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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
2008/02/21 22:52:56 |
Name |
The xian |
Subject |
[팬픽] 한 전사와 한 기록관의 끝나지 않는 이야기 |
바닷가에서 세 개의 머리를 가진 거대한 용과, 한 사나이가 싸우고 있었다. 바닷가의 마을은 거의 잿더미가 되었고 살아 남은 주민들 몇몇은 바닷가의 높은 절벽 위에서 그 용이 빨리 물러가기만을 바라며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용과 그 사나이 사이에는 수백 명의 사람들 -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람이었던 것들 - 이 있었다. 몇백명, 아니, 몇천명일 수도 있는 그 시신들, 하나같이 모습이 온전하지 못했고 팔다리가 없는 시체는 그나마 온전한 축에 속할 정도였다. 천참만륙이라는 표현은 이런 때에 쓰는 것이리라.
유일하게 살아 남은 사나이 역시 온전한 상태가 아니었다. 용의 피를 많이 뒤집어쓴 듯 온 몸이 붉은 색이었지만, 아마 태풍 같은 입김에 휩쓸려 여기저기 생채기가 났고, 파괴의 신이 내렸다고 해도 믿을 만한 엄청난 번개에 맞아 팔다리가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이런 상황이니 입고 있는 무기와 방어구가 온전할 리가 없다. 투구는 깨져서 흔적도 없이 날아간 지 오래고, 오른손에 든 칼도 여기저기 날이 빠지고 칼 끝은 이미 부러져 있었다. 방패는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뭉개져 버렸다.
순간, 한 마디 외마디 비명과 함께 그는 용의 오른쪽 머리에 정통으로 가격당해, 바다로 내던져졌다. 용은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그 사나이마저 흔적 없이 죽여버리겠다는 듯, 자기의 입김을 일으켜 물보라로 푸른 빛의 폭풍을 만들어냈다.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중상을 입고 푸른 바다에 내던져진 그에게, 그야말로 푸른 빛의 폭풍이 들이닥친다. 바다도 푸른 색, 폭풍도 푸른 색, 모든 것이 푸른 빛이었다. 그가 이제 곧 그 바다에 삼켜져 흔적도 없이 소멸되리라는 것은 누구든 예상할 수 있는 것이었다.
'아아...'
울음과 비탄이 섞인 주민들의 소리가 울려퍼진다. 희망이 사라지는 소리다. 불타 버린 밭은 다시 일구면 되고, 무너진 집은 다시 세우면 된다. 하지만 희망이 없어져버리면, 인간이 무너진다. 희망이 사라지고 패닉상태에 달했던 주민들은 인내심의 한계가 넘어가자 극한에 달한 행동을 보이기 시작한다. 어떤 이는 정신이 이미 떠난 듯 그 자리에 그대로 실신하거나, 촛점 없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들꽃을 손에 들고 실없는 웃음을 짓는다. 어떤 이는 손가락을 들어 조롱하기 시작한다. 바락바락 악을 쓰면서 욕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게 왜 저 용과 싸우겠다고 나서서 지X이야!! 지가 영웅이고 용사면 다야?'
'용이 노했으니 이제 우리들까지 잡아먹을 거야.!! 도망가자!!'
심지어는 자기 부인과 자식들을 용에게 바치는 공물인 양 바닷가로 떠밀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엄청난 무력감에 빠져 탄식하는 이들도 있었다. 대성통곡조차 하지 못할 만큼, 눈물만 주르륵 흘리는 이들도 있다.
'저 사나이는 다를 줄 알았는데... 어쩔 수 없나 보구만...'
그 몇몇의 사람들 사이에 한 나이 지긋한 이가 있었다. 왼손에 든 양피지는 그가 기록관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는 일생 동안 그 전사의 모험을 기록하며 살아 왔기에, 그는 그 전사가 죽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고, 지금 순간에도 이미 정신이 산란해질 대로 산란해진 다른 이들과 달리 양피지에 펜으로 계속 무엇을 적고 있었다. 그러나 양피지에 더 이상 무엇을 적을 수가 없어 보였다. 용의 키만큼이나 큰 폭풍이 바다에 쓰러져 신음하는 그에게 짓쳐들어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양피지를 덮고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이미 나이 들어 주름진 두 눈에는 안타까움이 짙게 배어 있었다.
