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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12/03/25 21:24:58
Name 눈시BBver.2
Subject 해방 후 - 조선 공산당의 몰락 (1)
"투쟁이 한창이니..."

해방 후와 민주화 후의 상황은 많이 닮았습니다. 좌든 우든 각기 권력을 잡기 위해 더러운 짓에 몸을 담궈야 되며, 자기 편에선 숭배하고 반대편에서는 그 그림자를 찾아 공격합니다. 한국인이 너무 깨끗한 영웅을 찾는다는 것도 문제겠죠. 이 "깨끗함"에 대한 기준도 사람마다 달라지며, 특히 자기 편이냐 적이냐에 따라 그 기준은 더 달라지죠. 아예 그냥 개인의 능력과 그 개인이 한 정책을 살펴본다... 해도 참 어렵습니다. 이것에 대한 구분 역시 자기 성향에 따라 또 달라지니까요.

독립이든 민주화든 운동을 하는 가운데서는 이게 크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자기들끼리야 신나게 싸우고 누구는 학을 떼고 나오겠지만, 일제든 독재 정권이든 이 쪽에 대한 정보를 아예 차단하니 그 치부도 크게 드러나지 않죠. 거기다 상대는 당시 절대악이라 부를 수 있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맞서려면 그들 역시 힘을 합쳐야 됩니다. 무엇이 옳나 어떻게 해야 되나 머리만 싸 매는 (네 저 같은 -_-) 이들은 "나약한 지식인"이라 여겨졌고, 이게 꼭 틀린 것도 아니었습니다. 조직원끼리 비밀을 절대 지키는 것, 종횡으로 조직을 짜고 무력으로 맞서 싸우는 것, 공산주의가 이런 것에 능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습니다. 거대해진 자본주의를 상대로 싸우는 것이었으니까요. 좌파 우파 가릴 것 없이 약자의 입장이고 강자에 맞서 싸우기 위해선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죠.


가령 김구를 예로 들어봅시다. 그의 방식은 분명 "테러"였습니다. 하지만 그 외에 방법이 있었냐고 반문하면 전 대답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는 전형적인 투사였고, 절대악인 일제와 맞서 싸웠습니다.

하지만 그 절대악인 일제가 사라진 후, 김구의 행보는 갈팡질팡합니다. 그는 좌우합작을 거부하고 우파 정부인 임정을 정통으로 밀었고, 미국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력으로 뒤집을 생각까지 했었습니다. 송진우 암살은 물론 여운형 암살에도 그가 관련돼 있을 가능성이 있고, 백의사를 북한에 보낸 것은 "테러"로밖에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을 겁니다. 그에게는, 그리고 많은 한국의 우파들에게는 공산주의 역시 절대악일 뿐이었거든요. 이에 관한 얘기는 조금 있다 하고...

이성적으로는 몰라도 감성적으로는 일제에 대한 그의 테러를 이해할 수 있고, 그렇게 투쟁하면서 마지막까지도 임정을 지켰다는 것은 높게 평가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해방 후의 그의 모습은 정당화 시키기 힘듭니다. 민주화 이전에는 쉬웠습니다. 좌익은 절대악이었고, 그런 테러도 정당화 될 수 있었으니까요. 이게 이승만 정권을 부정할 수밖에 없었던 독재 정권 하에서 김구가 우상시 된 이유입니다. 반공 우파의 시작, 독립운동가, 이승만과 결별, 그리고 마지막에는 통일을 위해 힘쓴 걸 부정할 순 없으니까요.

독립운동이라는 투사가 필요한 데 있어서 그의 존재는 절대적이었습니다. 하지만 해방 후, 정치가들의 대립에서 그는 너무 독선적이었고, 과격했으며, 서툴렀습니다. 우익, 좌익, 미국... 그 어느 쪽에도 그는 환영 받지 못 했고, 그는 이승만과 최대한 연대해 이승만 천하의 2인자로 만족하려 했지만, 이승만에게 버림받고 마지막으로 통일과 반이승만 운동에 뛰어듭니다.

김구에 대한 자세한 평가야 나중으로 돌리고........ 본론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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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우, 극좌라서 그런지 몰라도 김구와 박헌영은 닮은 점이 참 많습니다. 확실히 다르다 할 만한 건 죽은 뒤의 평가 뿐이겠죠.

