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12/03/18 21:00:40
Name 눈시BBver.2
Subject 해방 후의 상황에 대한 몇 가지 이야기
1945년 8월 15일, 당시 식민지 조선에서 이 소식을 듣고 기뻐하지 않은 사람은 얼마 안 될 겁니다.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정말 큰 기쁨이었을 것이고, "나라님이 누구든 무슨 상관이랴" 하는 사람들도 일단 전쟁이 끝났다는 것은 큰 기쁨이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한국은 곧바로 큰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해방 후에서 분단에 이르는 기간을 간단히 정리하면 "좌우 대립, 해외파의 승리"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후... 그럼 이 일련의 일들을 조금이나마 얘기해 보죠.


"그는 당대 조선인들이 감당할 수 없었던 민주주의자였다." - 47년 주한미군총영사 윌리엄 랭던

3.1 운동부터 참 많은 활약을 했던 여운형, 하지만 그는 참 오랜 기간 동안 묻혀 있었습니다. 아마 중국의 쑨원에 비교할 만한 사람은 한국에 그밖에 없을 겁을 겁니다.

친일파나 다른 독립운동가들을 생각하면 그는 뭔가 남 달랐습니다. 그가 일본의 패망을 생각했을 때는 진주만 직후 둘리틀 특공대가 도쿄를 공습했을 때, 이 특공대가 어떤 이들이었는지를 생각하면 뽀록 수준이었습니다. (...) 친일파야 당연할 거고, 국내파든 해외파든 "이런 걸 보니 일본이 곧 망하겠다"고 생각할 수 있었을까요. 단순 뽀록은 아닌 것이, 그는 만주사변 이후 일본이 패할 것이라는 것을 정확히 예측했고, 태평양전쟁 후 일본으로 가서 정계나 군부의 고위 관리들과 접촉해 독립을 협박하기도 했던 인물입니다. 그 때문에 옥살이를 하고 협박 속에 가족들이 전향문에 도장을 찍게 됐지만요.

해방 1년 전, 그는 비밀 조직 건국동맹을 만들어 해방 후를 준비합니다. 그 이름에서 느낄 수 있듯 이는 독립 투쟁을 위한 조직이 아니었습니다. 곧 독립될 나라를 위한 준비였던 것이죠. 그의 예상대로 1년 후 일제는 패망합니다.

항복이 다가오자 총독부는 자기들을 살려 줄 사람을 찾고, 여운형이 선택됩니다. 일본 극우파 정객이나 고위 관료들과도 친분이 있는 게 그였으니까요. 너무 거물이라서 죽이면 폭동이 일어날까봐 죽이지도 못 했던 그들이었습니다. 여운형은 그것을 받아들이고, 몇 가지 조건을 내겁니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 건국준비위원회, 건준이었습니다.

해방 후 건준은 가장 많은 지지를 받았고, 전국에 많은 지부를 두게 됩니다. 남한의 경우 여운형과 안재홍이 주도했고, 북한의 경우 조만식이 주도했죠. 하지만 나라를 되찾았다는 기쁨도 잠시, 건준은 너무나도 큰 상대를 만나게 됩니다. 그것도 너무 많았죠.


송진우을 대표로 한 우파 인사들은 건준 참여를 거부합니다. 이유는 몇 가지 있을 겁니다. 첫째는 임시 정부를 기다려야 된다는 것으로 후에 그들은 임시정부 대표들을 지지합니다. 둘째는 역시 "빨갱이와의 연대 거부"였죠. 공산주의자가 친일파보다 더 싫다는 건 이 때부터 시작됐고, 같은 편 내에서도 의견이 갈리는 당대나 지금이나 최대 쟁점 사항이 됩니다.

이들이 공산주의를 싫어하는 이유는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 일단 그들 자신의 배경이 지주, 사업가, 지식인 계층이었습니다. 공산주의식으로 하면 바로 힘을 잃을 이들이었죠.
- 공산주의는 민족보다 계급을 중요시 합니다. 북한의 모습을 보면 아리송해지긴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그랬고, 김일성 독재로 굳어지기 전에는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죠. 그들에 있어 중요한 건 한국의 독립이었지 계급 어쩌고가 아니었습니다.

