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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
2011/12/08 18:26:58 |
Name |
헥스밤 |
Subject |
두 개의 장례식 없는 죽음을 맞이하며. |
한여름이었나. 봄이었을까 혹은 가을이었을까. 바를 오픈하고 정신없이 지내고 있던 차에 바를 떠돌던 시절 알게 된 어떤 형이 바에 들어왔다. 울먹이면서, 비틀대면서. 형이 들어오는 순간 나는 그녀의 죽음을 직감했다. 나는 형과 별로 친하지 않았고 형과 나를 잇는 건 우리가 만나서 알게 된 바의 주인 누나밖에 없었으니까. 그녀가 일으킬 만한 사고라면 죽음밖엔 없었으니까.
시절에 감사를.
고맙게도 정신없이 바쁘던 시절이었다. 손님은 언제나처럼 많지 않았지만, 아직 익숙하지 못한 덕에 칵테일 한 잔 만드는 데 손님과 한번 떠드는 데 잔 한번 씻는 데 오래 걸리던 시절이었다. 미숙한 나의 손재주에 감사를. 마지막으로 누나를 만난 게 언제더라. 누나가 가게를 접고 내려가기 며칠 전이었던가. 마지막으로 누나랑 통화한 게 언제더라. 대낮에 술에 절은 목소리로 전화했을 때였나. 마지막으로 누나랑 연락한 게 언제더라. 마지막으로. 마지막으로. 그렇게 누나는 세상을 등졌다.
누나랑 정말 친한 사람들한테만 이야기하는 거야. 라고 형은 울먹이며 속삭였다. 누나랑 정말 친한 사람들이 많았던 지, 주말쯤 되니 이 거리를 지키는 모든 술집 주인장들과 손님들이 그 소식을 알게 되었다는 건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그리하야 이렇게 내가 글을 쓰고 있는 것 역시 다른 이야기일 것이고. 요절. 그리고 자살. 장례식은 하지 않았다고 들었다.
죽은 사람은 좋은 사람이 된다. 적어도 그와 관계 없는 사람들에겐. 내게 최진실이나 커트 코베인 같은 사람 말이다. 그렇게 누나는 좋은 사람이 되었다. 고인의 술버릇은 제법 고약한 편이었고, 고인의 성격도 제법 강렬한 편이었지만 이제는 다 상관 없는 일이 되었다. 좋은 사람이었지. 그녀가 떠나고 그녀를 아는 사람들은 대체로 그렇게 말하곤 했다. 나도 그렇게 말하곤 했던 것 같다. 때로 누군가 고인에 험하게 말할라치면, 다른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다. 죽은 사람한테 무슨 말이 필요한가. 일단 한잔 마시자.
죽은 누나는 한두 번 정도 내 꿈에 나왔던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죽은 누나가 한두 번 정도 꿈에 나오는 동안, 다른 이가 떠나갔다. 어제 저녁 나는 이 주 만에 지도교수와 대면하고 있었고, 지도교수는 내게 왜 이렇게 논문이 진척되지 않냐고 다그쳤다. '사람의 일이라는 게 그렇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닙니다. 다 말못할 속사정이 있는 겁니다.'라고 대답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자리가 끝나고 나는 연구실 동기와 오랜만에 술잔을 기울였다. 가게 하고 난 이후로 처음으로 이래 편하게 마시는구나. 야. 대학원 면접날 새벽에 설문지 돌리다 같이 택시타고 학교 올라온 게 엊그제같은데 이제 벌써 졸업이네. 뭐 그런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 동안 다른 친구에게 문자가 왔다. A가 메모를 남기고 실종되었다, 는 요지의.
A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는 바로 답장했다. 알 게 뭐야. 라는 요지로. 친구는 바로 답장했다. 까칠하게 굴지 말라고. 상황이 비교적 심각한 것 같아 전화를 했다. 문자 이상의 내용은 없었다. 알겠다고 하고 일 생기면 전화하라고 하고 나는 연구실 동기와 계속 술을 마셨다. 히히덕거리며. 연구실 동기와 나는, 유서를 쓰고 여행을 떠났다가 멀쩡히 잘 살아서 돌아온 어떤 친구를 공유하고 있었다. 사람이란 거 그래 쉽게 죽고 그라는 거 아니야. A도 내일 아침에 잘 살아 오겠지 뭐. 그나저나 유서 쓰고 그러던 그놈은 요즘 뭐하고 있다냐? 뭐. 음. 잘 살고 있구만. 아 그때 생각하니 아직도 빡치네 진짜.