그 역시 여운형을 제외하면 국내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독립운동을 지휘한 이였습니다. 하지만 해방 후의 그의 모습에서도 비판할 부분이 많습니다. 건준을 통한 좌우합작에 뛰어드는 것 같았지만 그의 독선적인 모습에 중도 우파들도 이탈했고, 여운형은 허수아비가 돼 버렸고, 결국 결별합니다. 조선 공산당 내부에서도 이는 마찬가지여서 박헌영의 반대파인 장안파는 해체되고, 이들은 같은 공산주의자면서도 그를 강하게 비난하는 쪽에 서게 됩니다. 이승만과의 연대가 될 거라 생각하는 건 무리였고, 김구 등 임정 계열 인사들이 그가 만든 조선인민공화국에 참가를 거부하자 임시 정부를 "망국 정부"라 부르며 김구 등을 "망국 인사"라 불렀습니다.

여운형이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하자 그는 여기에도 참가하는 듯 했지만, 평양에 갔다 온 후 갑자기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상황은 그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이승만은 45년 말부터 공산주의자를 악의 축으로 묘사하기 시작했으며, 다른 좌우파 인사들은 물론 공산주의 내에서도 분열되고 있었습니다. 반탁 운동을 통해 우파가 승기를 잡기 시작한 46년 초, 그는 김두한 (네, 그 김두한이요) 에 납치될 뻔 하기도 했고, 정읍 발언을 기점으로 한 이승만의 총공세에 남한 내에서 고립되기 시작합니다. 거기다 북한은 이미 김일성 세상이 돼 가고 있었구요. 미군정은 합법적으로 그에게 딴지를 걸지는 못 하고 불법을 저질렀다는 누명을 씌워 탄압을 시작합니다.

1946년 5월에 있었던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은 그의 몰락의 시작이었습니다.

시작은 단순했습니다. 일제 때 조선은행권을 인쇄하던 근택인쇄소의 직원 김창선은 일본 기술자들이 철수할 때 지폐를 인쇄하는 원판을 양승구에게 빼돌립니다. 양승구는 독촉(독립촉성중앙협의회) 뚝섬위원회 조직부장 이원재와 함께 (이모부였습니다) 지폐를 인쇄하려 하다 실패합니다. 결국 이를 다른 사람에게 팔아보려는 중에 발각됩니다.

우익 세력인 독촉 인사에게서 시작된 사건, 하지만 이 사건은 전혀 다르게 흘러갑니다. 그 때 조선공산당은 인쇄소가 있던 근택빌딩에 입주해 있었습니다.

군경찰청에서는 이를 이렇게 결론 내립니다.

"'1945년 10월 중순 근택빌딩 2층 조선공산당 사무실에서 이관술(조선공산당 당수 박헌영에 이은 2인자), 권오직(조선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 주필)이 김창선에게 위조지폐를 인쇄하라고 지시했다. 이후 김창선은 6차례에 걸쳐 9백만원을 인쇄해 이관술에게 제공했는데 아무 보답이 없자 분하게 여기고 징크판을 다른 사람에게 팔았다가 발각되었다"

참 엉뚱한 결말이었습니다. 이관술을 비롯한 공산당 인원들은 절대 부정했고, 미군정 역시 처음에는 딱히 공산당과 관련 없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수사가 진행되면서 상황은 더 이상하게 흘러갑니다. 5월 18일, 미군은 공산당 사무실 등을 포위해 수색에 들어갔고, 조공을 확실히 범인이라 낙인 찍습니다. 이관술 등은 붙잡혔고, 범행 사실을 시인해야 했죠. 후에 그들은 고문에 의한 허위 증언이라며 다시 맞섭니다만, 결국 유죄로 수감됩니다.

극우 단체들은 이 틈을 이용해 공산당을 강력하게 비난했고, 우익 청년들은 트럭에 나눠 타고 민전(민족주의민주전선, 좌파들의 연합 단체)와 좌파 언론사를 공격했습니다. 경찰들은 이를 방조합니다. 박헌영은 이를 "조선판 히틀러 테러"라고 비난했지만 상황은 돌릴 수 없었습니다. 어쨌든 "정부"에서 "합법적"으로 조사해서 나온 결론이었습니다. 공산당의 활동은 불법이 됐고, 박헌영의 지지도는 바닥도 없이 떨어졌습니다.

