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
2011/11/21 20:13:47 |
Name |
nickyo |
Subject |
커피 맛 좋은 날.+감사 |
새침하게 흐린 폼이 눈이 올 듯하더니 눈은 아니 오고 얼다가 만 비가 추적추적 내리었다.
이날이야말로 방배동 카페골목 안에서 바리스타 노릇을 하는 박 아무개에는 오래간만에도 닥친 비오는 날이었다. 카페란 으레 비가오면 매출이 거지같다. 물론, 요새는 매일 거지같다. 그럼에도 커피맛은 여느때 보다 더 좋은 날이었다.
홍차를 먹고 싶다는 앞집 마나님에게 홍차가 다 떨어져 커피를 내어 드린것을 비롯으로, 행여나 이 궂은 날씨에 카페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을까 하고 바의 옆에 트인 문 앞에 나와 어정어정 지나가는 사람 하나하나에게 거의 비는 듯한 눈빛으로 아이콘택트를 시도하니, 마침내 맞선이라도 보고 온 듯한 참한 처자 하나가 커피를 한잔 달라고 하였다.
첫째 번에 에스프레소가 뭐냐고 묻더니, 둘째 번에 아메리카노가 뭐냐고 묻는것이 동네찻집이라지만 그리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야말로 재수가 옴붙어서 한동안 블랜딩한 에스프레소 원두가 거지같이 맛이 없었던 것이 속상했던 박 아무개는 커피를 마셔본 적이 몇 번 없어뵈는 듯한 손님이 때마침 맛있을 때에 들어와 준 것이 눈물을 흘릴만큼 기뻤다. 더구나 이날 이때에 맛있게 내려진 커피에 라떼아트도 잘 되는것이, 기분이 좋아 집에 가는 길에 컬컬한 목구녕을 소주 한잔 적셔줄까 하는 마음도 슬그머니 드는 것이다.
매출이 똥같아진지 벌써 달포가 넘었다. 장사는 커녕 직원들 일급일급을 챙겨주기도 바삐하다 시피 한 형편이니 물론 신메뉴 개발따위를 할 겨를이 없다. 구태여 만드려면 못 할 바도 아니로되, 그는 괜한 짓을 하다가 일거리만 늘면 일하는 사람들만 힘들다는 자기의 신조에 어디까지 충실하였다. 따라서 하루가 멀다하고 가지각색의 신기한 음식을 내놓는 대형 프랜차이즈들에 밀리는 지금이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었다. 한때는 신 메뉴를 만들겠다고 이것저것 사다 연구를 하였더니 같이 일하는 직원 여자가 두어번 먹어보고는 두 뺨에 주먹덩이 같은 혹이 붉어지도록 누가 빼앗을 듯이 처박질 하더니만 맛이없다며 이걸로는 장사가 안될거라고 하는것이다. 속으로 "에이, 오라질 년. 좋은 마음으로 가게좀 살려보겠다고 하는 것이건만!"하고 중얼거렸다. 이 여자는 그러면서도 먹는데는 물리지 않았다.
커피이름도 채 모르는 처자가 로제타를 이쁘게 그려낸 따뜻한 카페라떼가 맛있다며 칭찬해주었다. 빈 잔을 손에 든 박 아무개의 마음은 푼푼하였다. 그러나 그의 행운은 그걸로 그치지 않았다. 세제묻은 손으로 커피잔을 닦다보니 단체손님이 마구마구 들어오는 것이다.
"여기요!"
하고 테이블에서 손을 들고는 메이플시럽을 잔뜩 끼얹은 와플을 두어개, 아이스크림을 곁들인 놈으로도 두어개, 라떼가 넉잔, 카푸치노가 두잔 하니 손이 놀 새가 없이 바쁘고 목덜미에는 땀이 비오듯 흘렀다. 박 아무개가 쉴새없이 커피를 내리고, 우유를 뎁히고, 빵을 구워내 이쁘게 과일을 얹어 손님에게 나갈 무렵 후즐근한 차림의 수염이 덥수룩한 아버지와, 초롱초롱한 눈망울의 딸이 바 앞에 서 있었다.
"와플에 커피 두잔 세트가 얼마요?"
"와플에 커피 두잔 말씀이십니까? 커피는 어떤걸로.."
하고 박 아무개는 잠깐 주저하였다. 이 동네 사람들같지 않은 다 헤지고 얼룩진 작업복과, 한눈에 헌 옷을 입은 소녀. 우리 커피값은 자랑은 아니지만 썩 싸지는 않았다. 그래도 오늘처럼 매출 좋은날이 자주 오는게 아니다 싶어 이 행운을 놓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커피는..아무거나.. 애가 먹을건 커피 말고.."
"그렇게 하시면 만 육천원 되시겠습니다."
그러자 행색이 남루한 아버지는 만 육천원이면 너무 과한데 싶은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하는것이다. 그리고는 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슬쩍 뒤를 돌아서는 꼬깃꼬깃 접힌 천원짜리를 시어보더니, 자신의 바짓가랑이를 꼭 잡은 소녀의 얼굴을 한번 보고는 울상 반, 굳센 의지 반을 가지고 내게 조심스레 이야기했다.
