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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02/09/14 11:17:54
Name Apatheia
Subject [허접꽁트] 귀환 -上
"......"


음. 몸을 움직여 본다. 깎였던 쉴드는 제법 차올랐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지 않도록 훈련받은 나였지만, 동료들이 전멸한 채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 낙오되어 버렸다는 것은 역시나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우리의 목적지는 12시 방향이다. 넥서스에서 온 연락으로는 잠시 후 시타델에서 사이버네틱 부스터 강화 연구가 끝난다고 하니, 당분간 제(諸) 질럿들은 적의 오버로드에 발각되지 않도록 유의하라.


이번 러시의 책임자인 젊은 하이템플러는 아킬래(Akilae) 부족 가운데서도 꽤 지체가 높은 집안의 자제라고 했다. 그는 자신감에 넘쳐 있었으며 명민했다. 그러나 그 역시도 여타의 다른 하이템플러들이 그러하듯, 나와 같은 다크템플러에게 우호적이지는 못했다.


-자네, 오긴 잘 오고 있는 건가? 음침한 어둠속에 숨어서 보이지를 않으니, 알 수가 없군.


-......


일개 질럿도 아니고, 걸음마를 막 뗄 나이부터 아카이브에 들어가 칼라의 가르침을 배웠다는 그에게 나를 볼 능력이 없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질럿들 앞에서 템플러끼리 다투는 모습을 보여 좋을 것은 없다는 생각에 입을 다물었지만, 채 제거되지 않은 일말의 감정 탓인지 워프 검을 꽂은 칼집을 쥔 내 손이 가볍게 떨려왔다.


-설마 겁이 나서 미네랄 필드 뒤에라도 숨은 건가? 자랑스런 아이우의 후예가.


-칼라의 아카이브에서는...


오랜만에 입을 여는 탓에, 내 목소리는 몹시나 긁혀지고 억눌린 듯 들렸다.


-전투에 앞서서 말부터 앞세우는 것을 가르치는가?


-......


그는 천천히 내 쪽을 돌아보았다. 아니, 내 목소리가 들리는 쪽이라고 해야 맞을지도 모를 일이긴 하다. 정신수양을 강조하는 칼라의 하이템플러답게 육체적인 수행을 배제한 탓인지 그는 몹시도 호리호리했고, 덕분에 비슷한 키인 나보다도 훨씬 키가 커 보였다.


-잘 따라는 오고 있었군, 형제여.


-......


오래 전, 우리의 선조들은 칼라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고향에서 추방당했다. 막강한 저그, 그리고 끈질긴 테란을 상대한 이 전쟁이 그토록이나 힘에 부치지 않았다면 그들은 아마 끝까지 우리를 도외시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싸움은 이미 그들만으로 치루어 내기에는 너무나 힘든 전쟁이 되어 버렸다. 정처없이 우주 공간을 떠돌던 우리는 고통에 찬 아이우의 비명소리를 들었고,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미 우리는 어느 정도 예감하고 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이 싸움이 끝나면, 그것이 프로토스족의 승리로 돌아간다면 그들은 그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다시 우리를 저 가없는 우주로 추방할 것이라는 것을. 그런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형제라는 호칭은 대부분 조롱이었다.


-앞으로 내 걱정 따위는 하지 말도록. 정 궁금하다면...


스윽. 나는 칼집에서 검을 뽑았다. 어둠의 템플러가 태어나면, 우리 종족의 장인들은 그들의 피와 땀으로 주조한 워프 검 한자루를 그에게 주고 그 검의 이름이 곧 그의 이름이 된다. 그리고 그 검은 주인과 일생을 함께 한다. 그 검은 우리의 생명이요 명예다.


-내 워프 검이 대신 대답할 것이다.


-......


그는 내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수를 읽힌 것일까. 나는 눈을 감았다. 사령관의 명을 받아 러시를 나왔던 병력은 대략 질럿이 6, 7기, 책임을 맡았던 하이템플러 하나와 나 정도였다. 이 언저리 어디쯤 다다랐을 무렵, 때아닌 무탈리스크의 급습을 받고 일행은 전멸했다. 나나 질럿들은 대공 공격이 불가능했고, 일행을 통솔하던 하이템플러가 급히 사이오닉 스톰을 소환했지만 그 혼자의 힘으로 그들을 모두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오직 나 혼자만, 어둠을 굴절시키는 힘을 지녔던 텃에 그들의 사악한 시야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다.