새벽까지 이어지던 술자리에 전화가 왔다.
나는 연구실 동기와 자리를 정리하고 택시를 탔다. 정신이 멍했다. 연락을 받은 후배들이 기다리던 까페에 들어가서 후배들을 데리고 경찰서에 갔다가, 옷을 갈아입고 병원으로 향했다. 정신이 멍했다. 옷을 갈아입으러 내가 살고 있는, 옥탑방을 개조한 고시원에 들어갔다가, 옆방 친구놈을 깨웠다. 야. 일어나. 너 A기억하지? 친구는 스타리그를 보며 잠을 청하던 중이었다. 일어나. 옷입어. A. 죽었어.
병원에는 A의 부모님과 몇 몇 친척들이 있었다. 그들은 눈물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을 흘리고 있었다.
죽은 사람은 나쁜 사람이다. 적어도 그와 관계 있는 사람들에겐. A의 가족들에게 A는 정말 나쁜 사람이었다. 후배들과 친구들과 자리를 지키다가, 유족들에게 운구까지 시간이 길어질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듣고 우리는 병원을 나섰다. 긴 새벽이 끝나고 이제는 아침이었다. 거리는 새벽만큼 쌀쌀했고 사람들이 바쁘게 지나갔다. 후배들을 보내고, 고시원에 같이 사는 친구와 나는 하늘을 바라보며 나즈막히 욕을 했다.
씨발X. 개같은X. 뭐야 이게. 아 뭐. 지금 뭐가 어떻게 되는 거야. 아 씨발 X같은 X. 친구나 나나 그닥 육두문자를 선호하는 편이 아니었는데, 마치 방언이 터진 듯 우리는 겨울의 하얀 아침 하늘을 보며 욕을 했다. 죽은 사람은 정말로 나쁜 사람이다. 적어도 그와 관계 있는 사람들에겐. 우리에게 A는 정말 나쁜 사람이었다. 집에 가는 길에 가게에 들려 보드카 한 병을 가지고 나왔다. 집에 가는 길에 편의점에서 먹을 걸 샀다. 집에 들어와 우리는 죽은 A를 마구 욕하며 술을 마셨다. 태양이 하늘 높이 걸릴 때 까지 우리는 마구 A를 욕하며 뒷담화를 깠다. 하고 싶은 욕과 하고 싶은 말을 다 쏟아내지 않고서야 우리는 잘 수 없을 것 같았고, 그러지 않고서는 A를 보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A와 적당히 친했었고, 고시원 친구는 한때 A와 애매한 관계에 있었었다. 죽은 사람은 천하에 둘도 없는 개호로새끼다. 적어도 그의 친구들에겐. 완전히 밤을 지샌 친구와 새벽까지 술을 마시다 온 나는 그렇게 한 병을 거의 비웠다.
장례식은 없다고 한다. 요절. 자살. 흉상이 갖출 것은 충분히 갖추었다. 몇 몇 친구들에게 연락이 왔고 연락을 했다. A를 짝사랑하던 후배 한놈은 넋이 나간 것 처럼 웃는 지 우는 지 모를 소리로 핸드폰으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어제 휴가를 나온, 소설을 쓰는 후배 한 놈은 문장을 조합하지 못하고 단어들을 눈물 속에 웅얼거리고 있었다.
사람이 나고 지는 것은 요일이 바뀌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자연스럽지 않게 지는 사람을 보내는 것은 정말로 슬픈 일이다. 운이 좋은 탓인지 서른 해 즈음을 살아오며 그렇게 사람을 떠나보낸 적이 없었는데, 올해에 그렇게 두 명이 떠나가버렸다. 내가 명복을 빈다고 그들의 저승길이 편해질 건 아니겠지만, 그들의 명복을 빈다. 신실하지 않은 나의 종교와 따뜻하지 않은 나의 마음으로 명복을 비느니, 글로써 그들의 명복을 빈다.
* Noam Chomsky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12-12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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