이들을 단지 친일이라고 할 순 없습니다. 친일파도 많지만 일제와 타협하지 않은 이들도 많거든요. 밥줄 문제와 함께 생각해야 될 것이, 그들은 조선 말부터 이어져 온 지식인 계층이라는 것입니다. 민중은 계몽의 대상일 뿐이라는 민족개조론자에 가까운 것이죠. 이들 중에 친일파가 많고, 일제 때 잘 산 지주층에서도 역시 친일파가 많죠.
이들에 있어 좌우 합작은 절대 있으면 안 되는 것이었고, 공산주의자와 손을 잡은 여운형 역시 마찬가지였죠. 여운형 자신도 중도 좌파 사회주의자이기도 했구요. 그리고 좌우 합작을 지향하는 건준에 비해 임시 정부는 확실한 우파였습니다. 그들이 따로 당을 세우니 바로 한국민주당, 한민당입니다.
이 한민당은 미군정에서도 친일파 정당으로 찍힙니다. (...) 헌데 정작 미국에서 정말 자세히 조사해서 친일과 전혀 관련이 없다고 결론 낸 여운형을 친일파로 몬 게 이들이었죠.


이렇게 우파 진영이 빠진 건준을 장악한 것이 박헌영이 이끄는 조선 공산당 출신의 좌파였습니다. 지금이야 우파는 부패해서, 좌파는 서로 싸우느라 망한다고 하지만 소련 때부터 좌파들의 조직력은 엄청났죠. 순식간에 건준은 공산주의 일색이 됐고, 여러 차례 이걸 문제 삼던 중도 우파 안재홍 등의 민족주의 세력도 탈퇴합니다. 거기다 같은 공산주의자라도 자기 입맛에 맞는 인물들만 배치했고 이 영향으로 조봉암이 전향하죠. 그런 상황에서 여운형은 소외돼 갔고, 박헌영은 건준을 인민위원회로 바꾸고 9월 6일 독단으로 조선인민공화국을 선언합니다. 아직 임정 인물은 물론 우파들의 참가도 없는 좌파들만의 선언이었죠.

하지만 이건 그나마 나았습니다. 겉치레든 뭐든 박헌영은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추대하고 한민당이나 미국과도 어느 정도 타협하려고 했거든요. 하지만 해외에서 돌아온 이들과 파란 눈과 큰 코를 가진 백인들은 달랐죠.

박헌영이 서둘렀던 이유는 미군이 한국에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9월 7일 인천에 들어온 미군은 건준은 물론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적통을 부정했습니다. 그들에 있어 현대 한국의 전신은 임시 정부가 아니라 조선총독부였죠. 그 동안 건준도 총독부에게 치안권 등을 제대로 이양 받지 못 한 상태였습니다. 미국과 일본 간에 서로 얘기가 돼 있었으니까요.


9월 9일, 미군정이 시작됩니다. 조선총독부를 계승하고 당시 일하던 관료들을 그대로 등용한 미군, 인기가 있을 리가요. 거기다 이들의 코드에 딱 맞는 이들은 역시 인기 없는 한민당 -_-; 그래도 그들이 들어올 때에는 표현의 자유가 인정됩니다. 사실 표현의 자유라는 면에 있어서는 해방 후는 물론 이승만 정권 때가 그 후의 군사 독재 정권 때보다 훨씬 좋았죠.

덕분에 38도 인마에서는 수백 개의 정당이 탄생합니다. 대표적인 것은 역시 송진우, 김성수 등의 한민당과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이었죠. 그리고... 10월 16일 해외파 중 가장 유명했던 사람이 입국합니다.


당시 이승만은 안티는 많아도 좌우 모두에게 인정받는 독립운동가였습니다. 그가 오자 좌우 가리지 않고 각 당에서 모두 모여 (200명)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만들고 그를 회장으로 앉힙니다. 이로써 그는 정부 수립 등에 있어 가장 큰 발언권을 얻게 되었죠.

미국 역시 그의 지도력에 기대했고, 미군정의 존 하지 역시 그를 잘 대우합니다. 그와 만난 자리에서 이승만은 임시정부 요인들을 정부 자격으로 귀국하게 해 줄 것을 요구했지만 거부당하죠. 결국 임정 인사들은 개인 자격으로 입국합니다.


11월 3일, 한국의 White Tiger. (미군정이 붙여준 별명)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그렇게 한국에 돌아오게 됩니다.


한편 9월 19일, 김일성은 소련군 육군 대위 자격으로 원산항에 도착합니다. 사람들은 보천보 전투의 영웅이 이렇게 젊다는 것에 놀랐었죠.