사실, 이 잔인한 싸움을 지켜보아야 하는 것, 그것은 기록관으로서 감당해야 할 의무이기도 했다. 이 나라에는 이름 있는 많은 전사들이 있었기에, 그 사나이 말고도 많은 이름 있는 전사들의 이야기를 다룬 기록관이 많이 있었지만 그 이야기들은 대개 영웅들의 죽음이나, 안타까운 이유로 모험의 끝을 이루지 못하는 결말로 끝나곤 했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오랜 세월 동안 기록관으로 살아온 이들은 자신의 의무가 끝난 후 공허감에 자살을 기도하거나, 아예 도성을 떠나 야인으로 살아가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 현실이었다.
하지만 기록을 마쳐야 하는 것도 그의 숙명이었다. 그는 몇 번이고 고개를 떨구려 하는 자신의 시선을 겨우 싸움터로 고정시켰다. 이제 막 일어난 전사의 머리 위로 엄청난 높이의 푸른 폭풍이 들이닥쳤고, 그 전사는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삼켜졌다. 그 전사의 모습이 푸른 폭풍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본 뒤, 그는 양피지의 맨 아랫단을 펼쳐서 '영웅은 푸른 폭풍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생을 마감하였고, 기나긴 위업도 여기에서 끝나고 말았다'라고 적었다. 아쉬움을 감출 수가 없는지 마지막 단을 맺으려 할 즈음 그의 주름진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린다.
'나의 일생을 건 의무도... 여기에서 끝나는구나. 마지막 이야기는 다른 영웅이나 용사들처럼 어둡게 끝나지 않기를 바랬는데...'
양피지를 덮은 그는 몸을 돌려 절벽을 내려섰고, 용을 피해 근처에 매어 둔 말 곁으로 가고 있었다. 그 전사가 살아 있을 때에는 기록하는 것이 임무였다면, 그 전사가 생을 마감했을 때에는 그 기록을 무사히 다른 이들에게 전파하는 것이 목표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황급히 말 곁으로 내려가려던 그에게 한 아이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린다.
"용사님이... 용사님이 폭풍을 이겨냈어요!!"
이럴 수가. 그 푸른 폭풍 속에서......?? 그러나 용사가 푸른 폭풍에 잠겨서 다시 보이지 않은 것은, 그의 눈이 아니었던가. 그래서 그는 '아이가 헛것을 본 거겠지'하고 가던 길을 가려 했다. 그러나 그 아이의 목소리가 한 번 더 울려퍼진다.
"용사님이 살아계셔요!!"
살아있다니, 이럴 수가!! 기록관은 가던 길을 멈추고 다시 절벽 위로 올라섰다. 살아있다면, 정말로 살아있다면 기록관의 의무는 끝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아이의 말이 맞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살아있었다.
이미 그의 몸에서 흘러내리는 붉은 액체는 그가 뒤집어 쓴 용의 피인지, 아니면 그 전사의 피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였지만, 어쨌든 그는 살아 있었다. 기록관은 황급히 양피지를 펼쳐 마지막 줄 위에 한 줄을 그어 지워 버리고는, 다시 그 용과 전사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용은 바짝 약이 올랐는지 바닷물을 자신의 입김으로 폭풍처럼 만들어 다시 푸른 폭풍을 일으켜 전사를 덮쳤지만, 이젠 그 전사도 하도 얻어맞다보니 이 정도는 일도 아니라는 듯이 번번히 그 폭풍을 이겨내면서 서서히 용과의 거리를 좁혀 가고 있었다.
용도 기진맥진한 듯, 용이 일으키는 푸른 폭풍도 횟수가 거듭될수록 약해졌고, 용과 전사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그리고 용의 왼쪽 머리가 전사를 노리고 짓쳐드는 순간, 전사는 그 왼쪽 머리의 돌진을 피해내더니 바람같이 뛰어 올라 칼을 휘둘러 용의 오른쪽 머리를 잘라내고 말았다. 용의 검붉은 피가 솟구치고, 이 세상 것이 아닌 양 엄청난 괴성이 들렸다.