아직 충분히 힘을 과시했던 공산당, 다른 독립운동가들처럼 그들 역시 부자들에게서도 이런 저런 지원을 받고 있었습니다. 거기다 공산당이 거기 입주한 것은 46년 초, 충분히 먹고 살 만 했고, 시간적으로도 맞지 않은 것이, 그것도 우익 인사가 저지른 일이 얼렁뚱땅 공산당의 죄가 돼 버린 것이죠. 이걸 46년 5월이라는 시간적 배경과 결부시켜 보면 쉬운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소공위의 무기한 휴회,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확실히 권력을 잡아가고 있었고, 이에 맞서 이승만과 미군정도 슬슬 단독 정부를 세우려는 움직임을 보일 때였습니다. 그렇다고 아직 그들을 악의 축으로 낙인 찍을 수는 없었습니다. 이승만이야 지원을 한다 해도 개인의 주장일 뿐이었지만, 미군정은 달랐죠. 즉, 해방 이후 벌어진 최초의 "꼼수"였습니다.

하지만 이 직후 다시 숨통을 틀 기회는 있었습니다. 당시 미국은 이승만에게서 여운형으로 다시 눈을 돌리고 있었습니다. 아직 미국의 반공노선이 제대로 나타나지 않은 때, 미군정 등 군부에서는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우익 세력으로 단독 정부를 세우고 싶어했지만, 국무성에서는 좌우를 모두 참가하는 형태의 통일 정부를 원했습니다. 2차 미소공위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이승만은 단독정부론을 철회해야 했고, 계속 고집을 부리던 김구는 좌우합작에 찬성하는 인사들까지 떨어지면서 고립돼 갔죠. 여운형은 46년 중반부터 이 분위기를 타 좌우합작을 추진하려 했습니다만...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박헌영은 달랐습니다. 그는 우익 반동에 맞서 좌익세력의 단결을 외쳤고, 두 차례에 걸친 회담을 통해 박헌영의 좌익측이 완전히 빠지면서 좌우합작운동은 유명무실해집니다.

"우리 한국에서 적정 타당한 합작으로 하루빨리 통일정부를 만들어내지 않으면 우리의 조국에는 중대한 위기가 찾아올 것 (중략) 멀지 않은 장래에 그야말로 내란적인 항쟁의 피를 흘리게 할 가능성이 있다" - 안재홍

이런 가운데 박헌영은 여운형의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 조선공산당 3당 합당을 추진합니다. 여운형은 이런 좌경화 경향을 막으려 했지만 실패합니다. 조선인민당 내에서도 박헌영의 프락치가 숨어 있었고, 여운형은 그 어느 때보다 크게 반발하며 미군정에게까지 박헌영을 제거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이 때 그가 쓴 표현은 "박헌영에게 정치적 강간을 당했다"였습니다. 이후 그는 몇 차례 평양으로 가 김일성과 만나지만, 결과야 뭐 말 할 필요 없겠죠. 이런 움직임이 박헌영 개인 레벨이 아닌 김일성과 소련 내에서부터 정해진 것이라는 걸 알게 된 여운형은 굴복합니다. 이후 그는 정계 은퇴라는 방식으로 조용히 맞섰죠.

"북의 김일성·김두봉이 민족주의자로서 박헌영의 반미적 노선에는 반대할 것" - 여운형. 하지만...............

이후에도 여운형은 어떻게든 좌우합작을 시도했습니다. 박헌영의 극좌 노선을 비판하고, 소련과 김일성이 추진하던 토지 개혁 등의 북한 단독의 움직임을 비판하지만 모두 실패합니다. 극우만큼이나 극좌 역시 그의 생각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좌우합작 과정에서 공산주의의 영향을 더 넣으려 했던 박헌영과 그것을 막았던 여운형, 미국에서도 이를 돕기 위해 서재필까지 투입하지만 우파의 참여 역시 실패하죠. 이 좌우합작의 실패는 더 이상 한반도에 중도는 필요 없다는 것을 말해주었습니다.

1946년 8월 말, 이 시점에서 여운형과 박헌영은 완전히 결별했다고 봐도 될 것입니다. 이 때 김일성과 소련에 갔다 온 박헌영은 소련에게서 이런 지령과 함께 일화 500만 엔을 받습니다.