이렇게 역사의 주역들이 모두 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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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직후 가장 중요한 과제는 모스크바 3상 회의의 결과였습니다. 여기서 어마어마한 일이 터져 버리죠.


한국 현대사에 길이 남을 오보가 터진 것이었습니다. 한국의 독립에 있어 소련은 신탁통치를 주장했고, 미국은 즉시 독립을 주장했다는 것이었죠.

이승만과 김구의 등장으로 그나마 조용해졌던 국내는 무시무시한 혼돈에 휩싸이게 됩니다.

처음에는 모두 반탁을 외쳤습니다. 실제 내용에 상관 없이 다시 강대국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것이었죠. 하지만... 소련에 갔다 온 박헌영은 찬탁으로 돌아서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서 좌파 민족주의자들에서도 반발하는 이들이 나오게 되었고, 남한 전체적으로 좌파의 세력도 급감하게 됩니다.

헌데... 이게 오보였단 말이죠. -_-; 먼저 제안한 것은 미국이었고, 그것도 10년이었습니다. 루즈벨트는 50년까지도 얘기했었죠. 반면 소련은 너무 길다며 반대했고, 5년으로 줄어듭니다. 중요한 건 이 회의에서 결정된 것이 한국 내의 임시정부를 만들고 미, 영, 소, 중 4개국이 이를 뒤에서 돕는 방식이었던 겁니다.

박헌영은 평양에 가서 소련의 지침을 들은 후 신탁통치 지지를 천명합니다. 헌데 이걸 단지 소련의 지령에 의해서라고 보기는 힘들다고 봐요.. 김규식(임정), 송진우(한민당) 등 우파에서도 이를 찬성하거나 생각해 보자고 했거든요.

하지만 이미 때는 늦어 찬탁을 주장한다는 것 자체가 매국노인 것처럼 돼 버렸습니다. 이승만이나 김구라고 이런 구체적인 사실을 모를 리는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승만은 몰라도 (아마 이 틈을 타서 자기 세력 제대로 잡으려고 -_-a?) 김구는 반탁에 대한 확실한 이유가 있긴 했습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임정 정통론을 내세웁니다. 하지만 또 다른 임시 정부를 한국에 세운다면 자기의 정치적 입지는 없어지다시피 하거든요. 지금이야 해방 후 최고의 지도자로 꼽히지만 당시에는 해외파로는 이승만에, 국내파로는 여운형에 밀리던 형국이었습니다. 동아일보가 한민당 계열이기에 한민당 쪽의 음모로 보기는 하는데, 정작 그 동아일보 사장인 송진우가 오보를 인정하고 아래의 행동을 보인 것을 보면 정말 그럴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혹 미국의 이미지를 좋게 하기 위한 작전이었다면, 너무나도 위험한 자충수였을 텐데요.

12월 29일 밤, 좌우를 가리지 않고 김구가 있는 경교장에 모입니다. 여기서 김구는 자주 독립 정부를 만들어야 된다면서 강경한 주장을 하게 되죠. 미군정의 명령을 모두 거부하고 임정을 한국 정부로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민중이 반탁을 지지한다 한들 힘으로 엎을 수도 없는 것이었고, 너무나도 위험한 주장이었습니다. 이에 송진우는 "미국을 적으로 두면 공산주의자에게만 이득이다"면서 신중하게 대처하자고 주장합니다. 김구의 분위기에 압도된 다른 이들도 송진우를 비판했지만 송진우는 무력으로 미군정을 접수하는 건 불가능하다면서 설득합니다. 결국 실패했지만요.

그가 집에 돌아온 새벽, 6시 15분에 그는 한현우에 의해 암살당합니다. 미군정 등에서는 그 배후로 김구를 지목했고, 이후 한민당과 김구 사이는 급격히 싸늘해집니다.(정작 한민당은 좌파를 배후로 지목했다는데요 -_-a) 박헌영이 서울로 돌아온 것은 1월 2일, 이미 우파 내에서는 찬탁 세력을 정리한 것입니다. 역시 찬탁 쪽으로 선회한 김규식 역시 암살의 위협에 시달리게 되죠.