"커피 하나를 빼고 애 마실 코코아 하나만 해서..하면 얼마요?"
"그러시면 만 삼천원 되겠습니다."
"삼천원밖에 안한단 말요? 너무 비싼데..."
이런 말을 하며 아버지는 약간 주춤하였다.
"원래 세트메뉴가 할인이 되시는지라.."
하고 말을 하니 슬쩍 동정심이 들었다. 저녁장사가 이정도면 많이 흥했는데 천원 이천원으로 저 아저씨의 자존심을 지켜드리는게 낫지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다. 살짝 아버지에게 "아이가 먹을 분만 해서 만원에 드릴까요?"라고 말하니 방글방글 웃는 아저씨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기쁨이 흘러넘쳤다.
재빨리 핫초코를 우유와 섞어내고, 이쁜 꽃을 그려넣은뒤에 갓 구운 와플빵에 과일과 시럽, 생크림을 얹어 내어주었다. 아이가 먹을 분만 해 준다고 하였지만 그깟 반죽 좀 아끼는게 뭔가 싶어 2인분을 만들어 주었다. 소녀는 제 입에 다 들어가지도 않는 와플 빵을 밀어넣으며 "아빠는 왜 커피 안마셔? 아빠 커피 좋아하잖아"라고 눈치없게 떠드는 것이었다.
커피 한잔을 서비스로 드릴까 하는 와중에 단체손님이 또 들어왔다. 정신없이 커피를 내리고 케익과 와플을 준비했다. 손님들이 오고나가는 사이에 계산과 설겆이를 하면서 소녀와 아버지의 대화는 문득문득 귀를 간지럽혔다. 커피 냄새가 참 좋지? 라는 아빠의 말과, 고개를 끄덕이면서 아빠도 먹으라고 포크에 빵을 쿡 찍어 주는 소녀. 이것만 하고 맛있는 커피를 주어야겠다. 맛있는 커피를 주어야겠다 하였지만 어찌된 도리인지 주문이 끊이질 않는 것이다.
등이 축축이 젖을 때 즈음 일련의 주문이 끝나고 재빨리 커피를 내렸다. 소녀와 아버지는 막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난 이 맛있는 커피를 저 아버지에게 주고자 재빨리 그를 불러세웠다. 그러나 커피를 들고나오는 날 보고서는 고개를 팩 돌리며 소녀의 손을 꼭 붙잡고는 정말 맛있게 먹었다며 재빨리 가게를 뛰쳐 나가는 것이다. 남의 테이블에 놓인 식은 커피를 보며 입맛을 다시는 것을 들켜 부끄러운걸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해가 되지 않았다. 테이블 위에는 천원짜리가 꼬깃꼬깃 여러장 놓여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를 옆에 내려놓고 천원짜리를 세어보니 두장이 모잘랐다. 그 옆에는 백원과 오십원짜리로 1700원정도가 더 있었다. 그제서야, 채 만원도 없어 미안한 마음에 재빨리 도망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꼬깃꼬깃 접힌 천원짜리와 동전을 금고에 넣으면서 중얼거렸다.
"왜 커피를 리필해주는데 먹지를 못하니, 어쩐지 오늘은 커피맛도 좋고, 손님도 많다더니. 커피 한잔 얻어먹고 가지 왜 그렇게 도망가니. 어쩐지 오늘은 운수가 좋다더만.."
피식새어나오는 웃음사이로 씁쓸함이 번졌다. 계산이요~ 하는 말에 재빨리 네~ 하고 달려갔다. 추적추적 비 내리는 날, 그 아버지에게 못 내어 준 커피 한잔이 아쉽다.
----------------------------
원작-현진건 [운수 좋은 날]
--------------------------------
좋은 댓글 이제서 확인했습니다. 할머니의 장례를 다들 호상이라 하였지만, 시골집에 덩그러이 놓인 지팡이를 보자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건 어쩔 수 없더이다. 영정사진을 들고 집 안을 한바퀴 도는데, 추위를 많이 타는 할머니를 위해 불을 꺼 놓은 적이 없는 할머니방의 방바닥이 차가워 가슴이 시립디다. 받은 화환이 칠십개요 3남매 6형제의 어머니를 조문한 객들이 수백이었건만, 가시는 길 홀로 외로울까 싶어 걱정이 드는 것은 생전에 자주 찾아뵙지 못한 손의 죄책감인가 싶드래요. 아직도 시골집에 전화하면 반가운 목소리로 받아줄 할머니가 있을 것 같아 한동안은 전화도 쉬이 하지 못하겠지 싶어요. 그래도 여차저차, 좋은 곳 가시라고 기도 많이 해 주시고 명복을 빌어주셔서 감사의 말씀드립니다. 먼 길 떠나시는데에 외롭지 않게 좀 더 할머니를 그리렵니다.
할머니의 상에 좋은 말씀 남겨주신, 좋은 마음 가져주신 모든 분들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장례 잘 치뤘습니다.
* OrBef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11-22 21:35)
|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