"테러와 압제에 항의하는 대중적인 시위를 벌이고 항의집회를 개최하라"

온건적인 협상에서 폭력적인 투쟁으로의 전환이었습니다. 한편, 둘의 결별이 확실해진 상황에서 미군정 역시 눈치볼 필요가 없었습니다. 여운형은 소련과 미국에게 박헌영의 태도를 성토합니다. 양 쪽 다 명분은 확실해진 상황이었습니다. 대대적인 탄압과 그에 대항한 폭력적인 선동이 이어졌고, 이는 6.25 전쟁 전까지 남한을 피로 물들게 했습니다.

하지만 미군정과 극우, 박헌영 모두 몰랐던 사실이 있었습니다. 당시 한국의 상황, 그리고 국민들이 얼마나 분노하고 있었는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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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7일, 미군정은 박헌영에 대한 체포령을 내립니다. 이것이 북한으로 갈 "명분"을 만들기 위한 박헌영과 미군정의 비밀 협상이라는 설이 있지만, 여기서 다루진 않겠습니다. 여기에 맞추어 각종 조선인민보 등 좌파 언론들도 모두 금지됐습니다. 공산당의 당수인 박헌영을 체포한다는 것, 공산당에서는 이에 대해 "신전술"로 맞섰습니다.

"승리냐, 패배냐 하는 판가리 싸움은 '타협'을 전제로 하지 않고 적을 '굴복'시킬 것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당시 남한 내의 노동 조합은 둘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남로당 계열의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뢰, 줄여서 전평과 이에 맞선 우익 계열의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 줄여서 대한노총이었죠.

9월 말, 영남을 중심으로 노동자들의 총 파업이 시작됩니다. 시작은 9월 23일 부산의 철도 노동자들, 이 9월 총파업에 25만여 명의 노동자가 참여하고, 1만 1624명이 검거됩니다. 남한에서 시작된 첫 노동 운동이었습니다. 당연히 우파 측에서는 박헌영이 저지른 짓이라 했고, 박헌영은 동학농민운동과 3.1운동에 이를 견주었습니다.

하지만 그 속 내용으로 들어가 보면 조금 다릅니다.

당시 남한의 경제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북한부터 만주, 일본과의 무역이 끊기면서 모든 걸 안에서 해결해야 했지만, 미군정은 남한의 사정에 그리 신경쓰지 않고 있었죠. 배급제의 실패로 쌀 값은 열 배 더 늘어났고, 임금은 너무 낮았으며, 그 상황은 오히려 일제시대보다 더 했습니다. 미군정은 일본인들이 남긴 공장을 한국인에게 넘겨줬지만 책임소재를 제대로 하지 않았고, 부패로 이어졌습니다. 친일 경찰들은 늘 하던 대로 식량을 "공출"해 갔구요. 남한 사람들에게 해방과 함께 찾아온 것은 기근이었습니다.

영남의 상황은 그 중에서도 최악이었습니다. 특히 대구의 경우 콜레라가 퍼졌는데, 미군정은 대구를 그냥 봉쇄해 버립니다. 대구 내의 생필품 공급이 끊어지면서 돈이 있어도 쌀을 구할 수 없는 상황이 이어졌습니다.

이랬던 그들에게, 지시가 내려져 옵니다. 총파업 선언이었죠. 문제는 이게 너무도 갑작스러웠고, 무질서 했다는 것이죠.

(1) 일급제 폐지와 월급제 채택
(2) 급식 계속
(3) 출근 노동자에 쌀 1일 4홉(가족은 3홉) 지급
(4) 임금 인상

이 정도가 당시 노동자들의 요구였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여기에 대한노총도 참가했다는 것이고, 지도부에서 요구했던 조건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 북조선과 같은 민주주의 노동 법령을 즉시 실시할 것
- 박헌영에 대한 체포령 철회

공산당 지도부와 연관돼서 이런 것들을 내세운 파업도 있었지만, 상당수의 파업은 이런 정치적인 목적은 내버려두고 우선 먹고 살 권리를 찾기 위한 자생적인 조직과 우파에서 내세운 대한노총까지도 합세했던 파업이었다는 것이죠. 하지만 그 결과는 달랐습니다. 대한노총은 이승만을 위원장으로 추대해 자기들의 주장을 미군정에 요구했고, 미군정이 들어주고 파업을 끝내는 형태로 끝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평이 주도한 다수의 파업은 달랐죠.