한편 북한에서도 반탁 운동이 벌어집니다. 그 중심은 조선의 간디 조만식, 북한에서 다른 우파 인사들이 월남하는 가운데서도 그는 끝까지 남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공산당 일당 독재 움직임에 반대하며 사사건건 부딪쳤고, 신탁통치에 이르러 조선 민주당을 창당하여 개신교 인사들을 중심으로 거센 반탁 운동을 벌입니다. 김일성이나 소련군 측에서도 계속해서 그를 달래고 총으로 협박까지 했지만 그는 굴하지 않았고, 결국 1월 5일 연금됩니다.

남한에서는 좌우를 가리지 않고 수많은 인사들이 싸우는 동안, 북한에서는 반대 세력을 간단히 정리하며 자기들만의 나라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http://nestofpnix.egloos.com/4223816

해방 후 소련은 막대한 양의 물자를 뜯어 갑니다. 소련군 개인의 약탈도 계속됐는데, 다 증언에 근거한 것이니 어디까지 믿어야 될 지 애매하긴 합니다. 참고로 그 중에 "소련 여군이 남자를 강간했다"는 증언도 있습니다. (...) 당시 미군정의 보고서입니다.

"소련이 북한에 주둔할 의사가 있는지 의심스럽다. 그들은 조선인민의 존경을 받을 일은 거의 하지 않고 그들과 멀어질 일만 일삼고 있다. 그들은 점령태도에서 무례하다. (중략) 약탈, 강간, 그리고 식량공급과 수송을 위해 주민들의 재산을 빼앗고 징발하는 것은 붉은 군대에 대한 염증만을 가져올 것으로 판단된다."

11월 23일 있었던 신의주 반공학생사건도 23명의 사망자를 내면서 무참히 진압했고, 조만식의 조선민주당 역시 그가 연금되면서 끝 났으며, 다른 좌파 계열 당도 거부됐습니다. 공산주의는 일당독재니까요. 팔로군에 배속됐던 조선의용군은 단체 입국이 거부되고 무장 해제를 당한 채 개인 자격으로 입국해야 됐고, 연안파가 소수 입국해서 조선신민당을 세우지만 구색 맞추기였을 뿐이었죠. 보천보 전투 이외에는 짬도, 경력도, 인망도 딸리던 김일성이 중심이 될 수 있었던 것에는 소련의 지원이 있었습니다. 이승만을 밀어주면서도 이리저리 눈치를 보고 휘둘렸던 미군정에 비해 소련군정은 김일성을 주석으로 하는 북한만의 나라를 세우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죠.

46년 2월 8일에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가 세워집니다. 16일부터 활동을 시작해 북한에서 토지개혁 등 자기만의 정책을 펴기 시작하구요. 처음에는 박헌영이 세운 조선 공산당을 인정해 "북조선분국"이라는, 한 층 낮은 집단으로 시작했지만 45년 12월 17일에 "분국"을 없애고 김일성이 위원장이 됩니다. 46년 6월 22일에는 이름을 북조선공산당으로 바꿔 대등한 관계가 되었고, 8월 30일에 조선신민당과 통합해 북조선노동당으로 확실한 일당 독재를 시작합니다. 박헌영이 이에 맞춰 남한의 공산주의계열 당들을 남조선노동당이라고 바꾼 것은 힘의 우열이 바뀌었다는 것을 말 해 주죠.

이런 북한의 움직임은 이승만과 미군정에게 좋은 기회였습니다.

46년 1월 16일 예비회담부터 미소공동위원회가 활동을 시작했지만, 제대로 합의점을 찾지 못 하고 결렬을 반복합니다. 특히 남한의 반탁 운동을 벌인 정당을 참가시키느냐의 문제가 가장 크게 걸렸고, 소련 측에서는 당연히 이에 반대했습니다. 논의 끝에 "이후에도 반탁 운동을 하지 않겠다고 서약하면" 임시정부에 참가할 수 있다는 대안이 제시됐고, 하지와 김규식 등은 김구와 이승만의 서명을 얻으려 노력했습니다. 계속 거부하던 김구와 이승만도 서명하게 됐지만, 회의는 끝내 결렬되고 맙니다.

미군정과 이승만에게 이게 악재인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이승만이 한국에 돌아올 때부터 그들 역시 남한만의 과도정부를 생각하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한국 내에서 이걸 생각한다 한들 입 밖에 낼 수 있는 정당은 없었습니다. 한국 국민들 역시 통일은 너무나도 당연한 거였고, 당시 미국 정부는 물론 UN에서도 기본 방침은 통일정부였습니다. 자기 멋대로 할 수 있는 소련에 비해 미국은 눈치 봐야 될 데가 너무 많았죠.

