소설입니다. 물론 무협에서 사랑이야기도 펼쳐지지만 가장 중요한 요소는 이름에서도 나오듯이 협(俠)과 무(武)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이야기 구성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런 무협 중 최고를 뽑으라고 한다면 꼭 빠지지 않고 들어가는 소설이 있습니다. 바로 김용의 영웅문입니다. 어쩌면 저보다 더 잘 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간단하게 이야기를 소개하면 중국의 송나라 말기부터 명나라 개국초까지를 배경으로 협의지사의 활동을, 혹은 애절한 사랑이야기를 그린 3부작 소설입니다. 아 하나를 빼먹었군요. 마지막 3부에서는 장무기라는 주인공이 명교의 교주가 되어 반원 운동을 펼치는 내용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놈은 1, 2부의 주인공들과 달리 영 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먼저 우유부단하지요. 그리고 여러 여자에게 끌려다니는 것도 모자라서 대의를 잊어버립니다. 결국,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에게 속고 부하들은 구렁텅이에 빠지게 됩니다. 제가 싫어하는 이야기 구성입니다. 그렇다고 사랑에 모든 것을 바친 것도 아닙니다. 여러 여자로부터 자신의 마음을 확고히 정하지를 못합니다. 원나라 공주였던 조민이 사랑을 위해 나라를 포기하고 장무기를 도와주는 것과는 참 대조가 됩니다. 그래서 저는 이 두 사람이 참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왜일까요? 머릿속에서 이 두 사람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냅니다. 아래는 의천도룡기의 마지막 장면 중 일부입니다.
"
조민은 가지런한 치아를 드러내 생긋이 웃었다.
"내 눈썹이 너무 엷은 것 같으니 붓으로 좀 그려 주세요. 강호 협의도에 위배되는 요구는 아니겠죠?"
화미(畵眉) ----- 여인의 눈썹을 그려 주는 것으로, 정인(情人)이나 부부 사이에 행해지는 낙취(樂趣)이다.
장무기는 굳어졌던 표정이 풀리며 환하게 웃었다.
"앞으로 매일 눈썹을 그려 주겠소."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창 밖에서 여인의 간드러진 음성이 들려왔다.
"나의 요구도 한 가지 들어주겠다고 한 약속을 잊지 않았겠죠?"
바로 주지약의 음성이었다.
"
참으로 아이러니했습니다.
그렇게 찾고 싶었던 대상은 제가 그토록 싫어했던 곳에 있었습니다.
5.
약간의 생각들이 스쳐 지나갑니다. 다행히 이번에는 그것들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여태까지 놓치고 있었던 일련의 생각들.
아름다운 여성 분의 얼굴을 바라봅니다. 정확히는 눈썹을 말이죠.
그리고는 다시 상상에 잠겨 여태까지 찾고 있었던 그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합니다.
어디선가 마녀의 목서리가 들려오는 것이 느껴집니다.
아차차, 여자 분께서 이쪽을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재빨리 의식을 가다듬고 이성을 되찾습니다.
김용은 정말 훌륭한 작가입니다. 현실로 상상하는 건 실례니까요.
마침 기다리던 버스가 멀리서 모습을 드러냅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준비를 합니다.
오늘 하루는 즐거운 기분으로 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0.
화미 혹은 화미하다. 눈썹을 그리다.
* 信主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2-12-08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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