"경제 부흥과 자주 경제의 수립이 급하니 노동자의 생활 향상도 경제 부흥 없이 할 수 없다. 우리는 경제 부흥과 노동 조건 개선을 병진시키는 투쟁을 전개시켜야 한다. (중략) 이를 분산적으로 무계획하게 기분적으로 단행한다면 승리할 수 없는 것이니,"

전평은 미군정 등 외에도 기본적으로 남한의 경제가 약하다고 판단, 이런 식의 총파업을 금지했고, 오랜 준비를 통해 해야 된다는 방침을 세워 왔습니다. 헌데 8월 중순, 갑자기 파업 명령이 내려졌고, "분산적으로 무계획하게 기분적으로 한" 파업이 일어나 버린 것이죠. 파업 계획이 틀어지는 건 기본이었지만, 가장 결정적인 것은 언론 파업이었습니다. 각지의 소식을 전해야 하기에 출판 노조의 파업은 가장 늦게 계획돼 있었지만, 9월 25일에 먼저 파업을 해 버립니다. 모든 것은 분산됐고, 정확한 목적이 무엇이었는지조차 혼동됐으며, 전평 지도부조차도 의사가 통일돼 있었는지 궁금할 정도죠. 전국적으로 일어난 파업이었지만, 각각이 연결되지 못 하는 혼란이 계속됐습니다. 그리고 이는 생존권을 들고 나온 학생과 시민들에 의해 걷잡을 수 없이 커집니다.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의 배후여야 할 박헌영은 그 때 북으로 도피 중이었습니다. 이제 그들에게 남은 것은 빨갱이라는 낙인과 미군정과 극우의 탄압 뿐이었죠.

대한노총의 경우 위의 경우처럼 우파 계열이라도 우선 노동자였기에 비슷한 요구를 했고, 역시 비교적 쉽게 파업이 끝났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크고 작은 진압이 시작됐습니다. 곳곳에서 경찰들이 발포했고, 수 명의 사망자와 많은 부상자를 낳았습니다. 여기에 김두한 등이 이끄는 정치 깡패들과 우익 청년들도 합세했습니다.

이런 가운데서 조선의 모스크바, 대구에서 끔찍한 일이 벌어집니다.


10월 1일, 시위대와 대치하던 경찰은 몸싸움 중에 발포, 2명의 사망자가 나옵니다. 이에 분노한 시민들과 고등학생, 대학생들까지 합세해 대구 경찰서로 향합니다. 그 선두에는 전날 사망한 두 명의 시체가 있었습니다.

"이성옥(대구경찰청장)은 무장 해제를 원했어요. 말 그대로 무기고에 무기를 갖다 넣자는 겁니다." - 이일재

"우리는 처음에 의과 대학생이 죽은 줄 알고 분개했고, 그래서 앞 쪽으로 파고들어 결국 경찰서 정문까지 갔어요. 그 때 경찰 간부 한 사람이 나와 무슨 연설을 하는 것 같았어요. 나중에 얘기를 들어보니 신재석 경위라는 사람인데, 뭐 연설을 하고 모자도 벗고 하더라고요. 경찰에서 손을 떼고 시위대에 합류한 것이지요." - 강창덕, 8.15의 기억

이런 모습들을 보면 경찰들이라고 그걸 떳떳히 생각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수많은 시위대, 그들의 정당한 요구, 경찰들은 무장 해제를 합니다. 하지만... 이 때 한 쪽에서 선동과 함께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에 당황한 경찰들도 발포해서 17명의 시민이 죽었다고 하죠.

이후 흥분한 시위대는 경찰 및 친일 부역자들을 쫓아 붙잡고 죽이기 시작했고, 대구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집니다. 이런 가운데서도 시위대는 스스로 질서를 지켜 치안을 확보하고 부자들에게 뺏은 것도 질서 있게 골고루 나누어주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게 정말인지는 의문입니다. 이 선동자들에 대한 언급이 없는 증언들도 있고, 시위대가 정말 질서 있게 움직였나 하는 생각도 들거든요. 위의 강창덕의 증언입니다.

"또 가는 중에 누구 한 사람이 심하게 두들겨 맞아 길가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았어요. (중략) 보기에 안 좋아 주위 사람들에게 저 사람이 왜 저리 됐는지 이유를 물었더니, '뭐 못되게 하다가 그래 됐지'라고 했어요. 그 날 대구 시내 분위기가 경찰이나 일본놈 앞잡이를 하면서 상당히 미움 받았떤 사람들을 모두 끄집어내 두드려 팼던 것 같아요."