북한에서 김일성 체제가 공고화 되는 것은 이들에게 기회를 줬습니다. 미군정도 슬슬 좌익에 대한 탄압을 시작했고, 이승만도 신탁통치에 대한 얘기가 나오기 전에 이미 공산당을 악의 축으로 몰고 있었습니다. 공산당의 찬탁 역시 그에게는 참 중요하게 쓰였구요. 미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되고 무기한 휴회되자 그는 본격적인 움직임을 시작합니다.

"공산주의자는 소련으로 보내야 한다. 가족의 일원이라도 거부하라. 공산주의자는 파괴주의자이므로 전부 체포할 것이다.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면 남조선에 단독정부를 세워 38선을 깨트리고 소련군을 내어 쫓고 북조선을 차지할 것이다" - 전남 목포 5월 30일

"이제 우리는 무기휴회된 공위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될 것이다. 여러분도 결심하여야 될 것이다. 그리고, 민족 통일기관 설치에 대하여 지금까지 노력 하여왔으나 이번에는 우리 민족의 대표적 통일기관을 귀경한 후 즉시 설치하게 되었으니 각 지방에서도 중앙의 지시에 순응하여 조직적으로 활동하여주기 바란다."

6월 3일, 그 유명한 정읍 발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인물 중 하나가 이에 동조합니다.

"소련의 방해로 인하여 북한의 선거를 실시하지 못할지라도 (중략) 방해가 제거 되는대로 북한이 참가할 수 있게 하는 것을 조건으로 하고 의연히 총선거의 방식으로서 정부를 수립하여야 한다. 그것은 남한이 단독정부와 같이 보일 것이나, 국제관계상으로 보아 통일정부일 것이요 단독정부는 아닐 것이다" (조선일보 1947. 12. 2)

김구는 신익희 등과 함께 46년 1월부터 대북타격작전을 시작합니다. 임정의 반탁포고문을 가진 인사들이 월북했으며, "대북반탁공작대"가 조만식을 만나기도 했죠. 한편 북한의 움직임을 막기 위한 건국광(狂)인을 보냅니다. 45년 11월 결성된 백의사 결사대였죠. 월남한 청년들을 포섭한 것이었습니다. 후의 서북청년대랑 비슷하네요.

그들에게 내려진 지령은 북한 임시 인민위원회 지도자 암살, 북한의 3.1절 기념 행사에서 김일성을 노리지만 소련군 노비첸코 중위로 인해 실패합니다. 그 후에도 3월 동안 최용건, 김책, 강양욱 등 지도부를 공격하지만 실패합니다. 오히려 이는 북한이 남한을 비난하는 좋은 소재로 쓰이게 됩니다. 그러는 동안에 남한에서 김구의 영향력은 크게 줄고 있었구요.

결국 김구는 태도를 바꿔 정당을 창설하게 됩니다. 46년 4월, 안재홍의 국민당 등 우익 정당을 통합한 한국독립당이죠. 한민당과, 후의 이승만과 다를 뿐 이들 역시 기본적으로 우익 정당이었습니다. 김구가 살던 경교장은 친일파인 최창학에게 받은 것이었고, 백범 일지를 다듬은 사람은 바로 이광수입니다. 해방 후 관동군 출신 한국인들을 광복군으로 대거 흡수한 것이 임정이었구요. 이렇게 광복군 자격으로 한국에 돌아온 장교 한 명이 있으니 박정희입니다. 박정희 광복군설의 시작이 이거죠. 미군정에 가려졌지만, 임정에서 역시 총독부 소속 한국 경찰들을 임정에 예속시켜서 지휘하려 했구요.
그가 친일파 척결을 외쳤을 때는 이승만과 완전히 결별한 후였습니다.

1947년 후반, 이승만의 남한 단독 선거에 동조했던 김구는 얼마 안 가 이승만과 완전히 결별하게 됩니다.

"미군 주둔 연장을 자기네의 생명 연장으로 인식하는 무지 몰각한 도배들은 국가 민족의 이익을 염두에 두지 아니하고 박테리아가 태양을 싫어함이나 다름없이 통일정부 수립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1948. 2. 11)

김구의 입장이 이렇게 바뀐 것 등에 대해서 다루자니 참 기네요. 정부 수립까지 얘기하려 했는데; 여기서 끊겠습니다. 그간 있었던 미군정의 좌익 탄압부터 박헌영이 어떻게 됐는지는 나중으로 미뤄야겠네요.