여기가 도대체 어디쯤일까. 본진에서 얼마나 떠나온 것일까. 본진에서는 일행의 전멸을 알고나 있는 것일까.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리를 복잡하게 했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나의 사명은 자객이다. 냉정을 잃어서는 안되는 직분이다... 그러나 지금 이 상황에서마저 침착하기에는, 아직 나는 수련이 부족한 모양이다.


"......"


순간 정적을 가르고, 저편에서 상당히 시끄러운 총성이 들렸다. 단발이 아닌 연발총. 그와 뒤섞여, 고통스러운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총이라... 우리 일족의 무기는 아니다. 생체병기에 가까운 저그의 무기도 아니고... 인간인가? 마음을 움직인 호기심에, 나는 몸을 일으켜 총성이 들려온 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


인간...이었다. 붉은 방탄복. 손에 든 것은 가우스 라이플이라고 하는, 실로 빈약한 인간의 무기. 서너기 정도의 저글링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근처에 낭자한 피는 인간의 것인지 저글링의 것인지 내 눈으로는 판별이 되지 않았다. 인간은 무어라 고함을 질러대고 있었다. 아마 죽음이 목전에 다다른 자의 단말마의 비명일 테지.


"......"


그를 도와주어야 할 필요성 따위는 실은 내겐 없었다. 오버로드를 대동하지 않은 저글링 따위가 어둠의 템플러인 나를 알아볼 방법 같은 것은 없다. 그리고 설령 있다하더라도 저런 하급한 생명체 따위는 내 워프 검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인간 또한 마찬가지였다. 상태가 온전하지도 못한 내가 굳이 저런 시끄러운 일에 멀려들어야 할 필요성은 사실 없었다.


"......"


그러나 이상하게도, 자신의 몸의 두배는 되어보이는 저글링들을 향해 총을 난사하고 있는 붉은 전투복 차림의 인간에게로 자꾸만 시선이 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도 역시 혼자였던 것이다... 마치 나처럼. 일행에서 낙오한 것일까? 아니면... 탈영이라도? 우리와 같은 템플러에게 탈영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나약한 테란 중에서는 종종 그런 일이 벌어진다고 들었다.


"......"


비명을 지르며 저글링 한 마리가 마저 쓰러진다. 그러나 그래도 세 기 정도가 남았다. 그리고 인간은 지쳤다. 자꾸만 흔들리는 그의 총구가, 몰릴데까지 몰린 생명의 절규를 대신하고 있었다.


"......"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칼자루에 손을 가져갔다. 동족은 아닐지언정, 나 또한 명예를 소중히 하는 템플러였기에.







-Apatheia, the Stable Spir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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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삼이
02/09/14 11:44
수정 아이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다크템플러의 워프검처럼 이 여린(?)감성을 난도질 하는군요.
좋지않던 일들도 단칼에 끊어내시길 바랍니다.
상, 중, 하, 외전까지 길게 연재를...-_-;
자신이 스타크래프트의 유닛 중 하나로 다시 태어난다면...
어느 유닛을 선택하겠느냐는 설문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 압도적인 1위가.... 다크템플러였죠.
단지 이름만으로도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고독한 전사.
다비님~ 좋은 글 감사합니다. 계~~~속 올려주시는 거죠? ^_^
나의꿈은백수
02/09/14 11:30
수정 아이콘
아앗..재미있는 글을 보니. 갑자기 저도 꽁트를 쓰고 싶어졌어요.
02/09/14 11:24
수정 아이콘
으음, 역시 토스의 유닛들은 멋집니다-_-+
다크템플러와 마린병사간의 우정어린 로망인가요?^^
기대되는군요 ^^
Dark당~
02/09/14 11:28
수정 아이콘
오늘은 여기 쪼금만 늦게 올걸 그랬슴다... 쫌 전에 와서 이 글이 올라오기 전에.. 아래글들을 먼저 봤는데... 한숨 한 두어번 쉬고... 어찌 생각들이.... 고까지 하고.. 막 컴터 끌려던 참이었슴다...
쫌만 더 늦게 들어와서 이글 먼저 봤으면 좋았을걸 싶네요..
모두 좋은 하루들 되세요..^^
02/09/14 12:26
수정 아이콘
역시 아파님의 글이네요^^
너무 재미있어서 다음편이 기다려지네요.
02/09/14 22:15
수정 아이콘
반가와요. 좋은 글 많이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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