그보다 위의 이일재의 증언입니다.

"무장 해제가 발표되자 시위대는 함성을 지르며 대구 평의회 앞에서 발포했던 250여명의 경찰관들과 대구 경찰서와 파출소에서 달아난 경찰관들을 쫓았고, 잡히는대로 구타하고 죽였어요."

이 뒤에는 스스로 질서를 잡았다는 내용은 있지만, 마찬가지로 그 때 경찰이 발포했다는 말은 없습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조선공산당원들이 제대로 지도하지 않았다는 점을 꼽습니다. 고참들은 허둥댔고, 신참들은 선동을 일삼았죠. 이 날 경찰 사망 20명, 부상 50명, 행방불명 30명의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들에 대한 피의 보복이 뒤따릅니다. 위에서 봤듯 경찰 스스로도 시민에 대한 발포를 떳떳히 여기지 못 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죠. 어디? 경찰이라는 조직 꼭대기에요.

"폭동에 가담했던 폭도들은 모조리 체포-구속하고 주모자는 즉결 처분해 버리라." - 수도경찰청장 장택상

이에 대해 경무부 고문 매글린은 이렇게 항의했습니다.

"민주 경찰이 국민의 생명을 파리 목숨만큼도 여기지 않으니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이 대구 사건의 여파는 컸습니다. 곧 경상북도 곳곳에서 이에 호응하는 봉기가 일어납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10월 3일 구미, 선산인민위원회 내정부장 박상희는 2000명의 군중을 선동해 구미경찰서를 습격하고 면사무소와 공무원들의 가옥을 파괴합니다. 이들은 박상희의 지휘 아래 적기가를 부르며 군청에 이르렀고, 인민재판을 실시하던 중 진압부대와 교전해 퇴각합니다.

박상희는 진압 과정 중에 사살됩니다. 그의 동생이 바로 박정희입니다.

46년 후반을 달궜던 경북 지방에서의 일들이 모두 끝난 후, 정확한 피해 집계는 조금씩 다릅니다. 미국의 G-2 보고서에서는 경찰 측의 피해를 사망 80명, 행불 및 납치 145명, 부상 96명으로, 시위대의 피해는 사망 48명, 부상 63명, 체포 1503명으로 집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위대의 피해는 연좌제를 우려해 신고가 안 된 게 많을 것으로 보입니다.

(길어져서 둘로 나눕니다)
* 信主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2-04-06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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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alingRain
12/03/25 22:07
수정 아이콘
해방후의 혼란은 상상이상이었네요. 광복만세를 부르짖던 당시 국민들은 저런 아비규환을 예상했었을까요...
12/03/25 22:31
수정 아이콘
스스로 독립을 하지 못해서 아비규환이 일어났을까요?
좀 알고 싶어서 책을 읽어도 참혹해서 도저히 읽을수가 없더군요
양정인
12/03/25 22:54
수정 아이콘
지난... 해방 전후의 이야기를 읽고 읽기가 두렵습니다.
또다시 멘붕을 겪을 것이 너무 뻔하거든요.
마지막과 다음 이야기는 도올 김용옥이 광주에서였나요.
박정희에 관한 강의에서 나왔던 이야기가 나올 것 같네요.
사티레브
12/03/26 04:46
수정 아이콘
대한민국 역사 비극의 시작...

ps. 추천머겅
좌월석점홈런
12/03/26 09:18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합니다! 사무실이라 스크랩후 나중에 천천히 다시 읽어봐야겠네요
12/03/26 12:55
수정 아이콘
추천 드리고 싶은데 지금 학교에서 폰으로 보는 중이라 집에 가서 스크랩 하면서 드려야 겠네요..

곧 수업이라 조금밖에 못 읽었지만 태백산맥과 한강을 읽었을때 그 컬쳐쇼크와 멘붕이 다시 오는 느낌입니다...엉엉 [m]
Je ne sais quoi
12/03/28 06:41
수정 아이콘
아 역시 이 혼란이란... 예전 근대사 수업 듣던게 기억나네요. 게다가 이 여파는 아직도, 그리고 언제 끝날지도 모르게 여전히 위력을 발휘한다는 게 가장 큰 문제겠죠. 뒤늦게나마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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