다시 여운형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신탁통치 사건 이후 좌우의 갈등이 계속되는 가운데 여운형은 이런 비탄을 터뜨립니다.

"참담한 심정이다. 나를 비롯해 지도층을 자칭하는 이들이 총퇴각을 할 때라 생각한다. 우리같은 지도층이 없었던들 통일은 벌써 성공하였을 것이다. 조선 지도자들은 제1차 시험에서 전부 낙제다." - 46년 1월 14일

정읍발언 이후 그는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하며 김규식, 안재홍 등과 좌우합작 운동을 전개합니다. 이 때가 7월이었죠.

"결코 반대다. 그 결과는 민족분열로 오고, 10년이 지나도 고칠 수 없는 분열이 된다. 현재, 통일의 암은 신탁이 아니라 결국 각 진영의 이해관계다." - 46년 6월 11일

이후 그는 좌우를 막론하고 끝 없는 비난과 암살 위험에 시달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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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암...... 막장이죠?

보면 볼수록... 모르겠습니다. 소련과 미국은 각기 자신의 입맛에 맞는 인물을 골랐고, 그런 나라를 세우려 했습니다. 이후의 상황은 각기 이승만과 김일성이 정권을 잡고 독재를 시작하면서 정적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흐르죠.

다만, 이 점은 말 하고 싶군요.

미군정은 소련군정에 비해 이리저리 휘둘렸습니다. 좌익에 대한 탄압은 46년 이후에 시작됐고, 좌익합작운동도 은근히 지원해 줘야 했으며, 이승만은 말도 참 안 듣고 계속 돌출행동 했고, 임정 정통을 밀어붙이는 김구 역시 상대하기 어려웠습니다. 나중에야 이들 모두를 탄압하고 죽이고 내쫓고 해서 이승만이 일인자가 됩니다만, 혼란은 계속 이어졌죠.

반면 북한은 참 깔끔합니다. 김일성이 들어온 때부터 쭉 일인자로 키워졌고, 반공 운동은 초기에 밟았으며 반탁 운동 역시 조만식 등을 연금해서 깔끔하게 끝냈습니다.

혼란이 있을 수밖에 없는 건국 초기, 깔끔한 게 과연 깨끗한 걸까요?

흔히 북한에서 친일파 청산을 잘 했다고 합니다. 네. 인민재판으로 지주들을 없애면서 친일 청산이 된 면은 있습니다. 하지만 양국의 초대 내각을 보면 다를 바 없어요. 제헌국회 의원 209명, 그 중에서 부일협력자로 밝혀진 이는 10명(임종국 실록친일파)입니다. 그나마도 소극적 적극적을 가리지 않은 평이고, 그 중 한 명은 반민특위 부위원장이었습니다.
북한 역시 일제 패망 후 관동군, 만주군의 한인들을 받아 세를 크게 늘렸고, 한국전쟁에 참가한 군인들은 양쪽 다 그런 이들이 많았습니다. 특히 고급 장교로 가면 더 많죠. 관료들이라고 다를까요?

이랬는데 한 쪽은 친일 정부, 한 쪽은 자주적인 정부로 평가됩니다. 두 가지 이유일 겁니다. 높은 확률로 친일파인 지주가 없어졌던 것이죠. 다른 하나는, 한국의 독재 정권이 못 한 걸 북한은 한 것입니다.

남한에서도 반대파를 친일파로 몰아 욕 했고, 여기에 깨끗한 사람은 여운형 등 중도파 정도입니다. 그 한민당도 여운형을 친일파로 몰았으니까요. 북한도 마찬가집니다. 조만식을 비롯, 자기의 반대파는 다 친일파와 반동분자로 몰고, 자기 편은 친일파가 없는 것처럼 얘기하는 거죠. 남한에서는 실패했지만, 북한에서는 성공한 겁니다.