"꾸웨에에에엑~~~~~"
주민들도, 기록관도, 아이들도 놀랄 정도의 엄청나게 큰 용의 소리가 울려퍼지며 용의 오른쪽 머리가 두 동강으로 잘려 떨어져 내린 다음 순간, 아직 남아 있던 용의 가운데 머리가 일순간 빈 틈을 보였던 전사의 가슴팍을 강하게 쳐냈고, 전사는 크게 튕겨져 바닷가 절벽에 몸을 부딪친 뒤 움직이지 않았다. 용은 전사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는, 이 정도는 일도 아니라는 듯이 오른쪽 머리를 재생시키킨 뒤 잘린 머리를 남겨 두고 바다 저편으로 날아갔다.
한 달 후.
전사는 여전히 병석에 누워 있었다. 온 몸에 성한 곳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적어도 몇 달은 더 누워 있어야 한다는 의사의 말이 있었지만, 다른 이에 비해 초인적인 회복력을 가졌기 때문에 그는 한 달 남짓 되자마자 다시 모험을 떠날 채비를 하라고 지시한 상태였다. 물론, 다음 모험을 떠나기까지 얼마 정도가 필요할지는 오직 그 전사만이 알고 있었다.
전사는 기록관을 불러들였다.
"그래, 지난 모험의 끝은 무엇이라고 적었는가? 보여주게."
"......"
"괜찮네. 내가 보고 싶어 그러는 것이니 보여주게."
기록관이 어렵게 내민 양피지를 전사는 죽 읽어 내려갔다. 양피지의 끝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영웅은 푸른 폭풍을 이겨내고 용의 머리 하나를 잘라냈지만, 결국 용의 공격에 정신을 잃어 패했고 목숨만은 간신히 건졌다'
그리고 그 밑에는 온전히 지우지 못한 또 다른 한 줄이 아래와 같이 적혀 있었다.
'영웅은 푸른 폭풍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생을 마감하였고, 기나긴 위업도 여기에서 끝나고 말았다'
전사는 양피지를 덮은 다음,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기록관을 바라보며 말했다.
"명문이군. 그런데, 내가 죽을 줄로 알았는가?"
"그렇습니다. 그 푸른 폭풍에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용서하여 주십시오."
전사는 잠시 침묵한 뒤, 말을 이었다.
"용서받아야 할 사람은 그대가 아닐세. 한때나마, 잠시나마 무력한 모습을 보여줬던 나이지."
"아닙니다. 어찌......"
"목숨이 살았든, 죽었든... 진 것은 진 것이야. 나를 영웅이라 여기고 바라보는 그대와 같은 이에게 내가 무력한 모습을, 지는 모습을 보여준 것, 그로 인해 그대와 같은 이들이 느꼈을 아쉬움은 무엇으로도 치유되지 않겠지."
"아닙니다. 용사여. 저는... 저는 당신께서 살아서, 다시 일어서서, 모험을 하시겠다는 것만으로도 족합니다. 그리고 모험을 마치는 날까지 건강하고 밝게 살아가신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그렇게 생각해 준다니 고맙군."
전사는 일어나 앉은 다음, 기록관의 주름진 손을 꼭 잡았다.
"내 약속하겠네. 내가 최후의 순간을 맞이하더라도...... 다른 이름 있는 이들처럼 허무하게, 슬프게 죽지는 않을 것이네. 약속하지."
기록관의 두 눈에 눈물이 맺히고 있었다. 자신이 섬기는 주군과 같은 이에게 이런 말을 듣는 것이 얼마나 영광된 일이던가.
"......"
"그러니, 내가 검과 방패를 내려놓는 날까지 나의 길을 계속 지켜봐 주고, 많은 이들에게 알려 주게나. 그렇게 해 준다면 나는 내가 마음먹은 날까지 아무런 의심 없이 나의 길을 갈 수 있을 것이네."
"......"
"그렇게 해 줄 수 있겠나?"
두 눈에 눈물이 글썽한 기록관이 떨리는 목소리로. 그러나 강하게 대답한다.
"물론입니다."
패기 있는 천재적인 젊은 전사에서, 어느덧 세월이 지나 삶의 여유가 느껴지는 풍모를 갖춘 영웅과.
그 패기에 반해 양피지를 손에 쥔 청년에서, 어느덧 세월이 지나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이 많은 나이가 된 기록관.
그 영웅이 걸어가는 끝나지 않는 이야기를 위해 기록관은 양피지와 펜을 새로이 준비하고,
자신을 영웅으로 대하는 이들과 그 자신의 영광을 위해 전사는 다시 검과 방패를 가다듬는다.
- The xian -
* 메딕아빠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8-02-27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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