남한에서는 아무리 독재 정권이라도 상대를 아예 없애버리지 못 했습니다. 정치 깡패를 동원한다든지, 납치하든지 뭘 하든지 꼼수를 써야 했고, 야당은 어떤 식으로라도 반대해 왔으며, 나라가 막장인가 하는 시위는 독재 하에서도 계속 일어났습니다. 반면 북한에서는 야당이 있어도 관제 야당 수준이었고, 정적들을 숙청한 이후에는 정말 조용했습니다. 남한에서 큰 정치 사건이 일어나면 한국에 있는 외국인들이 그 실상을 서양에 알렸고, 미국은 독재를 도우면서도 그걸 완전히 옹호하지 못 했습니다. 반면 북한과 같은 진영에서 북한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다루는 건 정말 찾기 힘들죠.

해방 후에 남북한 사람들이 그리 다르진 않을 겁니다. 북한 사람들이 멍청해서 한국처럼 민주화가 안 된 게 아니겠죠. 해방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남한의 정치 상황은 분명 막장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북한에 비해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얘기를 할 수 있었다는 걸 뜻 합니다. 그 이후 독재에 이르기까지, 북한의 독재와 같으면서도 뭔가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그게 그거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지만, 그 아주 약간의 차이가 한 쪽은 민주화 되고 다른 한 쪽은 여전히 전제군주제로 남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똑같은 방식의 지도자, 똑같은 방식으로 간섭한 강대국, 똑같은 국민, 하지만 그 결과가 달랐다는 건 환경의 차이입니다. 그것이 남한에서도 같이 독재했음에도 북한처럼 못 했고, 같이 간섭했음에도 소련처럼 못 한 이유겠죠.

참고로 6.25 때 납북되거나 월북한 사람을 9만 3천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이 중 납치된 사람이 8만 3천명에 이르죠. 이 납치된 사람들 모두를 자진 월북한 사람으로 치더라도 흥남 철수 작전 때 함께한 북한 피난민 9만 8천에도 미치지 못 합니다. 북한이 정말 남한보다 좋았다면 평양에서, 함흥에서 있었던, 진격도 아닌 어디까지 밀릴 지 모르는 퇴각에 함께 했던 피난민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해방 후의 상황이 막장이었다고, 이승만이 한 짓이 막장이었다고 그 때의 한국을 북한과 비교해서 까면 안 된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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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로, 진짜로 마지막으로 조선인민당 창당 때 여운형의 연설을 옮기겠습니다. 이거... 두서 없이 시작했는데 미친 듯이 길게 썼네요;;

"해방된 오늘,지주와 자본가만으로 나라를 세우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디 손을 들어보시오. 지식인, 사무원, 소시민만으로 나라를 세우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역시 손을 들어 보시오. 농민, 노동자들 만으로 나라를 세우겠다고 우기는 사람 있으면 어디 한번 손을 들어보시오. 손을 드는 사람이 없군요. 그렇습니다. 일제 통치기간 우리 민족에게 씻을 수 없는 반역적 죄악을 저지른 극소수 친일파들을 제외하고 우리는 다같이 손을 잡고 건국사업에 매진해야 됩니다. (중략)
독립을 완성하려면 땅의 남북과 사상의 좌우를 가릴 필요가 어디 있는가? 과거 지하운동시대 어두컴컴한 감방을 걷다 만나 껴안고 감격하던 혁명투사 간에 민족주의자도 공산주의자도 없었던 것 아닌가?""

이런 그의 바람은 남에서도, 북에서도 결국 이뤄지지 못 했습니다.
* 信主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2-03-26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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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chtmacht
12/03/18 21:22
수정 아이콘
여운형의 연설... 전율이 이네요
12/03/18 21:35
수정 아이콘
북한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지만 북한 피난민들이 남한으로 내려온 이유가 여러가지가 있겠습니다만
가장 큰 이유는 미군의 폭격이죠 북한의 악정으로 남한의 피난 온것이라고 단정할수는 없을것 같네요

여운형은 학문적으로는 평가를 받지만
아직 대한민국에서는 독립유공자 반열에 오를수없는 빨갱이이고요

저위에 언급된 사람중 제일 불쌍한 사람은 박헌영일겁니다.
남한에서 빨갱이에 6.25전범자 북한에서는 미제앞잡이로 불리고 있으니까요
그렇다고 제가 박헌영을 옹호 하는것은 아니지만요

이승만도 당시 그다지 힘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특히 미군정이 이승만을 꺼려 했죠
이승만도 워낙 독단적이고 특히 정읍발언으로 민심이 위반 되기 시작했죠
미군정이 지도자로 세우려던 인물은 김규식이죠
이승만은 국내에서 힘을 잃자 미국으로 건너가죠
당시 대한민국 인사중 세계를 보는눈이 가장 뛰어난 인물이 이승만이죠
이승만은 해방 전부터 냉전이 시작될줄 알고 있었으니까요 즉 미국VS소련 구도로 갈것을 알고 있었죠
뭐 지금이야 당연한 것이지만 당시 한국 사회에서는 예상 하기 쉽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박헌영을 비롯한 좌익들이 해방초창기 미국을 환영 했었고요
미국으로 건너간 이승만은 미정계의 반소련움직임을 이용하여 미정계를 등에 없고 화려하게 등장합니다.
Je ne sais quoi
12/03/18 21:47
수정 아이콘
대학때 한국 근대사 수업을 들으면서 독립 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으로 더 자세히 듣게 되었는데.. 이건 참 충격이었죠. 어렸을 때 읽었던 책에서 나오는 나라만을 위하는 독립 투사들은 다 어디가고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는 파벌 싸움의 현실을 듣게 됐었죠. 그 때 기억이 다시 나는군요.
12/03/18 21:51
수정 아이콘
정말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다만, 저 역시 당시 사람들이 남하한 이유가 남한이 북한보다 좋아서 남하할 때 더 많이 내려왔다.
라는 것에 설득력을 크게 느끼지 못하네요.
코큰아이
12/03/18 22:09
수정 아이콘
흥미와 재미있는 해방전후내용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13회차 글쓰기 이벤트 참여자몽키.D.루피
12/03/18 22:11
수정 아이콘
김구는 왜 포장됐던 거죠??
앉은뱅이 늑대
12/03/19 00:04
수정 아이콘
북한 역시 친일청산이 완벽하게 되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남한과의 비교는 불가할 정도라고 봐야겠죠.
북에서는 친일파는 세력으로서 존재할 수 없는 상황이었죠.
하지만 남에서는 여전히 가장 큰 힘을 가진 세력이었으니.
HELIOS_K
12/03/19 00:17
수정 아이콘
동아일보 저 희대의 오보가. 에휴

애써 중앙에 서서 모두를 안고자 했던 지도자들은 죽고, 극단에 섰던 이들만 살아서 현실에 이르렀네요.
아키아빠윌셔
12/03/19 01:02
수정 아이콘
세력 다툼이 커지다보니 이념이나 사상에 대한 감화 같은건 상관없이 아무나 데려와서 자기 세력화 시키기도 하죠. 4.3 때 무장대 쪽에 있었던 사람의 증언으론 이북이 진짜 유토피아라고 생각했다고 그러기도 하고요. 뭐 이 사람들도 김달삼이 튀면서-_- 답이 없어지긴 했지만. 또 서청과 군경에 의해서 학살당한 다수의 사람들은 뭣도 모르고 남로당이나 다른 단체에 그냥 이름 올렸던 사람이기도 하고...

우리나라 현대사의 시작은 혼돈의 카오스, 그 이상이었죠-_-
12/03/19 01:20
수정 아이콘
참 좋은 글이네요. 읽혀주고 싶은 사람이 많습니다.
갓의날개
12/03/19 01:44
수정 아이콘
좋은글 매번 잘 읽고있습니다

김구의 실체를 보고 살짝은 충격이네요

역사는 정말 승자의 기록이라는말이 실감이가네요

언젠가는 교과서에서도 재평가되어 교육되겠죠?
선데이그후
12/03/19 08:51
수정 아이콘
관련참고서적 부탁드립니다. ^^;
글 잘봤습니다. 역시나 박진감 넘치는 비비님의 글.. 너무 좋아요~~
방구차야
12/03/19 10:03
수정 아이콘
좋은글이네요~ 김구,이승만,김일성이라는 메인인물 외에도 조만식,여운형등의 주변인물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아보면 현대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것 같습니다. 다음에 혹시라도 시간이 되시면 부탁드립니다~
사악군
12/03/19 13:14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양정인
12/03/19 15:01
수정 아이콘
허... 멘붕이 오는데요.
그동안 알고있던 것들이... ㅠㅠ
신탁통치부터 시작해서 많은 인물들의 이야기에서 내가 알고있던 것들이 왜곡되고 과포장되었다는 것에 붕괴를 일으킬 정도의 충격이 오네요. 특히나 백범김구를 비롯해서 당시의 지도층들의 이야기는... 어찌 받아들여야하는 건지.
이래서 인물의 평가가 힘든 것인가 봅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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